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15/162)


  • 〈 15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벨투리안이 잠에서  건 이른 아침이었다. 까악까악 대는 까마귀 소리에 그만 눈이 떠지고 만 것이다. 이곳에서는 듣기 힘든 새소리였다. 생하울라가 말해주기를 생 산맥에 있던 슈라헤의 마을이 사라지고 난 이후로, 다시 말해 용이 왔다  후 부터 근방의 야생 동물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하늘의 사정 역시 마찬가지인 지라 최근까지 생 산맥은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 깨끗한, 다른 말로는 허전한 하늘을 유지하고 있었다. 잠을 설친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들은 새소리는 나름대로 반가운 맛이 있었다.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면 잡아서 먹을 수 있을 텐데.’

    물론  반가움은 소녀스러운 모습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지만 말이다.

    벨투리안은 어렸을 때부터 활과 덫을 이용해 수많은 사냥감을 잡아온 사냥꾼이었기에 지금의 상황은 확실히 아쉬운 것이었다. 벨투리안은 스스로에게 강한 자신감을 가지는 타입은 아니었다. 사냥꾼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투리안은 자신의 활솜씨만큼은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실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벨투리안이 이 모습으로 변하면서 모든 무기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그의 활은 자신이 살던 오두막집에 놓여 있어 시도조차  수 없는 상태였다. 애초에 그의 활은 이 소녀의 모습만큼 이나 크고, 시위는 더욱 팽팽했기에 당기지 조차 못할 테지만.


    ‘이 상태로도 쓸 만한 활은 없으려나. 있다 손 치더라도 이곳에서 구하기는 어렵겠지.’

    결국 벨투리안은  사냥을 포기하기로 했다. 시간은 많다. 다른 적당한 활을 빌려서 원래의 모습일 때 하면 되는 것이니 조급하게 굴지 않기로 했다.

    단장을 맞추고 집 밖으로 나오자 벨투리안은 조금 따뜻해진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눈이 녹고 있었다. 그럴 시기가 된 것이다. 물론 정말 따뜻한 곳과는 비교도 안되는 차가운 공기였지만 평생을 눈 덮인 산맥에서 살아온 벨투리안에게는 따뜻하다고 생각되는 온도였다. 하늘에서 무리를 지은 까마귀 떼가 보였다.

    일찍 밖을 나섰지만 벨투리안에게 딱히 할 일 같은 것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벨투리안의 일상은 식사와 훈련, 그리고 생하울라와의 대화 정도 밖에 없는 지루한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살아왔던 벨투리안에게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바쁜 생활이기도 했다. 벨투리안은 집 주변이나 둘러보기로 했다. 가벼운 산책이다.


    아무래도 혼자였기에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는 어느 정도 도망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자만은 금물이었다. 생하울라와 같은 규격 외의 존재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것을 항상 염두해야 했다. 자신이 없어졌다고 생하울라가 걱정할지도 모르고.


    마을 깊숙이 들어가는  역시 거부감이 있었다. 자신이 직접 만나  오크는   정도 밖에 안 되기에 다른 오크를 만나는 건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직 손님으로 받아 들여진 것도 아닌데 혼자 맘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았다. 혹시 모르니 검은 챙기고 나갔다.


    눈이 점차 녹고 있는 설산을 보는 것은 나름 운치 있는 일이었다. 평소에는 눈으로 덮여 보기 힘든 흙과 옷을 벗는 나무들의 속살이 보는 이의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 아무래도 이번 봄은 조금 성급한 모양이다.

    자신의 일족이었던 슈라헤는 굉장히 오만하고 고집불통에 재미없는 족속들이었지만 이 시기 만큼은 나름대로 유해지고 풍류를 즐기곤 했다. 거의 제사용으로만 쓰던 술을 마시기도 하고 축제 비슷한 일들을 하기도 했다.

    물론 자신은 추방된 몸이었기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유리히가 축제 음식들을 가져와 나눠주곤 했었다. 그런대로 즐거운 추억이었다. 다시는 있을 수 없는.

    일족들을 회상하니 좋았던 기분이 다시 곤두박질쳤다. 그냥 돌아가 버릴까.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산책을 계속하기로 했다.


    벨투리안은 주변을 계속 돌아보다가 굉장히  나무를 찾아갔다. 마을의 경계 쪽에 자라난, 생하울라의 집에서도 훤히 보일 만큼 거대한 나무였다. 눈이 좀 녹고 있었기에 미끄러웠지만 벨투리안은 무리 없이 올라탈 수 있었다. 나무타기라면 자신 있다. 오히려 나무타기만큼은  모습이 더 유리한 편이다. 벨투리안은 금방 나무 꼭대기에 이르렀다.


    꼭대기에 올라가자 서리 갈기의 마을이 눈에 다 들어왔다. 확실히 큰 군락이었다. 슈라헤 산맥의 슈라헤 마을보다 훨씬 거대했다. 물론 인간들의 도시 같은 것에 비하면 작은 모습이었지만. 벨투리안은 자신의 마을과 생 산맥에 있던 슈라헤의 마을 말고는 다른 마을이나 도시를 전혀 보지 못했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높은 곳에서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던 중 자신을 향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광량이 아가씨로군, 그래.”


    불쾌한 이야기였다.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있는 것. 어제 만났던 양만챠우라는 오크였다. 벨투리안은 그를 향해 말했다. 높은 곳에 있으니  들리지 않을까봐 조금 큰 목소리였다.

    “난 말괄량이가 아니다, 아가씨는 더욱 아니고.”


    “그렇군. 아가씨는 어제의 그 사자의 이름을 가진 전사인가?”

    그러니까 아가씨가 아니래도. 아무튼 어차피  이 마을의 오크들에게 알릴 사실이었으니 벨투리안은 대답했다.

    “그래. 내 이름은 벨투리안이다.”

    “예상은 했지만 놀라운 일이군. 어느 쪽이 본 모습이지?”

    “어제.”


    “그런가. 그럼 다시 한 번 인사하도록 하지. 나는 서리 갈기 부족의 전사이자 양아우테의 아들 양만챠우라고 한다. 잘 부탁하네, 손님.”

    “생각보다 놀라지 않는군.”


    “나는 좀 별종이라서 말이지. 예상하기도 했고.”


    벨투리안은 나무에서 내려와 그와 얼굴을 마주쳤다. 계속 위에서 얘기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내려와서 말이 끊기자 딱히  말이 없었다. 애초에 상대가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이기도 했고. 결국 다시 말을 꺼낸 것은 양만챠우였다.

    “자네의 원래 이름이 벨투리안이라면 아가씨의 이름은 뭐지?”

    “이상한 소리를 하는 군. 내 이름은 벨투리안이야.”


    “그렇지만 새로운 모습이라면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지 않겠나, 사자여.”

    “가명의 얘기인가? 이곳에서는 별로 필요 없어 보이는데.”

    “주술의 의미일세. 연금술사의 언어는 힘을 담고 있고 그대의 모습은 사자의 이름을 담기에는 조금 연약해 보이는 군. 아니, 반대인가?”

    무례한 말을 지껄인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만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무례한 이야기를 꺼냈군. 사과하겠네.”


    다행히 그가 면박을 주기 전에 알아서 사과를 건네 왔다. 벨투리안은 어쨌든 가명의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었기에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파악하지도 못했고.

    “사과를 받겠네.”

    “다만 나쁜 의미로  말은 아닐세. 생하울라님께서 아버지와 좀 얘기하시던데, 아마 아가씨도 곧 만나게  거야. 우리 아버지 말일세. 아, 미처 말을 못했군. 아버지는 이 마을의 유일한 주술사야.”


    그 이야기라면 자신도 알고 있다.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주술사와 이야기해본다고 생하울라가 말했었다. 그게  자의 아버지라는 것은 몰랐지만.


    “알겠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아가씨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 볼 건가? 그럼 오늘 밤에 다시 보자고.”


    “오늘 밤?”

    “못 들었나? 자네를 손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환영식이랄까. 오늘 밤이네. 생하울라님께서 말씀  해주셨나?”


    “그놈은 돌아오자마자 좀 말하다가 골아 떨어졌다.”

    “아버지랑 좀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 그럼 오늘 밤 다시 보도록 하지, 아가씨.”

    양만챠우는 그대로 돌아서서 벨투리안을 떠났다. 벨투리안은 그에게 조금 큰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그 놈의 아가씨라는 말은 좀 집어치우게나, 이 대머리.”

    듣기는 한 건지, 양만챠우의 대답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