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10/162)



〈 10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빌어먹을, 대체 당신네 마을까지는 얼마나 걸리는 거요?”


생하울라가 벨투리안을 이끌고 서리 갈기 부족의 마을로 떠나기를 3일 째 되는 날, 작은 벨투리안은 결국 불평의 말을 꺼냈다. 과묵한 벨투리안이 욕설을 꺼냈다는 것은 그만큼 참을  없이 짜증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앞으로 금방일세. 조금만 여유를 갖게나.”

“당신은 첫날에도 금방 도착한다고 말했소. 오크의 ‘금방’이라는 말은 한참 남았다는 뜻이라도 되는 것인가?”


“어린 양의 피는 전장으로 가는 지름길이지.”

벨투리안의 직설적인 비꼼에 생하울라는 선문답으로 응대했다. 벨투리안이 화나는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처음 벨투리안은 자신이 계집애로 변할 때마다 길을 가는 속도가 현저히 줄어드는 것을 알고 있기에 불평 같은 것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속을 실실 긁어대며 계속 선문답으로 대응하는 생하울라의 태도가 벨투리안에게는 견딜 수 없이 짜증났다. 생하울라는 벨투리안이 알던 오크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아는 것이 많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계속해서 사용했는데 지식이 적은 벨투리안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었다.

“자네가 내 등에 업혀서 간다면 확실히 더 빨라질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벨투리안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불평하는 것을 멈췄다.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 말이 실로 사실이었기에 더욱. 그런데다가 상대가 순수한 호의로 그런 말을 꺼낸 것을 알고 있기에 화를 내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벨투리안은 빨개진 얼굴을 돌려  곳을 바라봤다. 생하울라는 벨투리안을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말했다.


“슬슬 자리를 잡고 식사라도 하는 것이 괜찮겠군.”


 말에 벨투리안은 말없이 걸음을 멈춰 준비를 시작했다. 점심때였다. 생하울라는 귀신같이 쉴만한 곳을 적당한 시간에 찾아내 식사를 권했는데 이는 분명 산맥의 지리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 분명해보였다.


생하울라 역시 자신과 벨투리안의 짐을 내리고 준비를 도왔다. 벨투리안은  모습을 보며 조금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저 짐은 자신이 이런 모습으로 변하자 그가 억지로 채간 것이었다. 속도가 떨어진다는 생하울라의 말에 벨투리안은 반박할 수 없었다. 빼앗으려고 해도 무력의 차이가 있으니 불가능한 것이었다.


벨투리안은 자신의 짐을 받아 들고 적당히 자리를 만들고 요리 도구들을 꺼냈다. 생하울라는 자신의 도끼에 부싯돌을 튕겨서 그대로 불을 일으켰다. 이미 여러 번 본 장면이지만 참 편리해 보인다고 벨투리안은 생각했다.

불길은 자신이 낑낑대며 피웠을 때와는 다르게 순식간에 일어났다. 준비가 끝나자 생하울라는 냄비에 눈을 넣어 물을 끓이고 비축해두었던 고기를 꺼내 간을 했다.


동행을 시작하며 가장 놀랐던 것은 생하울라가 매우 요리를 잘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무려 귀한 향신료와 쓸 만한 요리 도구까지 가지고 있었다. 벨투리안은  식사 시간에 평소처럼 대충 고기를 구워먹으려 했는데 생하울라가 고개를 젓더니 순식간에 그럴 듯한 음식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최근 10년간을 혼자 살면서 스스로 대충  음식을 먹은 것 밖에 기억이 없는 벨투리안에게는 거의 혁명이나 다름없는 맛이었다.  뒤로 벨투리안은 자신이 요리를 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얼마 뒤, 고기가 모두 구워졌을 즈음에 맛깔 나는 스튜가 완성되었다. 벨투리안은 음식들을 게  감추듯 순식간에 해치웠다. 여느 때와 같이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모습을 보며 생하울라는 자신의 남은 고기까지 먹지 않겠냐고 권해왔다. 벨투리안은 거절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생하울라가 자리에서 누워 그대로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벨투리안이 파악한 그의 습관  하나였는데 밥을 먹고 나면 반드시 누워서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그는 보통 짧은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일어났기에 벨투리안도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는 조금 놀랐지만.


삼 일 간의 동행 동안 약간의 실랑이를 제외하면 둘에게 딱히 특별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잠든 생하울라의 얼굴을 보며 오크들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처음 그의 말에 홀려 동행을 결정했을 때는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만약 모든 오크가 이 사내처럼 이상한 헛소리를 한다면 대응하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벨투리안은 각오를 다 잡았다. 그리고 생하울라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한참이 지나 벨투리안이 잠에서 깨어나자, 벨투리안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업혀있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을 파악한 벨투리안은 기겁을 하며 외쳤다.


“뭐, 뭐야!”

“아, 깨어났는가?”


“다, 당신 무슨 짓이야, 이게!”


벨투리안은 당황해서 흐트러진 말투로 외쳤다. 생하울라가 벨투리안은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너무 곤히 자고 있길래 깨우기가 좀 그랬네. 미안하네.”


먼저 잠든 것은 당신이 아닌가! 벨투리안은 억울해졌다. 그렇지만 결국 잠에서 깨지 못한 것은 자신인데다가 자신을 배려하려고  행동이기에 더 말하는 것도 껄끄러웠다.


무엇보다 상대방이 사과를 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욕을 할 만큼 벨투리안은 모질지 못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서 이런 상황을 겪은 것이라 당황스러운 것도 한몫했다. 벨투리안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그러지 마시오. 그냥 깨워도 괜찮으니.”


“알겠네.”


생하울라는 별 얘기 없이 벨투리안의 말을 받았다. 벨투리안은 채비를 정리했다. 생하울라는 조용히 그것을 기다렸다. 정리가 끝나자 둘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직 햇빛은 쨍쨍하였다.

“그러고 보니 벨투리안 자네.”

“…왜 부르시오”

생하울라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벨투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약간의 침묵 후, 벨투리안이 대답했다.

“자네는  모습을 때도 벨투리안이란 이름을 계속  생각인가?”


“그럼  이름을 쓰지, 어찌 하겠소.”

“글쎄, 개인적인 조언을 주자면, 적당한 가명을 만들어두는  좋을 거라고 생각하네.”


“어째서?”

“변한 자네와 변하지 않는 자네가 동일 인물인 것을 알릴 수도 있으니까. 웬만하면 그런 몸이란 사실은 알리지 않는 게 좋으니까. 그리고 벨투리안 같은 특이한 이름, 보통 여자애에게는 쓰지 않는다네. 아니, 산맥 아래에서는 아예 쓰지 않는 이름이군.”


그건 분명 맞는 말이었다. 벨투리안 역시 스스로의 비밀을 알릴 생각은 없었다. 생하울라와 같이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여행을 떠나려고 마음먹었을 때 깨달아야 했던 것인데, 사람과 맞대고 지낸  너무 오래 전 일이다 보니 떠올리지 못했다.


“자네가 정 바꾸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대로 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이름이 같다는 것만 가지고 쉽게 같은 사람이란 걸 파악하기엔 너무 동떨어진 외모이기도 하니.”


“아니, 그대의 말이 옳소. 적당한 가명을 생각해봐야겠군.”

벨투리안이 생하울라의 말에 동의를 표하며 생각에 빠졌다. 무슨 이름이 좋을까? 벨투리안은 본디 이런 쪽에는  재능이 없는 편이었다.

“괜찮다면 내가 이름을 지어줘도 괜찮은데 말이지.”


“한번 말이라도 해보시오.”


“생슈크레?”


생하울라가 말한 이름에 생이란 말이 붙은 것에 당황한 채로 벨투리안이 물었다.

“무슨 뜻이오, 그게?”

“빵 속에 슈크림을 넣어서 만드는 달콤한 과자가 있는데, 그….”


“사양하겠소.”


벨투리안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생하울라는 조금 아쉬워하고는 말했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무엇보다 그 앞에 붙은 생은 무엇이요, 무엇. 내가 당신 아들이라도 되오?”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곧 부모의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하니 크게 틀린 말이라고 보기도 힘들지. 다만 저건 그냥 과자 이름일세. 제국의 수도에 가면 먹을  있지.”


“좋아하나 보오.”


“자네도 먹어보면 좋아하게 될 걸세.”


“징그럽기는.”


둘의 대화는 한참이나 지속됐다. 서로 조용히 걷기만 하던 삼 일간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벨투리안의 새로운 이름을 정하지 못했다. 대화를 나누던 도중 둘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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