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화 〉끊기지 않을 인연 (4/162)


  • 〈 4화 〉끊기지 않을 인연

    “아레히씨, 괜찮습니까?!”

    이야기가 끝나가던 도중, 누군가 갑자기 난입해왔다. 벨투리안에게 미행을 당했던 용병이었다. 부서진 문짝을 보고 아레히의 신변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거라 지레짐작한 그는 바로 집 안에 들어와 아레히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곧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목격한 것은 바로 테이블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금발머리의 작고 예쁜 소녀였으니까.

    “어, 어린애?”

    “크흠.”

    아레히는 짧게 헛기침을 했다. 용병은 정신을 차려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아레히도 에리히도 다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레히의 얼굴은 언제 표정을 구겼냐는 듯, 태평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헛걸음을 하게 해서 미안하군, 마틴.”

    “그,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언가 좀 설명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이리저리 말하자면 조금 길다만, 너희들에게 부탁했던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일족이… 멸망했다는 군.”


    아레히의 입에서 나온 소식에 마틴은 크게 당황했다. 갑작스럽게 듣기에는 지나치게 큰 얘기였다. 마틴은 이제 걱정을 덜었으니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지, 일족의 멸망을 안타깝다고 하며 조의를 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그렇군요. 그럼 이 아이는?”

    마틴의 질문에 아레히는 난감해졌다. 아레히는 마틴과을 비롯한 다른 여러 용병들과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해오던 사이였다. 그들과 지내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고 그중에는 자신의 친구 벨투리안의 이야기 또한 들어있었다. 이제 와서 이런 어린 소녀가 벨투리안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소리였다.

    무엇보다 그 자신 또한 아직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증표와 이야기 덕분에 이 소녀가 분명히 벨투리안이라는 것은 어느정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건장한 성인 남성이 어린 소녀로 변했다는 이야기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이런 저주는 함부로 떠벌리고 다닐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  아이는 뭐냐면, 음....”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아레히가 고민하며 말을 끌고 있자 벨투리안이 나섰다. 벨투리안은 호로록 마시고 있던 물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말했다.


    “내 이름은 쯔르레이다.”

    종달새 같은 목소리였다. 마틴이 이전에 술집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마틴이 고개를 들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당황해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마치 귀족가의 영애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어여쁜 소녀였다. 투박하고 온갖 곳이 기워진 누더기 가죽 옷 따위로는 헤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사냥꾼 벨투리안의 딸이요, 멸망한 슈라헤의 마지막 생존자이다. 나는 일족의 생존자로써 유일하게 살아있는 일족의 피가 흐르는 자에게 일족의 멸망을 알릴 책임을 지고 있기에 그 의무를 실행하기 위해 이 자를 만나러 왔다. 나는 일족의 암살자가 아니고 듄벨의 첩자 또한 아니다. 대답은 되었나?”


    마틴은 입을 다물었다. 귀여운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뚝뚝한 말투로 소녀는 고했다. 물론 그런 말을 들었다고 바로 믿어준다면 그건 바보나 다름없었지만 아레히는 이미 소녀의 말을 믿고 있는 듯 했다. 일단 아레히 부자의 안전을 확인했으니 그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소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듄벨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듄벨의 이야기는….”

    “내가 산에서 내려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나시아 듄벨이란 이름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어려울 것도 없더군. 당장 저쪽들을 찾아다니는 이들이 있었으니.”

    타당한 이야기였다. 듄벨가는 아직 아나시아 듄벨의 아들인 에리히를 노리고 있었다.


    “그럼 저 부서진 문은?”


    “내가 부셨다.”


    마틴은 소녀의 대답을 듣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소녀의 모습은 분명 암살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으나  행동은 암살자, 아니 그보다 더 무자비했으니. 아레히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면 그는 소녀를 제압했을 것이다.

    “그럼 저는 일단 가보겠습니다. 다른 애들도 아레히씨를 걱정하고 있으니 곧 이쪽으로 올게 분명하니까 제가 가서 말을 하죠. 가능하다면 나중에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리죠 아가씨.”

    아가씨라는 말에 벨투리안의 표정이 살짝 찡그러졌다. 마틴은 눈치채지 못하고 집을 나서려 했으나 아레히가 만류했다.

    “고맙네, 마틴. 그런데 어차피 다른 애들은 어차피 이곳에 올 테니까 지금 가는 것보다는 여기 있는 게 좋지 않을까? 도와줬으면 하는 일도 있고.”


    “도와줄 일이요?”


    “문을 고쳐야 되거든.”

    아레히는 잠시 뜸 들였다가 덧붙였다.


    “실은 자네가 말해주기 전까지 잊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나 혼자서는 좀 힘들 것 같고.”


    마틴은 잠시 문을 부순 범인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틴은 피곤한 목소리로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마틴과 아레히는 그 길로 문을 고치러 나갔다. 물론 그게 정말 단순히 문을 고치러 나간 것이라고 벨투리안은 생각하지 않았다. 뭔가 할 얘기라도 있는 거겠지. 신경쓰지 않았다.

    에리히는 아직도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당사자인 벨투리안은 평온하게 물통이나 홀짝이고 있었다.

    “저기 베, 벨투리안씨? 실례지만 그 쯔르레이라는 이름은…?”


    “가명이다.”

    벨투리안이라는 이름은 일족의 언어로 만들어진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이름은 아니었지만 이런 여자아이의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근데 그, 얘기하신 것들이 정말 사실인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잘 믿어지지가… 당신이 정말 그 벨투리안이 맞는 건가요?”

    “그래.”

    벨투리안은 길게 말을 할 생각이 없다는 듯,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제대로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로 대화가 끝나자 방 안이 어색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밖에서 문을 고치는 소리가 들리는  말고는 조용했다.

    벨투리안의 원래 모습으로 있을 때만 해도 재잘재잘  말하던 에리히지만 아무래도 저런 모습의 소녀와 같이 있는 것은 당황스러운 듯하다. 무엇보다 아직 에리히에게는 저 소녀가 어제 자신을 구해주었던 벨투리안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저 어여쁜 소녀와 있는 거 같아 가슴이 살짝 두근거릴 뿐이었다.


    바깥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벨투리안은 기척을 느끼자마자 벗어두었던 가면을 다시 쓰고 후드를 올려 머리를 감췄다.

    “벨투리안씨, 갑자기 다시 가면은 왜 쓰세요?”

    “쯔르레이라고 불러라. 아까는 그 자를 빠르게 납득시키기 위해 굳이 모습을 숨기지 않았지만 이제는 굳이 모습을 드러낼 이유가 없으니까.”

    가면을 쓰자 바뀐 목소리에 에리히는 적응이 안되는 듯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무뚝뚝하지만 종달새 같던 목소리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성의 굵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바뀌었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다시 가면을 썼군요?”


    마틴의 목소리였다. 마틴과 아레히가 돌아왔다. 손에는 아직 그대로 문을 고치던 연장을 들고 있는 채였다. 아레히가 이미 자세한 얘기(적당히 숨길 부분은 잘라냈겠지만)를 했을 텐데도 마틴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해보였다.


    “더 보일 이유가 없으니까.”

    무뚝뚝한 대답에 마틴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 역시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어색한  보였다. 에리히와는 달리 이미 한 번 들은 적 있는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만 아레히만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아까 다 말해버려서 굳이 또 소개를 할 필요가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앞에서 얘기는 제대로 해둬야겠지. 이쪽은 쯔르레이, 내가 얘기했었던 내 친구 벨투리안의 딸이네.”

    아레히는 요령 좋게도 아까 벨투리안이 말했던 가명으로 그녀를 소개했다.

    “이쪽은 마틴이야. 예전에 용병 일을 할 때 같이 일하던 동료이지. 나는 은퇴했지만 이 친구는 아직 남아서 일을 하고 있는데,  주변 마을에 용병단의 본거지가 있어서. 이쪽에는 자주 오곤 하지.  미행했던 건 내가 부탁했던  때문이야. 쫓기고 있는 몸이라서 말이지.”


    “안녕하세요, 마틴 우버라고 합니다. 편하게 마틴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마틴은 용병임에도 불구하고 보기 드물게 예의범절 바른 청년이었다. 겉보기에도 확실히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그리고 자신이 알기로는 실제로 어린 쯔르레이에게도 존댓말로 인사했다.

    마틴의 인사에 쯔르레이는 말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틴은 속으로 확실히 엄청 무뚝뚝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바깥에서 아레히는 이미 쯔르레이가 아버지인 벨투리안을 닮아 굉장히 말이 없는 아이라고 이미 말을 해준 것이다.

    “사실 문을 고치던 도중에 다른 놈들도 찾아왔는데, 당장은 피곤하기도 할 테니 굳이 모두와 인사 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일단 대충 설명해주고 돌려보냈어. 마틴은 일단 한번 얼굴을 보였으니 인사 정도는 하는 게 좋을  같아서 잠깐 남았지만.”

    쯔르레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후로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쯔르레이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틴은 어색한 분위기에 당황하지 않고 요령 좋게 말했다.

    "피곤한 것 같은데 굳이 지금 더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인사야 끝냈으니 뭔가  더 얘기할게 있으면 나중에 모두 모였을 때 좀 더 얘기하도록 하죠."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 느껴지는 사려 깊은 제안이었다. 아레히 또한 그 말에 동의하며 쯔르레이에게 물었다.

    "투르. . . 아니, 쯔르레이 넌 어떻게 생각해?"

    아레히는 자기도 모르게 원래 친구의 이름으로 불렀다가 다시 고쳐 말했다. 다행히 마틴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투르라는 이름은 쯔르레이라는 이름의 애칭으로도 특별히 이상한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쯔르레이는 아레히와 마틴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아니."

    "뭐?"

    "인사는 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부로 이 마을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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