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끊기지 않을 인연
"무슨. . . 어째서 그렇게 서두르는 거냐? 당장 오늘 마을을 떠나야 할 이유라도 있냐?"
당황한 아레히의 물음에 쯔르레이는 마틴을 상대로 곁눈질했다. 가면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쯔르레이가 마틴을 가리킨 것은 확연히 보였다.
마틴은 마치 동년배의 친구에게 말하 듯이 쯔르레이게 말을 거는 아레히를 보고 조금 당황해있었지만 이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을 눈치챘다. 아레히 역시 쯔르레이의 의도를 알아채고 마틴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불렀는데미안하지만 마틴, 오늘은 이만 돌아가 줄 수 있겠나?“
"네, 그럼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죠."
마틴은 아레히의 요청에 별 불만 없이 응했다. 애초에 관계없는 그가 남아서 이야기 할 이유는 없었기에 불쾌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이 어색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좀 더 낫다고 생각했다. 마틴이 집에서 나가자 아레히는 다시 쯔르레이에게 물었다.
"어째서 오늘 바로 떠나려고 하는 거냐?"
"나는 이 저주에 걸린 후로 항상 그 어떤 마을에서도 밤을 새지 않았다. 이유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
타당한 이유였다. 하루에 한번 신체가 바뀌는 사람이 한 곳에서 하루를 넘긴 채로 지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10년 만에 만난 친구를 상대로 얘기를 꺼내기에는 확실히 조금 궁색한 면이 있는 대답이었다. 아직도 그를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당연히 있다, 이 멍청아. 당장 하루 정도 우리 집에서 숨어 있어도 문제 될 건 없다고! 10년이다. 자그마치 10년이야. 무슨 10년이냐고? 내가 널 배신한 10년! 나에게 친구의 원래 모습조차 보지 못하게 하는 거냐? 내 죄가 그렇게 깊은 거냐? 나에게 사과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냐?"
“깊다.”
아레히의 말은 얼핏 적반하장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말이 지날 수록 처절한 자기혐오가 느껴졌다. 아레히는 쯔르레이의 단호한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위해 기꺼이 나를 희생했다. 그 사실에 나는 결코 불만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너는 나를 배신했고, 배신의 대가는 깊었다.”
쯔르레이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나는 일족이 모두 죽었는데, 혼자서 이런 추한 모습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쯔르레이는 모든 걸 토해내듯 말했다. 쯔르레이의 겉모습은 전혀 추하지 않았으나 그가 말하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아레히와 에리히는 어찌 말해야 할지 몰라 그저 듣고만 있었다.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너에게 배신 당해서 나는 일족에게 버림받았지만 나는 일족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어리석고 고지식하며 구닥다리에 한심한 놈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쯔르레이는 말을 끊었다.
“남은 건 네놈뿐이다. 일족을 버린 고결한 배신자여, 나의 친구여. 너는 기억하는가?”
쯔르레이는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방금까지의 중후한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맞는 목소리였다. 쯔르레이의 질문에 아레히는 당황했다. 기억하냐니, 무엇을? 어째서 갑자기 가면을 벗은 거지? 그리고 아레히는 곧 기억해냈다.
일족의 가면은 목소리를 변조한다. 그리고 그 변조된 목소리는 일족의 것이다. 살아있는 일족이 직접 목소리를 불어넣어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목소리를 불어넣을 일족은 누가 남았는가? 어째서 마틴과 에리히 모두 급변한 목소리에 어색함을 계속 느꼈는데, 자신은 아무런 어색함도 느끼지 못한 것인가? 아레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는 너에게 10년의 세월과 나의 순수함을 주었다. 너는 내 목소리 하나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10년이란 세월은 길었다. 가장 절친했던 친구의 목소리라 해도 잊어버릴 정도로. 쯔르레이… 아니, 벨투리안은 이것이 조금 억지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지워버렸다. 친구의 목소리를 잊어버릴 정도로 긴 시간 동안 그의 배신감도 그만큼 깊어졌다. 그에게는 억지를 부릴만한 자격이 있었다.
쯔르레이는 손에서 가면을 놓았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가면을 발로 밟아 버렸다. 가면은 아주 쉽게 두 조각으로 부서졌다. 유용한 물건이었다. 부서진 가면 조각을 보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쳤다. 그러나 이젠 감정을 갈무리할 때였다.
아레히는 망연자실한 채로 가면을 바라보고, 쯔르레이를 보았다. 에리히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가만히 있었다.
“이제 벨투리안은 죽었다. 이것이 마지막 일족의 유산이었으니. 네가 슈라헤를 계승할 생각이 없다면, 이것이 마지막이다.”
쯔르레이는 부서진 가면 조각을 줍고 말했다.
“나는 쯔르레이다.
쯔르레이의 선언이 끝나고 집은 조용해졌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아레히에게 다시 쯔르레이가 입을 열었다.
“듄벨의 주인이 죽었다.”
“뭐?”“네?”
아레히와 에리히가 놀라서 동시에 되물었다.
“마지막 조언이다.”
쯔르레이는 그 말을 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서 걸었다. 아니, 뛰었다. 아레히가 놀라서 “투르!” 하고 부르며 붙잡으려 했지만 잡히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아레히의 손길을 피해 그대로 아레히의 집 밖으로 도망쳤다. 아레히는 붙잡으러 바로 뒤따라 나왔지만 쯔르레이는 이미 사라져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
쯔르레이는 지체하지 않았다. 기척을 숨긴 채 곧바로 마을을 나섰다. 당연하게도 마을 경계를 지키는 경비병이 보였지만, 이런 작은 마을의 경비병이 쯔르레이를 눈치 채는 일은 없었다.
쯔르레이는 아레히에게 잡힐 생각이 없엇다. 듄벨의 이야기를 풀었으니 바로 자신을 쫓지는 못할 것이다. 쫓는다 하더라도 충분히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럴 여유를 벌어줄 수 있는 말이었다.
마을을 나서자 곧 눈 덮힌 숲이 나타났다. 이미 날씨가 풀려 크게 춥지는 않았다. 여전히 기척을 숨긴 채로 움직이면서 쯔르레이는 아레히와의 만남을 생각했다. 자신이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일까? 하지만 자신이 말은 모두 진실이었다. 그럴 자격이 있었다, 자신에게는.
가면을 부수게 된 것은 아쉬웠다.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목소리를 바꿀 수 있는 가면은 굉장히 유용한 물건이다. 애초에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던 거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하지만 당장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런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밤이 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 안에 최대한 멀리 길을 가야했다. 아레히는 말했다. 주변 마을에 자신이 있었던 용병단이 있다고. 아레히가 과연 그들까지 동원해서 자신을 찾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혹시 모르니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쯔르레이는 지도를 펴들었다. 예전에 막 산에서 내려왔을 때 사둔 조잡한 지도였지만, 쯔르레이가 지나온 곳은 직접 지도를 고치고 그려서 상당히 그럴 듯해 보였다. 아직 가지 않은 곳은 여전히 조잡했지만 길을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지도를 계속 보며 걷던 쯔르레이는 곧 길을 정하고 지도를 가방에 넣었다. 주변 마을에 들르지 않고 꽤 먼 방향으로 돌아가기로 정했다. 목적지로 잡은 곳은 볼타르 왕국의 수도였다. 3~4일 정도 걷다 보면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루마다 몸이 바뀌어 체력도,걷는 속도도 달라지는 것 때문에 쉽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마을에 들리지 않아 문제가 되는 것은 식량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위험부담을 감수할 수준은 아니다. 이틀에 하루는 이런 몸이라 많은 식량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적당한 짐승이라도 한 마리 잡으면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런 몸이기 때문에 마을에 들르지 않는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서너 시간 동안 꾸준히 걸음을 옮긴 쯔르레이는 나무 밑둥에 몸을 기대고 쉬기 시작했다. 자정이 되기까지는 아직 반나절 정도가 남아있었지만 어린 아이의 몸이었기에 그 시간 동안 꾸준히 걷는다고 해도 멀리가긴 힘들 것이다.
쯔르레이는 곧 생각을 정리했다. 이전에 이런 몸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체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막움직이다 탈진해서 쓰러진 적이 있기에 주의해야 했다.
아레히가 자신을 쫓아오지 못하더라도 용병들을 보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닌 이상 자신이 숨는 것을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중간에 적당히 숨을 곳을 발견한다면 그 곳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이런 몸으로는 맘 놓고 휴식을 취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다시 일어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가올 밤을 준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