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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29/162)


  • 〈 29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벨투리안은 바보가 아니었다.

    10년을 혼자 살았고 세상물정은 모르는데다가 사교성도 없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생하울라가 자신을 도와주는 게 아무런 대가도 없는 것이라 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동맹의 마지막 생존자라고 해서 도와줬다고 하기에는 생하울라의 도움의 정도가 지나쳤다.

    벨투리안은 그에 대해서 이미 대답을 들은 바가 있었다. 용을 잡을 전사의 목을 취하기 위해서. 지극히 오크답고, 그래서 전혀 믿을  없는 이야기였다. 이 따위 어린애 장난으로 용을 잡을 수 없다는 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벨투리안 그 자신이 가장  알고 있었다.

    생하울라가 그걸 모를 것이라 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그가 자신을 돕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벨투리안은 그걸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평소처럼 벨투리안은 생하울라가 숨기는 것을 굳이 알아내려 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인생은 망가졌고 거기에 무언가 하나 더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굳이 언급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둘 사이의 관계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애써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 와서는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그가 무엇을 숨기던 간에 벨투리안은 그에게서 충분히 받을 만큼 받고 있었다.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을 정도였다.


    생하울라의 집에는 꽤나 많은 책이 있었다. 책들은 대부분 오크 문자로 쓰여 있었지만, 인간의 글로 쓰인 책들도 많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벨투리안은 까막눈이었기 때문에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벨투리안이 갑자기 생하울라에게 요청했다. 종이와 펜을 빌릴 수 있겠냐고. 그가 글을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생하울라는 어렵지 않게 부탁을 들어주었다.


    벨투리안은 그가 구해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옆에서 사전을 읽고 있던 생하울라가 어느새 보러와 감탄할 만큼 꽤나 범상치 않은 솜씨였다.

    “자네 그림도 그렸나?”

    “슈라헤는 문자가 없다. 필요한 일이 있다면 그림을 그릴 뿐이지.”

    “이 그림은 누구 얼굴인가?”


    그림에는 훤칠하게 생긴 청년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슈라헤의 생존자.”

    “모두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는 이미 10년 전에 추방당했다. 바깥에서 죽지 않았더라면 살아 있겠지.”


    그를 추방한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지만.

    “이 자를 찾아볼 생각이네.”


    “그런가.”

    둘의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요새는 매번 이런 상황이었다. 얘기가 길게 가지를 않았다. 생하울라가 벨투리안을 놀리든, 농담을 하든 반응은 시원찮았다. 그가 작은 모습일 때 역시 그랬다. 과거 잠깐 놀리면 얼굴이 빨개지고 바로 노발대발하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이쪽에 왔던 사절단들이 그들의 영지로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네.”


    그러나 이번 이야기는 벨투리안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백작가의 차남이 오크의 마을에서 죽었다. 쉽게 쉽게 이야기가 끝날 리 없었다. 안테른 남작은 돌아가면서 전쟁 만큼은 막아보겠다고 했지만, 그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


    “그들이 날 요구할 가능성은 없나?  놈을 죽인 건 바로 난데.”

    “남작과 입을 맞춰놨네. 그들은 놈을 죽인 게 나라고 보고를 받을 걸세.”

    그건 남작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거짓말이었다. 만약 사실대로 보고했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전쟁을 막는 방법으로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를 죽인 벨투리안의 신병 만을 인도 받고 전쟁을 막는. 하지만 남작은 배에 구멍이 뚫린  사경을 헤매고 있을 아이에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설령 신병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오크들은 응하지 않을 테니 그걸로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 또한 접었다. 기실 벨투리안의 신병이란 건, 그의 신체 특성상 넘겨줄 수도 없었고, 오크들은 손님을 버리지 않으니 타당한 선택이었다.

    “그쪽에서 다시 우리 쪽으로 사람을 보낸다는 소식이 있어. 아마 정확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서겠지. 그때와는 다르게 병사들을.”

    “전쟁이 시작되는건가?”


    “알 수 없네. 다만 전쟁이란 건 그들한테도 쉬운 선택은 아니야. 지금은 겨울이고 백작은 앓아 누워 있어. 백작 대리인 놈의 형은 꽤나 골치가 아플거다. 그가 제 형제를 진정 아꼈더라면  수 없지만, 백작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이가 사라진  이득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고.”


    예상 외로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오크들은 결코 전쟁을 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무작정 싸움을 걸고 다니는 종족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모든 전쟁을 부러 일으키고 다닌다면 그들은 진작 멸종했을 것이다. 전쟁을 피하지 않되 일어나지 않을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서리 갈기 부족 또한 그러했다. 만약 인간들이 결국 전쟁을 선택한다면 그들은 싸울 것이다. 살기 위해, 싸우기 위해, 명예롭게 죽을 것이다. 서리 갈기 부족은 결코 약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군대와 맞서 싸울 만큼 세력이 크진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 게 맞았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명분이 있었고, 오크들을 싫어하는 인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당장은 겨울이라 모르지만,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올 때에 맞춰서 군대를 출병할 수도 있었다.

    “그들이 도착하는 건 언제쯤이지?”

    “눈이 녹고 있고, 그들은 빠르기에 아마 2주가 걸리지 않을걸세.”


    벨투리안은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칼에 찔리기 전에 그라면, 그들을 도와 맞서 싸우는 것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벨투리안은 떠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떠날 생각인가?”

    생하울라는 그런 벨투리안의 마음을 눈치챘다는 듯 물었다.

    “그래.”

    그 말을 듣고 생하울라는 자신의 방으로 가서 문서들을 들고 나왔다.


    “볼타르 왕국의 위, 간티아 제국의 수해의 깊은 곳에 ‘글룸라’라고 하는 주술사가 살고 있다네.”

    “글룸라?”


    “한번 들러보게나. 이걸 가지고. 지금  세상에서 자네의  상태를 가장 잘 알아낼  있는 유일한 이일 테니까 말이야.”


    “….”

    “그리고 이것, 강철 부리 부족에게 갈거라면 부탁하겠네.”

    그렇게 생하울라는 두 개의 편지를 맡겼다. 벨투리안은 두 개의 편지를 받아 들고 말없이 서있었다.

    “준비할게 많겠군. 떠날 거라면 최대한 일찍 떠나는 걸 추천하겠네. 늦으면 인간들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 말에 벨투리안은 충동적으로 말했다.

    “가지 말까?”

    “그걸 원하나?”

    “아니… 아닐세. 잠시 정신이 나간 것 뿐이야.”

    “내 자네에게 나쁜 짓을 했군.”

    엎질러진 물은 이미 담을 수 없었다. 생하울라가 말했다.


    “자네는 내 딸이 아니고, 나 또한 자네의 아빠가 아니야. 연극은 연극에서 끝내야 하네.”


    “…그렇지. 나는 어린애가 아니니까.”

    비참한 기분이었다. 생하울라의 말은 그를 조롱하는  아니었다. 그저 끝까지 감정을 숨기지 못한 자신을 꾸짖는거였다. 벨투리안이 아무리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침착하게 굴어도 끝내 튀어나오는 나약함이었다.


    ~


    벨투리안이 출발하는 것은 다음날 밤 자정을 넘어서였다. 원래의 모습일 때였다. 작은 모습으로 출발하는 것보다 더 편하고 멀리  수 있도록.


    다른 오크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알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짐은 생하울라가 챙겨  식량과 작은 활, 어린 몸으로도 들고 다닐  있을 정도의 도구들과 무게가 없는 검, 솜뭉치 뿐이었다. 오크들의 옷은 눈에 띄기에 가져 오지 않았다. 처음 벨투리안이 입고  옷을 그대로 입고 나가기로 했다.

    “가기 전에 이것 가져가게나.”


    “이건….”

    “생 산맥에서 찾아낸 유일한 것이네.”


    생하울라가 건네준 것은 가면이었다. 벨투리안 또한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목소리를 변조할  있는 주술이 담긴 것이었다. 이미 힘을 다한 듯, 얼마 사용하지 못할 것 같아 보였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고맙네.”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말해둘 것이 있네.”


    “뭔가?”

    “생슈크레는 싫다고 했지 않았나?.”


    “…?”

    벨투리안은 생하울라와 처음 만나고 며칠 안 되서 나누었던, 첫 농담을 떠올렸다.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마치 아득히 예전처럼 느껴졌다.

    “내 이름 하나 지어봤네. 자네가 쓸.”

    “….”


    “‘쯔르레이’ 어떠한가?”


    “무슨 의미인가?”

    “종달새.”


    그 순간 벨투리안은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마치 조롱과도 같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생하울라가 조롱의 의미로 그러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생하울라는 웃고 있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농담임을 벨투리안은 알았다. 이틀 전 자신의 그림을 그릴 때 옆에서 연금술사의 언어 사전을 찾아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자와 종달새라….”

    “어떤가?”

    “자네는 여전히 센스가 별로네.”

    그렇지만 벨투리안은 웃고 있었다. 생하울라도 마주 웃었다.

    “다시 보게나. 내 어린 친구여.”

    “그때는 쯔르레이라고 불러 주게나.  녹색 친구.”

    사자와 종달새가 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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