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12/162)


  • 〈 12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한 가지 묻고 싶은  있는데.”


    “말해보게나.”

    “당신과 서리 갈기의 족장은 무슨 관계요? 둘의 이름이 모두 ‘생’으로 시작하는데.”

    “특별한 것은 아니네만.”


    “또 과자 이름이라고  생각이오?”


    하하하! 생하울라가 작은 벨투리안의 농담에 크게 웃었다.

    “과자 이름이라면 그 나름대로 맛이 있었겠구만. 별거 아니네. 그는 나의 아버지의 형제 되시는 분일세. 이름이 비슷한 이유는 그래서일 뿐이야.”

    벨투리안은 그 대답에 크게 놀라 물었다.

    “근데 당신은 어째서 그 분에게 그리 무례한 말투를 취하는 거요? 더군다나 당신은 손님이고 그 분은 한 부족의 족장인데. 그 분은 어째서 당신에게 존대를 하는 거고?”


    “나는 전장의 순례자로써 내 이름을 폭력에 바쳤을 때, 모든 인연을 끊었지. 그렇기에 피가 이어졌을지언정, 그와 나는 가족도 뭣도 아닐세. 그저 두 사람의 전사일 뿐. 그렇기에 내가 그에게 보여 줄 것은 전사의 예의뿐일세.”

    “그럼 그 분께서는?”

    “원래 그 분은 좀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쓰잘데기 없이 예의를  차린다네. 늙은이 고집이지.”

    작게 험담을 하는 생하울라의 얼굴에는 자기도 모르는 작은 미소가 서려있었다. 벨투리안이 핀잔주며 말했다.


    “정작 그렇게 말하면서 집을 나오니 그 분에게 꼬박꼬박 말을 높이는 구려.”


    “아무래도 수십 년이나 그렇게 살았는데 조금 어색하다 말이지. 같이 있을 때가 아니라면 나도 편하게 말하고 싶다고.”

    “아무렴.”

    벨투리안은 큭큭 대며 작게 웃었다. 생하울라의 처음 보는 유쾌한 모습에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었다. 생하울라는 무안해하면서 벨투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확히 쓰다듬었다기보다는 억누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당황한 벨투리안이 외쳤다.

    “하지 마!”

    “어이쿠, 미안하네.”

    그러나 생하울라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고 손도 그대로였다. 벨투리안은 저항했지만 그걸로 끄떡 할 생하울라가 아니었다. 생하울라가 손을 뗀 건 벨투리안이 저항을 포기하고 난 후였다. 샘솟는 굴욕감에 벨투리안이 비꼬았다.


    “잘도 이런 어린 아이를 괴롭히는 군?”

    “이런,  지금까지 자네가 시커먼 남정네인  알았는데! 앞으로는 꼬박꼬박 어린애 대우를 해주도록 할까, 꼬마 아가씨?”

    벨투리안의 판정패였다. 분한 얼굴로 말이 없어진 벨투리안을 보며 생하울라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저기 보게나. 저기가 내 집일세. 당분간 우리가 지낼 곳이지.”

    둘은 서리 갈기 부족의 외곽 끝자락에 있는 생하울라의 집에 도착했다. 마을이라 고는 하지만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벨투리안 자신의 오두막집만큼은 아니었지만.


    “그건 그렇고 그 분께서도 담이 크시군. 우리 일족이었다면 저주를 받았다는 수상쩍은 사람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

    “명예로운 오크족이라면, 적어도 서리 갈기 부족은 손님을 내치지 않는다네. 그 손님이 동맹의 마지막 생존자라면 더더욱 말이지.”

    “그리고  생존자가 이런 계집애라면 말할 것도 없겠고?”


    “하하, 자네는 이제 슬슬 그 모습이 맘에 든 모양이야?”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쇼.”


    “용이 돌아올까 걱정하는가?”

    평소와는 다른 유쾌한, 그리고 자학적인 농담은 그런 걱정을 지우려고 그러던 것이었을까. 생하울라가 벨투리안의 정곡을 찌르자 벨투리안은 말이 없어졌다.


    “걱정 말게. 상대가 용일지라도, 죽음이 기다리는 전투를 오크는 거부하지 않으니까.”


    “거 참, 위로가 되는 군.”


    둘은 집에 짐을 모두 풀고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생하울라가 자신의 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다른 생필품 같은 거라도 좀 얻어와야겠군. 혼자 지내던 집이라 둘이 지내기엔 좀 불편할거야.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 맥주라도  잔 하고 싶은데….”

    “나는 술은 안 마신다만.”


    “어차피 지금의 자네에게 술을 줄 생각은 한 톨도 없었어. 한 모금 마시면 그대로 뻗어버릴 걸?”

    생하울라의 그런 말에 벨투리안은 괜한 오기가 났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자신도 마실 수 있다는 만용을 부리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원래 모습이었을 때도 술을 마시지 않았으니까.

    “술 얘기는 그만하고 이제 가르쳐  때가 된 것 같은데.”


    “무엇을?”


    생하울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벨투리안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이 모습일 때도 쓸 수 있는 힘을 준다 하지 않았소.”

    “아,  말이군. 미안하네. 잠시만 기다리게나.”

    생하울라는  말을 끝으로 그대로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말릴 틈도 없었다. 졸지에 혼자 남아버린 벨투리안은 그의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벨투리안은 집 주인이 없는 상태에서 집을 뒤질 정도로 무례하지 않았기에 숨겨진 무언가를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집은 작고 부엌과 침실을 제외한 방도 따로 없었기에 그럴 만한 곳도 없었고.

    생하울라의 집은 정말 휑한 것이 마치 자신의 오두막집 같았다. 보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집에 있는 물건이 없다는 뜻이었다. 잠만 자고 가는 곳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는 서리갈기 부족의 손님이라 했으니 자신의 원래 집이 아닌 것인가?

    그러나 부엌을 보자 이 집이 생하울라의 것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부엌은 집의 다른 곳과는 다르게 잘 정리되어있었고 여러 가지 요리 도구들이 가득했다. 생하울라와 같이 다니던 시절에 그가 해주었던 음식들이 떠올랐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벨투리안은 부엌에서 나왔다. 생하울라가 돌아왔다. 온 몸이 먼지투성이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손에는 작아진 자신의 몸집만한 대검이 들려있었다. 크기 밖에는 볼 게 없는 투박한 모양새였다. 멀리서 쉽게 볼  있을 정도로 날이 빠져있기 까지 했다.

    “그건 뭐요?”

    “자네가 가질 힘.”

    “농담하시오? 난 검을 다뤄본 적이 없소. 그리고 아무리 봐도 그 검이 멀쩡해 보이지도 않고 무엇보다 이 몸으로 그런 검을 들 수 있을 리가 없잖소.”

    “그럼 한 번 들어보게나.”


    벨투리안이 화를 내자 생하울라는  말하지 않고 그대로 대검을 벨투리안에게 던졌다. 그건 칼을 투척하는 것이 아니라 휙하고 던져 주는 모양새였다. 자연스러운 그 모습에 벨투리안은 자신도 모른 채 손으로 그 검을 받으려 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후회했다. 이 몸으로 저런 검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크게 다칠 것이 분명했다. 벨투리안은 머릿속으로 멍청한 오크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에 검이 닿자 벨투리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상상하던 검을 놓치거나, 무게에 짓눌리는 일은 없었다. 대검은 그 거대한 크기와는 다르게 자신의 손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가벼웠다. 아니 이건 가벼운 수준이 아니었다. 벨투리안은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이 솜털인지 칼인지 전혀 구분할  없었다.

    “이, 이건? 이 칼은 대체 무엇이요?”

    “말하지 않았나.”


    생하울라가 아주 재밌는 장난을 치고 있는 어린 아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소녀의 모습일 때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


    생하울라가 벨투리안에게 쥐어준 것은 무게가 없는 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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