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6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36/162)


  • 〈 36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쯔르레이는 지체하지 않았다. 곧바로 솜뭉치를 들고 휘리오비치에게 덤벼들었다. 벨투리안의 공격은 정확하게 들어갔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검에 닿는 순간 마치 그림자가 흩어지듯이 휘리오비치의 몸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역시 예의가 없군.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나? 자네 이름은 뭔가? 대화를 하려면 서로간의 통성명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쯔르레이.”


    “그렇군, 쯔르레이라! 좋은 이름이야! 신과 악마는 언제나 종달새에게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역할을 맡기지. 자네 부모는 꽤나 센스가 있는 사람이군.”

    “그다지….”


    생하울라의 끔찍한 네이밍 센스를 생각하며 대답했다. 설마 정말 저런 뜻이었나?


    일단 휘리오비치에게는 쯔르레이를 당장 공격할 의사는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때의 그 암살자들과 관련해서 자신을 찾아왔다면 결코 좋은 얘기는 아닐 것이다. 쯔르레이는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다시 한번 소개하도록 하지. 나는 휘리오비치 세르미나카. 밤하늘의 달을 가리기 위해 태어난 자이며 태양빛으로 눈을 가리는 자일세. 만나서 반갑네.”

    그가 말을 마침에 따라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림자가 사라지고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휘리오비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취향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인정할만한 수준의 대단한 미중년이었다. 희게 바랜 머리와 단정하게 정리한 수염은 그를 댄디하고 정중한 신사로 보이게 했다.

    휘리오비치가 악수를 하며 내미는 손을 무시하며 쯔르레이가 되물었다.

    “밤하늘의 달을 가리기 위해 태어났다고…? 태양빛으로 눈을 가려?”

    “이런, 어린 아가씨에게는 아무래도 어려운 말이었나보군. 내가 미안하네. 조금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건 흑마법사들을 부르는 말이네. 우리는 대개 빛을 증오하는 삶을 살곤 하지.”

    “흑마법사. 그렇군.”


    쯔르레이는 그가 마법사라는 말에 긴장했다. 마법사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고 상대하는 방법 또한 알지 못했다. 흑마법사라는 것이 일반적인 마법사와 뭐가 다른지는 모르지만, 둘 다 쯔르레이에게는 한번도 보지 못한 이들이란 건 똑같았다.


    “호오, 반응이… 신기하군. 자네 흑마법사가 뭔지 모르는군?”

    그러나 쯔르레이의 몸이란 이토록 읽히기 쉬운 것인지! 쯔르레이의 긴장을 일반적인 흑마법사에 대한 공포로 인한 것이라고 얼마든지 착각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휘리오비치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생각보다 더 순진한 아가씨를 붙잡은 것 같군, 하하. 아니 아니 걱정하지 말게나. 나는 어린아이에게 친절한 사람이네. 아가씨가 내 말을 들어주기만 한다면 말이야.”

    “어린아이에게 친절하다는 사람을 한 명 더 봤는데, 그 쪽은 그런 조건 따위 붙이지 않았다.”

    “순수하기도 해라.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쪽이 더 위험한 법이란다, 아가야.”

    휘리오비치는 쯔르레이를 조롱하듯 아가씨라고 놀리던  넘어서 아가라고 쯔르레이를 부르기 시작했다. 쯔르레이는 발끈했지만 최대한 티를 내려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가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하구나. 그럼  할애비가 뭔가 가르쳐주기 라도 할까?”

    휘리오비치의 노골적인 조롱을 쯔르레이는 무시하기로 했다. 위험한 상황인데 저런 조롱 따위에 넘어가서야 목숨이 아까웠다.


    “목적이 뭐지?”


    “하하, 그건 당연히 엘핀의 목이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젊은 초월자, 신에게 사랑 받는 어린 검사의 몸이 이 휘리오비치가 원하는 바라오.”

    “그 여자가 목적이 아니었나?”


    “울펜슈타인 영애도 먹음직스럽지요. 하지만 그쪽은 단순한 부업입니다. 진짜 목적은 엘핀이죠.”


    휘리오비치의 말투가 갑작스레 바뀌었다. 갑자기 존댓말을 쓰자 휘리오비치의 얼굴이 좀 더 젋은 듯 인상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잘못 찾아왔다. 나는 그놈들과 아무런 인연도…”

    “아무런 인연도… 없다고 하긴 힘들겠죠? 이렇게 수배서가 있는데.”

    “….”


    “물론 저는 바보가 아니니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정말로 당신은 그들과 별 인연이 없었겠지요.  나쁘게 엘핀에게 붙잡히기 전까지는.”

    “그걸 어떻게.”

    “당신이 왜 붙잡혔다고 생각하나요? 당신 스스로가 부족해서? 그것도 맞는 얘기지만, 재밌는 가정을 하나 해보지요. 엘핀이 무언가의 시선을 느끼고 예민해져 있었다면… 당신이 들키는 것이 더 쉬워지지 않았을까요?”


    휘리오비치는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덕분에 습격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당신이 그 시선의 정체라고 믿어서 그의 경계가 조금 약해졌거든요. 감사를 표하도록 하죠.”

    으드득

    쯔르레이가 이를 갈았다. 결국 자신이 붙잡혀서 그 고초를 당한  부터가 이  때문이라는  아닌가. 그러나 쯔르레이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자신에게는 이 자를 이길 힘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은 도망칠 수 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뭐 덕분에 당신은 살려주려고 했습니다. 당신이 제 암살자를 한 명 죽이기 전까지는요.”

    말없이 도망칠 루트를 찾는 쯔르레이와 그런 건 신경 쓰지도 않은 채 계속 제 말을 이어가는 휘리오비치의 기묘한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그 여린 팔목! 손! 아름다운 피부! 그런 작은 몸으로 그 거대한 검을 휘둘러 영웅처럼 울펜슈타인 영애를 구해내는 모습이란! 이 늙은이 마저도 감동시켰단다, 아가야. 그래서 내가 너에게 살짝 호기심이 생겼지.”

    다시금 휘리오비치의 말투와 인상이 바뀌었다.


    “….”

    “하루 걸러서 변하는 그것, 조절할 수 있는 건가?”

    쯔르레이는  없이 검을 들었다. 죽여서 없애야 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흑마법사라는 알 수 없는 이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것은 맞는 일일까? 도망쳐야 했다. 그것이 맞았다.휘리오비치는 빈틈투성이였다. 죽이는 것을 힘들 것이다. 하지만 도망치는 거라면…?


    “하하, 진정하게나. 자네 반응을 보건데 아마 조절할 수 없는 일인가 보지? 대단하군. 내 짧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런 저주는 단  번도  적이 없어.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나는 자네를 돕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돕는다고?”


    “자네가 날 도와준다면, 자네의 저주를 치료할 수 있게 도와주도록 하지. 매력적인 제안 아닌가?”

    “…뭘 도와야 하는지 너는 말하지 않았다.”


    “그거야 당연히 엘핀 아니겠습니까?! 엘핀은 당신을 찾고 있고 저는 엘핀을 잡는 걸 원하죠. 서로 간에 아주 딱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로군요.”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그의 짜증스런 말투에 결국 쯔르레이가 태클을 걸었다.


    “그 말투는 자꾸 왜 바뀌는 거지?”

    “이런 실례를, 미안합니다. 제 버릇이라고 생각해주시죠. 아주 오래 전에 생긴 거죠.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제안은?”


    “대답은….”


    쯔르레이는 물론 대답을 마치지 않았다. 그대로 땅바닥에 퍼져있던 흙먼지를 발로 퍼트리고 뒤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도주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읍!”


    벽에서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대로 쯔르레이의 목을 붙잡았다. 쯔르레이는 솜뭉치조차 놓친 채로 공중에서 그림자에게 매달려있는 기묘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쯔르레이는 그림자를 팔로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했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이런 이런, 어른이 말을 할 때는 끝까지 들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역시 아주 버릇이 없어. 하지만 대답을 거절한 건 똑똑하다고 칭찬해 줄 수 밖에 없겠군. 내가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흑마법사와 약속하지 말라는 얘기가 있으니 말이야.”


    여유롭게 쯔르레이를 붙잡은 휘리오비치가 쯔르레이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자네가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나는 자네를 해부했을걸세.”

    쯔르레이의 매서운 눈길이 그를 거칠게 바라보았지만 시선은 시선 뿐이었다. 쯔르레이는 무력감을 느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제안을 거절한 자네에게는 무엇을 할까, 그럼? 맞춰보게나.”


    그러나 그림자에 입이 막힌 쯔르레이가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쯔르레이를 조롱하듯 휘리오비치는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3… 2… 1…. 땡, 끝났네! 그럼 정답을 공개해줘야겠지? 나는 이렇게 할 걸세.”





    휘리오비치가 작은 단검을 쯔르레이의 심장에 그대로 꽂아버렸다. 쯔르레이는 막힌 입에서 피를 토해냈고 여린 가슴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쯔르레이의 금발 머리가 금색 깃털들로 길게 자라나기 시작했으나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휘리오비치는 그 모습을 보며 웃으며 쯔르레이를 뒷골목에 고이 내려놓고는 그림자 속으로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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