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17/162)


  • 〈 17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소식이 빠른 자라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를 것이다.”

    족장 생카울레가 입을 열었다.


    “우리의 친구여, 동맹이자 맹우!  산맥의 슈라헤가 갑자기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지도 벌써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우리는 맹우의 흔적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이는 치욕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눈 뜬 채로 친구를 잃은 것이다.”

    마을의 중앙에 모인 모든 오크들이 그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생하울라 님께서 얼마 전, 그들이 사라진 일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

    모든 오크가 숨을 죽였다.

    “그건 슈라헤 일족의 마지막 생존자로부터 얻은 정보다.”

    생카울레가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용이다.”

    작은 탄식이 일었다.


    “고룡이다. 애끓는 비명의 주둥아리, 재앙을 조각하는 울푸레가 슈라헤를 멸망시켰다. 이미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던 존재가 어째서 갑자기 그들을 멸망시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서리 갈기 부족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맹우를 잃었단 것이다!”

    생카울레에게서 노성이 튀어나왔다.


    “중요하지 않다! 그 상대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우리는 슈라헤와 맹약을 맺었다. 우리는 그들의 맹우가 되었고, 그들은 우리의 우방이 되었다. 그런 우리에게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그들을 공격한 것은 모독이다! 상대는 용이다. 우리가 그들 슈라헤를 도우러 갔다 하더라도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손도 쓰지 못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우리는 마땅히 그리 해야 했다. 우리는 그들의 망치고 그들은 우리의 창이었기에! 우리는 명예로이 스러질 기회를 강탈당한 것이다.”

    수많은 오크들 역시 그에게 동조했다. 그들은 맹우를 잃은 것에, 그들의 명예가 모독 당한 것에, 그리고 용과 싸울 기회를 놓쳤다는 것에 분노했다. 물론 그러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있는 이 또한 없지 않았다.


    “족장님, 제가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율라티에, 그대의 발언을 허가한다.”

    말을 꺼낸 율라티에라는 오크는 굉장히 거칠게 생긴 오크였다. 물론 오크라는 종 대부분이 거칠고 험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특히나 더했다. 서리 갈기 부족이 머무르는 생 산맥은 매우 춥고 험한 지방이었기에 오크들 역시 두껍고 따뜻한 옷을 입고 지내곤 했는데, 율라티에의 옷은 얇아 보이는 로브 한 자루가 전부였다.

    “저로서는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군요. 생하울라님의 말을 감히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생존자라는 이를 쉽게 믿을 수 있는 겁니까?”


    그러나 그의 지적은 그의 야만적인 겉모습과는 다르게 매우 타당하고 올바른 의문을 담고 있었다. 또한 말하는 태도 역시 예의 바르고 정중한 것이 굉장히 언밸런스했다.

    “그대의 지적은 옳다. 본 족장 또한 아무런 증거 없이 감히 용의 이름을 담은 것이 아니다.”

    생카울레는 품에서 준비해두었던 서신을 꺼내 보였다.

    “이것은 저 멀리 강철 부리 부족에게서 온 서신이다. 우리의 맹우 알마티에가 보내 준 이 서신에는 울푸레와 관련된 일을 전하고 있다. 그 시기는 그 생존자가 말하는 이야기와 맞아 떨어지고 있다. 이 서신에 대한 열람을 원한다면 이후 얼마든지 양아우테를 통해서 볼  있을 것이다.”

    잠시 말을 멈춘 생카울레가 좌중을 한번 둘러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또한 하나의 증거가 있다. 그건 바로 생존자의 모습이다.”

    “생존자의 모습이라고요?”


    “그렇다. 슈라헤의 생존자, 그의 이름은 벨투리안이다. 그는 증오스러운 고룡 울푸레에게 차마 말로 꺼내기 힘든 끔찍한 저주를 받았다. 그는 전사로서의 명예를 강탈당했다!”


    울부짖듯이 외친 생카울레의 말에 모든 오크들, 심지어 아까 의심을 표하며 지적하던 율라티에마저 끔찍한 탄성을 내뱉었다. 일생을 전사로 태어나 살아가는 오크들에게 있어서 그건 가장 끔찍한 형벌이었다.


    “그는 매일 해가 바뀌는 순간 전사의 자격을 강탈당해, 하루는 전사이나 하루는 나약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사로서의 자격을 다시금 되찾으려 우리 부족을 찾았다. 그는 슈라헤의 마지막 생존자이기에 우리는 맹우로써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고결한 모습에 있어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고 감히 말하겠다. 나는 그를 우리 서리 갈기의 손님으로써 받아들이기를 결정했다. 그를 받지 않는 것은 일족의 수치요, 전사의 좌절이다!”

    생카울레가 뒤를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나오시오.’ 그 말에 대기하고 있던 벨투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벨투리안은 후드를 쓴 채로 나와 족장 생카울레와 마주섰다. 그 작은 모습에 많은 오크들이 의문을 드러냈다. 벨투리안이 후드를 벗자 그들은 족장이 한 ‘전사로서의 명예를 강탈당했다.’ 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전사라기에는 너무 나약하고 가녀린 모습이었다.


    생카울레는 작은 잔을 벨투리안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직접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벨투리안은 그 후 생카울레에게 술병을 받아 생카울레가 들고 있는 큰 잔에 술을 채웠다. 둘은 동시에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잔의 크기는 달랐으나 잔을 내리는 것은 동시였다. 처음 마셔보는 독한 술 맛에 벨투리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모습은 다행히도 다른 오크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이로써 맹약은 체결되었다. 그는 우리의 맹우요, 우리는 그의 방패가 될 것이다!”

    오크들이 엄숙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벨투리안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예를 받아 같은 방식으로 돌려주었다.

    ~


    “실수 없이 잘했군 그래.”

    “내가 할 것도 별로 없지 않았나.”

    환영식이 끝나자  뒤는 축제였다. 대부분의 오크들은 그들에게 생긴 새로운 손님을 궁금해 하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춤추는데 집중했다. 벨투리안은 생하울라와 같이 앉아서 축제 음식을 먹으며 구경하는 쪽이었다.

    아예 아무런 오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라 이미 여러 오크와 인사를 나누긴 하였다. 그러나 옆에 앉아있는 생하울라 때문인지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오크는 애시당초 과묵한 이들이기도 하고.

    “이렇게 얘기해보니, 확실히 아까 그 놈은 당신 말대로 별종이 맞는 거 같군.”


    “양만챠우? 그 놈이 말이 많긴 하지. 별종이란 건 조금 다른 의미로 말한 거지만 말이야.”


    “그래? 그런가….”

    “자네 취했나?”


    말꼬리를 늘이는 벨투리안의 얼굴은 이미 발개져 있었다. 추운 지방이었기에 벨투리안이 작고 하얀 이 모습일 때는 평소에도 얼굴이 빨개지곤 했지만 이 모습은 평소보다 더 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벨투리안은 술을 먹어본 적이 없기에 이게 취한 것인지 아닌지도 구분 할 수 없었기에 적당히 대답하였다.

    “글쎄, 잘 모르겠는 걸…. 조금 어지럽긴 하군….”

    “물이라도 좀 마시게나.”


    생하울라가 건네준 따뜻한 물 컵을  손으로 잡고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좀 쓰린 속이 나아진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이런 모습으로 나오면 좀 더 놀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대들은 별 생각이 없나 보군.”


    “나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더 놀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말이야. 숙부께서 잘 포장해주신 거지.”

    “포장?”

    “앞서 전사의 말을 했는데 누가 거기서 그대를 향해 불경한 반응을 하겠는가? 단순히 여자 아이가 됐다고 말해버리면 아무리 감수성 없는 오크라도 놀라겠지만 전사의 명예를 강탈당했다고 해버리면 모두가 숙연해지는 걸세.”


    “잘 이해가  가는군.”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대가 원래 남자인 것도  안하지 않았나. 하하.”


    조금 식었던 벨투리안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그럼 지금  오크들은 자신을 원래부터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설마 그럼….”

    “하하하!”

     크게 웃어재끼는 생하울라를 향해 벨투리안이 솜뭉치를 들어 그대로 때려버렸다. 무게는 아예 없는 상태 그대로였기에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벌써 칼을 그렇게 조절할  있을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다만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다른 오크들은 조금 놀란 듯 보였다. 그걸 맞고도 아무렇지 않은 생하울라 보다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대한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좀 더 신기한 듯 보였다.

    “환영식이라면서 정작 다들 나한테는 관심도 없어 보이는 군.”


    “대부분의 오크들에게는 그냥 놀고 먹을 기회인거지. 인간들도 높은 분들 이야기는 별로 관심 없지 않나. 자네가 궁금하기도 하겠지만 내가 옆에 있으니까 쉽게 말을 걸기 힘든 것도 있고.”

    “보잘 것 없다 기에는 꽤나 권위 있는 명성인가 보오?”

    “그 권위 있는 명성의 제자가 된 셈이니 감사하게 여기게나.”


    “퍽이나.”


    물 한 잔을 다시 마신 벨투리안이 물었다.


    “아까 그 오크는 어떤 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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