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26/162)



〈 26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아르만 루드빅, 나는 차남이었다.


그 말은 즉, 백작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째서? 덜떨어진 형은 착하다는  말고는 아무런 재주가 없었다. 반면 자신은 뛰어난 재능이 가득한 수재였다. 검술도 정치학도 수학도 다른 모든 학문도 자신이 더 뛰어났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았다. 모든 것은 형의 것이었다.

더 이상 백작가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간티아 제국의 아카데미로 유학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카데미 생활은 순조로웠다. 나는 뛰어난 성적을 받았고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이곳이야말로 자신을 제대로 알아봐주는 곳이었다. 연인도 생겼다.

그렇게 생각했다.

사건은 3학년일 때 터졌다. 비밀리에 사귀고 있던 간티아 제국의 울펜슈타인 후작 영애가 부정을 저지른 것이었다. 분노에 차서 부정의 상대에게 결투를 신청했지만, 패배했다. 상대는 이미 기사의 작위를 지닌 자였다. 자신에게 검술의 재능이 있다 한들 상대가 되지 않는 존재였던 것이다.


억울함을 증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보았지만 비밀 연애였던 까닭에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나는 곧 퇴학당했다. 백작가로 돌아오자 모든 게 변했다. 자신은 여자한테 껄떡대다 퇴학당한 멍청이가 되어 있었고 아무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빌어먹을! 어째서 세상은 이렇게도 멍청이들만이 가득한가? 왜 우월한 나의 능력을 아무도 보지 못하는가? 자신을 상대해주는 것은 멍청한 평민 출신 검술 스승과 덜떨어진 시종  명뿐이었다. 그들 역시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아니,  명 있긴 했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형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덜떨어진 존재인 자신의 형만이 유일하게 나를 믿어준 것이었다.


참을  없었다.

자신은 형에게 동정 받아야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기회가 왔는데 그걸 버리는 바보가 아니다. 나는 형의 말에 따르기 시작했다. 오늘 내일 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영지를 돌보는 형을 도와 일하기 시작했다.


영지관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자신이 손을 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인식도 변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늘었다. 형에게 머리를 숙인 덕이었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이 멍청한 형을 쫓아내고 내가 백작이 되는 것을.

오크 마을에 가는 사절단에 따라가게  것도 그 일환이었다. 처음에는 형의 지시였다.  오랜 시간 영지를 비워야 하는 일을 시킨 것은 분명 지지를 얻기 시작한 자신을 경계해서일 것이다. 거절할 수는 없었으니 아르만은 이것을 기회로 삼기로 했다.


오크랑 교류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간티아 제국에서 오크는 몬스터였고 노예였다. 볼타르 왕국이 이상한 것이었다. 오크와 공존하려는 생각을 한다는 것부터가. 만약 백작이 된다면 이런 교류는 전부 없애고 그들을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만약 오크들로 인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들과 교류를 계속 하기로 결정한 형의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  방문에서는 별 소득이 없었다. 오크 마을에 대한 대략적인 생태를 알았으나 그런 것은 자신이  올 필요는 없던 것이었다.

야만적인 그들이 무언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나,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들은 예상 외로 신사적이었다. 물론 그것이 전부 연기라는 것을 영리한 나는 놓치지 않았다. 첫 방문을 헛수고로 끝내고 돌아오자 형은 앞으로 이 일을 계속 맡긴다고 하였다.

자신이 그렇게 두렵냐고 빈정대고 싶었다. 그러나 그걸 드러내지는 않았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고개를 숙여야 했다. 형은 중요한 일을 맡아줘서 고맙다고 했다. 웃기지마, 속으론 이런 내 꼴을 비웃고 있겠지. 하지만 곧,  있으면 그 자리가  것이 될 것이다.

속으로 분노를 삼킨 채, 사절단과 함께 생 산맥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발견했다.


나의 운명을.


갑자기 튀어나온 토끼가 번개 같이 날아온 화살에 머리를 맞고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아르만은 보았다. ‘요정’이었다.


투박한 옷을 입고 있는 아이였다. 10살쯤은 되었을까. 붉은 루비 같이 영롱한 산호색 눈에 금색 깃털이 엮인 듯이 내려앉은 머리칼의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울펜슈타인 후작 영애는 비교할 것도 못되었다. 아름다운 요정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요정은 곧 사라졌다. 붙잡을 새도 없이 빠르게 요정은 자신의 시야에서 몸을 감췄다. 그러나 발자국은 남아있었다. 발자국은 오크의 마을로 향해 있었다.


오크 마을에서 다시 찾은 ‘요정’은  얼굴을 보기 수줍어하는 듯, 오크의 뒤에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자신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이곳에 오게 된 것임을.

울펜슈타인? 지금 와서는 오히려 고마울 정도였다. 그런 여자 따위와 만나고 있었으면 결코  아이를 만나지 못하게 되었을 테니까.

요정의 이름은 투르라고 했다. 조금 투박한 이름이었다. 어째서 저런 아름다운 아이가 이런 곳에 있는 걸까. 진창에 박힌 다이아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기회였다. 자신이 백작이 될 수 있고, 더러운 오크를 쓸어버릴 수 있고, 요정을 얻을  있는 기회라고.

~


스승이 내게 고함쳤다. 오크를 모른다고? 알아야  필요가 있나? 저런 더럽고 야만적인 이들을? 그러나 그들이 나를 깔봤다는 얘기만큼은 흘려 넘길 수 없었다. 오크 따위가, 자신을 그렇게 봤다고? 가치조차 없는 애송이? 분노했지만 속으로 넘겼다. 그런 야만적인 이들을 상대해줄 필요는 없었다.

당장에 죽게 되면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는 것만큼은 맞았으니 태도를 달리 하긴 했다. 그러나 굳은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오늘만 참으면 됐다. 요정이 자신을 도와줄게 분명했으니까. 투르라는 이름은 확실히 조금 투박했다.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자고 생각했다. 훨씬 아름다운, 요정에 걸맞는 이름을. 그러나,

“네…. 아빠,”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아빠를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훈련은 내가 받고 싶어서 받는 거에요. …내 소중한 아빠에요.”

아냐, 그렇게 말하지 마. 거짓말 하지 마.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저런 말은 겁에 질려서, 협박에 당해서 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절대 저런 표정으로 말해서는 안 되었다. 안돼야 했다. 그러니까


“고마워요, 아빠….”

거짓말 하지 마.


모든 일이 끝나고 거대한 오크를 보았다. 아니,  시선에 비친 것은 오크 따위가 아니었다.  너머의 요정이었다.

~

아르만은 그 후 오크 마을에서 머무르는 마지막 밤까지 숙소에 박혀서 아예 나오지를 않았다.  봐도 상태가  좋아 보였지만 그의 스승은 그를 내버려두고 오크들의 환송 파티에 나갔다.

괜히 말을 걸어봐야 아르만의 성격 상 죽도 밥도  될 것이다. 가끔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스승은 이번 일을 통해서 그가 좀 성장하기를 바랐다.


물론 아르만은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지독한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평생을 자신이 틀렸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틀렸다고? 자신이? 종일 숙소에 틀어박혀서 생각하던 아르만은 마지막 밤이 되어서야 마음을 정했다.

다시 한 번 요정과 만나서 얘기해보자. 내가 틀리지 않았단 걸 증명하기 위해서.

마침 환송 파티로 시선이 쏠려 있었기 때문에 생하울라의 집 주변을 경계하던 오크들도 없었다. 그는 이미 예전에 생하울라의 집을 알아두었다. 오크들에게서는 애송이 취급 받았던 실력이지만  역시 나름대로 검술을 배웠고 재능 또한 있었다. 자신의 기척 또한 어느 정도 숨길 수 있었다.

아르만은 기척을 숨긴 채로 생하울라의 집 앞에 도착했다. 생하울라 역시 나간 듯 했다. 노크를 하기 전에 그는 우선 창문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순간 손으로 입을 막았다.


창문으로 보이는 방 안에는 요정이 알몸인 채로 있었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건 뜻밖의 횡재인 것일까? 그러나 곧 그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끔찍한 충격과 마주했다.

그건 요정이 아니었다. 요정일 리가 없었다. 그건 괴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했던 그 모든 일들은 뭐지? 자신이 생각했던 것은?


구역질이 치솟아 올랐다.


틀렸다. 자신이.

끔찍한 변화를 눈에 담은 충격과, 속았다는 배신감, 강렬한 혐오감이 몸을 지배했다. 어쩌면 내가 꿈을 꾼 것이 아닐까?

아르만은 황급히 숙소로 돌아가서 잠을 청했다. 자고 일어나면 이 끔찍한 악몽이 끝나기를 빌며.


아르만이 잠에서 깨어난 시간은 아침을 한참 넘어서였다. 그래, 분명 그건 악몽이었을 거야. 아르만은 숙소에 돌아온 한센에게서 출발이 좀 늦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간이 생겼다. 아르만은 자신의 칼을 들고 나갔다.

그리고 기다렸다. 오크의 집 앞에서, 그의 요정이 나오기를. 오래지 않은 시간 후에 문이 열렸다. 그러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르만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칼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벨투리안의 복부를 뚫고 들어갔다.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혐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벨투리안을 바라보며 아르만은 칼을 뽑아버렸다.

끝났다. 아르만이 혐오스러운 괴물을 죽였다. 자신을 속인, 거짓된 존재를 죽여 증명했다. 아르만은 벨투리안의 시체를 뒤로 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걸로 끝일 것이다.

“아…?”

그랬던 것 같았다.


아르만의 입에서 작은 단말마가 흘러나왔다. 자리를 벗어나던 그의 배를 거대한 검이 뚫고 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그의 요정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금발머리의 작은 소녀가 배에서 피를 흘린 채로 거대한 검을 들고 그의 배를 뚫은 것이다.


생각조차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아르만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 들어갔다. 죽기 직전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그의 요정이 아니었다. 원래 투르의 머리보다 더욱 길고 아름답게 자라난 그것은, 분명 새의 깃털이었다.

그의 요정은 인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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