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3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23/162)


  • 〈 23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자네 왔는가? 일은 어떻게 되었나?”


    집에 돌아온 생하울라를 반긴  그의 말대로 요리를 하고 있는 벨투리안이었다. 벨투리안은 최근 꽤나 요리에 재미를 붙인 건지 혼자 있을 때면 생하울라를 대신해 이것저것 만들어 보곤 했다.


    “흠, 냄새가 좋군. 이건 어제 남은 고기를 구운 건가?”

    “자네가 만든 소스에 재어서 한번 해봤다네. 어떤가?”


    “괜찮은데, 양념이 살짝 덜 배인 거 같군. 그래도 꽤 먹을 만한데, 벌써 요리에 익숙해진 거 아닌가?”

    “단순히 구워 먹는 건 예전부터 해온 일이야. 그냥 양념을 쓰는 방법을 알았을 뿐이지. 남은  좀  기다려야겠군.”

    “그렇게 하다 보면 느는 걸세 요리는.”

    “그나저나 일은?  돌리는  보니 별로 상황이 안 좋았나?”


    생하울라가  익은 고기를  점 입에 집어넣어 질겅질겅 씹었다.‘덜 익었어, 그거.’벨투리안의 지적을 무시하고 생하울라가 말했다.


    “그래, 예상 외로 더 미친놈이었어.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만, 준비해간 얘기는 전부 안 통하더군. 생각보다 더 똑똑해. 뭣보다 자네한테 아주 홀딱 반한 모양이던데.”

    벨투리안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찡그러졌다.


    “쓰레기 같은 놈이군.”

    “어제만큼 화내지는 않는군?”

    생하울라의 지적에 벨투리안이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어제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작은 벨투리안은 좀 더 신경질적이고 화를  내는 면이 있었다.

    “…그때는 감정에 좀  취약한  같아.”


    “자네도 생각하고 있었나.”

    “내 감정인데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있겠나.”


    본래 벨투리안에게 감정이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았다.

    그가 혼자 지내게 된 시간은 10년, 그런 긴 시간 동안 벨투리안에게 교류라는 것은, 자신의 친구였던 유리히 뿐이었다. 이미 족장 대리의 일을 시작한 그는 가끔씩 자신을 찾아왔고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또 다른 친구는 자신을 배신하고 사라졌지만, 유리히는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그 또한 더 이상은  수 없지만.


    유리히 덕분에 벨투리안의 감정이 죽어 없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서서히, 설산의 추위처럼 고요하게 굳어갔을 뿐이었다. 호수에는 어떠한 큰 돌이 던져져도 파문조차 일으킬 수 없을  같았다.


    그런 그가 어린 아이가 되면 호수는 마치 뜨거운 햇살에 마주한 것처럼 일렁거렸다. 마음이 어려진 걸까. 작은 농담에도 쉽게 웃을 수 있었다. 가벼운 괴롭힘에 화가 나고 얼굴이 빨개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모든 변화가 가장 두려운 것은, 이런 감정들이 즐거웠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되는 것만 같았다.


    “어려지게 되면 작은 감정이 마치 눈사태처럼 몰아쳐오네. 쉽게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고 진짜 어린아이가  것처럼 느껴져. 변한 내가 과연 내가 맞는 걸까? 몸의 얘기가 아니야. 좀 더 뭔가 근본적인 문제 같아.”

    “자신의 마음을 좀  강하게 붙잡고 있게나. 휩쓸려가지 않도록. 자네가 그렇게 변한다고 해서 자네가 자네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생하울라는 단언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솔직히 말해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클 때나 작을 때나. 똑같이 어린애일세.”


    “내가? 하하. 지금은 그런 농담에도 크게 화가 나지 않는 걸.”


    그렇지만 벨투리안은 정말로 즐겁다는 듯 웃었다. 유쾌한 기분이었다.


    “거 보게나. 적어도 지금 자네는 웃고 있지 않는가?  농담이 조금 빛을 보는 군 그래.”


    “그런  하기엔 평소 자네 농담이 너무 짓궂지 않은가?”

    “늙은이의 작은 즐거움을 뺏어갈 생각인가?”


    “어린애 놀리는 게 즐거움이라면 자네도 참 골방 늙은이가 따로 없구만.”

    두 사람이 누가 뭐라  것도 없이  소리로 웃었다. 둘의 웃음소리가 그치자 생하울라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내일은 자네도 나와야 할 것 같네. 이걸 간단하게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닌데…. 자네한테 말하기 조금 곤란하구만, 솔직히.”

    “그런 방법이 있는데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나? 뭔지 말해보게.”

    “사실 방금 생각난 데다가 자네가 아마 극심하게 싫어할 일이라서 말이야.”

    “…?”

    “일단 밥이나 마저 먹지.”


    벨투리안은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대답을 캐묻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어른이었고, 아이처럼 기다림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식사가 끝난 후 그가 들은 얘기는 벨투리안이 어른이라고 참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

    벨투리안의 몸에서 뜨거운 열이 흘러나왔다. 고통은 이전보다 확연히 줄어들었다. 적어도 끔찍한 고통을 주었던  변화의 날에 비하면 버틸 수 있을 정도였다. 변화가 끝나자 어린 벨투리안, 투르의 나신이 드러났다.


    산호색의 붉은 눈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고 어깨 살짝 위까지 내려온 깃털 같은 금발머리 역시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이의 몸이기에 색기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습은 마치 아기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표정은 아기 천사의 것과는 많이 큰 차이가 있었다. 평소 항상 입던 어린 오크의 전통복을 입으며 투르는 확연히 화가 난, 그리고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망할 오크, 빌어먹을 늙은이, 멍청한 새대가리….”

    그리고 욕은  사람에게만 향하는 게 아니었다.


    “쓰레기 같은 소아성애자 새끼, 빌어쳐먹을 개새끼….”


    어휘력이 부족한 투르에게는 아마도 가장 심한 욕이었을 것을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퍼붓고 있었다. 물론  누군가는 자기를 이 지경에 빠트린 아르만 루드빅이었다. 당연하지만 망할 오크는 생하울라였고. 아직 옷가지를 다 챙겨 입지 못했는데 문이 열리며 생하울라가 물었다.


    “다 입었나?”


    “나가!”


    투르는 망설임 없이 아직 남은 옷가지를 문을 향해 집어던졌다. 물론 생하울라는 옷가지가 닿기도 전에 ‘미안하네~!’ 하며 문을 닫아버렸다.

    투르의 모습이 되면 분명 감정 조절이 어려워지는 건 맞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생하울라의 밥을 먹고 자신에게 한 제안 때문이었다. 시종일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도무지 가라앉지를 않았다. 옷을 모두 갈아입은 투르가 문을 열고 나섰다.


    “다 입었어.”

    “그래, 뭐… 괜찮은가?”


    “제발   좀 닥쳐주게. 지금 당장 자네 입 속에 솜뭉치를 쑤셔 넣고 싶으니까.”

    물론 투르가 말하는 솜뭉치는 그 외모에 어울리는 귀여운 솜 덩어리가 아니라 거대한 검의 이름이었다. 생하울라가 어색한 얼굴로 물었다.

    “연습… 할 수 있겠나?”

    그래, 해야 할 것이 왔다. 해야 한다. 투르는 적어도 자신을 받아준  오크들을 배신하고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그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생하울라가 얘기한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것이었다. 정말 죽도록 하고 싶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투르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었다. 심호흡을 하고 숨을 골랐다. 다시  한번 숨을 내쉬고 들이마셨다. 그리고  단어를 입에 담았다.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지금 내뱉는 말은 결코 투르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빠.”


    “푸하하하하하하!!!”


    “야 이시발롬아!”


    벨투리안, 인생의 최전방에서 평생 들었던 것 중 가장  욕설을 처음 사용했다. 그 대상은 그의 새로운 친구였고.


    ~

    “망할, 진짜 죽여 버릴 거야. 내가 언젠가 널 꼭 죽여 버릴 거라고.”


    “그래그래, 내 딸아. 어서 커서 이 아빠를 물리쳐주렴.”

    “진짜!! 죽인다!!”


    생하울라의 제안은 간단했다. 아르만과 안테른의 앞에서 확실하게 서로의 애정 어린 모습을 보여준다면 아르만이 아무리 우기려고 해도 그럴  없게 된다. 안테른 남작이라는 확실한 증인이 생길 테니 선동을 해도 막을  있다. 그렇기 위해서 우선 호칭부터 변경하기로 한 것이다. 가장 알기 쉽고 보여주기 쉬운 것이었다.

    “호칭.”


    “…아빠.”

     뒤로도 둘은 여러 가지 행동을 연습했다. 사실 그다지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전 날 자연스럽게 행했던 생하울라의 뒤에 숨는거나 서로 껴안는 정도의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했던 그 날의 행동과는 다르게 수치스러움이 다분히 느껴졌다.


    “이 정도면 충분하네. 자네는 뭐 조용히 입 닫고 낯가리는 아이 연기만 잘해주면 되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자네가 알아서 한다는 말 믿고 보냈다가 이 꼴을 하게 됐는데 자넬 믿으라고?”

    “걱정 말게 이번에는 확실한 계책이 있으니….”


    “…미리 말해봐.”

    투르는 그가 못미더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제안을 한 다음에 생각해낼 계책이라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생하울라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실은 자네 준비하는 동안 잠깐 어디 다녀왔네.”

    “어디를?”


    “옷을 좀… 가지러.”


    “옷?”

    “여자아이 옷.”

    투르는,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조용하게, 그리고 아무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투르의 검, 솜뭉치가 놓여있었다. 투르가 검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곧장 생하울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죽어죽어!”


    “야, 무게 늘리지 말게! 집 무너져 집!”


    연기하기로 한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둘의 모습은 이미 충분히 친근해보였다. 그 누구도 결코 이 모습을 보고 납치라는 헛소리를 꺼낼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단 하나, 그것이 상대에게는 결코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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