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8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38/162)



〈 38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휘리엘은 조금 당황한 듯 머뭇거리더니 엘핀을 보면서 대답했다.


“그건 정말 죄송해요. 저는 쯔르레이양이 저를 구해 준 거에 대해서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서 엘핀에게 쯔르레이양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  꽉 막힌 인간이….”

“영애, 꼭 그렇게 말해야겠습니까.”

엘핀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수배서는 내가 내렸다. 그게 가장 찾기 쉬우니까. 하지만 수배서에는 분명 상처를 입히지 않고 데려오라고 했다.  위협할 생각은 없었어.”


“그저 감사 인사를 위해서 라면 거짓말을 써서 잡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사실대로 감사 인사를 위해서 찾아와 달라고 썼으면 네가 믿고 응했을까?”


“잘 알면서 굳이?”


쯔르레이가 빈정거렸다. 보상은 원하지 않는데도 굳이 억지로 데려오려고 했단 걸 욕하는 것이었다. 휘리엘이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요. 우리가 쯔르레이양을 잡고 엘핀이 폭력을 휘두른  모두 사과하도록 할게요. 미안합니다.”


“영애가 굳이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은 제가 했으니 사과는 제가 해야 합니다.”

“그래, 빨리 사과해라.”


쯔르레이는 드물게도 재촉했다. 아무래도 엘핀에 대해서 여러 악감정이 쌓여있어서 그런지 평소 성격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엘핀은 이를 갈았지만 사과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미안하다.”


“소리가 작은데.”


“미 안 하 다.”

“말로만?”


“그래,  원하는 거라도 있냐?”


쯔르레이는 신경질 내며 대답하는 엘핀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더니 잠시 후 말했다. 그건 쯔르레이에게 지금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일단 멀쩡한 옷을 내놔라, 이런 다 비치는 옷 말고.”

“그니까 그거 내가 입힌  아니라니까.”

요구에 대한 응대는 엘핀이 아닌 휘리엘에게서 나왔다.


“여기  아이가 입을 옷 좀 갖다 주겠어?”


휘리엘의 말에 메이드는  멀쩡한 옷을 가져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멀쩡한 옷이라는 건 쯔르레이의 기준이 아니었다. 사랑스러운 모습의 하얀색 원피스를 보며 쯔르레이가 소리쳤다.

“멀쩡한 옷이 아니잖아."

쯔르레이의 얘기에 메이드는 당황해서 말했다.


“네? 뭔가 마음에 안드시나요? 하지만 여기에 어린 아이 옷은 별로 없어서….”


“나는 이런, 하늘하늘하고 부드러운 옷 같은 건 안입는다.  옷은 어딨지?”


“허, 얻어 입는 주제에 말도 많군. 그 누더기라면 소각시켜버렸다. 피가 엄청나게 묻어서 다시 입을 수도 없어.”

“그런….”

누더기였지만 꽤 정들었던 옷이었다. 자신의 옷을 직접 수선해서 만든 옷으로 처음 자신의 집에서 떠났을 때부터 계속 입고 다녔던 옷이었다. 정이라고 들건 없었지만 지금 이 상황을 탈출할 유일한 희망이 불타 없어졌다. 쯔르레이에게는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뭐가 불만인가 했더니만 그냥 부끄럼 타는 거였나. 평범한 여자애들은 이런  좋아하지 않나?”

엘핀의 말에 쯔르레이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맞다. 부끄러운  맞았다. 하지만 그걸 저 놈의 입으로 들으니 짜증이 솟구쳤다.

“귀엽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어릴 때 입은 옷인데… 별로인가요?”

메이드와 휘리엘도 한마디 보탰다. 확실히 여자아이라면 평범하게 좋아할만한 옷을 갖고 거부감을 드러내는 쯔르레이의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나는 싫다, 이런 옷.”

“하지만 지금 따로 준비할 수 있는 옷들도 전부 이런 것 뿐인데요.”

“으윽….”

“고집 부리지 말고 입어라. 무슨 옷 가지고 이렇게 시간을 끌어.”


“네가 입어보던가.”

“내가 너랑 같냐?”

엘핀이 한심하다는 듯 쯔르레이를 보았다. 엘핀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얘기였다. 그야 그는 남자였고, 그런 옷을 입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쯔르레이는 여자아이였으니 저런 옷을 입는 게 당연했고. 하지만 쯔르레이에게 만큼은 그건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였다.

결국 쯔르레이는 메이드의 손에 이끌려 가서 원피스를 입게 되었다. 굴욕적이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메이드를 뿌리치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아래가 허전해….”

“치마를 입어보는 건 처음인가요?”


휘리엘이 물었다. 물론 처음은 아니었다. 생하울라가 선물한 옷을 억지로 입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렇게 얇고 하늘하늘한 옷이 아니었고 속에 바지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생하울라가 사온 옷은 평민들이 입는 옷이었고 이번 옷은 귀족들이 입는 옷이었다. 둘 사이에는 소재부터 디자인까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쯔르레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렇게 가만히  닫고 있으니 그나마 좀 봐줄 만 하군.”

“닥쳐.”

“너… 쥐어터지기 싫으면 그 말버릇,”

“변태.”


엘핀은 아쉽게도 거기서 ‘이걸 때릴 수도 없고’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주먹을 들고 쯔르레이를 향해 손을 올렸다. 휘리엘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실제로 때렸을 것이다. 휘리엘의 만류에 손을 내린 그가 중얼거렸다.

“망할.”


“자자, 옷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볼까요?.”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얘기에 엘핀이 곧바로 쯔르레이에게 물었다.

“그래, 너 무슨 짓을 당한 거냐?”

“무슨 짓?”


“네 몸, 상태가 멀쩡하지 않다는  느끼고 있겠지. 강력한 흑마법이다. 너는 단검에 심장이 찔린 채로 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다. 우연히 발견한 사람이 너를 데려와서 살았지만 솔직히 죽지 않은  이상한 상태였다.”

“….”


쯔르레이가 죽지 않은  물론 단순히 운이 좋아서는 아니였다. 하지만 애초에 자신도 왜 죽지 않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걸 또 얘기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입을 닫았다.


“그리고 지금도  흑마법이 네 몸을 갉아 먹고 있는 중이다. 이전처럼  이상한 칼을 들고 헛짓거리하는 건 불가능할 걸.”

“휘리오비치라고 했다.”


“뭐?”


“날 공격한 흑마법사의 이름, 휘리오비치라고 했다. 암살자들을 보낸 것도 그놈이 한 짓이라고 했어.”


쯔르레이의 얘기에 엘핀이 열을 내며 물었다.

“빌어먹을, 말투가 이상한 녀석이 맞았나? 두 가지 말투를 번갈아 가면서 쓰는?”

쯔르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가지 말투를 번갈아서 사용한 이상한 말투의 소유자였다. 엘핀의 표정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심각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영애, 돌아가야 합니다. 제국으로.”


“잠시만요, 갑자기 그렇게 말해도….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해요.”

휘리엘도 드물게 정색하는 엘핀의 모습에 당황한  했다.


“휘리오비치는 아라곤 왕국 출신의 강력한 흑마법사로 저와 같은 초월자입니다. 모든 나라에서 1급 수배범으로 분류되는 끔찍한 범죄자입니다. 당장 안전한 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엘핀도 같은 초월자잖아요. 상대할 수는 없는 건가요?”

“저는 놈에 비하면 애송이입니다. 경험도 부족하고요. 당장에 영애를 위기에 빠트린 전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기사와 마법사의 초월자의 차이는 큽니다. 저는 오로지 전투만을 할 수 있지만 흑마법사는 어떤 술수를 부릴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영애를 노리고 있다면 빨리 안전한 곳으로….”


엘핀의 말은 더할 나위 없이 정확했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엘핀은 신에게 축복 받은 이라고 불릴 정도의 놀라운 재능으로 젊은 나이에 초월자라는 경지를 이룩했다. 그러나 상대 휘리오비치는 벌써 백 년을 넘게 살아온 자로 경험도 실력도 엘핀이 비할 바가 못되었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세월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놈은 너의 신체를 원한다고 했다. 여자… 저 아가씨는 어디까지나 부업이라고 했어.”

쯔르레이가 들은 대로 말했다.

“제길, 누군가 영애의 목을 원하는군요.”

“저는 괜찮아요, 엘핀. 하지만 돌아가지는 않겠어요.”

“영애!”


“흥분하지 마세요, 엘핀.”

휘리엘은 침착했다. 그녀는 조곤조곤 엘핀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안전한 곳으로 가자는 말은 동의해요. 하지만 여기서 간티아 제국으로 돌아가는 건 너무 지나치게 오래 걸려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 가깝고 안전한 곳이 있지 않나요?”

“왕궁으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하지만 볼타르 왕국은….”

“네, 저희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죠. 하지만 1급 수배범의 얘기를 듣고 저희를 내칠 수는 없을 겁니다. 만약 저희를 죽게 내버려 둔다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 생길테니까요. 볼타르 왕국에는  명의 초월자가 있습니다. 일단 왕궁에 들어가면 휘리오비치도 어쩔  없어요.”

“영애, 르로망샤나 그라시아가 저희를 도울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힘들 겁니다. 르로망샤는 자신에게 이득이 없으면 무시할 테고 그라시아는 아마 왕궁에는 있지도 않을 겁니다.”


볼타르 왕국에는  명의 초월자가 있다. 기사 라로슈 데 르로망샤와 마법사 제놈 그라시아이다. 그러나 그들은 초월자 답게 괴팍한 성격을 지녔고 쉽게 도움을 구할 수 있을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들이 저희를 도울 필요는 없어요. 단순히 있어 주는 것 만으로도 우리의 안전은 보장 될테니까요. 무엇보다 휘리오비치가 왕궁에 있는 우릴 계속해서 노린다면 자연스럽게 왕국의 초월자들이 그를 상대할 이유가 생기는 겁니다. 그건 곧 왕국을 노리는 것과 같으니까요. 휘리오비치를 상대하는 방법은 우선 안전을 챙긴 후에 도모하도록 하죠.”

휘리엘의 이야기는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휘리오비치라고 할지라도 왕국 하나를 통째로 적으로 돌릴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으니 당장에 안전을 도모하고 대책을 세우자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둘의 얘기가 어느 정도 일단락 될 것처럼 보이자 쯔르레이가 끼어들었다.

“얘기하는데 미안하지만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쯔르레이의 말에 엘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은 우리와 계속 같이 있어줘야겠다. 어차피 너도 저주 때문에 혼자 다닐 수는 없을 테니.”


“미안해요. 저희 때문에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됐네요. 제 목숨을 구해 준 것까지 포함해서 반드시 크게 보상해드리도록 할게요.”


쯔르레이로서는 한숨 나오는 일이었다. 빨리 수해에 도착해야 하는데 이런 데서 발목이 붙잡힌 것이다. 왕궁이라면 수도로 간다고 하니 방향 자체는 맞았지만 그 흑마법사를 처치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수도에 갇혀있을지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쯔르레이가 이들에게서 빠져나와 혼자 도망가는 것도 있을  없는 일이었다. 다시 흑마법사가 습격해올지 모르는 일인 데다가 이미 저주 때문에 힘이 빠진 것을 느끼고 있다. 원래도 힘들었던 여정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변한 것이다.

“이 저주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현재로서는 술자를 죽이는 법 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초월자지. 아무래도 꽤 오랫동안 너랑 다니게 될  같군.”

엘핀이 골칫거리를 떠맡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평생이고?”

“끔찍하군.”


“빌어먹을.”

방금 전 엘핀이 사용한 욕설이었다. 이번에는 말릴 새도 없었다. 기어코 엘핀은 쯔르레이에게 꿀밤을 때렸다. 심하게 때린 건 아니었지만 쯔르레이는 머리에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이 자식, 어린애를 진심으로 때렸다.


“으윽!”

“엘핀! 폭력은 안된다고 했잖아요. 앞으로 여동생인데 좀 잘대해주세요.”

그러나 쯔르레이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휘리엘의 폭탄 발언이 터졌다. 엘핀 역시 무슨 미친 소리라도 들은 듯 한 얼굴이었다. 먼저 반문한 것은 엘핀이었다.


“영애, 그건 무슨 개소리입니까.”


엘핀은 가차 없었다. 그의 걸걸한 입담은 그나마 예의를 차리던 자신의 아가씨에게도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는지 휘리엘은 욕설을 무시하고 대답했다.

“왕궁에는 정확히 신분을 증명할 수 없으면 들어갈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쯔르레이양이 들어가려면 엘핀이 신분을 증명 해주는 수밖에 없어요.”


“왜 하필 접니까, 다른 새끼들 많지 않습니까.”


“엘핀은 초월자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말하면 쯔르레이양이 어느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 거도 아니니 바로 들키겠지만 엘핀이 말하면 초월자의 힘으로 넘길 수 있어요.”


“제 신용은 갖다 버리는 겁니까?”


“무엇보다 엘핀의 아버지가 뿌린 씨가 한둘이 아닌  생각하면 적당히 둘러대도 설득력이 넘치는 걸요.”

“젠장맞을 애비 새끼, 내 인생에 단  순간도 도움이 안돼.”


“잠깐, 나도 싫다. 죽어도 싫어.”


쯔르레이 역시 반항했다. 그가 만난 인간  엘핀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싫은 인간이었다. 여동생이라고 하는  말도 안되는 얘기도 싫었지만  대상이 엘핀이라는  차라리 평생 이 모습으로 평생을 사는 걸 고민할 수 있을 만큼 끔찍하게 싫었다.


“차라리 날 버리고 가라. 혼자 가겠다.”

“얘도 싫다는 데요, 영애? 그냥 버리고 가죠.”

두 사람의 의견이 처음으로 일치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아름다운 합일이었다. 그러나 그 둘의 의견 일치에도 불구하고 휘리엘은 한번에 말  마디씩으로  둘을 침묵 시켜버렸다.

“그 칼,  줄거에요. 혼자 갈 수 있으면 가보세요.”

“….”

“엘핀이 날 죽을 상황에 내버려뒀을 때 저를 구해 준 건 누구였죠?”

“…망할.”

엘핀은 결국 결심한 듯 눈을 감고 크게 고민하다 말했다. 아니, 말해버렸다.

“오라버니라고 불러라.”

“미친 새끼.”


엘핀은 곧바로 쯔르레이를 주먹으로 응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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