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솔직히 말해서 쯔르레이는 어느 정도는 다 털어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어린애가 아니고, 지금의 몸 상태는 사실상 인간조차 아님을. 그러나 반강제적으로 합류하게 된 일행은 모두 간티아 제국의 사람들이었고 간티아 제국이 인간이 아닌 이종족들을 박해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결국 말할 수는 없었다.
즉, 쯔르레이는 그들 사이에서 속절없이 어린애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카락이 정말 아름다워요, 아가씨.”
“이 에메랄드 머리핀은 어떨까요?”
“….”
메이드들이 쯔르레이를 치장하며 조잘조잘대고 있었다. 물론 쯔르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완전히 질린 상황이었다. 수도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울펜슈타인 별장의 메이드들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의 쯔르레이에게 반한 듯 매일 어떻게라도 더 이쁘게 꾸며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연녹색의 원피스 드레스를 입고 옅은 화장에 머리핀까지 차고 나서야 쯔르레이는 해방 될 수 있었다. 이나마도 쯔르레이가 치장하는 걸 싫어해 최대한 간단히 한 것이었다.
“어이, 다 끝났으면 나와. 밥 먹으러 가자.”
치장이 다 끝나자 귀신같이 엘핀이 쯔르레이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세이피어스님! 숙녀의 방을 함부로 열면 안되는 거에요!”
“이 꼬맹이가 뭔 숙녀야.”
쯔르레이는 속으로 끄덕였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자신이 숙녀가 아님은 확실했으니. 쯔르레이가 화장대 앞에서 일어나 엘핀을 따라 나섰다. 엘핀은 서로가 남매 사이임을 주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휘리엘이 시키는 대로 가끔 이렇게 자신을 데리러 오곤 했다. 쯔르레이로서는 굳이 필요한 연기인지 의아했지만 어쨌든 따라나섰다.
휘리엘과 엘핀, 그리고 쯔르레이의 일행이 수도 갈라테아에 도착한 건 사흘 전이었다. 휘리엘의 말에 따르면 울펜슈타인 가는 제국의 제일가는 부호 가문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인지 온갖 곳에 저택이 있었고 그것은 볼타르 왕국의 수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쯔르레이는 얘기했던 대로 엘핀의 여동생으로 신분을 속이고 일행에 합류하기로 했다. 의외로 기사들은 딱히 의문을 가지지 않고 받아들였다.
쯔르레이가 일행에 합류하자마자 휘리엘은 곧바로 수도로 출발했다. 흑마법사에게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서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 결정이었고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휘리오비치나 그의 잔당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안전하게 수도에 도착했고 수도에 울펜슈타인이 소유한 저택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휘리엘은 곧바로 왕궁에 연통을 넣었고 그들은 지금 그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당신 기사들은 어떻게 내 존재를 바로 믿을 수 있던거지?”
쯔르레이와 엘핀은 같이 아침을 먹는 중 계속 의아해하던 얘기를 꺼냈다.
“…내 아버지란 놈은 말이다. 내가 네 살일 때 집을 나갔어.”
“응?”
“그리고 지금까지 안돌아왔지. 편지만 보내고 말이야. 어딘가에서 가문의 돈을 쓰면서 흥청망청 놀아재끼고 있을 거야, 지금도.”
“대단한 사람이군.”
“그리고 여자랑 눈 마주치고 애새끼를 싸질러 대고 나중에 그 사생아를 발견하면 나한테 보내.”
“….”
“일단 어디든 가서 마구 놀아재껴. 그러다가 여자랑 눈이 맞고 놀아나는거지. 그리고 돌아다니다가 다시 옛날에 들렀던 마을에 가봤는데 얼씨구, 자기 애가 생겼다는거야. 하, 씨발. 그럼 이제 그 애새끼들을 나한테 보내고 정작 본인은 계속 흥청망청 놀러다니는거지. 그 책임은 전부 내가 지고.”
“내 아버지란 분은 상당히 한심한 작자로군.”
쯔르레이가 비꼬았다. 확실히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드물게 쯔르레이는 엘핀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그런 아버지를 뒀으니까 저렇게 성격이 개차반이 된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엘핀 역시 아버지를 모욕했다고 화내기는커녕 같이 욕을 했다.
“한심한 정도가 아니지. 인간 쓰레기야, 그 새끼는.”
“당신 동생들은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뭘 어떻게 해. 가족들은 영지에 적당히 살 수 있게 해주고 애들은 대충 알아서 살게 해주는 거지. 넷은 돈 받고 연 끊고 나갔고 둘은 저택에서 지내고 있어.”
꽤나 의외인 얘기였다. 엘핀의 성격이라면 그들 전부를 내쫓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관대한 처사로군. ”
“그러니까 네가 지금 그 꼴을 하고 있는 거 아니겠어?”
엘핀이 치장한 쯔르레이의 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쯔르레이의 모습은 객관적으로 결코 비웃음을 받을 이상한 모습이 아닌, 오히려 매우 귀여운 모습의 외모였지만 쯔르레이가 결코 그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기에 하는 일이었다.
엘핀의 이죽거림을 쯔르레이는 적당히 넘겼다. 엘핀과의 사이는 결코 좋지 않았지만 이런 시시한 말싸움을 매일매일 해대서야 신경줄이 남아나지를 않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야 곧바로 발끈하며 덤벼들었지만 말이다.
“첫날에는 좀만 찔러 대도 빨개지는 게 웃겼는데 이제는 부끄럽지도 않나보네. 좋냐? 역시 여자애는 여자애인건가.”
“첫날 당신이 입힌 변태 같은 옷 보다는 나아서 말이지.”
“이 새끼, 아직도 그거로 이야기 꺼내네. 네 몸 열이 엄청나게 끓어올라서 최대한 얇게 입힌 거고, 내가 갈아입힌 거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흥.”
“하여간 애새끼는…. 아무튼 그것도 그렇지만, 그 애비 새끼가 워낙 얼굴 하나 만큼은 잘나서 기사들이 적당히 수긍한 것도 있을 거다. 너랑 머리 색도 같고. 그러니까 대충 흑마법사가 내 몸을 노린다고 미끼로 내 동생인 너를 찾아서 이렇게 던져준 것이다, 하고 말하면 믿는거야.”
“그가 금발인가?”
“금발에 금안.”
“당신 눈도 금색이군.”
“끔찍하니까 닥쳐. 그 자식이랑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게 최악이야.”
“여기 계셨군요. 단장님. 쯔르레이.”
식사가 끝마칠 즈음 기사 아티고 마르실이 둘을 찾아왔다.
“아티고. 무슨 일이지?”
아티고 마르실은 전에 쯔르레이가 붙잡혔을 때 보살펴주고 심문할 때 참여했던 기사였다. 그래서 그는 휘리엘에게 당장의 쯔르레이의 호위 기사로 낙점 지어졌다. 이미 한 번 습격을 당한 쯔르레이가 언제 다시 또 같은 상황에 쳐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식사가 끝나는 대로 방으로 오라고 휘리엘 아가씨가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왕궁에서 대답이 왔다고요.”
~
“어머나, 둘이 벌써 사이가 많이 좋아진 거 같네요.”
“영애, 저도 참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사이좋게 휘리엘의 방에 방문한 둘을 보고 내린 휘리엘의 평가에 엘핀이 일축했다.
“쯔르레이양은 오늘도 정말 아름답네요.”
“….”
쯔르레이는 대답하지 않고 넘겼다. 지금 쯔르레이가 입고 있는 옷들은 모두 휘리엘이 어렸을 때 입은 옷들이었다. 휘리엘은 쯔르레이가 이렇게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면 꼭 저렇게 칭찬을 해줬는데 쯔르레이의 입장에서는 그저 거북할 따름이었다.
“왕궁에서 답변은 뭐라고 왔습니까?”
“입궁을 허가한다고 하는 군요.”
“다행이군요. 지금 휘리오비치가 기색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곳에 있어야 뭐든 할 수 있을테니까요. 녀석의 생각이 뭔지는 알 수가 없군요.”
“그리고… 같이 연통을 넣은 버빌런 공작가에서도 연락이 왔어요.
그 말을 듣자 엘핀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직도 불만인거에요, 엘핀?”
“영애, 저는 아무런 불만도 없습니다. 다만 그저 영애가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하는 걸 원하는거죠. 그 재능 없는 놈보다는요.”
“아르테온은 벌써 기사 작위를 받았는걸요. 엘핀의 기준에서는 조금 모자랄지 몰라도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무슨 얘기지?”
자신이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둘이 진행하자 쯔르레이가 궁금증에 물었다. 그러자 엘핀의 얼굴은 더더욱 썩어 들어갔고 휘리엘이 얼굴을 밝히며 말했다.
“제 약혼자 얘기요. 아르테온 버빌런 공자. 제가 볼타르 왕국으로 온 것도 그를 만나기 위해서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