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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41/162)


  • 〈 41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뭐야, 멀쩡하잖아.”


    “제가 당신 같은 애송이인  아십니까?”

    “제길, 그런 식으로 연락 받으면 당연히 무슨 일 생긴 줄 알지.”

    쯔르레이 일행이 왕궁에 입궁하자마자 마주친 것은 대마법사 제놈 그라시아였다. 잠시 휘리엘이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그는 생각보다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생활에 찌든 표정을 지녀 대마법사보다는 사무원에 어울림직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오는데 녀석이 암살자 부대를 보내더군요. 그런 애들 장난으로는 제 털 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 놈들… 이쪽에도 한  찾아왔었지.”


    “그런가요? 당신이라면 별 문제 없이 넘겼겠죠.”

    제놈은 정말로 애들 장난이라는 반응으로 물었다. 그러나 이미 그 과정에서 실수를 범한 적 있는 엘핀으로서는  말이 없었다. 엘핀의 침묵에 제놈의 표정이 묘해지기 시작했다.

    “뭔가요,  반응? 설마….”


    “제길.”

    “애송이인 것도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한심하긴.”


    “닥쳐.”


    엘핀이 제놈의 조롱에 으르렁댔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런 과한 반응이 제놈의 말이 틀린 것 없다는 데에서 기인한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쯔르레이조차 속으로는 엘핀을 비웃고 있었다. 제놈은 엘핀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쯔르레이를 보았다.

    “그 꼬맹이는 뭡니까.”

    “…내 동생.”


    뒤에서 둘의 촌극을 지켜보던 쯔르레이에게 관심이 돌아왔다. 제놈 그라시아가 쯔르레이를 자세히 훑어보더니 표정을 굳히고는 말했다.


    “강력한 저주가 붙어있군요.”


    “아, 그건 휘리오비치가….”

    “아뇨, 그가 아닙니다. 이건….”

    쯔르레이는 순간 당황했다. 휘리오비치가 아니다. 그럼 남은 것은? 물론 그런 것은 하나 뿐이었다. 자신의 저주. 하루 단위로 모습이 바뀌는 용이 내린 저주. 그걸 눈치챈건가?

    “이 저주에 대해 알고 있나?”

    “무슨 얘기냐, 어이.”


    쯔르레이가 다급하게 물었다. 상황을 모르는 엘핀 또한 쯔르레이에게 물었지만 답을 해줄 상황이 아니었다. 제놈은 계속해서 쯔르레이를 살펴보고는 말하였다.


    “…나중에 혼자 저에게 찾아오시죠. 저 멍청이가 있어서는 대화가 안통할 거 같으니.”


    그러나 제놈은 대답을 미뤘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급한 마음이 아쉬웠다.  말을 끝으로 제놈은 그대로 뒤로 걸어 나갔다. 왕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야, 무슨 얘기냐니까.   무슨 저주 같은 게 있는 거냐?”


    저주에 대한 얘기에 대해 엘핀이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쯔르레이는 입을 닫았다. 엘핀이 이죽거리기까지 했지만 쯔르레이의 입은 무거웠고 결국 엘핀 또한 캐묻는 걸 당장은 포기하기로 했다. 휘리엘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휘리엘은 돌아오자마자 둘의 어색한 상황에 대해서, 정확히는 엘핀 혼자 열을 내는 상황에 대해서 당황했지만 엘핀의 아무 것도 아니란 말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엘핀이 휘리엘 앞에서는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좋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둘은 이제 제놈의 뒤를 이어 왕을 알현할 시간이었다.


    쯔르레이는 혼자 그들을 기다리게 되었다. 일단 쯔르레이의 거짓 신분은 제대로 귀족이란 신분을 받지 못했고 받았다 하더라도 사생아이기 때문에 왕을 알현할만한 신분이 되지 못했다. 아마 엘핀이 적당히 얘기만 전해둘 것이다. 지정해둔 방으로 돌아가기로  쯔르레이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깨닫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길을 잃었다,  쯔르레이는 판단했다. 왕궁의 길은 마치 미로처럼 복잡해서 원래 왔던 길을 찾아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을 그만 놓치고 만 것이다. 주변에 사람이라도 있으면 물어보면 될 것을. 아쉽게도 쯔르레이의 주변에는 아무런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라면 아티고가 붙어 있을 테니 이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문제라면 왕궁에 들어왔으니 안전하다고 판단이 되어 더 이상 호위 기사를 두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시중을  사람이 필요하지 않냐는 휘리엘의 말을 거절한 것은 쯔르레이 자신이었으니 자업자득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과 계속해서 같이 있는 것을 쯔르레이는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길을 찾아 헤매는 쯔르레이는 편하게 마음 먹기로 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왕궁이었고 안전한 곳이니 길을 잃는다고 문제가 생길 것은 없었다. 적당히 사람을 찾아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편했다.

    사실 그러했다. 쯔르레이는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이 움직였다. 쯔르레이의 일이 기한이란 것이 딱히 정해지지 않은 일인데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르레이가 쫓기듯이 길을 간 것은 실제로 쯔르레이가 무언가에게 쫓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자신의 저주임을 쯔르레이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쯔르레이는 반쯤 이 모습으로 고정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벌써 며칠 째 모습이 변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극심한 상처를 입었으니까 오래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은 이미 확인한 바였지만 기간이 너무 길었다.


    흑마법이 그를 제대로 격리하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되려 어느 정도 마음을 편하게 해준 것도 사실이었다. 매일 바뀌는 모습을 감추고 여행하는 상황이 그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던 것은 분명했으니. 마치 진짜 귀족 영애처럼 가만히 지내는 달콤한 생활이 편하지 않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쯔르레이는 비웃었다. 자조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자신이 평생 이렇게 진짜 어린 여자애인 마냥 살기라도 할 생각인 건가? 편한 마음 한 가운데에 기억해두어야했다. 자신의 원래 모습을. 잊어버리기 전에. 언제라도 꺼낼 수 있게.


    쯔르레이가 상념을 하며 길을 찾던 도중, 인기척이 느껴졌다. 쯔르레이는 습관처럼 숨으려는 생각을 했지만 곧 집어넣었다. 지금은 사람을 찾아야 할 시간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쯔르레이가 발을 옮겼다.


    “…뭐냐, 누구지?”

    발을 향한 곳에서 발견한 사람은 소년이었다. 아니, 정확히 소년인지는 알 수 없는 외모였다. 금발머리를 살짝 길게 늘어뜨린 얼굴이 이쁘장해 여자아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모습이었다. 쯔르레이가 그를 소년이라고 판단한 이유는 순전히 그가 남성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녹색의 눈이 쯔르레이르 바라보고 있었다.

    “길을 잃어서… 찾고 있었습니다.”

    “네가 누군지 물었을텐데.”

    “제 이름은 쯔르레이입니다.”

    쯔르레이는 소년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대답했다. 당장 이 모습과도 나이차가 별로 많이 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어린 소년이었지만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데다가 왕궁에 있는 사람이니 무조건적으로 쯔르레이보다 신분이 높을 테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 상황에서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설마 이름이 그게 끝이라는 것은 아니겠지? 네 정확한 신분을 밝혀라.”


    “…쯔르레이 세이피어스라고 합니다. 엘핀 세이피어스 경의 동생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더 정확한 소개를 요구했다. 스스로를 엘핀의 동생이라 소개하는 것만은 끔찍하게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년은 놀란 듯 했다.

    “세이피어스 경의 동생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길을 잃었다고 했나. 손님용으로 쓰는 곳은 이쪽이다. 따라와.”

    다행히도 쯔르레이가 원했던 바는 이룰 수 있었다. 까칠한 소년이 몸소 길을 알려주게 된 것이다. 쯔르레이는 감사를 표하며 소년을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이윽고 쯔르레이는 자신이 원래 배정되었던 방으로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아는 곳까지 도착했으니 방 정도는 자신이 찾아갈 수 있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다 도착해서였다.

    “전하. 이곳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훤칠한 키의 기사였다. 기사는 쯔르레이 앞에서 길을 안내하던 소년을 보고 말했다. 전하라고. 쯔르레이가 소년의 이쁘장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러 상식이 부족한 쯔르레이였지만 그 말이 왕족에게나 쓰는 말인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곧 쯔르레이는 자신이 지금 왕자에게 길 안내를 시켰다는 걸 깨달았다.

    전혀 편한 게 아니었잖아. 쯔르레이는 속으로 화를 냈다. 순순히 길 안내를 해준 걸 생각하면 괜찮아 보였지만 혹시나 이상한 트집을 잡을 지도 몰랐다. 쯔르레이가 만난 귀족이란 것들은 대체적으로 이상한 이들이었으니 당연한 의심이었다.


    다행히도 왕자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이 아이가 길을 잃었다고 해서 데려와 주었다. 세이피어스 경의 동생이라고 하더군.”

    “세이피어스 경의요?”


    남자가 의문을 담아 쯔르레이를 쳐다보았다. 쯔르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말했다.

    “그럼 제가 맡겠습니다. 길 안내는 제가 해줄 테니까 전하께서는 이만 돌아가셔도,”

    “아니.”

    왕자가 기사의 말을 끊고 말했다.

    “내가 안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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