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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42/162)


  • 〈 42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엘핀의 표정은 늘 그랬듯이 시건방지고 만사가 짜증난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그가 늘 그런 표정을 짓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지만 쯔르레이의 앞에서는 대부분 그랬다.


    “자고 있던거 안보이나.”


    “말  이쁘게 못하냐? 어떻게 된게 애가 귀염성이 없어.”


    “황소 발걸음에는 쟁기가 따라오는 법이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뜻이었다. 쯔르레이의 적절한 대답에 엘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다 내 잘못이다. 왕자랑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된거냐?”

    갑자기 왕자 얘기가 나오자 쯔르레이 역시 엘핀처럼 얼굴을 구겼다. 직감적으로 귀찮은 일이 생길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길을 잃었는데 그가 도와줬다.”

    “그런거로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잊지 마라, 넌 진짜  여동생 같은  아니니까 그런 쪽으로 문제 생기면 안돼.”

    “어디 내 맘대로 되는 일이겠나.”

    “그것도 그렇지만….”

    “휘리엘 아가씨는?”


    “방으로 돌아가 쉬시는 중. 휘리오비치에 대해서라면, 그라시아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라시아….”

    그가 어떤 마법사인지 쯔르레이는 잘모른다. 그러나 그는 쯔르레이의 저주를 곧바로 알아본 마법사였다. 서리 갈기 부족의 주술사 양아우테는 전혀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쯔르레이가 주술사나 마법사를 본 것은 극히 적은 일이었기에 실력을 속단할 수는 없었지만 생하울라는 분명 양아우테가 뛰어난 주술사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양아우테도 못알아본 저주를 알아본 마법사, 분명 초월자라고 했었다. 그가 자신에게 실마리를  수 있는 것일까, 하고 쯔르레이는 고민했다.

    “르로망샤에게도 협력을 구해보려고 하지만, 놈이 도와줄거라는 생각은 잘안드는군. 아무튼 그라시아가 녀석을 어떻게든 찾아내면 나랑 그라시아가 같이 토벌하게 될 거다. 그럼 일은 전부 끝이야. 물론 흑마법사가 작정하고 숨으면 찾을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지만….”

    “그럼 나는 무얼 하면 되지?”


    “뭐?”

    쯔르레이의 물음에 엘핀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무슨 개소리를 하냐고 묻는 얼굴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무슨 개소리야. 네가 뭘 할 일이 있겠어.”


    “….”

    “넌 아무리 봐도 10살짜리 꼬맹이고, 그 검을 다루면서 뭔가 착각이라도 했나본데 네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어. 네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고. 그냥 여기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면 끝이야. 애초에 저주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하는 몸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


    쯔르레이는 침묵했다. 엘핀은 그런 쯔르레이를 보고 자기도 말이 좀 심했다고 생각한건지 변명을 덧붙였다.


    “…어차피 너는 이 일에 있어서 완전한 피해자야. 나 때문에 휩쓸리게 된. 그러니까 굳이 뭔가 신경 쓸 필요 없이 여기서 안전하게 있으면 된다. 아무리 나라도 애한테 책임을 지울 생각은 없어.”

     어린애를 폭행한 남자가 하는 말이라는 것은 상당히 우스운 얘기였다. 그렇지만 엘핀의 말은 틀릴 것이 없었다. 쯔르레이는 이번 일에 있어서 할  있는 것이 없었다. 설사 몸이 정상이었다고 할지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자신의 원래 몸이었다고 해도 그러했다. 초월자들간의 전투에 자신이 끼어들어서 무엇 할 수 있겠는가.


    쯔르레이는 생하울라를 떠올렸다. 오크 전사 셋과 싸워서 이길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생하울라의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했던 자신의 실력이 생각났다. 그였다면  전투에도 참여할 수 있었겠지. 아니, 애초에 흑마법사에게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응?”


    “어떻게 하면 너처럼 강해질  있지?”

    엘핀이 살짝 자신의 머리를 긁기 시작했다.

    “…뭔 시답잖은 소리를 하나 했더니.”

    “가르쳐다오. 부탁이다.”


    “가르쳐 달라고 해도… 후….”


    엘핀이 깊게 한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너, 검 휘두르는 걸   적이 있는데.  제대로 검술 배워본 적이 없지?”


    “그래. 내가 배운 것은 단순히 솜뭉치를 들고 싸우는 방법 뿐이었다.”

    “솜뭉치? 그 검 이름이 그거냐? 하하, 누가 지은거냐, 그런 이름.”

    “지금 하는 얘기가 그 얘기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검의 이름에 엘핀이 웃었다. 지금까지는 딱히 얘기한 적 없던 내용이었다. 쯔르레이는 짜증을 느끼며 말하는 걸 엘핀이 끊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임마. 너 검 휘두르는 방식에서 싹 보이더라. 완전 엉망진창이였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기초부터 시작하지.”


    “그 말은… 부탁을 들어준다는 뜻인가?”


    “아니, 이런 짓 해봐야 진짜 강해질 수 있는 지, 나는 모른다. 백날천날 훈련해도 강해지지 못하는 인간도 있고 나처럼 운좋게 강해지는 놈도 있겠지. 10살짜리 여자애인 네가  짓을 한다고 뭔가 바뀔지도 모르겠고. 다만.”


    “….”


    “네가 검 휘두르는 거에서 뭔가 느껴져서 내가 이러는 거다. 혹시 네 스승이 누군지 말할 수 있나?”


    쯔르레이는 여기서 생하울라의 이름을 말해도 되나 고민했다. 그는 이름 높은 전장의 순례자였고 왕국에서도 명성 높은 존재였다. 그러나 엘핀은 간티아 제국의 사람이었고 생하울라는 그들을 상대로 전쟁에 나간 적도 있는 오크였다. 굉장히 말하기 껄끄러운 존재인 것이다.

    “그 스승의 이름을 말해준다면 네 부탁을 들어주는 걸로 하지.”

    그러나 엘핀이 그의 이름을 대가로 걸고 말하자 쯔르레이는 결국 말할 수밖에 없었다. 쯔르레이는 원하는 게 있었고 지금 그걸 줄 수 있는 사람은 엘핀 뿐이었으니까. 휘리엘에게도 어차피 오크 부족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으니까, 철저하게 그들과의 관계를 숨겼다고 하기도 뭐했다.

    “생하울라, 그가  스승이다.”

    “맙소사.”

    엘핀의 얼굴이 경탄으로 차올랐다.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쯔르레이 또한 놀랐다.

    “네 스승이 정녕 전쟁의 신이라는 거냐? 세상에. 놀라운 일이군. 그가 제자를 들였다고?”

    “전쟁의 신?”


    “그래, 전쟁의 신. 오크의 화신! 생하울라. 가장 이름 높은 오크들의 초월자. 오래 살고  일이군.”


    “그를… 싫어하지 않나? 생하울라는 자네 나라와의 전쟁에 참전했을 텐데.”

    쯔르레이의 의문은 지극히 당연했다. 생하울라가 나갔던 아르다루 전투는 간티아 제국과 볼타르 왕국의 영토 분쟁으로 생긴 전쟁이었다. 지금 이미 10년이란 시간이 지났고 두 나라 또한 화해했다고는 한들 그 묵힌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를 싫어하는 이들이 제국에 많은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나는… 무인으로서, 그가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면 그것이 그를 결코 증오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자네 제국의 사람들이 죽었을 텐데.”

    “아니, 그는 죽이지 않았어.”

    “죽이지 않았다고?”

    “전쟁의 신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놀라운 거지.”


    어떻게 그렇게  수 있는 거지? 전쟁이었다. 전쟁이란 것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 행할 수 있는 것이던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지?”

    “순수한 무력! 생하울라는 혼자서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우리 제국의 대대 하나를 상대했다. 그리고 승리했지. 그의 몸이 자신의 피로 피칠갑이 되었지만 단  명도 죽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쓰러지지 않았다. 전설 같은 이야기지.”

    쯔르레이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가 자신이 혼자서 일개 대대를 상대로 물리쳤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허풍이라고 치고 넘긴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충분히 그런 실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솔직히 듣고서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엘핀이 너무 지나치게 열광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태클을 걸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제자를 들였다니. 엄청난 이야기군. 오히려 내가 너를 건들여도 될지 의문인데.”


    “그가 그런 걸 신경쓰진 않을거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널 망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다. 네가 원한다면 약속한대로 훈련을 시켜줄 수는 있어. 그러나 이게  강하게 만들어준다고 나는 장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그 전쟁의 신의 실력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르로망샤라고 해도 그에 비해서는 부족해. 너는 심지어 저주로 약체화한 상태고, 그 무기도 쓸  없지. 그래도 괜찮나?”


    쯔르레이는 고민했다. 과연 엘핀에게 훈련을 받는게 맞는 것인가? 생하울라는 자신에게 과연 길을 안배해두었던가? 이것이 올바른 길로 가는 길이라고 볼 수 있는가? 그러나 쯔르레이의 답은 정해져있었다. 쯔르레이가 원하는 것은 힘이었다. 스스로가 가진 무력감을 해소하고 싶었다.


    실마리를 버릴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강해진다는 보장이 있다면, 그 곳에. 오히려 지금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하는게 더 본질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런 제약도 없는 힘.


    쯔르레이는 대답했다.

    엘핀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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