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다음날부터 엘핀은 쯔르레이를 혹독하게 굴리기 시작했다. 왕궁의 연무장을 빌려서 시작한 훈련은 정말 놀랍게도 생하울라의 것보다 지독했다. 물론 그에 대한 원인은 쯔르레이의 몸이 평범한 어린애처럼 약해졌다는 데에 절반 정도가 기인했다. 나머지 절반은, 엘핀 그 자체의 독함이었다.
쯔르레이는 하루 지독하게 굴려지고 나서야 엘핀이 어떻게 초월자가 되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지독하게 몸을 굴려대서야 초월자가 안되서는 수지가 맞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까지 심하게 훈련을 한다고 해서 초월자가 되는 사람은 극단적으로 적겠지만 그렇게 느낄 정도로 독했다.
만약 쯔르레이가 정말 평범한 어린애라서 아예 이 훈련을 견디지 못한다면 의미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약체화 되었는데에도 몸의 튼튼함 만큼은 그대로였으니 쯔르레이는 정신을 잃을 수도 없었다. 일반적인 어른조차도 금세 정신을 잃을만큼 독한 훈련 속에서도 맨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니 도망치는 것 조차 불가능했다.
그 강인한 쯔르레이의 정신조차도 자존심이고 뭐고 때려치고 그만두자고 할까 고민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러나 결국 쯔르레이는 기어코 끝까지 훈련을 받았고 훈련이 끝나자마자 쓰러졌다.
첫날 그렇게 훈련이 끝나고 잠, 아니 기절에서 깨어난 것은 한창 성의 일과가 시작될 새벽이었다. 쓰러지고 그대로 날밤을 새버린 것이다. 밥도 안 먹고 그대로 쓰러졌기 때문인지 배가 고파왔다. 쯔르레이는 나가서 식당을 찾아볼까 고민했지만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휘리엘의 별장에서야 메이드를 쓰는 것이 어색해 그리하였지만 왕궁에서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쯔르레이가 메이드를 불러 간단한 식사를 해결하고 나서야 온전한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쯔르레이는 문득 의문을 느꼈다. 어제 그렇게까지 지독하게 훈련을 했는데 몸이 그렇게 아프지 않은 것이다. 물론 온 몸이 쑤시고 고통스러웠지만 예상보다 약한 수준이었다. 누군가 치료라도 해준 것일까, 쯔르레이는 적당히 넘기기로 했다. 몸이 계속해서 아파서야 훈련도 못할 테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꽤나 일찍 일어나버려 할 일이 없었다. 사실 최근 쯔르레이의 생활이란 것 자체가 별로 할 일이 없는 것이 맞았다. 휘리엘과의 글공부도 결국 그것 때문에 시작하게 된 것 아닌가. 그러나 왕궁에 들어온 후로는 휘리엘도 바빠질 테니 글공부는 당분간은 그만두기로 했다. 쯔르레이는 휘리엘이 주었던 동화책이나 적당히 읽으면서 시간을 때웠다. 어린 아이용이지만 쯔르레이는 이 정도도 읽기 벅찼다.
“야.”
동화책을 다 읽어갈 무렵 문이 벌컥 열리고 엘핀이 들어왔다. 엘핀은 들어오자마자 말했다.
“가자.”
“…벌써?”
“뭐가 벌써야. 해가 중천에 떠있다. 밥도 먹었지? 옷 갈아입고 나와.”
그의 말에 쯔르레이는 토달지 않고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훈련은 자신이 부탁한 것이었으니까. 그 전에 우선 베개부터 던지고.
“옷 갈아입게 나가.”
그제서야 엘핀은 쯔르레이가 가벼운 속옷 차림임을 깨닫고 별 말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아무리 애들이 어렵다고 해도, 그 정도 예의는 갖고 있는 엘핀이었다. 이미 노크도 없이 들어온 시점에서 그것을 예의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쯔르레이는 메이드도 부르지 않은 채로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대충 묶었다. 훈련할 때 입으라고 엘핀이 갖다준 옷은 소년들이나 입을 법한 간편안 옷이었기에 무리가 없었다. 머리를 묶는 것도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차림새가 평범한 소년 종자 같은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쯔르레이의 미모는 태가 났다.
연무장에는 벌써부터 적지만 여러 기사들이 아침 훈련을 하고 있었다. 과연 기사에게는 일찍이라고 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쯔르레이는 납득했다.
둘이 연무장에 들어서자 몇 안되는 기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퍼졌다. 그들은 어제도 이 둘의 훈련 장면을 목격한 사람인 것이다. 쯔르레이로서는 알 수 있는 바가 없겠지만, 벌써 쯔르레이의 훈련은 기사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쯔르레이의 아름다운 미모가 첫 번째 얘기였지만 그보다는 그 훈련 내용이 더 했다.
엘핀은 주변 시선에 아랑곳 않고 곧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어제와 같은, 아니 조금이지만 어제보다 더 지독한 훈련으로 쯔르레이를 가르쳤다. 훈련이 끝나자마자 쯔르레이는 또 쓰러졌다. 엘핀은 직접 쯔르레이를 들고 방으로 데려가주었다. 메이드들은 정신을 놓은 쯔르레이를 조심스럽게 씻겨주고 침대에 눕혔다.
이런 일이 나흘쯤 계속되자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쯔르레이가 코피를 흘렸다. 엘핀은 신경도 안쓰고 말했다.
“다시.”
쯔르레이는 군말 않고 따랐다. 박하고 한심한 인간 처럼 보이는 평소와는 달리 엘핀은 훈련을 시작하면 마치 처음 만났을 때 처럼 돌아갔다. 그때의 엘핀은 무표정하고 냉정한데다 말투도 딱딱해서 지금 갖고 있는 경박하고 입이 험한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결국 참다 못한 기사 한 명이 엘핀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세이피어스경.”
“뭐지?”
엘핀은 싸늘하게 응대했다. 이미 겪어본 것이지만, 엘핀은 보통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저런 식의 태도를 견지했다. 공식 석상에서도 비슷한 모습이라고 휘리엘 또한 일러주었다.
“제가 가정사에 끼어들 생각은 없습니다만, 아무리 그대로 정도가 있지 않습니까? 아이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훈련을 시킨다고 생갑됩니다만. 이건 학대 수준입니다.”
“이름을 밝혀라.”
“…실례를 끼쳤군요. 저는 무르토 백작의 차남 기사 갈틴 무르토입니다.”
“내 이름은 알 테니 말할 필요 없겠군. 네놈 말대로 네놈이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다. 그만 가보도록.”
그러나 엘핀이 태도를 달리 했다고 그의 무례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무표정하게 축객령을 내리는 엘핀의 모습에 갈틴도 화가 나 말했다.
“기사가 돼서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고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아이가 코피를 흘리고 있지 않습니까. 최소한 잠시간의 휴식이라도 주어야 하지,”
엘핀이 그의 말을 끊고 쯔르레이에게 물었다.
“휴식이 필요한가?”
“아뇨, 괜찮습니다.”
쯔르레이는 훈련 중 만큼은 엘핀이 그토록 듣고 싶어하던 존대를 썼다. 엘핀이 내린 조건 중 하나였다. 쯔르레이의 말을 들은 엘핀이 말했다.
“됐다는 군.”
“…설령 아이가 됐다고 하더라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런 훈련은 오히려 아이의 몸을 망치는 일 밖에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여자아이인데.”
“여자아이인게 뭐 어떻단거지?”
“레이디의 몸에 상처라도 나면 어떡할 생가이냔 말입니다.”
그 말에 엘핀은 명백한 비웃음을 흘리며 쯔르레이를 보았다.
“그렇다는 군, 레이디?”
당황한 건 갈틴이었다. 쯔르레이는 그 말에 차가운 분노에 찬 눈으로 갈틴을 바라본 것이었다. 그로서는 알리 없겠지만 여자아이라는 그런 말은 쯔르레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이만 가보게나. 내 동생이 자네를 반기지 않는 것 같군.”
그 말에 갈틴은 결국 터벅터벅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쯔르레이는 엘핀의 마지막 말에 더 화가 난 듯 했지만 뭐 갈틴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기사들 일행으로 돌아온 갈틴에게 동료가 어깨를 짚어주었다. 아이를 위해 초월자인 엘핀에게 말이라도 걸어본 것이 대단하다는 반응이었다.
쯔르레이로서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대외적으로 엘핀은 그런 인물이었다. 차갑고 냉정하고 무뚝뚝하고 무자비해 말을 거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인간. 쯔르레이에게는 그냥 거지 같은 인물이었지만.
하지만 갈틴의 소원은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시종이 엘핀에게 말을 전했다.
“…왕자 전하의 초대라고.”
“헉헉….”
“너, 왕자랑 뭔가 일이 있었다고 했냐?”
그러나 쯔르레이는 너무 지쳐 엘핀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 이걸 거절 할 수도 없고…. 쯧,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쯔르레이는 그대로 땅바닥에 누워버렸다. 전날들처럼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고 그저 너무 힘들어 서있을 힘이 없어서였다. 그런 쯔르레이를 엘핀이 들었다.
“…맨날 이렇게 들고 간거냐?”
“그럼 업어주기라도 하리?”
“….”
쯔르레이는 깊은 숨을 몰아쉬며 대답하기를 포기했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