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24/162)



〈 24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엣취!”

투르가 별안간 재채기를 했다.

“날씨가  추운가? 재채기라니.”


“아니, 날씨는 따뜻한데 갑자기 코가 근질거렸네.”


투르와 생하울라가 생카울레의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투르는 이전과 같이 몸 전체를 가리는 후드를 쓰고 있었다.


“어허, 밖에 나와있을 땐, 제대로‘연기’하기로 했잖은가.”

“읏…. 그냥 코가 간지러웠어요….”

“‘아빠’.”


“아빠….”


후드로 가려져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투르의 표정은 이미 굴욕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화내지 않는다…. 나는 어른이다…. 어른, 어른, 어른. 나는 애가 아니다….“

벨투리안은 필사적으로 되뇌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지금 ‘투르’였다. 화가 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결국 투르는 생하울라의 다리를 걷어찼다. 물론 생하울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먼저 들어가 있게나. 나는 잠시 어디 좀 갔다 올 테니.”

“네, 알았어요. …아빠.”

생카울레의 집에 들어서자 반겨주는  생카울레의 아내인 생쿠룰라였다. 그녀는 지금 투르가 평소에 입는 옷들을 챙겨준 이로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 왔군요. 벨투리안.”

“지금은 투르라고 불러주세요.  모습일 때, 그 이름은 쓰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렇구나, 그럼 투르 양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어요. 얘기는 저도 대충 들었으니까요.”


생쿠룰라는 투르가 알기로는 서리 갈기 부족에서 가장 나긋나긋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오크답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온화하며 요리솜씨도 생하울라만큼이나 뛰어났다. 물론 그녀 역시 오크임은 분명했는데, 듣기로는 생쿠룰라가 생카울레와 결혼하게  것은 직접 생카울레를 전투에서 이기고 한 청혼을 생카울레가 받아들여서 한 것이라고.

“아직 아침은 안 먹었죠? 안쪽에 애플파이를 구워놨으니 좀 먹고 있으세요.”


“늘 감사합니다. 생쿠룰라.”

“혹시라도  일을 걱정하고 있다면 너무 신경쓰지 않도록 해요. 만약 상대가 억지로 데려가려고 한다면 제가 직접 놈들의 목을 쳐줄테니까요.”

투르는 살짝 미소 지으며 적당히 그 말을 넘겼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일이 파토나면 아마 그녀는 직접 검을 들고 전장에 나설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모든 오크에게도 해당되는 일임을 알기 때문에 투르는  꼴사나운 모습을 하게 된 것이었다.


투르는 생쿠룰라의 안내에 따라 식탁에 앉아 파이를 먹게 되었다. 파이라는 음식을 투르는 난생 처음 들어봤지만, 딱히 편식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아마도 먹는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생쿠룰라는 친절하게도 파이를 한 조각 잘라서 투르에게 주었다. 만약 그래주지 않았더라면 투르는 저 큰 파이를 통째로 포크로 퍼먹어야 하나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투르는 파이를 한입 먹었다.


달았다.

많이 달았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벨투리안은 평생에 있어 단 음식을 거의 먹은 적이 없었다. 단 과일 같은 것이야 먹어보긴 했지만 딱히 단 맛을 좋아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애플파이란 것의 단 맛은 과일보다 더했다. 엄청나게 달았다. 문제는 투르에게 이 단 맛이 결코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엄청나게 맛있었다.

투르는 난생 처음 맛보는 단 맛의 폭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투르는 파이 한 조각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반대편에서 같이 파이를 먹고 있던 생쿠룰라는 그걸 보고 말했다.


“더 줄까요?”

꿀꺽.


투르는 굴복했다. 고개를 끄덕인 투르에게 생쿠룰라가 한 조각, 아니  조각을 잘라서 투르에게 덜어줬다.


“아, 입에 파이가 묻었어요.”

흠칫.

투르는 바로 소매로 입을 닦았다. 정말이었다. 투르의 얼굴이 다시 새빨개졌다.


“…감사합니다.”


투르는 다시 파이를 먹어치웠다. 그래도 이번에는 입에 묻지 않도록 조심조심해서 먹었다.

~

그 시각 아르만과 안테른 자작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좀 더 예의를 차리란 말이다!”


“오크를 상대로요? 그들이 예의란  알긴 합니까?”


“너는 예의란 걸 아냐? 네가 할 말이야, 그게? 너는 겪어보지 못해서 그러는 거야. 너는 진짜 어제 잘못했으면 목이 날라갈 뻔 했어. 생하울라님이나 족장님이 아니었다면 백퍼센트 죽었어.”

“그걸 아니까 그런 겁니다.”


“뭐?”

“적어도 그들은 이 협상이 결렬된다고 하더라도  죽일 수 없어요. 제가 죽지 않고 돌아가서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면 그들은 기회가 생깁니다. 투르는 납치한 게 아니라는 주장을 왕국에 전하면 아마 아예 전쟁을 막을 수도 있겠죠. 설사 전쟁을 막더라도 먼저 공격 당한 것이니까 명분도 생깁니다. 하지만 저를 죽인다면?”


“전쟁은 막을  없겠지. 그들이 먼저 시작한 거니까. 하지만….”

“바로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절 죽일 수 없어요. 그들은 현명하니까요.”


아르만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분명히  주장에 모순은 없었다. 그러나,

“너는 오크를 몰라.”


“네?”


“오크, 명예로운 전사의 종족. 무기를 잡기 위해 태어나고 죽기 위해서 살아가는 야만인들. 그들은 네가 어제의 경고를 따르지 않는다면 망설임 없이 네 목을  거다. 왜냐고? 그들은 결코 전쟁을 피하지 않으니까!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부족 전원의 목숨을 기꺼이 판돈으로 올릴거야. 우리가 먼저건, 그들이 먼저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전쟁이 벌어진다면  한 명, 마지막 단 한 명조차 남지 않을 때까지 그들은 무기를 들고 싸울거다. 그들은 그런 종족이다! 네가 어제 죽지 않은 건,  얄팍한 생각이 맞아들어서가 아니야! 단순히 무기를  가치조차 없는 애송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준 것 뿐이다!”

“….”


아르만은 그의 말을 듣고 침묵했다. 그러나  얼굴은 놀라서 라기 보다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알겠으면 오늘은 제발 예의 바르게 굴어라. 애초에 전쟁 같은 건 일어나지도 않을거야.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전쟁은 애들 장난이 아니야. 나는 전쟁을 막을 거다.”

“그 말은, 스승님이 그들의 편을 들거란 얘기인가요?”


“설사  말이 맞아 떨어져  아이가 납치된거라고 해도, 나는  주장의 동의하지 않을거다. 아이 하나를 구하자고 전쟁을 벌일 수는 없어. 만약, 네 말이 틀려서 그 아이가 자신의 의지로 있는 거라면 당연히 나는 그렇게 증언할거다.”

“당신은 비겁자입니다.”

“너처럼 미치진 않았어.”

“그리고….”

“그리고?”


“나는 애송이가 아닙니다.”

“후우….”


아르만의 분노에 가득찬 얼굴을 보고 안테른 자작은 깊게 한숨을 셨다.


~


이건 뭔가?

‘이건 뭔가요, 아빠.’


…이건 뭔가요, 아빠.

열어보게나.

….

이번에  소품일세.

그 말은 즉….


…잘 부탁하네.

~


생하울라와 투르가 원탁의 한쪽 편에, 아르만과 안테른이 그 반대쪽에, 그리고 생카울레가 위쪽에 앉았다.

“그럼 다시 얘기해볼까.”

“이쪽에서 먼저 투르… 아니, 그 아이에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르만은 어제와는 다르게 확실히 바른 태도로 대화에 임했다. 비록 어제보다는 힘없는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물어봐도 괜찮겠니?”


생하울라는 자상한 목소리로 투르에게 말을 건넸다. 투르는 속이 뒤집힐거 같았지만 참고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다.

“네…. 아빠.”

투르의 대답을 들은 아르만의 얼굴이 굳어졌다. 안테른 살짝 한숨을 셨다.


“투르양… 당신은 슈라헤라는 일족의 일원이었던 것이 맞습니까.”


“아니오.”


아르만의 눈이 살짝 빛났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대답에 눈은 다시 그 빛을 잃었다.


“혼혈은 슈라헤가  수 없어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추방자였어요.”

반쯤은 사실이었다. 얘기를 들은 안테른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힘들었겠구나.”

이렇게 어린 아이가 스스로를 그렇게 표현할 정도라면, 어쩌면 학대를 받은 걸지도 모른다. 아까는 분명 아이 하나 정도는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그지만 연민을 느끼는 건 어쩔  없었다.

“그럼… 일족이 멸망해서 혼자 남았다는 건 사실인가요?”


“…네.”


안테른은 아르만의 입을 닥치게 하고 싶었다. 10살짜리 아이에게 해도  그런 질문을 해야 하는 걸까. 그렇지만 필요한 질문이란 건 맞았기 때문에 어쩔  없었다.

“슈라헤 일족의 피부가 하얀 편이었다는 것 사실인가요?”

“저보다는 덜 하얬어요.”

“그럼… 저 오크를 따라 여기 오게 된  본인의 의지입니까?”

“네.”

“정말입니까?”


“네.”

“혹시나  모든 대답이 저 오크가 강요해서 하는 대답은 아닙니까?”

“아르만!”


안테른이 호통쳤다. 그러나 아르만은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만약 강요해서 시킨 대답이라면 부디 말해주십시오.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크가 무슨 협박이나 폭력을 했다면 말씀해주세요. 혹시 오크에게서 하고 싶지 않은 훈련 같은 걸 강요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빠를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투르는 이번만큼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훈련은 내가 받고 싶어서 받는 거에요. …내 소중한 아빠에요.”

투르의 얼굴이 다시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생하울라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투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줬다.

“…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을 하죠.”


“더 애기할 게 있냐?”


안테른은 다 끝났다는 표정으로 빈정거렸다. 아르만의 표정이 분노로 가득찼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투르양…. 아실지 모르겠지만 오크는 인간과 많이 다릅니다. 오크의 마을에서 살게 된다면 여러 가지로 커가는데 부족한게 많을 겁니다. 인간과는 생활 방식도 생각도 전부 다릅니다. 만약 저를 따라와 주신다고 해주시면 부족함 없는 지원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올바른 인간의 방식으로 키워드릴 수 있습니다. 어떠신가요?”

“이봐, 적당히 하지 그래.”

생하울라가 끼어들었다.

“오크의 마을에서 제대로 된 옷이라도 구할 수 있습니까? 여자는 커가면서 필요한게 많습니다. 그런건 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하, 어제도 비슷한 말을 했던가? 그거라면 간단한 방법이 있지 않은가?”

“뭐죠?”


생하울라가 손수 투르가 걸친 후드의 매듭을 풀어주었다. 후드를 벗자 투르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건….”

투르가 입고 있는 옷은, 간단하게 말해서 어린 여자아이들이 입을 법한 튜닉과 치마였다. 질긴 가죽에 빨간 색깔의 천을 덧대어서 따뜻하면서도 보기 좋은 옷이었다.


“나가면 자네 부하들에게 물어보게나. 이번 물자에 따로 추가된 것은 없었는지. 나는 저번에 이미 투르를 위한  같은 것들을 구매하기 위해 당신네들에게 연락했다네.”

안테른 자작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가 이 사절단의 책임자이긴 하지만 그쪽의 관리는 따로 상인들이 하고 있었고, 그런 사소한 물품 추가는 보통 그에게까지 올라오지 않았다.


“으윽….”


아르만이 짧게 신음했다.


“또 한가지 따로 주문한게 있지, 그리고.”

“뭔가요?”


안테른 자작이 반문했다. 생하울라는 그대로 원탁 옆에 놔두었던 상자를 투르에게 건네줬다.

“열어보렴.”

투르는 조잡하게 포장된 포장지를 뜯고 상자를 열어보았다. 거기에서 튀어나온 건, 투르의 몸만한 곰인형이었다.


“선물이란다.”

“와….”


투르는 마치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곰인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곰인형을 꼭 껴안았다. 훈훈한 그 장면에 안테른 자작은 미소를 지었고, 아르만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생카울레는 살짝 무언가를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본래 이런 상황에서 주고 싶은  아니었지만, 투르가 밤에 잠을 잘못자는 것 같아서 같이 주문했다오.”

쑥쓰러워하며 말하는 생하울라에게 별안간 투르가 안겨들어왔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며 투르가 말했다. 작지만 모두에게 들릴만한 목소리였다.


“고마워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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