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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31/162)



〈 31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쯔르레이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은  몸이 묶여 있는 채로 짐마차 안에 갇혀 있다. 손도 발도 꽁꽁 묶여있고 입에는 재갈이 묶여있다. 사방을 병사들이 지키고 있고 무기 또한 없었다.

외통수였다.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방심의 대가였다. 생하울라 만큼의 강자를 이렇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엘핀이라는 자가 정말 그런 강자라면 의심을 산 순간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설사 방심하지 않았더라해도 상황이 더 좋았을지는 모르겠다.

자해라도  수 있다면, 적어도  모습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으니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혀조차 깨물지 못하게 온 몸을 결박해두었으니 자해 또한 불가능했다.

벨투리안으로 돌아가 모습을 들키는 것은 최악의 결과였지만, 그런 결과가 나온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 밧줄은 끊어질 테지만 솜뭉치도 빼앗긴 상황에서 벨투리안이 알몸으로 이런 병사들 사이에서 도망칠 가능성도 극히 낮았고 솜뭉치를 놓고 도망치는 것은 절대 논외였다. 그 검이 없다면 여행하는  자체가 불가능했다.


“다시 출발한다!”


엘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쯔르레이는 그 목소리가 굉장히 불쾌해졌다.

~

쯔르레이가 마차에 실린 채로 움직이기를 반나절 하늘이 어두워지자 병사들이 멈춰섰다. 엘핀이 명령을 내리고 마차에 다가가 말했다.


“오늘은 이만 이 곳에서 야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영애.”

“네, 그렇게 하세요, 엘핀.”


마차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묘령의 여성의 것이었다. 가녀리다기 보단 당차고 여리다기보다는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 순간 쯔르레이는 마차에서 끌려나와 앉은 채로 나무에 묶이게 되었다. 재갈을 풀어준 순간, 쯔르레이는 기회가 왔다는 걸 깨달았다.


“뭐지…?”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니냐.”

이름 모를 기사는 작은 빵  덩어리를 쯔르레이의 입에 대주었다. 굴욕적인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찬  더운  가릴 때가 아니었다. 마치 아기새가 어미의 모이를 받아먹듯 쯔르레이는 작은 입으로 빵을 조금씩 먹었다.


“너 이름이 뭐냐.”

“….”

“붙임성 없는 녀석이군. 네 말대로 네가 암살자가 아니라면 태도라도 좋게 하는 게 좋을거다.”


“쯔르레이.”

“응? 그게  이름이냐? 이상한 이름이군.”


“네 이름은?”


“음?”


“먼저 이름을 밝혔으면 당신도 이름을 대는 게 예의 아닌가?”

“거 맹랑한 꼬맹이일세. 내 이름은 아티고다. 아티고 마르실.”


아티고 마르실이라고 이름을 밝힌 기사는  나이가 있어 보였다. 적어도 서른 중반은 되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는 쯔르레이가 식사를 다하자 쯔르레이를 묶어둔 채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얼마  있어서 아티고와 엘핀, 그리고 여행용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  명이 찾아왔다.

“이 아이인가요?”

“다가가지는 마십시오, 영애. 아직 안전하다고 판명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린애인 걸요. 피부도 새하얗고.”

“어린 아이라고 방심할 수는 없습니다. 아티고, 이 아이의 이름이 뭐라고?”

“네, 그러니까 분명… 쯔,”


“쯔르레이다.”


쯔르레이가 아티고의 말을 가로채며 대답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엘핀이 곧바로 검집 채로 쯔르레이를 후려쳤다.


“크윽…!”

쯔르레이의 입에서 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경어를 써라. 건방진 것. 이 분이 누군지 모르느냐?”


“모른다.”


엘핀은 다시금 쯔르레이를 후려쳤다. 이번에는 방금과는 달랐다. 처음 친 것은 맛보기라는 듯, 그 다음은 인정사정 없이 친 것이었다. 쯔르레이의 몸은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았지만 고통에 둔감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쯔르레이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고통을 죽이고 있었다.

“그만하세요, 엘핀! 아이에게 너무 가혹하세요.”


“영애, 저는 당신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합니다. 아이라고 해서 수상한 자를 그냥 놔둘 수는 없습니다.”


아티고는 실랑이하는  사람 사이에서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꽤나 당황스러웠는데 그는 아무래도 쯔르레이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제압된 상태잖아요. 폭력을 쓰는 것은 그만 해주세요.”


“영애가 정 그렇다면 최소한으로 하겠습니다.”


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네가 이분을 모른다면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 모른 채로 넘어가라.  산맥에서 왔다고 했던가?”


“….”


“대답.”


“그래….”


엘핀은 다시 쯔르레이를 검집으로 때리지는 않았다. 그저 눈을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네 결백을 직접 증명해봐라. 듣기에 따라서는 풀어 줄지도 모르지.”

 봐도 거짓말이라는 걸, 쯔르레이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적어도 당분간은 자신을 풀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답  수 있는  없었다. 어떤 사실을 얘기해야 하는가? 함부로 말할 내용도 아니었고 말한다고 믿어 줄 리도 없었다.

“말하지 않는 군.”


“아이라서 그런  아닐까요? 계속 맞으면… 겁을 먹어서 라도 대답을 못할 수도 있어요.”

마음씨 착한 영애가 쯔르레이를 변호해줬다. 이 여자가 쯔르레이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쯔르레이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말로 그러한가?”

엘핀이 아티고에게 물었다.


“네?”


“자네 딸이 있지 않은가. 자네 딸도 그런가?”


“뭐, 그렇기도 하죠. 괜히 윽박지르거나 하면 오히려 더 입을 다물기도 하고.”


“애들은 어렵군.”

쯔르레이로서는 환장할만한 대화였다. 억울했지만 그렇게 라도 오해 해주는 게 차라리 편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가만히 있어야 했다. 쯔르레이의 조잡한 계획의 가능성이라도 조금 올리려면.


“더 대답을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다시 재갈을….”

“…실….”

“뭐라고?”


“화장실….”

이번에는 쯔르레이도 참을 수 없었다. 쯔르레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엘핀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어머나….”


“그냥 싸라.”

엘핀의 충격적인 선고는 다행히도 마음씨 착한 영애가 말려주었다.

“안돼요, 엘핀! 여자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그럼 어떡합니까? 이 아이의 결박을 풀어주기 라도 하라고요?”


“제 메이드를 붙여줄 테니 마르실 경께서 같이 도와주세요. 묶여 있는 상태니까 위험할 것도 없잖아요. 마르실 경은 따님 분도 계시고요.”

“저한테 딸이 있다고 해서 그러는   아닌  같지만요.”


“마르실, 영애께서 말하신 대로 해라.”


아티고의 소심한 반항은 금방 진압되었다. 난데없이 딸 뻘인 아이의 소변 보는 걸 돕게 된 그의 사정도 사정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수치스러운 것은 쯔르레이였다. 그렇지만 들키지 않기 위해서 라면 어쩔 수 없었다.

딱히 묘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쯔르레이가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큰 상처를 입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갈을 묶이기 전에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을 해서 갖다 오면서 생길 빈틈 사이에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혀를 깨물 수도 있지만 깨문다고 변화를 막을 정도로 피를 많이 흘린다는 보장이 없었다.

조잡하고 성공 확률도 낮았지만 이렇게 라도 해야 했다.  방법을  찾는다면 다리가 풀린 사이에 모닥불 사이로 몸을 던지기로 마음 먹었다.

모든 일의 원흉인 엘핀에게 짜증이 솟아 올랐다. 차라리 그가 때렸을  정말 검으로 찌르기라도 했으면 이런 걱정을 할 일도 없었을 텐데. 애초에 그가 쯔르레이를 눈치채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검집으로 맞은  죽어라 아프기만 할  피는 하나도 흘리지 못했다.


그러나 상황은 예기치 못하게 흘러갔다. 쯔르레이가 다리 쪽의 결박만 풀린 채로 메이드와 아티고와 함께 가던 도중이었다.

“습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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