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0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40/162)


  • 〈 40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휘리엘의 저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직 사랑이란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쯔르레이는   없었지만 분명 그것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나올 수 있는 얼굴이었다. 다만 쯔르레이에게는 확실히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곧 흥미가 사라졌다.

    “제가 이 곳에  것도 그를 만나기 위해서 였답니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공작가로 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예의가 아니니까 연통을 넣었는데….”

    “그게 문제입니다, 영애. 영애가 왔으면 당장이라도 찾아와야지. 어디서 뺀질대다가 이제야 편지만 보내는 겁니까.”

    “너무 그러지마요. 흑마법사 때문에 편지가 바뀔 위험이 있어서 안전하게 보내려면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어요. 아르테온은 바쁜 사람이고요.”


    둘은 휘리엘의 약혼자라는 이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쯔르레이는 조금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더 특별한 얘기가 없으면 나는 가지. 왕궁… 에 들어가는 것은 언제가 되는거지?”

    “나흘 뒤에요.”


    “내가 따로 준비할 건 없나?”


    “네가 뭐가 있다고 그런 걸 준비하겠냐. 가만히 있어, 그냥. 가만히.”

    쯔르레이는 엘핀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신경  가치도 없었다. 이 모습일 때 쯔르레이가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워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그런 것도 익숙해져서 인지 지금은 크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서리 갈기 마을에서 실험했을 때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감정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쯔르레이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까지 이 몸에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는 것이었다.

    밖에서 대기하던 아티고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간 쯔르레이는 불안을 잊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아티고에게 부탁해서 얻어낸 목검이었다. 솜뭉치는 여전히 엘핀이 갖고 있는 상태였다. 흑마법의 저주로 현재 평범한 어린아이 정도의 힘밖에 내지 못하는 쯔르레이로서는 목검 휘두르는 것도 얼마 못가 금방 지쳐버렸다.


    “헉… 헉….”


    “쯔르레이양, 괜찮습니까?”

    쯔르레이의 신음소리를 들은 건지 아티고가 방으로 들어왔다. 땀에 젖은 채로 지쳐있는 쯔르레이의 모습을 보고 그가 말했다.

    “어차피 제대로 힘도 못쓰는데 그렇게 까지 무리하실 필요는 없지 않나…요.”

    아티고의 어색한 존댓말이 이어졌다. 처음 봤을 때와 지금의 괴리감이 그를 붙잡는건지 그는 종종 무심코 반말을 해버릴 뻔  때가 있었다. 분명 쯔르레이의 외모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름다웠지만 여행에 찌들어 제대로 씻지도 못한 그때와 완전히 꾸민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쯔르레이는 그가 어떻게 자신을 부르든 신경쓰지 않았기에 내버려 두었다.

    “이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이 너무 남는다.”

    “뭐… 휘리엘 아가씨한테 예법 공부라도 받아보시는  어떨까요? 휘리엘 아가씨도 꽤나 심심해하시는  같은데. 아니면 내가… 아니 제가 도서관 가서 책이라도 빌려올까요?”


    “나는 글을 모른다.”

    아티고는 순간 쯔르레이가 원래 평민이었음을 깨달았다. 글을 모르는 것이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모습이 워낙 기품 있어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럼 글이라도 배워보겠습니까?”

    아티고의 말에 쯔르레이가 고민에 빠졌다. 글을 배워두는 것은 분명 나쁘지 않은 얘기였다. 그러나 한번도 그런 공부를 해본 적도 없는 자신이 제대로 배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쯔르레이가 말했다.

    “당신이 가르쳐주는 건가?”


    “뭐 제가 가르쳐드려도 좋지만… 아, 단장님한테 배워보시는 건 어떨까요? 단장님도 할  없어서 죽어나던데. 남매의 정을 쌓는… 실언이었습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드물게도 표정이 끔찍하게 바뀐 쯔르레이를 보며 결국 아티고가 말을 취소했다.

    “그럼 휘리엘 아가씨한테 한번 부탁드려볼까요?”


    쯔르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이건 ‘강아지’라고 읽으면 되요. ‘강아지가 멍멍하고 짖었다.’ 다음 문장을 읽어보시겠어요?”


    “가, 강아지가 집 안으로 나갔다.”

    “아니에요, 거기는 집 밖으로 라고 해야 맞아요.”

    휘리엘은 생각보다 흔쾌하게 요청을 받아들였다. 흑마법사에 대한 대책으로 다른 누군가를 저택에 초대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어디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생활이 무료해진 덕분이었다. 그녀는  훌륭한 교사였는데 꽤나 열정적으로 쯔르레이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다.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부탁한 쯔르레이는 공부라는 것에 대한 힘겨움을 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휘리엘이 열정적인 만큼 쯔르레이가 공부해야 할 것이 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쯔르레이가 썩 영리했던 탓에 공부량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남는 것이 시간이기도 했고.

    “굉장히 배우는게 빠르네요. 이정도면 금방 읽고 쓸 수 있을거에요.”

    “감사합니다.”


    쯔르레이는 드물게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난생처음 하는 공부는 힘들었지만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도움이  일이었다. 쯔르레이가 숙제를 들고 일어나려 하자 휘리엘이 말했다.


    “잠시만요. 바로 가지 말고 같이 티타임이라도 즐기고 가요.”

    “아뇨, 괜찮,”

    “과자도 있어요.”


    “… 그럼.”


    휘리엘은 꽤나 빠르게 쯔르레이를 다루는 방법을 깨달았다.  무뚝뚝한 소녀는 의외로 꽤나 단 것을 좋아하는 입맛이었던 것이다. 과자 같은  미끼로 걸면 대개 넘어와주곤 했다. 과자 같은 걸 좋아할 인상처럼 보이지 않았기에  갭이 귀여웠다.

    “후후, 여동생이 생긴거 같은 기분이네요.”

    “….”

    쯔르레이는 과자를 오물오물 먹으면서 휘리엘의 말을 무시했고 휘리엘은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평온한 일상이었다.


    쌓여있는 과자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대부분이 쯔르레이는 모르는 거였지만 몇 개는 이미 이곳에서 지나면서 먹어본 것이었다. 그러다 못보던 과자… 아니, 이건 빵인가? 처음 보는 모습의 과자를 보고는 입에 넣어보았다.


    환상적이었다. 꿀이 발라진 바삭한 빵 안에 가득 든 슈크림의 단 맛이 폭력적으로 쯔르레이의 입안을 강타했다. 지금까지 먹어본 그 어떤 과자보다도 달았고, 맛있었다. 살짝 흥분한 쯔르레이가 휘리엘에게 물었다.

    “이, 이 과자는 뭔가요?”


    “아, 그 과자는 생슈크레라고 해요. 수도의 특산물이죠.”

    생슈크레!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놓고 잊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생하울라가 자신의 이름을 지을 때 농담처럼 붙이려던 이름! 그 과자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버리고 온 서리 갈기 부족이 떠올라 단 맛이 가시고 씁쓸함이 몰려왔다.

    “아가씨 혹시….”

    “뭔가 궁금한게 있나요?”


    휘리엘은 곧바로 질문을 받아주었다. 생슈크레를 맛보고는 아이처럼 좋아하던 아이가 이름을 듣자마자 갑자기 우울해지는  보고 의아해했던 휘리엘이었다.

    “혹시, 생 산맥의 서리 갈기 부족이라는 오크 부족을 아십니까?”

    “미안해요. 제가 볼타르 왕국의 지리에는 약해서….”

    당연한 일이었다. 휘리엘 울펜슈타인은 타국의 귀족이었고, 심지어 간티아 제국의 귀족이었다. 다른 나라의 이종족의 마을에 관해서 알 리가 없는 것이다.

    “생 산맥에서 왔다고 했죠? 그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 아뇨,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윽고 간티아 제국의 성향을 떠올린 쯔르레이가 말을 줄였다. 오크에 대한 이야기를 간티아 제국의 사람에게 해서 좋을 것은 없는 것이다.


    “궁금하시다면 한 번 알아봐 드릴까요?”


    그러나 쯔르레이는 결국 이어지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단순히 상황을 파악하는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타협한 것이다.


    그러던 중 휘리엘의 방문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영애,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네, 들어오세요. 엘핀.”


    엘핀이 들어오자마자 쯔르레이를 보고 얼굴을 구겼다.


    “뭐야, 너도 있었냐.”

    그의 쓸데없이 분쟁을 재촉하는 말투에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쯔르레이는 가볍게 그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상대해봐야 자신만 피곤해진다는  이미 학습한 상황이었다.


    “무시하기냐. 하, 요새 글을 배운다더니 머리가 커지기라도 했나.”


    물론 가끔은 학습을 무시해야 할 때도 있었다.


    “엘핀이 멍멍하고 짖었다.”


    “이 새끼가….”


    “어머, 응용력이 좋네요. 하하!”


    쯔르레이가 책을 든채로 가볍게 아까 배운 문장을 읽으면서 돌려주었다. 엘핀은 화를 내었지만 휘리엘의 웃음에 주먹을 내렸다.

    “후, 나중에 두고 보자, 너. 아무튼 영애. 왕궁에서 추가로 연통이 왔습니다.”


    “어머… 입궁은 이틀 뒤일텐데요.”


    “한번 열어보도록 하죠.”

    엘핀이 곧바로 편지를 뜯어  안에 걸린 내용을 확인했다. 그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 오늘 밤 바로 입궁하라는 내용입니다.”


    “이렇게나 갑자기?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제놈 그라시아가 휘리오비치에게 습격을 당한 채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제놈 그라시아, 왕국에  둘 뿐인 초월자의 이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