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25/162)



〈 25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아악!!!”


투르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곰인형을 내팽겨 치고 절규했다. 그리고 곰인형에 얼굴을 파묻고 주먹으로 퍽퍽 치기 시작했다. 뒤따라 들어온 생하울라는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자네 연기에 소질이 있는 거 같구만! 누가 봐도 완벽했어, 하하하!”


“닥쳐, 죽인다.”

“하하하!”

하지만 투르는 전날처럼 솜뭉치를 들고 생하울라에게 달려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죽을 만큼 부끄러웠고 수치스러웠지만, 애초에 투르가 직접 선택한 행동이었다. 자신이 생하울라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민폐는 끼치지 않도록. 책임을 돌릴 생각은 없다.

물론 그건 그거고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였다. 투르는 곰인형에 얼굴을 파묻은  한참을 있었다.


정신을 차린 투르는 생하울라에게 캐물었다.

“너… 이 옷이랑 저 망할 곰인형. 미리 주문 해놓은 거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텐데. 곰인형은 그래, 자네 취미라고 하지. 그럼 이 치마는 대체 왜 주문한 거야?”


“그건….”


“저것도 자네 취미라고 해보게나.”


생하울라가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투르는 솜뭉치를 집어던졌고 이번만큼은 생하울라도 피하지 않았다.

투르가 어느 정도 진정하자 생하울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덕분에 걱정하던 일은 생기지 않을  같군. 자네가 먼저 나간 후에 안테른 남작과 잠깐 얘기해봤는데, 그 역시 협조해 준다는 군. 애송이 녀석의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이제 와서 무언가 할  있는 일은 없을 거야. 다만….”

“다만? 이렇게까지 했는데 단념하지 않았다고?”

“아니, 아닐세. 신경 쓰지 말게나. 그냥 노파심이니.”


생하울라는 말을 줄였다. 투르는 의문이 갔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투르에게는 중요한 얘기가 있었다.

“그럼 이제 다 끝났으니 놈들은 돌아가는 건가?”


“아니, 돌아가려면 닷새는 더 있어야 되네. 그들도  쉬어야 하고. 물자 배분에 대한 협상도 해야 하니까. 애송이 고집 때문에 일이 좀 미뤄졌거든.”


“놈 때매 별 고생을 다하게 되는 군.”


“뭐 당분간은 집에서 편하게 쉬도록 하게나. 훈련도  줄이도록 하지. 어차피 이 쪽으로는 못오게 해놨지만, 혹시라도 눈에 띄면 곤란하니.”

생하울라의 말대로 벨투리안은 인간이 있는 동안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집 안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투르의 모습일 때는 나가서 기초 훈련 정도는 했지만, 이전처럼 사냥을 나가거나 하지는 못했고, 벨투리안의 모습일 때는 아예  안에 박혀서 요리 연습 정도나 했을 뿐이다.


 곳에 오고 나서는 꽤나 활동적으로 움직였던 벨투리안이길래 상당히 좀이 쑤셨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벨투리안이 할  있는  생하울라가 억지로 넘겨준 곰인형과 눈싸움이나 하는 것 뿐이었다.

생하울라 역시 이번 사절단의 방문에 대해서 생카울레를 도와 여러 일을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을 자주 비워 더더욱 그러했다. 매일 밤 늦게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들어오는 걸 보면, 그것보다는 안테른 남작과 대작하느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둘이 같은 전쟁터에서 싸웠다고 그랬지.’

아르다루 전투. 그것은 안테른 남작이 소속한 볼타르 왕국과 그 옆에 위치한 간티아 제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생하울라가 얘기해 준 바에 따르면 볼타르 왕국의 인간과 오크들이 연합해서 간티아 제국의 침공을 막아낸 전투라고 하는데, 벨투리안은 간티아 제국이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삶을 살았기에 생소한 이야기였다.


오크와 인간이 힘을 합쳤다는 것 또한 그러했다. 듣기로는 그 간티아 제국이란 곳은 오크를 비롯한 인간이 아닌 자들을, 아니, 인간들 또한 노예로 쓰는 곳이라고 하는데 그 것이 오크와 인간이 연합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의 벨투리안에게는  얘기였다. 전투는 10년  과거의 것이었고 이제 와서는 생하울라의 술주정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내일 아침이면  날 이후로 닷새 째이다. 닷새가 되는  아침, 사절단은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자신은  어른의 모습으로 변할 테니 배웅은 못할 것이다. 물론 할 생각도 없었다. 생하울라는 투르가 아르만이 보기 거북해서 집에서 잘 안 나온다고 말해두었다고 한다. 이 지루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될 걸 생각하니 꽤 마음이 편했다. 자정이 다가왔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변화였다. 어린 투르의 모습이 어른 벨투리안의 것으로 변했다. 익숙한 고통도 이제는 버틸 만 했다. 벨투리안은 생하울라가 구해 준 어른 오크의 옷을 챙겨 입고 알몸에서 벗어났다. 오늘은 꽤나 기분이 좋았다. 일은  잘 풀리고 있었다. 인간들이 돌아가면 훈련도 재개하겠지. 그렇게 되면 그런 모습으로도 충분한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러고 나면?


순간 벨투리안에게 큰 혼란이 찾아왔다. 그러고 나면, 대체  해야 하지?

미뤄두었던 고민이었다. 자신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으러 간다. 말은 좋았다. 그러나 자신은 설산에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계속 내려가는 걸 망설이고 있었다. 이제 와서 달라진 게 있나?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벨투리안은 여전히 미아였다.


순간 이 마을에서 계속해서 살아가는 건 어떤가 생각해버렸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진짜 어린 여자애가 아니었다.

생하울라가 자신을 도와주는 건 내가 전사가 되는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서리 갈기 부족이 자신을 받아 준  단순히 멸망한 동맹의 생존자여서가 아니었다. 그 또한 이유에 있겠지만, 내가 전사로서의 힘을 빼앗긴 것을 동정해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현재 상황에 안주하는 순간 그들은 자신을 버릴 것이었다. 그들은 오크. 전사이지 보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생각을 끝내자 지독한 자기 혐오가 몰려왔다. 오랜만에 품은 온기에 썩어버린 것일까. 일족이 모두 죽었는데 이런 생활에 안주하고 있던 자신이 역겨웠다. 어린 몸이 되면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어? 단순히, 이 즐거움에 눈이 가려졌을 뿐이다. 그냥 행복했을 뿐이었다. 자신은 그래서는 안되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벨투리안은 뒤척이며 잠에 들었다. 자면서도 고민은 끊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나, 자신은. 그는 산에서의 길 찾기에 자신 있었다. 하지만 산을 내려오면 그곳은 미궁이었다.


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


벨투리안은 드물게도 늦잠을 자버렸다. 해는 벌써 중천에 떠있었다. 점심 직전 즈음 되어 보였다. 생하울라는 보이지 않았다. 늦은 아침이라도 해먹을까 싶었지만, 생하울라도 없고 그 또한 입맛이 없었기에 그만두었다.


지금쯤이면 인간들도 모두 갔겠지, 그렇게 생각한 벨투리안은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잠을 설쳐서인지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몸이라도 풀어야 했다. 벨투리안이 솜뭉치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밖에는 아르만 루드빅이 서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벨투리안이 제대로 정신도 차리지 못한 상태였기에, 하필이면 잠을 설쳐서, 하필이면 마음이 어지러워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일이었다.

아니, 변명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자신이 이 일상에 파묻혔기에 당하게 된 것이었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 날 이 소년을 처음 만난 날 느꼈던 토끼의 기척보다도 더 크고 어설펐다. 그냥 무뎌진 거였다.


 자신이.


아르만의 칼날이 벨투리안의 배를 관통해있었다. 아르만의 눈빛에는 증오와 배신감, 그리고 뭐라 말하기 힘든 온갖 질척한 감정이 흘러나왔다. 아르만은 그대로 칼을 뽑아버렸다. 벨투리안의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이렇게 허무하게?

우습게도 되려 마음이 편해졌다. 용의 저주를 받아 그런 비참한 모습이 되고, 비참한 자신이 따뜻한 일상에 파묻혀 이렇게 끝나는 건가?

거창한 시작과는 다르게 지나치게 허무한 끝이었다, 이것은.

나를 죽이는 것은 오만하고 정신 나간 별 볼일 없는 소년이었다. 전설에서나 등장하는 검은 용 따위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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