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화 〉끊기지 않을 인연 (2/162)



〈 2화 〉끊기지 않을 인연

눈 덮인 산의 아래에는 벨투리안의 목적지인 마을이 있었다. 보라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듯 마을 또한 눈으로 덮여 있었다. 다행히 산 속보다는 훨씬 따뜻했다.

나흘 간의 산행이 끝났으니 조금은 쉬는 게 좋을 터이다. 쉴 곳을 찾는 것인지 벨투리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아직 아침이라 그런지 마을은 한산했고 사람들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벨투리안은 목표로 하는 건물을 찾았다. 금색 글씨와 맥주 모양의 그림이 멋들어지게 그려져 있는 간판이 눈에 뜨이는 술집이었다. 술은 분명 찬 몸을 데우기에 좋은 것이지만, 벨투리안의 어린 몸에게는 맞지 않을 것이다. 벨투리안의 목적은 휴식이 아닌  하다.


술집에 들어선 벨투리안은  술집 안의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끌었다.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이런 작은 몸집으로 후드를 뒤집어 쓴 채 거대한 가방과 검을 들고 있는 사람이란 것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모습이니까.

아직 이른 시간 때문인지 술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았다. 술집의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 한 명과 구석진 곳의 한 테이블에 같이 앉아있는 용병 서너 명 뿐이었다. 벨투리안은 곧장 중년의 남성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사람을 찾고 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에게서 작은 몸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나오자 중년 남성의 표정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그러나 중년의 남성은 괜한 호기심을 접고 대답했다.


“이 곳은 정보 길드 같은 곳이 아닙니다. 누구를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찾는다면 좀 더  도시로 가는 게 좋을 거요.”


그의 대답은 확실히 도움이 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어색한 말투 속에는 복잡한 일에는 연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하지만 벨투리안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젊은 남성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도 함께였다.


“이렇게 생긴 남자를  적이 있나?”

초상화는 굉장히 훌륭했다. 안에 담긴 남성의 미모가 아니라 그 얼굴을 담아낸 그 솜씨가 말이다. 초상화를 힐끗 보더니 순간 그의 얼굴에 당황스런 표정이 스쳐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벨투리안은 놓치지 않았다. 금방 표정을 갈무리한 그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글쎄, 모르겠군요. 언제 한 번 봤을지는 모르겠지만 보다시피 외부인이 자주 들르는 곳이라서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얼굴을 내가 전부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방금 전의 어색한 대답과는 달리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대답이었다. 거짓말이란 걸 확신했다. 이런 마을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외부인이 많이 들를 곳은 아니었다.

“그렇군.”


벨투리안은 굳이 그의 표정을 지적하지 않았다. 이미 필요한 정보는 전부 얻었다. 술집에서 나가려는 벨투리안에게 그가 말을 걸었다.

“혹시 무슨 일로 그 남자를 찾고 있는지 알려 줄 수 있습니까? 어쩌면 들으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는데.”

목소리에 대한 호기심을 참았던 그의 신중함은 어디로 갔을까, 그는 상당히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을 했다. 대화가 상당히 흥미로웠던걸까?  테이블의 용병들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벨투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술집에서 나온 벨투리안은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적당히 걸음을 옮기다가 그대로 기척을 숨겼다.

미행이었다.

미행의 대상이 갑자기 완전히 사라져버리자 상대는 당황한 듯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기척을 숨긴 채로 벨투리안을 찾는 그 모습에서는 전문가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러나 결국 그는 벨투리안을 찾지 못했다. 미행의 정체는 술집에서 대화를 지켜보던 용병이었다.


정체를 알아낸 벨투리안은 기척을 숨긴 채로 다시 술집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술집의  앞에는 여러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있었다. 그리고 벨투리안의 작은 발자국과 미행을 하던 자의 것이라 짐작되는 큰 발자국이 같은 방향으로 나있었다. 벨투리안은 반대쪽 방향으로 나있는 다른 하나의 발자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기이하게도 벨투리안이 지나간 눈길에는 아까와는 달리 발자국이 생기지 않았다.

~

발자국을 쫓아 도착한 곳은 마을의 외곽 쪽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곳으로 온 용병은 아마 아직   안에 있는 듯, 집의 문 앞에는 들어가는 발자국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벨투리안은 집 안에서 하고 있는 얘기를 엿들으려 했지만 아쉽게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상대가 엿들을 수 없게 막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린 신체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별 수 없이 벨투리안은 계속해서 몸을 숨긴 채 바깥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용병이 집 밖으로 나왔다. 벨투리안은 그가 집에서 멀어져 보이지 않게  때까지 기다렸다. 무슨 소란이 일어나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용병이 멀리 갔을 만한 시간이 지나고 벨투리안은 행동을 개시했다.

나름 튼튼하게 만들어진 문은 잠겨있었다. 정직하게 노크를 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벨투리안은 검을 들었다. 거대한 검으로 문고리를 쑤시자 싱거우리만치 문은 간단히 열렸다.

심호흡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조금의 지체도 없이 벨투리안은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벨투리안을 반겨준 것은 하나의 화살이었다. 정확히 벨투리안의 옆의 문짝에 명중한 화살은 그대로 문을 부순  바깥으로 날아 가버렸다. 허무하게 침입자를 허락한 문짝의 최후였다.

“뻔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다음번에는 빗나가지 않을 걸세.”


석궁을 들고 있는 회색 머리의 남자가 벨투리안을 조준하며 말했다. 청년과 중년 사이의 경계를 지나고 있는 듯한 나이로 보였다. 벨투리안의 지금 모습에 있어서는 아버지 뻘이라고 해도 쉽게 믿을 수 있는 정도였다.


“일족에서 보낸 암살자인가?”

그러나 자식 뻘의 아이에게 하는 말치고는 그 내용이 심히 살벌했다. 벨투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오히려 벨투리안이 일족에서 왔다는 것을 확신한 듯 했다. 아니, 확신하고 말 것도 없었다. 벨투리안이 쓰고 있는 그 가면은, 분명 일족의 것이 분명했다.

“10년이란 기간 동안, 일족에서는 이미 나를 포기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제 와서야?”


벨투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집 안을 둘러보기만 했다.


“그렇게 여유 갖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말이야. 네가 그 어떤 실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런 곳에서 내 화살을 피할 수는 없을 테니.”


분명 그러했다. 이런 장소, 이런 거리에서는 그 어떤 이가 오더라도 남자의 화살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절대적인 우위의 상황에서도 남자는 조금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신중했고

“10년 사이에 일족에서 어린애도 암살자로 쓰는 짓을 시작했나? 너 같은 놈을  기억은 없는데 말이지. 내가 나가 있는 동안 일족이 그 정도로 멍청해졌나? 아무리 내가 우습게 보여 진다 해도  같은 아이에게 당하지 않을 것은 일족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계속 집안을 둘러보기만 하던 벨투리안은 처음으로 남자의 물음에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그저 확인에 불과했다.


“아이가 있군.”


남자의 얼굴이 순간 창백하게 식었다. 덥지 않은 날씨임에도 남자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혼자 왔나?”

벨투리안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다행이군. 걱정 없이 너를 죽여도 되겠어.”


남자는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벨투리안을 죽인다고 선언했다. 아이를 죽이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그의 손이 석궁의 방아쇠를 당기기만 해도 벨투리안은 죽음을 피할 수 없겠지.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남자는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췄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벨투리안의 이야기는 그럴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족은 멸망했다.”


“...뭐?”


남자의 비장하던 표정이 얼빠지게 변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우스꽝스러운 표정이었다. 벨투리안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떠올랐다. 가면은 그 미소를 전달해주지 않았지만.

벨투리안은 멍하니 있는 남자를 무시하고 그대로 집 안으로 들아가 의자에 앉았다. 남자는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석궁을 벨투리안에게 향했지만 이미 아까와 같던 비장한 기세는 없어진 상태였다.

“방금  말은 무슨 뜻이지? 일족이 멸망했다고?   자세히 설명하는  좋을 거다.”

“그럴 필요 없다. 일족은 멸망했다. 살아남은 것은 나, 그리고 ‘아레히 오바드’  뿐이다.”


네 아이를 제외한다면 말이지. 벨투리안의 어조는 평탄했다. 그러나 그 말에 담긴 내용은 무거웠다. 단 둘 뿐이서야 일족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일족이 멸망했단 걸 증명할 수 있나?”

“증명할 필요도, 의미도 없다. 애초에 일족은 너에게 암살자를 보낼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너도 알고 있었을텐데? 설마 지금까지 암살자를 못본게 네가 잘 숨어서 일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까지 단  번도 암살자가 오지 않은 것은, 너의 숨는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유리히가 너를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형이...”


아레히가 석궁의 조준은 유지한 채 잠시 감상에 잦아들었다. 정체모를 일족의 방문자의 말은 아직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얘기가 사실이라면 유리히, 그의 형이 그에 대한 정을 버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안도할 것은 없다. 유리히 또한 이미 죽었으니까.”


벨투리안은 아레히의 그런 감상을 바로 깨버렸다.


“안도...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나는 아직 너를 신뢰하지 않아. 네 놈은 아직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했어.”

벨투리안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갑작스런 행동에 아레히가 석궁을 긴장했지만 그 품 안에서 나온 것은 단순한 물통이었다. 벨투리안은 살짝 가면을 위로 올리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 가면 속으로 보인 흰 피부에 아레히는 순간 당황했다. 흰 피부라고?


“용을 잡는 일족, 용을 사냥해 용을 먹고 용의 피로 몸을 씻는 슈라헤. 그 우스꽝스러운, 의미없는 이름. 우리는 그에 걸맞게 멸망했다.”

슈라헤는 벨투리안과 아레히가 태어난 일족의 이름이었다. 그들은 1년 내내 눈이 그치지 않는 설산에서 사는 수렵 민족으로 고대에는 용을 사냥하고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로 뛰어난 사냥꾼들이다.


그러나 현재의 그들에게 진짜 용을 잡을 능력 같은 것은 없었다. 진짜 용이라는 것들이 모두 마경 너머로 사라진 현대에 용 사냥꾼이라는 이름은 그저 허울뿐이었다. 아레히가 일찍이 10년 전에 뛰쳐나온 곳이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 고귀한 검은 용, 애끓는 비명의 주둥아리, 재앙을 조각하는 울푸레.”

“무슨 소리냐? 울푸레라니.”


아레히는 명백하게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울푸레라는 이름은 수천 년 전의 고룡의 것으로 지금에 와서는 전설과 민담, 문헌으로만 알  있는 존재였다. 갑자기  그런 이름이 나오는지 아레히의 상식으론 이해하기 힘들었다.

“말 그대로다. 울푸레가 왔고 일족은 멸망했다.”


“갑작스레 나타나 전설 속의 존재가 일족을 멸망시켰다고 하는 것은 나보고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애초에 네 그  피부… 슈라헤에게 흰 피부의 아이는 없다!  존재조차 믿을  없어!”

벨투리안은 다시 물통을 들어 홀짝이며 대답했다.

“일족을 버린 주제에, 아직도 일족에 대한 일말의 애정이라도 갖고 있었나? 안타깝게도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 일족의 끝에는 인과도 복선도 없었다. 그건 지진이나 해일, 눈사태 같은 것이다. 흔한 일이지.”


벨투리안은 답했다. 그 말에는 지금까지의 무미건조한 말투와는 다르게 조금의 짜증이 담겨 있었다. 당연히도 아레히는 그런 말로 만족할 수 없었다.


“증거가 없다면 믿을 수 없어.  존재조차 알 수 없다면 더더욱.”


“미안하지만, 나는 너에게 믿음을 줘야 할 의무 같은  없다. 그저 마지막 생존자인 너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했을 뿐이다.  이상 너에게 용무 따윈 없다.”

“그렇다면 대체 너는 어떻게 울푸레에게서 살아남은 것이지? 흰 피부의 아이라니, 평생 들어본 적이 없다. 슈라헤에게서는.”

“일찍도 묻는군. 멍청한건가, 눈치가 없는건가?”


벨투리안은 빈정거렸다. 벨투리안의 태도에서는 아레히에 대해 숨길  없는 조롱이 나타나고 있었다.


“아직 화살이 너를 향하고 있단 걸 상기해야 할 텐데.”


“누구...?”


둘의 이야기는 그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갑자기 아레히의 말을 끊은 것은, 위층에서 내려온 아레히와  닮은 소년이었다. 갑작스런 소년의 난입에 당황한 아레히가 외쳤다.


“어서 올라가!”


어느 정도 벨투리안의 말을 수긍했을지라도 정체불명의 존재를 신뢰할 수는 없었다. 무슨 무기를 숨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레히의 외침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둘의 반응은 아레히의 반응과는 상당히 동떨어져있었다. 벨투리안은 살짝 당황한 듯 했고 소년은 벨투리안을 계속 살펴보고 있었다. 아니, 벨투리안이 들고 있는 검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 검은... 벨투리안 씨의 검?”

그리고 소년에게서 나온 한 마디의 말은, 아레히에게도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아레히는 예의 그 얼빠진 표정으로 벨투리안을 보며 말했다.

“벨투리안이라고?”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소년은 벨투리안이 산맥에서 만난 에리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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