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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46/162)


  • 〈 46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쯔르레이가 훈련을 하기 위해 연무장에 나서자 그런 분위기가 확실히 느껴졌다. 전보다 더 웅성거림이 강해진 것이다. 혼자서 몸을 풀고 있자  엘핀이 나타났다. 평소에 남들이 주변에 있으면 무표정으로 다니던 것조차 유지 못할 정도로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훈련, 시작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엘핀의 훈련에 사심은 들어가지 않았다. 사심을 넣기 힘들 정도로 이미 힘든 훈련이었기 때문이었다. 쯔르레이는 훈련에 집중하느라 몰랐지만 주변에서 엘핀을 안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늘었다.


    훈련은 평소보다 일찍 끝났다. 엘핀으로서는 주변의 시선을 신경  게 아니라 단순히 쯔르레이가  쓰는 것에 익숙해져 그 정도를 줄였을 뿐이었지만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에게는 시선을 신경 쓰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르레이는 녹초가 되어 엘핀에게 들린 채 핍셀의 치료를 받게 되었다.


    “쯔르레이양은 소문 쫙 퍼진거 아세요? 왕자님께서 글쎄 면전에 대고 엘핀보고 파렴치한이라고 했다더라고요. 하긴 저 녀석이 좀 그런 감이 있긴 해요. 실은 쯔르레이양이 지금 하고 있는 훈련도 자기 학교 다닐  지 혼자 죽어라 한 건데 그러다  쓰러져서 제가 치료해줬거든요. 그때는 몰랐는데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를 좋아해서 일부러,”


    “야, 헛소리는 그만하고 다 됐으면 이만 나와.”

    핍셀의 수다를 멈춰준 것은 이번에는 왕자가 아니라 엘핀이었다. 그 또한 핍셀의 수다를 계속해서 듣기는 싫은 건지 핍셀의 수다가 정도를 넘기 시작하면 항상 끊어주었다. 어쩌면 단순히 그의 흑역사를 풀기 싫어서  수도 있고.

    “잘 가요, 쯔르레이양!”

    “안녕히 계세요.”

    쯔르레이가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핍셀이 쯔르레이를 갑자기 껴안아 버렸다..

    “꺄아! 정말 어쩜 그 파렴치한에게 이런 이쁜 동생이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내 동생 안할래요? 제가 열심히 귀여워 해줄 수 있는데.”

    “아뇨, 놔주세요.”

    “이런 건 아주 오빠를 그냥 닮아서는!”

    “지랄한다.”

    왕실 마법사의 방에서 나온 쯔르레이는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아무리 훈련 시간이 줄고 치료를 받았다 한들 힘든 건 그대로였으니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쯔르레이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여기 있었군요.”

    제놈 그라시아였다.


    “마법사에게 뭔가 볼 일이 있었나요? 이런 곳에 있다니.”

    “이 녀석 훈련시키고 치료를 받느라 조금. 당신은 무슨 일로?”

    “이미 끝난 볼일입니다. 마침 잘됐군요. 쯔르레이…라고 했나요? 같이 가도록 하죠. 저번에 한 얘기를 계속하게.”

    “대체 그 얘긴 뭔데 나한테는 비밀로 하는 거지?”

    쯔르레이는 엘핀에게 대답하지 않고 제놈에게 말했다.


    “따라가지.”

    “그럼 이쪽으로.”

    “망할, 개무시하는 거냐.”


    “…나중에 얘기해주지.”

    엘핀이 투덜대는 것에 결국 쯔르레이가 대답했다. 전부를 밝히지는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말해도 상관없을거란 생각에서였다. 쯔르레이의 사람 보는 눈이 좋다고는 말할  없었지만 엘핀은 재수없고 싸가지없고 성격이 더럽긴 해도 갑자기 뒤에서 칼을 꽂을 사람은 아니었다.

    제놈을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간 쯔르레이는  놀랐다. 엄청나게 넓은 방의 크기에  번, 그 방을  채운 잡동사니에 두 번이었다. 방을 구경하고 있자 제놈이 갑자기 쯔르레이의 팔 밑으로 양손을 넣어 들어올렸다.


    “뭐, 뭐냐.”

    “들어가기 힘들겁니다. 바닥에 잡동사니가 많아서.”


    확실히  말대로였다. 제놈은 쯔르레이를 들어올린 채 요령좋게 바닥의 잡동사니를 피해 안으로 들어간 뒤 내려주었다. 쯔르레이는 구석진 곳에 있는 의자를 안내 받았다.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고 제놈을 보고 말했다.


    “내 저주에 대해 알고 있나?”


    “자세히는 모릅니다. 저는 신이 아니니까, 어느정도 살펴보지 않으면 확신할  없죠. 그러나 당신에게는 겉으로 드러나 있는 약체화의 저주 아래에 무언가 숨어있는게 간신히 보이기는 하군요.”

    “그럼…  저주를 풀 수도 있나?”


    “당신을 살펴볼 수 있게 허락해준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죠. 확신은 못합니다.”


    “무슨 저주인지는 안물어보나?”

    “보통 그런  물어본다고 가르쳐주진 않죠.”


    쯔르레이는 갈등했다. 이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자신을 살피게 해도 되는 것인가? 말을 해도 되는 것인가? 자신의 몸은 제대로 된 인간조차 아니었다. 위험요소가 너무 많았다.


    “원한다면 당신을 살핀 것을 발설하지 않는다고 맹세해드리죠.”


    “당신의 맹세를 믿을  있나?”


    “제 이름은 높습니다.”


    “….”


    결국 쯔르레이는 제놈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가 쯔르레이의 몸을 살펴서 해주의 단서를 찾을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곧 제놈이 쯔르레이의 어깨를 붙잡고 몸 속으로 기를 흘려보냈다. 검사는 생각보다 간단했는지 금방 끝났다. 아니, 금방 끝난 건 간단해서가 아니었다.

    “강력한 봉인이군요, 이건. 죄송하지만 제 힘으로는 살펴볼 수도 없겠습니다.”

    사실상 아무 것도 못알아냈다는 뜻이었다. 대마법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실망한 쯔르레이가 말했다.


    “말이 다른거 같은데.”

    “아무 소득도 없는 건 아닙니다.”

    제놈 그라시아의 얼굴에 작은 짜증이 서렸다. 자신을 질책하는 쯔르레이 때문인지, 아니면 저주를 알아내지 못한 자신 때문인지는 몰랐다.


    “이 정도로 강한 봉인, 제가 손도 대지 못할 정도의 봉인이라면 되려 이야기가 간단해집니다. 이 봉인은 초월체, 혹은 그에 비견되는 존재가  거겠죠. 맞습니까?”

    “…맞다.”

    초월체는 말 그대로 초월적인 힘과 지성을 가진 생명체를 부르는 말이었다. 즉, 용과 같은 생명체들의 이야기였다. 쯔르레이를 저주한 것은 바로 그 흑룡 울푸레였으니 제놈의 말은 정확했다.

    “당신은 분명  저주를 풀기 위해 다니고 있는 거겠죠.  나쁘게 휘리오비치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계속 여행하고 있었을 테고요. 단서가 있었나요?”

    “날 도와준 이는 수해로 가보라고 했다.”

    “수해… 수해의 마녀 글룸라를 찾으러 가는 건가요?”


    곧바로 생하울라가 얘기했던 이의 이름을 꺼내는 제놈에게 놀란 쯔르레이가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수해라고 하면 뻔한 얘기입니다. 당신에게 그녀를 소개해준 사람이 궁금해지는 군요.”

    쯔르레이는 생하울라의 이름을 꺼내도 될지   없었으나 고민은 짧았다. 휘리엘과 다르게 제놈은 볼타르의 사람이었으니까, 오크에 대한 거부감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생하울라다.”

    “당신은 초월자와 자주 만나는 군요. 혹시 그런 저주입니까?”

    이름을 말하자 제놈은 곧바로 그가 누군지를 깨닫고 농담을 했다. 하긴 벌써 쯔르레이가 만난 초월자는 생하울라와 엘핀 세이피어스, 휘리오비치 세르미나카, 제놈 그라시아로 네명이나 되었다. 그런 농담이 나올 법도 했다. 제놈의 농담을 무시하며 쯔르레이가 말했다.


    “하지만 결국 네가 알아낸 건 없는거 같은데.”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에게 무슨 단서를 줘야할지를 알아냈으니. 가르쳐줄 단서는 있습니다.”

    “단서?”


    “수해에 들르기 전에 왕국의 북쪽으로 가십시오. 왕국의 끝, 버려진 산맥 골트룬에 빙룡 네메시스가 살고 있습니다.”

    쯔르레이가 제놈의 말에 놀라서 소리쳤다.


    “용이라고!”


    “당신에게 저주를 건 존재도 용이었나요? 반응이 좋군요. 같은 용이라면 어쩌면 당신의 저주를 풀어줄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목숨을 걸어야겠지만요. 빙룡 네메시스는 가장 강력한 봉인자입니다.”

    제놈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을 뒤지더니 이윽고 문서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골트룬으로 가는 지도와 빙룡에 대한 정보가 적힌 문서였다. 쯔르레이가 자세히 읽을 수는 없었으나 대강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보았다. 동화책에 용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 게 다행이었다.


    “넌 어떻게 이런 정보를 알고 있는거지?”


    “대마법사를 우습게 보면 안됩니다. 사실 빙룡에 대한 얘기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당신이 생하울라와 알고 있는 사이라길래 전해주는 겁니다.”

    “그를 알고 있나?”

    “모를 리가 없죠. 하지만 당신에게까지 말할 이야기는 아닙니다.”


    피곤한 얼굴의 제놈이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오. 피곤하군요.”


    제놈의 축객령에 쯔르레이는 결국 생하울라에 대해 더 묻지 못하고 발을 돌렸다. 용에 관한 정보를 얻은 것만으로도 엄청난 수확이었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그러나 돌아가려는 쯔르레이는 이윽고 발을 다시 돌렸다.


    “무슨 일입니까?”


    “이거… 어떻게 돌아가야 하지?”

    침묵하던 제놈은 곧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쯔르레이는 다시 제놈의 손에 붙들려서야 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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