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27/162)


  • 〈 27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아이고, 도련님! 아이고 어떡해, 우리 도련님!”

    한센은 아르만의 시신을 부여잡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생하울라는 말 없이 배에 구멍이 뚫린 채 죽어가고 있는 투르의 몸에 곧바로 응급처치를 하기 시작했다. 안테른 남작은 그저 멍하니 아르만의 시체를 보고 있었다.


    “내… 제자가.”

    그는 결코 자신의 제자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만하고 예의 없는 데다가 자존심 강하고 이상한 사고까지 치곤 했다. 진지하게 이 녀석의 스승으로 검술을 가르치는 것 또한 짜증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충격을 감출  없었다. 제자의 싸늘한 시신을 바라보면서 그는 진심으로 슬퍼했다. 만약 자신이 어젯밤 그의 제자에게 말을 걸었더라면 이런 결과가 바뀌었을까?

    처음 문제를 눈치챈 것은 한센이었다. 곧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도련님이 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당연하게도 안테른 남작에게 보고했다. 안테른 남작은 당시 생하울라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고, 그 또한 아르만 루드빅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칼을 가진 채로.

    생하울라는 즉시 안테른과 한센을 데리고 자신의 집을 달려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목격했다.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는 투르와 이미 죽어서 싸늘해진 아르만의 시체였다.

    한센은 곧바로 아르만에게 달려가서 그를 깨워보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는 이미 숨을 멈췄으니까. 한센이 제 도련님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우는 동안 생하울라는 침착하게 투르의 배를 막아 피를 멈추게 하고 응급처치를 시도했다. 안테른 남작은 멍하니 아르만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응급처치가 끝나자 생하울라는 한센을 바라보았다.


    ‘저 놈은 글렀군.’

    놈은 아르만의 시체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럼 남은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남작.”


    “생하울라공… 나는… 이게 대체….”

    횡설수설하는 안테른 남작의 어깨를 부여잡고 생하울라가 일갈했다.


    “정신 차리시오, 당장. 상황은 당신이 보더라도 명백하겠지. 내 딸이 자네 제자한테 죽을  했고, 그 대가로 당신 제자는 죽었소. 나는 그리고  딸이 죽는 걸 볼 생각 없소. 지금 당장! 돌아가서 주술사 양아우테를 데려오시오.”


    안테른 남작이 정신을 차리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랬다. 상황은 명백했다. 애초에 집 주변에서 나오지 않았을 어린 소녀를 자신의 제자가 칼을 들고 찾아갔다. 그리고 10살짜리 아이를 죽이려고 했고, 자신은 죽었다. 끔찍한 이야기다. 안테른 남작은 생하울라의 말에 따랐다.

    혼란스러웠지만 적어도 저 어린 아이가 죽게 내버려둬서는 안된다는 걸 그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모두가 살아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

    사절단이 돌아가는 것은 사실상 무기한 연기되었다. 정확히는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구금된 것이다. 사정도 모르는  구금당한 인간들은 오크들에게 항의했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들의 책임자인 안테른 남작이 나타나서 사정을 설명해준 것이었다.

    못본 몇시간 사이에 끔찍하게 늙어버린 듯 피곤한 표정을 지은 안테른은 일행들에게 아르만이 죽었고, 오크 마을에 있던 인간 소녀가 중태라는 것을 전했다. 당분간은 돌아갈 수 없으니 다들 처신을 바르게 하란 말도 덧붙였다.


    그들은 혼란에 빠졌다. 야만적인 오크들이 결국 일을 벌인 것인가? 그렇게 추측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곧 한센이 돌아오고 그의 얘기를 듣자 여론은 반전되었다. 칼을 들고 어린 소녀에게 찾아간 아르만의 이야기는 그들 모두에게 비슷한 생각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그들의 도련님, 아르만 루드빅은 사절단에게 인망이 없는 이였다. 능력은 뛰어났으나, 공공연연하게 백작이 될 야심을 드러냈고, 성격 또한 좋지 않았다. 뛰어난 능력 덕분에 그를 차기 백작으로 밀어주는 세력들 또한 있었지만, 친절한 그의 형과는 달리 시건방지고 오만한 동생을 좋아하는 아랫것들은 그의 시종인 한센 밖에 없었다.

    그들 모두가 이번 방문에서 비정상적으로 소녀에게 집착한 아르만의 모습을 보아 알고 있었다. 소문에 밝은 이는 과거 그가 귀한 가문의 여식을 건들다가 퇴학 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도 했다.

    오직 한센만이 도련님은 그럴 분이 아니시라고 울면서 변호하였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

    안테른 남작이 불러온 양아우테는 곧바로 투르의 상태를 살폈다. 생하울라의 응급처치는 훌륭했기에 이미 피는 멈췄지만 이미 너무 피를 많이 흘렸다. 양아우테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가 손댈 수가 없네.”


    “뭐라고?”

    “나로서는  자를… 아니 이걸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이거’ 라고?”

    “그래, 자네도 알지 않겠나. 이 수많은 깃털…. 이자의 몸은 인간이 아니야. 오크는 당연히 더더욱 아니지. 수혈을 해야 되는데 인간의 피도 오크의 피도 받아들이지 못할거야, 이몸은.”

    “그럼 방법이 없단 말인가?”

    “방법은 없네. 다만….”

    양아우테는 뜸들였다. 자신의 얘기에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죽지 않을거야. 본래대로라면 자네 응급처치와는 상관없이 한참 전에 죽었어야 했어. 이건 바깥에 놓인  인간의 시체와 크게 상태가 다르지 않아. 그런데 죽지 않고 있다.”

    “용의 저주인가….”

    “나는 장담할  없어. 이대로 놔두는게 최선이다. 이건,”


    미처 죽지 못한 시신이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

    인간들의 구금은 곧 풀렸다. 책임자인 안테른 남작은 인간들과 오크들 사이를 오가며 상황을 얘기하고 앞으로의 대처에 대해 논했다. 덕분에 안그래도 피곤해 보이던  모습은 며칠  시체처럼 변해있었다. 시종 한센은 말이 없어졌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아르만이 소녀를 덮치다가 오크에게 죽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안테른 남작은 한 번 생하울라를 따라 그의 집에 들렀다. 머리를 가린 채 시체나 다름없이 누워있는 소녀를 보며 그는 강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자신이 좀  잘 처신했다면 자신의 제자가 죽을 일도, 저 소녀가 저런 상황에 빠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돌아가서 아르만의 형에게, 그의 주인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하는 것일까.


    “저는 장담할  없습니다. 저는 제가 아는 모든 사실을 보고할 것입니다. 아르만이 칼을 들고 이 아이를 찾아갔다고 보고할 것이고, 아르만의 칼에 그 아이의 피가 묻었다는 것을 보고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르만이 이 아이를 찔렀다고 보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정황증거만 갖고 사건을 판단할 권리가 저에게는 없습니다.”

    그게 자신이 지켜줄 수 있는 아르만의 명예에 대한 한계였다. 비겁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확실하지도 않은 추측을 보고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한없이 사실에 가까운 추측일지라도.

    “하지만 전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은 드리겠습니다. 비록 제가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알겠네.”


    생카울레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의 시체는 곧 돌려주도록 하지. 내일 떠나도록 하게나. 다음 교류는… 없도록 하지.”

    최악의 결과였다. 아르만은 죽었고 소녀는 죽어가고 있고, 교류는 끊겼고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책임자는 자신이었다.

    “다시 한 번, 책임자로서, 스승으로서 사죄드립니다. 모든 것이 제자를 잘못 키운 제 잘못입니다.”

    안테른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너무 입을  깨물은 탓이었을까. 그는 너무 지쳐있었다.

    다음 날, 사절단은 아무런 환대도 받지 못하고 떠났다. 아르만의 시종 한센은 한참을 오크들의 마을 앞에서 묶인 듯 서있다가 이내 발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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