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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37/162)



〈 37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으음….”

쯔르레이가 조용히 잠에서 깨어났다. 여기는 어디일까. 아직 잠에서   건지 정신이 몽롱하다.  앞에 보이는 건 낯선 천장이었다. 단순한 관용어구가 아니라 정말로 낯선, 처음보는 천장이었다. 주변을 둘러보고는 이내 그것이 침대에 매달린 천장이란 걸 깨달았다.


쯔르레이는 곧 굉장히 고급스럽고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침대 위에 자신이 누워있는 걸 알아차렸다. 여긴 어디지?


마치 엄청난 저택의 방처럼 보이는 고급스럽고 넓은 방이었다. 쯔르레이의 부족한 식견에도 그리 보였다.

쯔르레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짐도 칼도 보이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긴장했다. 자신에게 솜뭉치가 없다면 아무런 힘도 없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이 집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위협적인 상대라면 쯔르레이는 상대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덮고 있는 이불을 치우고 쯔르레이가 일어났다. 아니, 일어서려 했다. 이변을 눈치챈 것은 금방이었다. 몸이 허전했다. 쯔르레이는 지금, 익숙했던 자신의 누더기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니었다.

한눈에 봐도 여성용 속옷임이, 아니 여아용 속옷이 분명한 팬티와 네글리제를 입고 있는 거였다. 피부에 닿는 촉감이 엄청났다. 하늘하늘하고 가벼운 그 감촉은 쯔르레이가 알고 있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부드러웠다. 피부에 닿는 옷의 촉감이 기분 좋을 정도였다. 이내 쯔르레이의 입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튀어나왔다.

“이익… 이으으으윽….”

미처 제대로 된 소리가 되지 못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부끄러웠다. 기분나빴다. 혐오스러웠다. 역겨웠다. 자신의 원래 모습을 생각해보니 구역질이 새어 나올 정도였다. 물론 지금 자신은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지만, 원래 자신은 서른 살이 넘는 아저씨였다. 서른 살이 넘는 아저씨가 여아용 속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보아라. 끔찍했다.


대체 누가 자신에게 이딴 옷을 입힌 것인가, 진지하게 분노가 차올랐다. 그러나 분노보다 창피함이 더 심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었지만, 자신만은 보고 있다. 벨투리안은 보고 있는 것이다.


쯔르레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원래부터 쉽게 달아오르는 얼굴이었지만 이번은 정말 화려하게 불타올랐다. 분노와 창피함, 부끄러움과 당혹감이 겹쳐진 표정이었다.


쯔르레이는 차라리 알몸이 낫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멋대로 옷을 찢어버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정말 알몸이 되는 것도 곤란한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쯔르레이가 자괴감과 창피함에 시달리는 도중, 조용히 문이 열렸다. 쯔르레이는 긴장했다. 누가 들어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설마 그 흑마법사인가? 이런 옷을 입힌  그 자식의 수작? 쯔르레이는 곧바로 숨고 싶었지만 이미 문이 열렸으니 늦었다.


“어머나, 깨어났구나!”

그러나 들어온 것은 흑마법사도 위협적인 다른 사람도 아닌 그냥 평범한 메이드였다.

“어머, 울었니? 아직도 몸이 아픈가? 말할 수 있겠어? 괜찮니?”


메이드는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쯔르레이를 살폈다. 자신을 살펴보려고 다가오는 손길에 쯔르레이가 메이드를 뿌리치고 말했다.


“다가오지마라!”


“어머, 벌써부터 무리하면 안되요. 많이 다쳤으니까.”


그러나 쯔르레이는 다시 다가온 메이드에게 잡혀버렸다. 이전이라면 아무리 힘이 약하다 해도 이런 평범한 여자라면 뿌리칠  있었을 텐데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익….”

“일단 지금 몸은 괜찮은  같네. 기다려봐. 아가씨랑 엘핀님한테 말하고  테니까.”

메이드는 쯔르레이의 반항을 그냥 어린애의 앙탈 정도로 생각하는 듯  반응 없이 쯔르레이의 몸을 살피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쯔르레이는 방금 자기가 들은 이름에 대해서 떠올리고 얼굴을 굳혔다.


‘엘핀? 그 놈이 왜? 아니, 분명 수배서가….“


그제서야 쯔르레이는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이 되었다. 그 흑마법사에게 칼에 찔린  누군가가 버려진 자신을 보고 신고를 했음이 분명했다. 칼에 찔려서 죽을 정도로 피를 흘렸으니 당분간 원래대로 돌아갈 일도 없을테고. 그렇다면 자신을 치료해 준 건 엘핀 그 놈의 짓인가?


쯔르레이가 고민을 하던 도중 방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이미 쯔르레이가 깨어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노크도 없이 문을 아주 활짝 열어재꼈다.

남색 머리칼에 탄탄한 몸매, 쯔르레이의 머리색처럼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을 지닌 잘생긴 청년, 엘핀이었다. 엘핀은 벌써부터 귀찮다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일어났군.”

“엘핀….”

“멋대로 이름 부르지마라.”


“내 칼은 어디에 있지? 날 끌고 온 이유는 뭐지?”

엘핀은 여전히 까칠했다. 엘핀은 쯔르레이의 질문을 무시하고는 말했다.

“먼저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어디 팔아먹었지?”


쯔르레이도 가만히 당하고 있진 않았다.

“네 아가씨 목숨을 지켜줘서 고맙다는 말이 먼저 아닐까.”

엘핀은 정곡을 찔렸다는 듯 굉장히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의외로 순순히 감사인사를 했다.

“고맙다. 덕분에 영애께서 목숨을 건졌군.”

“….”


“이제 네 차례 아닌가?”


“…구해줘서 고맙군.”


“끝까지 경어를 쓰지 않는 군. 신분을 떠나서 연장자에게 존댓말을 하는 건 기본적인 예의 아닌가?”

하지만 엘핀은 서로 간의 감사 인사가 끝나자마자 말투를 트집 잡기 시작했다. 쯔르레이도 받아쳤다.

“검집으로 자길 폭행한 사람한테?”


“흥…. 암살자로 의심되는 놈한테 친절하게 대해 줄 필요가 있던가?”


“무죄였고 말이야.”

둘의 신경전은 팽팽했다. 신경전을 끝낸 건 의외로 엘핀이었다.


“됐다. 괜한 싸움을 할 필요는 없지.”


“꼬리를 내리는 건가?”


“속옷만 입고 있는 어린애랑 진지하게 싸우는  모습이 우스워서 그런다.”


그 말에 타격을 입은 건 오히려 쯔르레이였다. 엘핀과 대화하느라 잊어버렸던 자신의 모습을 깨닫자마자 부끄러움에 다시 얼굴이 달아올랐고 이불을 들어 몸을 가렸다.

“천둥벌거숭이 같더니 부끄러움은 있나 보군.”


“너… 이, 이런 옷을 입히고 사람을….”

“잠깐, 사람을 무슨 변태로 만들지 마라. 그 옷을 입힌 건 내가 아니다.”

엘핀이 침착하게 누명을 해소했다. 하지만 쯔르레이는 이미 화가  상태였다. 쯔르레이가 베개를 엘핀에게 집어던졌다. 물론 엘핀은 쉽게 피했고 베개는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엘핀이  옷을 직접 입혔다는 얘기는 없었고 실제로도 그러지 않앗다. 그러나 분노와 부끄러움으로 쯔르레이는 상당히 혼란스런인 상태였고 이성적인 대화는 통하지 않았다.

“어머나….”


쯔르레이의 분노가 엘핀을 향해 쏟아지던 도중 새로운 방문자가 찾아왔다. 선명한 흑색 머리칼이 아름답고 윤기 있게 빛나는 붉은 눈의 여자였다. 분명 쯔르레이가 그때 목숨을 구해준 여자였다. 여자는 엘핀을 향해 굉장히 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말했다.


“엘핀, 무슨 맞을 짓이라도 했나요?”

“오해입니다!”

엘핀의 그 뻔뻔한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엘핀이 변명하는 그 와중에 쯔르레이가 다시 남아있는 베개를 던졌다. 천하의 엘핀도 이건 피하지 못했다.

~

“정식으로 제 소개를 하겠어요. 제 이름은 휘리엘 울펜슈타인. 간티아 제국 울펜슈타인 후작가의 장녀입니다. 반갑습니다. 쯔르레이양.”


“흥….”


“제대로 인사해라, 네놈.”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엘핀. 처음 보는 곳에서 갑자기 깨어났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저는 이해한답니다.”

물론 쯔르레이는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쯔르레이양이라는  표현에 화가 난 거였지만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내 이름은 이미 알고 있을텐데. 뭘 더 말할 게 있지?”


“그냥 좀 인사하라고.”


“…안녕하세요.”


“엘핀도 소개해야죠.”


“엘핀 세이피어스다.”


“쯔르레이다.”

“너  새끼… 나한테만,”

쯔르레이는 교묘하게도 엘핀에게만 말을 놓았다. 무력과는 상관없이 휘리엘이 엘핀의 고삐를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생각대로 휘리엘은 곧바로 엘핀을 제재했고 그 제재는 효과가 있었다.


“그만하세요, 엘핀. 그러길래 제가 여자애한테는 조금 부드럽게 대해주라고 했잖아요. 여자아이는 섬세하다고요.”


“저 천둥벌거숭이가요?”

“물론이죠. 저 새침한 얼굴을 보세요.”


물론 쯔르레이는  황당한 헛소리를 듣고 있지만은 않았다. 쯔르레이는 곧바로 본론으로 진입했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수배서는 왜 뿌린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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