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믿을 수가 없다고?”
생하울라가 흥미롭다는 듯 반문했다.
“근본적으로 당신의 말에는 아무런 증거도 없습니다. 지나치게 딱 맞아 떨어져서 오히려 의문이 드는 군요. 마치 준비된 대본처럼 말이에요. 혼혈이라는 얘기 역시 의심스럽습니다. 혼혈이라면서 산 속 민족들의 특징은 아예 없고 어머니의 외모만을 물려받았다고요?”
“자네는 아까부터 그걸 붙잡고 늘어지는군. 그러나 딱 맞아 떨어진다는 건 역시 내 말에서 틀린 점은 찾아볼 수 없단 얘기 아닌가? 무엇보다 자네는 슈라헤 일족의 생김새를 본 적이 없지 않나?”
“...그렇습니다.”
“자네가 말한 산 속 민족의 특징 또한 틀린 것은 없지만, 슈라헤 일족은 그거보다 훨씬 더 하얀피부를 가지고 있는 편이라네. 그러니 저렇게 깔끔하고 하얀 피부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지.”
“크읏, 그렇지만 그 일족은 전부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말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죠?”
아르만의 지적은 타당했다. 그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슈라헤 일족의 피부가 하얗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들 모두가 죽어 없어졌기에 할 수 있는 거짓말이었다.
“서리 갈기 부족의 모두가 증언해줄 수 있다.”
“그들은 모두 당신의 편이 아닙니까. 오크의 증언은 믿을 수 없습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는 안테른 남작은 혼이 빠질 것만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제자가 반쯤 미친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만의 지적은 확실히 타당했기 때문에 자신조차 이제는 누구의 말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자네는 내 말을 애초부터 거짓이라고 판단하고 말하는 군. 그렇다면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은가?”
“오크가 인간의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데, 그 어떤 인간일지라도 이렇게 반응할 겁니다. 오크를 어떻게 믿고 아이를 맡길 수 있죠?”
“지금 오크를 모욕하는 건가?”
“하지만 당신이 투르에게 한 일을 생각해보시죠. 재능이 있다고 아이에게, 그것도 여자아이에게 검이나 활 같은 걸 가르친다고요? 아이는 오크가 아닙니다! 그런 전투술을 배워야 할 나이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벨투리안의 현재 모습은 10살쯤 되어 보이는어린 모습이었다. 남자아이라면 모를까, 그런 어린 여자아이에게 전투술을 가르치는 건 일반적인 상식이라면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웃기는 이야기군. 슈라헤의 일족은 남녀 가리지 않고 5살부터 전투술을 배우기 시작한다. 투르는 오히려 늦게 시작한 편이야.”
“설사 그게 그 일족의 전통이라고 할지라도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가르치지 않는 게 옳습니다. 당신은 투르의 의사를 물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애초에 투르가 원해서 시작한 일이라는 걸 생각하지는 못했나 보군.”
“당신은 오크입니다. 오크가 시키는 일이 무서워서 따른다거나, 버려질까봐 걱정되어 하는 일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장담할 수 있다.”
생하울라는 단언했다.
“애초에 따라오지 않겠다고 한 아이였다. 투르가 날 따라오기로 결심한 건 스스로 살 수 있는 힘을 가르쳐준다는 말을 들어서였으니까.”
그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간단하군요. 그런 전투술은 인간에게도 배울 수 있습니다. 저희가 데려가서 가르쳐주면 해결되는 일입니다.”
“방금 전까지 아이에게 그런 걸 가르치는 일은 옳지 않다고 하지 않았나?”
“아이의 자유의지는 존중해야 하는 법입니다.”
“뻔뻔하군. 그렇다면 투르가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떡할 것이지?”
“오크의 위협을 받고 하는 아이의 말은 증언으로 채택할 수 없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 군.”
서로의 대화가 평행선을 달리기 시작하자 생카울레가 둘의 대화를 끊고 중재를 시도했다.
“더 이상 이야기의 전진이 없는 것 같군. 일단 오늘의 얘기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지. 내일 투르를 데리고 다시 이야기해보는 건 어떻겠나?”
생카울레가 나선 이상 아르만도 더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생하울라와 아르만 모두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남작.”
“네, 넷. 족장님.”
“자네의 얼굴을 봐서라도 오늘의 무례는 넘어가주겠네. 하지만 내일도 오크에 대한 모욕을 계속한다면 더 이상의 거래는 없을 걸세. 만약 태도의 변화가 없다면....”
“없다면...요?”
“영지로 돌아가 전쟁을 준비하게나.”
안테른 남작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대답했다.
“당치도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제자의 무례는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반드시 저 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오겠습니다.”
“우리가 서리 갈기라는 것에 감사하게나. 강철 부리나 매 발톱이었다면 이미 자네들의 목이 날아갔을 테니.”
남작의 얼굴은 순간 공포로 물들었다. 결코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르다루 전투에서 만난 오크는 생하울라 뿐이 아니었다. 생하울라는 신사적인 오크였다. 그러나 다른 오크들은 대개 야만적이고 대단히 오만한 자들이었다. 처음 서리 갈기 부족과 만나고 그들이 신사적임에 얼마나 안심했던가! 그러나그들 또한 오크임을 명심해야 했다.
그러나 아르만은 끝까지 고개를 굽히지 않았다.
“가기 전에 한 마디만 하도록 하지.”
“뭐죠?”
“멋대로 투르를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투르는 너 따위에게 이름을 허락한 적이 없으니.”
아르만과 안테른 남작이 생카울레의 집에서 나가자 생하울라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거 생각보다 똑똑한 놈이군. 생각보다 더 멍청하고.”
“나 역시 오크에 대한 모욕을 더 들어줄 생각은 없습니다. 부족의 손님을 내칠 생각 또한 없으니, 정말 상황이 안 좋아진다면 전쟁을 준비해야겠죠.”
“골치아픈 건 놈에게도 정말로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요. 백작가의 차남이라고 했던가? 그 놈이 오크가 무고한 아이를 납치하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퍼트린다면 명분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아.”
“그쪽에서 먼저? 쉽지 않을 텐데요.”
“그래, 쉽지 않지.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오크가 인간에게 받는 취급은 몬스터나 마찬가지요. 작정하고 선동을 하면서 야만적인 오크들이 인간의 아이를 납치하고 있다고 소문내면 왕국의 지원을 요청하면, 알 수 없는 일이오. 아르다루 전투 이후로 왕국 내에서도 오크와의 교전을 멈춘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이들이 있고, 꼬투리가 잡힌다면 그들이 놈의 요청을 받아들일지도 모르는 것이오.”
“생각보다 일이 커지는 군요.벨투리안, 그는 지금 어떻게 보내고 있죠?”
“오늘은 어른의 모습이니 집 안에서 조용히 요리나 하고 있겠군. 어른 모습일 때는 침착한데, 어린 아이일 때는 조금 떽떽거리곤 하오.”
“정신이 몸을 따라가고 있군요.”
“뭐 나로서는 어린 쪽의 모습이 반응이 좀 더 재밌지만 말이야.”
“내일 그가 해답을 주면 좋겠군요.”
~
아르만과 안테른이 생카울레의 집에서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르만의 시종 한센이 말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그 오크들이 무언가 해코지는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해코지고 나발이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네, 네? 왜 화내십니까, 남작님.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이멍청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단 말이야!”
한센의 얼굴이 경악으로 달아올랐다.
“저, 전쟁이라굽쇼? 도련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당황할거 없어. 예상한 바야.”
“예상했다고? 너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냐?”
아르만은 안테른의 호통에도 되려 당당하게 말했다.
“어린 아이가 오크에게 고통 받고 있는데 그것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면, 세간의 사람들이 저희 루드빅 백작가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오크와 거래하기 위해 그들의 악행을 방관하는 천하의 비겁자라고 생각할 게 분명합니다.”
“말은 번드러지네! 만약 생하울라님의 말이 정말 맞으면 어쩌려고!”
“제가 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말에는 증거가 없습니다. 애초에 오크가 인간의 아이를 기른다니. 금시초문입니다. 인륜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투르를 구출해야 합니다.”
“너 말 잘했다. 인륜이라고? 너 시발 그냥 그 애한테 완전 홀딱 반해서 지금 이 지랄하고 있는 거 아니냐! 요정이라고 지랄 할 때부터 알아봤다. 내가 미쳐, 저번에는 개소리 안하고 잘 있어서 안심했더니, 왜 하필 생하울라님 있을 때 이런 미친 짓을….”
결국 화가 폭발한 남작의 입에서 비속어가 쏟아져 나왔다. 본래 전쟁터를 전전하던 평민 출신의 기사였던 그에게는 되려 익숙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아르만은 뻔뻔하게 나왔다.
“그럼 안 됩니까?”
“미! 친! 새끼야! 그 애 잘 봐줘도 10살이야! 너는 16살이고! 이 소아성애자 새끼야!”
“귀족 사회에서는 6살 차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돌아가면 내가 항명을 해서라도 보직 변경할거야. 내가 너랑 있다가는 절대 제 명줄에 못 죽어.”
둘의 말다툼 속에서 아르만의 시종인 한센은 그저겁먹은 채로 중얼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 전쟁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그럼 여기 있는 우리가 제일 먼저 죽을 텐데…. 으, 으. 아이고, 내가 미쳤다고 도련님을 따라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