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화 〉끊기지 않을 인연 (3/162)


  • 〈 3화 〉끊기지 않을 인연

    벨투리안의 도움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눈보라가 내리던 산맥에서 내려온 에리히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한 것은 그의  침대에 드러눕는 것이었다. 밥을 먹는다던지, 아버지와 재회의 대화를 나눈다던가 하는 그런 일들은 모두 제쳐놓고 쉬고 싶었다. 무언가 다른 일을 하기 에는 너무 지쳐있던 것이다.

    아레히 또한 지친  뻔히 보이는 아들을 꼭 안아준 후에 먼저 휴식을 취하기를 권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레히는 자신의 아들을 구해준 사람의 이야기 같은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

    에리히의 단잠은 반나절도 못가서 깨지고 말았다. 평소엔 특별히 잠귀가 밝은 편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주변 소리가 전부 에리히에게 전해지듯이 들려와 깊은 잠에 빠진 상황임에도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된 것이다. 결국 잠에서 깨어난 에리히는 조용히 방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에리히가 목격한 것은, 거대한 벨투리안의 검을 들고 있는  몸을 후드로 감싼, 가면 때문에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작은 체구의 누군가와 그에게 석궁을 겨누고 있는 아버지였다.

    “벨투리안이라고...? 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곧 아레히의 멍청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자리를 분노가 차지했다.

    벨투리안이라는 이름, 그의 가장 친했던 친구의 이름, 명백히 그가 아닌 자가 자신의 친구의 이름을 대는 모습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분명했다. 그러나 곧 내밀어진 상대의 손을 보고 그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벨투리안의 손에 걸려있는 건, 빛바랜 에메랄드와 짐승의 이빨이 함께 엮여있는 투박한 목걸이였다.

    “아레히 오바드. 나를 보아라.”

    벨투리안이 가면을 벗고 말했다.

    “나는 흙을 밟는 용의 아들 슈라헤의 마지막 송곳니이다. 아레히 오바드가 아나시아 듄벨과의 결혼을 위해 배신한 친구 벨투리안이 남긴 찌꺼기이다.”


    방금까지와 전혀 다른, 청량하고 어린 목소리로 벨투리안의 말이 아레히에게 이어졌다. 아레히는 들고 있던 석궁을 떨어트렸다. 그거 부정할  없는 과거가 그에게 다가왔다.

    목걸이는 지금은 타계한 자신의 아내 아나시아 듄벨과 결혼했을 때의 증표였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증거였다. 자신을 탈출시켜준 친구 벨투리안에게 주었던 것으로, 짐승의 이빨은 자신이 처음 잡은 늑대의 송곳니요, 에메랄드는 아나시아의 가문인 듄벨 가의 상징이었다.


    아레히는 목걸이를 보면서 과거를 떠올렸다. 자신은 사랑을 위해서 친구에게 모든 희생을 떠맡겼다. 그를 배신했다. 자신이 받아야 할 모든 벌이 그에게 내려졌을 것이다. 목걸이는 반쯤 억지로 떠맡긴 것이었다.

    내 목숨을 빚졌으니 언젠가 내 목숨을 바친다는 약속의 증표였다. 이뤄질 가능성도 희박한 그저 자기만족일 뿐인 약속을 위해 서로의 피를 목걸이에 뿌리고 맹약하였다. 자신이 배신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친구에게.

    그는 가끔씩 자신의 친구가 목걸이를 들고 나타나 약속을 지키라고 말 하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사실상 이행이 불가능한 약속이었다. 어쩌면 벨투리안은 자신이 도망친 그 날 목이 잘렸을 수도 있다. 괴로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너는 벨투리안…의 딸인가?”

    그러나 약속은 전혀 상상도 못한 모습으로 이뤄졌다. 아레히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일족의 피로 이루어진 맹약으로 묶인 목걸이는 오직 맹약자와 그 혈족만이 가질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아이는 그가 배신한 친구의 딸일 것이다.

    “투르는 죽었나…?”

    “아니, 내가 벨투리안이다.”



    그러나 벨투리안은 부정했다.


    ~

    슈라헤, 용을 잡는 송곳니, 거창한 이름이나  이상 용이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에는 그저 도룡지기일 따름. 남은 것은 전통과 고집뿐인 쇠퇴해가는 일족이었다.


    아레히는 족장의 차남이었다. 형을 이긴다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다음 대의 족장이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러나 아레히에게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과거의 영광만을 붙잡고 변하지 않는 일족의 모습은 그에게는 그저 추해보일 뿐이었다.


    그런 아레히가 바깥 세상에 나가는 임무에 자원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 것이다. 처음 보는 세상에 그는 흥분했고 즐거워했다. 그리고 거기서 운명을 만났다. 고고한 들개, 아나시아 듄벨을. 왕국의 들개라 불리는 명가 듄벨가의 영양이었다. 일반적인 귀족 여성과는 다르게 활발하고 무예를 즐겼으며 무엇보다 짧게 자른 연녹색 머리가 매력적인 여자였다.


    하룻밤의 불같은 사랑이었다. 격렬한 정사가 끝난 후, 설산의 사내와 들판의 여인은 서로의 목걸이를 교환했다. 듄벨의 에메랄드와 슈라헤의 송곳니로 아나시아가 성인식 날의 선물로 받은 에메랄드였고 아레히가 처음 잡은 늑대의 송곳니였다. 둘은 후를 기약하지 않고 헤어졌다. 그렇게 끝났으면 그냥 좋은 추억으로 남았을 것을.


    일족으로 돌아간 아레히가 그 날을 그저 추억하기만을 4년, 그는 다시금 바깥세상으로 가는 임무에 지원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아나시아 듄벨을 만났다. 운명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4년 만에 다시 만난 아나시아는 지나간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머리는 좀 더 길었고 키가 조금 자란 것 같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는 다른 것이었다. 그녀 옆에는 아이가 있었다. 3살쯤 되었을까. 아레히는 보자마자 아이가 자신의 아이임을 깨달았다. 아닐 수가 없었다. 아나시아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레히는 일족을 떠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

    상황이 일단락  후, 셋은 자리를 옮겨 부엌으로 향했다. 여럿이서 앉을만한 곳이라곤 부엌 밖에 없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아레히는 우선 가장 급한 질문부터 하기로 했다.

    “네가 벨투리안이라고…? 그렇다면 네 그 몸은 어떻게 된 것이지?”

    벨투리안은 후드를 벗었다. 풍성한 금발머리와 붉은 색의 눈을 가진 어린 소녀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나자 아레히와 에리히 부자는 모두 말을 잃어버렸다. 거대한 몸집을 가졌던 벨투리안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네가 나를 배신한 후, 나는 일족의 규칙을 어긴 죄로 일족에서 가장 낮은 자가 되었다. 유리히 덕분에 추방은 면했지만, 나는 아무런 자격도 갖지 못한 채 마을과 멀리 떨어진 곳에 격리 당했다. 격리라고는 해도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유리히가 애쓴 덕분이겠지.”


    종달새 같이 예쁜 목소리였다. 퉁명스러운 말투는 아름다운 외모와 갭을 일으켜 훨씬  소녀를 소녀답게 느껴지게 했다. 가면에서 나오던 중년 남성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에 에리히는 당혹스러워했다. 벨투리안은 다시 한 번 물통을 홀짝이고 말했다.


    “그렇게 살기를 10년이었다. 그동안 나는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일족이 내린 벌을 계속 수행했고 반항 같은  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후에는 유리히의 도움으로 감시 받는 일도 사라졌다. 유리히는 내가 일족의 품으로 돌아올  있게 노력해주었지. 그러던 중, 유리히에게 작은 부탁을 받았다.”


    “부탁?”

    “생 산맥에 있는 일족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와달라는 얘기였다.  달 전부터 그들에게서 오던 연락이 끊겼다고 하더군. 나 말고도  명 사람을 보냈지만 모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유리히는 내가 이 일을 제대로 수행하고 돌아온다면 격리가 끝나고 돌아올 수 있다고 했지만, 내가 가는 걸 반겨하는 눈치는 아니었지.”

    슈라헤 일족의 본거지는 슈라헤 산맥에 있었지만 일찍이 과거에 갈라졌던 다른 일족들은 생 산맥에 자리를 잡았다. 벨투리안은 부탁이라고 말했지만 이미 보냈던 이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사실상 희생양으로 쓰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더러운 놈들! 희생양이라니...”

    아레히는 분개했다. 겉으로는 벨투리안을 희생양으로 내몬 일족들에 대한 분노였지만 실상은 벨투리안을 그런 상황으로 몰은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벨투리안은 꼴이 우스웠지만 지적하지 않고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유리히의 부탁을 받아들여 생 산맥으로 갔다. 하지만 거기에 일족은 없었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기에 헤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헤맨 것이 아니었다.

    “그건 무슨 말이지?

    “나는 정확히 왔다. 문제는 그곳이 마을이 아니라, 마을이었던 곳 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돌아갔지만, 이미 늦었다.”

    벨투리안이 잠깐 뜸을 들인 후, 말했다.


    “거기엔 울푸레가 있었다.”

    “용을 만났단 말인가?”


    “일족들은 전부 죽었다. 시체조차 남지 않고 마을의 모든 것이 녹아버렸지. 그 위에 검은 용이 마치 신처럼 앉아있었다.”


    지금까지 거의 무표정했던 벨투리안의 얼굴이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다. 씁쓸한 미소였다.

    “용이 날 바라보자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공포라던가, 분노라던가, 그런 것은 느끼지 못했다. 그저 나는 이것이 결코 대적하지 못할, 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인과라는 것을 이해했을 뿐이다. 자포자기였지.”

    벨투리안이 살짝 웃었다.


    “용은 나를 보고 말했다, ‘울푸레’라고. 말이라고 하긴 조금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용은 입을 벌리지 않았으니까. 그저 나를 바라봤고 내게 들렸을 뿐이다. 용의 전언이. 그 순간 그 용이 울푸레라는 걸 깨달았다. 그저 이름을 말했을 뿐인데. 그 후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후에 나는,”

    벨투리안은 장갑을 벗었다. 작고 새하얀 예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이런 모습이 되어있었다.”

    “...용의 저주라도 되는 것이냐? 어린 계집애로 변하는 게? 울푸레는 변태 소아성애자라도 되나?”


    황당한 저주의 이야기에 아레히는 주저 없이 용을 모욕하는 말을 했다. 하지만 단순한 농담으로 치부하기에는 해괴한 저주인 것은 분명했다.

    “나는 하루가 끝나는 시점마다 모습이 변한다. 하루는 내 원래의 모습이고 하루는 이 어린 소녀의 모습이지. 네 놈의 아들, 에리히라고 했던가? 너는 이미 내 원래의 모습을 봤지.”

    당황한 표정으로 계속 이 황당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리히는 자신을 부르는 벨투리안의 모습에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네? 아 네, 네. 봤죠. 어, 크고 멋있었어요, 회색머리였고.  검을 들고 계셨죠.”


    “처음에는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어째서 이런 모습이 되었는가를 고민하며 내가 격리됐던 집으로 돌아갔지. 마을은 더 이상 지낼 곳이 없게 됐으니까. 하루가 끝나는 시간이 되자 끔찍한 고열과 함께 나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고열이라고? 매일? 괜찮은 거냐?”


    “견딜만하다.”


    벨투리안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계속해서 그 집에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태로 평생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일족의 멸망을 너에게 전해야 했다. 너는 일족을 버렸지만, 남은 일족은 네가 유일했기에 나는 너에게 이 사실을 알릴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멸망한 일족의 책임을 져서 뭐하겠느냐만은.”

    “일족의 멸망 같은 건…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레히의 표정은 냉정한 말과는 달리 조금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형이 죽었다는 건 조금 가슴이 아프군…. 어차피 평생을 만나지 못할 거란 사실은 똑같은 데.”


    “그렇게 상황을만든 것은, 너였지. 유리히는 도망가지 않았다. 너와는 달리.”

    벨투리안을 배신하고 도망친 자신을 비꼬는 얘기에 아레히의 표정이 죄악감으로 달아올랐다.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건 그가 감내해야 할 과거가 분명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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