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7/162)



〈 7화 〉서릿발 아래의 사자들이여

벨투리안의 여행은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다.

 번째는 자신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당연히 언제 끝날지 아무런 기약도 없는 일이었다.


 번째는 또 다른 일족의 생존자 아레히에게 일족의 멸망을 알리는 것이다. 어제 막 끝이  일이었다. 벨투리안에게 있어서 이는 가장 우선도가 떨어지는 일이었다. 그가 길을 가면서 찾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수준의 일이었다. 그가 아레히를 찾는데 성공한 것은 상당히 깊은 우연이 겹쳐져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만약 우연이 겹치지 않았더라면 벨투리안은 망설임 없이 아레히를 만나지 않고 약속을 지키기 위한 길을 갔을 것이다.

그것은 용의 습격 이후의 이야기였다.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벨투리안에게는 아주 오래  겪은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용의 습격 이후 처음 자신이 저주에 걸렸다는 걸 깨달은 벨투리안은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파악했다. 처음 며칠간은 고열로 제대로 된 판단조차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는 판단할  없었다.


최대한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결론지었다. 이런 몸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무리다. 단 한 번도 산맥 위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벨투리안이었지만 이런 몸으로 여행을 가면 어떻게 될지는 그에게도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투리안은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바보 같은 결정이었다. 어째서? 무엇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몸이라도 혼자서 산다면 살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평생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지난 10년처럼. 벨투리안에게 처음 주어진 자유였다, 이것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유일하게 무사했던 자신의 오두막집으로 돌아가서 여행을 준비했다. 지나치게 길었던 소녀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여린 몸을 가능한  단련했다. 무력은 한 없이 부족했기에 벨투리안은 도망치는 것을 주로 단련했다.


숨고, 도망치고, 기척을 눈치 채는 그런 예리함이 필요했다. 자신의 원래 몸일  역시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소녀의 몸으로 눈밭에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은 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벨투리안은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벨투리안은 마을이 존재했던 곳에 돌아가 추모했다. 나의 가족들이여, 안녕히. 나의 일족이여,  가시오. 벨투리안은 죽은 나무로 마을의 묘비를 만들었다. 그는 까막눈이었기에 무언가 적지는 않았다. 글을 알았더라 한들 뭐라고 적어야 할지도 몰랐을 것이다.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투박한 나무 묘비만이 마을에 남아 지금은 사라진 일족을 기리고 있었다.

목적지로 잡은 곳은 생 산맥이었다. 아마  곳 또한 울푸레의 습격을 받았던 것이기에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혹시 자신이 발견 못했던 무언가가 남아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벨투리안은 다시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혹시, 자신처럼 생존자가 어딘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한 없지 않았다.


생 산맥으로 가는 길은 이전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몸의 변화 때문이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벨투리안의 장기는 활이었으나, 벨투리안이 쓰던 활은 소녀의 힘으로는 시위조차 당기지 못했기에 두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벨투리안의 도구들 역시 지나치게 무거워서 소녀의 몸으로는 들고 다니는 것조차 고행이었기에 벨투리안이 가지고 나온 무기는 작은 단검과 밧줄 같은 것들이 전부였다. 만일 그 때 맹수, 혹은 인간을 만나게 되었다면 아마 벨투리안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생 산맥에 도착해서는 다시금 일족의 마을, 아니 일족의 마을이었던 곳을 찾았다. 헤맸지만 한번 찾아본 곳이었기에 이전보다 더 빨리 발견할  있었다. 벨투리안은 주변에 거처를 마련하고 마을이었던 곳을 샅샅이 뒤졌다.


혹시 무언가 남은 것이 없을까? 혹시 누군가 살아남은 자는 없는가? 자신처럼 무언가 저주를 받고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2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마을의 흔적을 뒤지고 사람을 찾던 벨투리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벨투리안은 혼자였다.


벨투리안은 울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기에 괜찮다. 그렇게 자신을 속였다. 벨투리안은 울지 않았다. 어쩌면 지난 10년 간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었기에 흘리는 방법을 잊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나뭇가지와 천막을 합쳐 만든 임시 거처로 돌아간 벨투리안은 짐을 정리하기로 했다. 여기서  찾을 것이 없는 이상, 이제 떠나야 했다. 그런데, 어디로?


벨투리안은 도저히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없었다. 떠오르는 것은 과거 일족을 떠났던 자신의 친구 아레히뿐이었다. 그를 찾아야 할까?


그러나 벨투리안은 아레히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산 아래를 다닌 경험도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챙길 것이 많지도 않았거늘 벨투리안은 계속 시간을 끌며 미적댔다.

그러던 중이었다. 나뭇가지가 바삭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벨투리안이 혹시 모를 침입자를 대비해서 설치해두었던 것이다. 벨투리안은 즉시 거처 밖으로 나가 몸을 숨겼다. 불행히도 지금 벨투리안은 어린 소녀의 모습이기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선택지에 없었다.


작은 단검을 손에  채 벨투리안은 기척을 감췄다. 곧 모습을 드러낸 것은 족히 소녀의 키의  배는 되어 보이는 도끼를  거구의 사내였다. 온 몸을 따뜻한 겉옷으로 두르고 후드를 뒤집어쓴 상태였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설산을 등반하기에는 딱 좋은 모습이었지만 결코 일반적인 사냥꾼의 모습은 아니었다.


사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거처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벨투리안이 만들어둔 임시 거처를 발견했다. 벨투리안의 실책이었다. 이런 상황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런 상황을 대비해둬야 했다.


사내가 도적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만약 도적이라고 한다면 중요한 짐들을 모두 뺏기게 될 것이었다. 제 한 몸 도망칠 자신은 있었지만 짐까지 챙기는 건 불가능했다.

사내의 체격과 손에 쥔 단검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몸으로  사내에게 덤벼드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름이 없었다.


사내는 거처를 보고 조금 멈칫하더니 그대로 거처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내가 거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사내는 계속해서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거처의 주인을,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이다.

벨투리안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했다. 몸은 완벽하게 감췄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기척을 눈치 챈다면 벨투리안은 싸우든 도망치든, 어떻게든 해야 했다. 벨투리안이 숨은 나무쪽으로 사내가 오자 벨투리안은 단검을 들고 각오를 다잡았다.


그러나 이후 일어난 일은 벨투리안의 생각과는 달랐다.

쿵!


사내의 거대한 도끼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강렬한 진동과 소리가 산에 울려 퍼졌다. 놀라 뛰나를 새들은 이미 산을 떠나 보이지 않았지만, 벨투리안은 자신이 그런 새들인  것만 같았다. 땅에 도끼를 내려둔 사내가 걸걸하고  소리로 말하였다.


“기척을 감추고 있는 작은 순례자여, 나는 그대와 싸울 의사가 없다! 나의 반신을 땅에 뉘였음이 그 의지의 표명이다. 허나 그대가 나와의 대면을 원치 않는 듯 보이니 이곳에서 묻겠노라!  이름은 생하울라! 가장 위대한 전사의 목숨을 취할 전장의 순례자이자 서리갈기 부족의 손님이요, 사라진 일족 슈라헤의 친구이다! 나는 슈라헤 일족의 친구로서 그들의 행방을 찾고 있다. 너는 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가?!”

대답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을 믿고, 무엇을 위해 그에 대답해야 하는가? 자신이 대답하는 순간 사내는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낼 것이다. 그리고 도끼를 손에서 놓았다 할지라도  사내는 한 손으로도 능히 자신의 목을 부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벨투리안은 후드를 벗은 사내의 얼굴을 보고 대답할 마음을 잡았다. 거대한 사내의 얼굴은 선명한 진녹색 빛을 띄우고 있었다. 사내는 오크였다. 벨투리안은 크게, 그러나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벨투리안. 몰락한 일족 슈라헤의 마지막 생존자이다. 일족 슈라헤는 모두 죽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나뿐이다. 그대가 이곳에서 찾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두 기묘한 대화의 끝에 잠시 정적이 일었다.

“어린애였나?”

“명예를 아는 자라면, 전사의 혼을 지닌 오크라면 목소리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을 거라 믿소.”

오크 사내, 생하울라는 들려오는 대답에 침묵했다. 들려온 목소리가 여성의 것이란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나 어린아이는 이야기가 달랐다. 상대는 자신에게 대답해 자신의 위치를 드러냈다. 그런데도 의미 없는 은신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자신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몰락한 일족의 생존자가 어린 아이라고 한다면, 그에게는 설사 자신의 친구였던 일족의 일이 아니더라도 그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것은 신성한 전장의 순례자의 의무가 아니었다. 마땅한 사람의 의무였다. 생하울라는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그러나 내 너의 모습을 확인해야겠구나. 부디 용서해다오.”

생하울라는 곧바로 자신이 숨어 있던 나무 밑동에 도착했다. 어떻게? 자신이 숨어있는 곳을 찾아냈지?


“미안하네, 친구여.”


생하울라는 주먹으로 나무를 쳤다. 벨투리안이 몸을 숨긴 나무는 결코 작은 나무가 아니었다. 몸통 둘레만 하더라도 생하울라의 몸의 서너 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듯 나무는 순식간에 엄청난 흔들림에 쳐했다. 벨투리안은 몸을 옮길 새도 없이 나무에서 떨어졌다. 떨어지는 벨투리안을 생하울라가  손으로 잡아챘다.

금발 머리의 작은 소녀가 가진 산호색 눈을 바라보며 생하울라는 말했다.


“안녕하신가?”


“…안녕하오.”

벨투리안은 화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전혀 매섭지 않았다. 화가 퉁퉁 난 벨투리안의 표정은 그저 평소 무뚝뚝했던 얼굴과는 다른 귀여움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었다. 벨투리안 또한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알고 있기에 더욱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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