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0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20/162)


  • 〈 20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벨투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했다는 게  올바른 말이었다. 토끼에 집중하느라 느꼈던 인기척을 무시해버린 게 잘못이었다. 벨투리안은 그대로 토끼를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친 것이다.


    “잠깐….”

    소년은 그런 벨투리안을 불러 세웠지만 벨투리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계속 도망쳤다. 엄청난 속도로 사라진 벨투리안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에는 명백한 당황과 홍조만이 남아있었다.


    “도련님! 혼자 좀 멀리 떨어지지 마십시오! 여긴 야만스러운 오크의 땅이라고요.”

    굳은 채로 가만히 서있는 소년에게 그의 시종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다가오면서 소리쳤다.

    “대체 이런 설산에 뭐 볼 곳이 있다고 이렇게 나돌아 다니는 겁니까. 위험하다고요.”


    “한센….”

    “네?”

    “나, 요정을 봤어.”

    한센이라 불린 시종의 얼굴이 살짝 미친 놈 바라보는 듯 시선을 바꿨다.

    “도련님, 아무래도 감기라도 걸리신 거 같은데. 어서 돌아가서 좀 따뜻한 차라도 한잔 하셔야겠어요.”

    “진짜라니까.”


    “네, 네, 그러믄요.”


    “진짜라고.”

    “그래요. 알겠습니다요.”

    “나처럼 금발머리에 새빨간 눈이었어….”


    “중증이네. 이거.”


    ~


    “헉, 헉.”

    무심코 집까지 완전히 도망쳐온 벨투리안이 거센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고른 벨투리안에게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도망쳤지?’

    기실 타당한 의문이었다. 벨투리안은 죄인도 아니었고  소년이 자신을 위협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순간적인 당황함에 그대로 도망쳐버렸다. 어째서일까.


    “음? 자네 왔나. 오, 오늘은 토끼로군! 저녁 식단이 풍성해지겠어…. 근데 자네 왜그렇게 얼굴이 빨간가?”

    “…마주쳤네, 사람이랑.”


    “뭐? 사절단이 벌써 왔다고?”

    “사절단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랑 같은 금발머리에 나보다  키가  소년이었네.”


    벨투리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생하울라님 계십니까?”

    “음, 들어오게.”

    생하울라의 허락이 떨어지자 한 명의 오크가 들어왔다. 그는 벨투리안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대신하고 생하울라에게 자신이 온 용건을 전했다.

    “네,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인간들의 사절단이 곧 도착할 예정이란 소식을 들어서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족장님께서 인사를 위해 생하울라님을 불러오라고.”

    “일부러 전해주러 와서 고맙네. 먼저 가있겠나? 나는 준비를 하고 따라가겠네.”


    “네, 그럼 이만.”

    그가 나가자 생하울라가 벨투리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곤란하게 됐군.”


    “뭐가?”

    “자네가 말한  소년, 아마도 사절단의 일행일세.”


    “…그게  어쨌다는 건가?”


    “자네, 여기 오면서 발자국은 지웠나?”

    ‘아차’


    “그 표정 보니 대답은 없어도 되겠군. 아마 자네가 여기 있단 걸 알게 됐을 텐데. 인간의 아이를 우리가 데리고 있단 걸 알면 그쪽에서 태클을 걸지도 모르니까.”

    “그게 무슨 얘기요? 내가 여기 있는 게 그 치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인간의 아이가 오크의 밑에서 자라고 있단  알면 어떻게든 데려가려고 할 테니까 말이야.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들은 대개 그러거든.”


    “이해할 수 없군.”

    “그런 상황에서 자네 얼굴을 들켰으니까 말이지. 원래대로 라면 자네가 남자일 때 모습을 보여주고 어릴 때는 모습을 숨길 생각이었는데. 먼저 자네의 얼굴을 보였다면 오히려 남자일 때의 모습을 숨겨야 할 테니까.”

    “내가 당신과 있을 거라고 애기하면 되는  아닌가?”

    “어쩌면 보통은 그걸로 해결되겠지. 그들도 굳이 잘 모르는 아이 하나를 위해 부족과의 갈등을 야기하고 싶어 하진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어째 예감이 좋지 않단 말이지.”


    ~

    “안녕하십니까, 카울레 공.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반갑소, 안테른 남작. 반년만이군. 백작께선 안녕하신가?”


    “여전하시죠 뭐, 하하.”


    벨투리안은 후드를 쓰고 생하울라와 같이 사절단과의 인사 자리에 동참했다. 둘이 준비를 끝내고 자리에 도착했을 쯤에 인간들의 사절단 또한 막 도착했는지 생카울레와 상대의 대표자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상대의 대표는 생카울레의 말에 따르면 안테른 남작이라고 하는거 같았는데 아치형 수염을 멋드러지게 기른 아저씨였다.

    “이 쪽은 저번에도 한번 뵈었지요. 루드빅 백작님의 자제분이신 아르만 루드빅입니다. 아르만 인사드리거라.”

    그러나 그의 뒤에 있던 인물 때문에 벨투리안이 여유롭게 그들을 관찰하기는 곤란해졌다.


    “안녕하십니까, 족장 생카울레님. 아베르 루드빅 백작의 차남 아르만 루드빅입니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금발머리가 인상적인 그 소년은 바로 벨투리안이 아까 마주쳤던 그 소년이었던 것이다. 벨투리안은 본능적으로 생하울라의 다리를 잡고 거대한 덩치 뒤로 숨어버렸다.

    “나 또한 반갑네. 전보다 훨씬 듬직해졌군 그래. 이쪽도 소개를 해줘야겠군. 우리 부족의 주술사인 양아우테는 전에 봤었나? 그때는 자리를 비워서  봤겠지만 우리 부족에 머무는 전장의 순례자께서 있다는 얘기는 했었지.”

    “오오,  명성 높은 아르다루 전투의 영웅 생하울라님 말씀이십니까? 저번에 만나지 못한 것이 굉장히 아쉬웠는데 이렇게 뵙게 되는 군요.”

    ‘자네 팬이 있네, 그래.’


    ‘이거 참 부끄럽구만.’


    벨투리안과 생하울라가 서로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도 그럴게 안테른 남작이란 자는 나잇살도 꽤나 먹어 보이는 사람이 마치 아이처럼 흥분해서 들뜬 것이다. 생카울레가 뒤를 돌아보며 생하울라를 향해 눈짓했다.

    생하울라가 인사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에 따라 뒤에 서있던 벨투리안도 얼떨결에 같이 앞으로 나서버렸는데 여전히 계속해서 생하울라의 다리를 잡고 있는 모양새였다.

    “반갑소. 전장의 순례자인 생하울라라 하오.”


    “반갑습니다! 이렇게 뵙게 될 날이 오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10년  제가 아르다루 전투에  참가한 애송이였을 적에 처음 당신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많은 밤잠을 헤쳤는지 모릅니다. 그때 이후로 항상 꼭 생하울라님을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호오, 그 전투에 참여했었나? 소속은 어디였지?”

    “볼타르 왕국 가르니메 영지 출신 아홉 사자 부대 소속이었습니다!”


    “안톤이 있던 곳이군.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나, 혹시?”


    “안톤 부대장님께서는 지금 은퇴하셔서 본인의 영지로 돌아가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부대장님께서도 항상 당신의 이야기를 해주시곤 하셨습니다.”


    “내 흉 좀 많이 들었겠구만 그래, 킬킬.”


    “당치도 않습니다! 항상 당신을 최고의 전사이자 전우라고 부르셨습니다.”

    “자자, 둘의 이야기는 이만 미루도록 하지 않겠나? 먼 길 달려오신 손님분 들께서 피곤해하는 것 같아 보이는군.”

    둘의 대화가 길게 이어질 기미를 보이자 생카울레는 적절한 선에서 끊어버렸다. 본래라면 적절히 인사만 하고 끝났을 만남이 눈치 없는 상관 덕분에 오래 이어질 기미가 보이자 사절단 일행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하, 제가 좀 흥분했군요. 미안하네, 모두들.”

    “이야기라면 언제든지 다시 나눌 수 있으니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도록 하지.”


    “영광입니다. 생하울라님. 자 그럼 인사도 모두 끝났으니 이제 쉴 시간이다! 숙소 안내를 부탁 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일세. 만챠우, 자네가 좀….”

    “잠시만요.”

    그러나 아쉽게도 병사들의 피로가 풀릴 시간은 좀 멀었나 보다. 금발머리의 소년, 아르만 루드빅이 제동을 건 것이다. 일행들의 표정이 다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생하울라님의 뒤에 있는 아이의 소개를 부탁 드려도 괜찮을까요?”


    벨투리안은 후드 속으로 표정을 구겼다. 괜히 따라 나왔다. 뒤 쪽에 숨어있어야 했는데. 일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저도 궁금하군요. 혹시 생하울라님의 자제 되시는 분이십니까?”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벨투리안도 그저 뒤에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벨투리안은 앞으로 나서 후드를 살짝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그 작고 가녀린 얼굴이 드러나자 놀란 사절단에게서 웅성웅성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벨투리안은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자신의 이름을 밝혀야 하나? 하지만 원래 이름은 이 모습일 때 쓰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직 지금까지 생각한 이름은 없었다. 생하울라가 장난삼아 붙여 준 이름은 있지만 차마 그런 이름을 쓰고 싶진 않았다. 결국 벨투리안은 선택했다.

    “…투르.”


    그 이름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친구가 자신을 부르던 애칭이었다.


    벨투리안, 투르는 그대로 다시 후드를 뒤집어 쓴 채 생하울라의 뒤로 숨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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