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0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30/162)


  • 〈 30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쯔르레이가 아레히를 만나고 길을 떠난 지 보름이 지났다.  동안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직 왕국의 수도로 향하는 길은 멀었지만 벌써 눈이 내리지 않는 지역까지 올라왔다.

    쯔르레이의  목적지는 왕국의 수도를 넘어서 있는 수해였다. 수해에 도착하면 생하울라가 얘기한 ‘글룸라’라는 자를 만나고, 그 후에는 간티아 제국을 가로질러 석양이 지지 않는 전장으로 가야했다.  곳으로 가면 무언가 실마리가 있기를 쯔르레이는 간절히 빌었다.

    눈이 쌓이지 않는 숲이란  참으로 신기했다. 따뜻하고, 시끄러웠다.  덮인 산이란 것은  특성이 고요함이라, 이렇게 생명력이 차고 넘치는 시끄러운 숲은 낯설었다. 무엇보다 쯔르레이에게 좋은 것은 사냥할 동물도, 먹을 수 있는 과일도 널렸다는 것이다.


    물론 과일 같은 것은 독이 있을지도 모르니 잘 모르고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 자못 당연했지만, 쯔르레이는 자신이 쉽게 죽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이후 자기 몸을 함부로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약하지만 작은 독이 있는 것이 분명한 과일을 먹고 살짝 컨디션이 안 좋아지는 정도에 그치자, 적당한 과일들은 식량으로 규정해버렸다.

     강한 독을 먹는다면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으니 먹는 것은 어디까지나 약한 독이 있는 과일 뿐이었다.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쓰러지거나 하게 되면 신변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덕분에 눈이 내리지 않는 숲에 도착하자, 마을에 들를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쯔르레이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었다. 가면을 부순 이후로 쯔르레이는 마을에 들를 때면  날을 기다려서라도 벨투리안의 모습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일정이 지체되는 일이 잦았고 쯔르레이의 몸이 여행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은 거리를 가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 말이다.

    지금 쯔르레이가 걷고 있는 길은 듄벨의 아멘토 영지와 루드빅의 가르니메 영지를 넘어서 수도로 향하는 셰이먼 숲의 도로였다. 숲의 한 가운데 길을 내어둔 것은 쯔르레이의 상식으로써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도로가 있다는 것은 확실히 움직이기 편했다.


    하지만 도로가 있다는  다른 사람과 마주치기도 쉽다는 이야기였다. 많은 사람을 본 것은 아니지만, 종종 길을 지나가는 상인들의 마차 같은  또한 있었고 쯔르레이는 그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기척을 숨기곤 했다.

    만약 벨투리안의 모습이었다면 이런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됐겠지.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라지만 불편한  어쩔 수 없었다. 어리다는  불편했다.

    그렇게 길을 걷던 쯔르레이에게 소리가 들렸다. 이건… 훨씬 많았다. 지금까지 마주쳤던 이들과는 달랐다. 어린 쯔르레이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로 말과 마차가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쯔르레이는 지체 없이 몸을 숨겼다. 군대인가? 그가 두고 온 서리 갈기 부족이 생각났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흐트러버렸다. 감상 따위에 젖어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소리의 정체는 군대가 맞았다. 병사들이 말을 타고 마차를 둘러싼 채 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꽤나 호화스러운 마차였고, 병사들의 갑옷 또한 매우 고급스러워 보였다.


    꽤나 멀리 숨어 있던 쯔르레이는 그저 그들이 쭉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쯔르레이가 숨어 있는 곳 주변까지 와서 이변이 생겼다.


    “모두 정지!”

    일행의 가장 중간에 있는 마차 앞에서 대열을 지휘하던 이가 갑작스레 외쳤다. 그의 외침에 따라 모두가 말을 멈췄고 곧 모든 일행이 정지했다.

    쯔르레이가 숨어있는 곳 바로 주변에.

    “무슨 일이 있나요, 엘핀?”

    마차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쯔르레이가 숨은 곳에서도 간신히 들릴만한 크기였다.


    “아닙니다, 잠시 말들이 지쳐서 잠시 휴식을 하는 게 좋을  같습니다. 영애.”

    휴식…?


    순간 쯔르레이는 불안해졌다. 혹시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신이 기척을 숨긴 것을 눈치챘나? 그럴 리가 없다. 쯔르레이가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자신 있는 재주였다. 생하울라급의 전사가 아니라면 감히 그를 쉽게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엘핀이라고 불린 남자는 일행들에게 잠시 휴식할 것을 명했고 병사들은 말에서 내려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이런 도로 한복판에서 갑자기 휴식을 한다고? 쯔르레이는 마을에 들르지 않았지만 마을까지는 그렇게 오랜 거리가 아니었다. 말들이 갑자기 지친다고? 하지만 쯔르레이의 눈에 말들에게는 그렇게까지 크게 지쳤다는 느낌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읍!”

    무언가가 쯔르레이의 뒷목을 치고 지나갔다. 급소를 타격하는 정확한 움직임에 쯔르레이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어린애라고…?”

    검집채로 쯔르레이를 쳐서 기절 시킨 이가 의문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엘핀이었다.


    쯔르레이는 그대로 정신을 잃은 채로 있지 않았다. 갑작스런 충격에 정신을 잃어버렸지만 몸의 회복력은 그런 것에도 적용되는 듯 바로 정신을 차린 것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몸이 묶인 채로 엘핀에게 옮겨지고 있는 상태였다.

    “벌써 정신을 차렸나?”


    엘핀이 말을 걸어왔지만 이미 입에는 재갈이 묶여있어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쯔르레이는 몸부림치지 않았다. 밧줄은 단단하게 묶여있었고 여기서 발버둥 친다고 해도 그저 체력 손실만 일어날 뿐이었다.


    “어디서  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목표하고 있는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헛다리 짚었다는 말이 입 끝까지 몰려왔지만 불행히도 쯔르레이는 지금 말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쯔르레이는 그대로 끌려갔다.

    “단장님, 잡으셨군요.”

    ‘함정이었나.’

    쯔르레이로서는 알  없지만 무언가 신호를 주고 시선을 뺏은 사이에 엘핀이라는 자가 그를 잡으러 온 것이겠지. 쯔르레이는 온 몸이 결박 당한 채로 병사들 앞에 놓이게 되었다.


    “입에 독약은 없었습니까?”

    “없었다. 후드를 벗겨라.”


    엘핀의 명령에 병사가 그대로 쯔르레이의 후드를 벗겼다. 그리고는 곧, 탄성 소리가 퍼져나왔다.


    “여자아이였나?”

    “세상에, 굉장한 미모로군요. 크면 경국지색이  겁니다.”

    쯔르레이는 수치스러워졌다. 그가 이런 모습이 된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구경거리가  채로 품평 받는  처음이었다.

    “재갈을 벗겨라.”


    병사들의 행동이 조금은 조심스러워졌다. 재갈이 벗겨지자 쯔르레이는 깊은 숨을 토해냈다.


    “후하….”


    “어디서 왔지?”


    쯔르레이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숨길 필요도 없고 그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자신이 결백하다는 걸 증명하면 보내 줄 것이다. 그러길 바랐다.

    “생 산맥.”


    “네 조직을 묻는 거다. 혹은 고용주.”


    “나는 암살자가 아니다. 첩자 또한 아니며 당신네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아무런 관련도 없는 어린아이가 암살자들이나 할 법한 은신을 하고 우리를 감시했다고? 우연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나?”


    불행히도 그랬다. 쯔르레이의 이야기는 가감 없는 사실이었지만 상황이 너무나도 절묘했기 때문에 도저히 의심하지 않고는 배길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여행하는 건 골치 아픈 일이다. 사람과 마주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지. 그렇기 때문에 숨었을 뿐, 감시하려는 생각 따윈 없었다. 너희들이 지나갔다면 다시 길을 갔겠지. 그 뿐이다.”


    “어떻게 증명 할 수 있지?”

    “내 짐을 봐라.”

    쯔르레이의 말에 엘핀이 병사들을 시켜 쯔르레이의 짐을 확인했다. 쯔르레이의 짐은 평범했다. 아이들이나 쓸 법한 작은 활과 화살  개, 옷이나 단검과 같이 여행하는데 필요한 필수품 정도였다.


    “암살자의 짐은 아니군. 확실히.”

    “….”


    “이 검은 뭐지?”

    쯔르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엘핀이 쯔르레이의 짐과 검을 가져왔을 때부터 생긴 의문이다. 아이가  거라고는 생각도 못할 거대한 검이었다. 아이가 조금만  작았더라면 땅에 끌렸을 정도의 크기였다. 그런데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고 날은 무디었다. 이런 건 무기라고 할 수 없었다.

    “대답하지 않는 군. 이런 장난감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텐데.”


    엘핀이 느끼기엔 그랬다. 이 정도로 거대한 검인데 도저히 무기로는 쓸 수 없다. 그렇다고 어떠한 마력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수상했다.

    “네 말이 정녕 사실이라면 풀어주도록 하지. 하지만 그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다시 재갈을 묶어라!”

    낭패였다. 당장 오늘 밤이 되면 쯔르레이는 벨투리안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되면 돌이킬 수 없었다. 하지만 밧줄은 견고하게 쯔르레이의 몸을 묶고 있었고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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