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화 〉끊기지 않을 인연 (1/162)


  • 〈 1화 〉끊기지 않을 인연

    벨투리안의 발이 가득 쌓인 눈길에 발자국을 남기며 걸음을 옮기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거세게 내리던 눈보라는 그쳤지만 그새 쌓인 눈은 안 그래도 험한 산세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고 있었다. 웬만큼 건장한 사람이라 해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길을 벨투리안은 표정 한번 찌푸리지 않고 계속 걸어 나갔다.

    다행히 해가 말짱히 떠있는 걸 보면 당분간 눈보라는 오지 않을 것 같다. 설산에 들어온 3일 동안 내리치던 눈보라가 그쳤다고 산세가 변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눈보라가 칠 때보다는 더욱 수월하게 움직일  있었다. 이대로 가면 아마 내일쯤에는 산을 내려갈  있을 것이다.


    벨투리안은 태양의 위치를 파악하면서 이동했다. 그러던 도중 풀숲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벨투리안은 조용히 등에 매고 있던 대검을 손에 쥐었다. 이런 겨울에 산에서 움직이는 생물은 적었다. 맹수조차 겨울잠에 빠질 시기였고, 맹수가 아니라면 인간뿐이었다. 조난자던 모험자던, 그에게는 위험한 존재였다.


    곧 인기척의 정체가 밝혀졌다. 풀숲에서 나온 것은 온 몸을 옷으로 꽁꽁 싸매고 있는 한 소년이었다. 그 정체가 작은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벨투리안은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손으로 대검을 쥔 채로 작은 소년을 응시할 뿐이었다.


    “사, 살려주세요!”

    소년의 입에서는 구원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것이 이 험준한 설산을 탈출하게 도와달라는 건지, 아니면 그 대검을 거두어달란 소리인지, 벨투리안은 조금 고민했다. 겁에 질린 소년의 표정을 본 벨투리안은 결국 대검을 내렸다. 그에 안심한 것인지 소년은 다시금 벨투리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 산을 나가고 계신거죠? 저도 좀 데려가주세요! 길을 잃어버렸어요.”


    벨투리안은 소년의 부탁에 응대하지 않고 대검을 다시 등에 매고는 걸음을 시작했다. 소년은 당황해서 여러 말을 하며 벨투리안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결국 소년은 말 한마디 없는 벨투리안을 뒤에서 조용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벨투리안은 소년의 뒤따름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소년은 그걸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른들도 힘들어 할 길을 소년은 잘도 따라왔다.

    소년은 벨투리안의 뒤를 따라가면서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대답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소년은 말하는 것에 재미라도 붙인 것인지 계속해서 벨투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묻지도 않은 자신의 사정을 얘기하기도 했다. 소년의 얘기에 따르면 소년의 이름은 에리히였고 며칠 전에 설산에 올라왔다가 눈보라로 인해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얼마간의 시간을 걸었을까 산이라 그런지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둠이 곧 사방을 찬찬히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벨투리안은 적당한 자리를 찾아 노숙할 준비를 했다. 에리히도 벨투리안이 걸음을 멈추자 자연히 걸음을 멈추었다. 솜씨 좋게  사람이 들어갈 만한 눈 굴을 만든 벨투리안은 에리히에게 먼저  굴에 들어가게 했다.


    눈 굴 안에서  사람은 잠 잘 준비를 끝냈다. 벨투리안은 여전히 에리히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음식과 침낭을 빌려주는 등, 박대하지는 않았다.

    “벨투리안.”


    그것이 에리히가 잠들기 전에 벨투리안이  유일한 말이었다. 이름이라는 얘기는 없었지만 에리히는 그것이 벨투리안의 이름일거라고 생각했다.


    벨투리안은 눈을 감았지만 잠에 빠지지는 않았다. 얼마  벨투리안은 에리히가 완전히 잠에 빠진 걸 확인하고는 약간의 음식을 에리히의 품에 남기고는 그대로 눈 굴에서 나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금만 걷는다면 곧 산을 내려갈 길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에리히가 산을  내려갈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벨투리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산에서 내려가는 길을 발견했다.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분명 동이 틀쯤에는 산에서 나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벨투리안은 그 길을 따라가지 않았다. 아직은 버틸만한 날씨지만 곧 시간이 지나면 새벽의 싸늘한 추위가 찾아올 것이다. 지금 그대로 내려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물론 벨투리안이 과연 추위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건지는 확실할  없었다.


    벨투리안은 주변을 다니면서 적당한 공간을 찾고 있었다.  작은 동굴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 지금까지의 과묵하고 차분한 모습과는 다르게 조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다행히 동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짐승들이 쓰다 버린 동굴일 것이다.


    벨투리안은 동굴 입구를 눈으로 대충 막은 후 안에서 작은 모닥불을 지폈다. 벨투리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벨투리안은 짐을 전부 내려놓고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모든 옷을 벗어버린 벨투리안은 그대로 건장한 곰 같은 몸집의 나신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었다.

    벨투리안의 몸은 어디 하나 성한 곳 없이 흉터들로 가득했다. 끔찍한 흉터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보면 기겁을 하며 실성을 할지도 모를 정도였다.


    아무리 불이 있고 동굴 안이라고 해도 이런 날씨에 옷을 벗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행동이지만 벨투리안에게는 그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벨투리안의 표정은 어떤 추위도 겪지 못하는 듯 평온하고 차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벨투리안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뒤늦게 추위를 느끼기라도  것일까?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되려 벨투리안의 몸에서 엄청난 열이 뿜어져 나왔고 곧 벨투리안은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몸에서 강한 열이 나는 것에 따라 벨투리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일그러진 표정이었지만 고통을 느끼는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이걸 문제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열이 가라앉았을 때 이미 벨투리안의 몸은 더 이상 벨투리안의 몸이 아니었다.


    온 몸에 가득하던 흉터들은 전부 말끔하게 사라졌다. 단단한 갈색 피부는 옥처럼 반질반질한 하얀 피부로 변해버렸다. 짧게 정리되어있던 회색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머리가 되었고 군청색 눈동자는 새빨간 산호처럼 영롱한 붉은 색으로 변해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몸집 그 자체였다. 웬만큼 건장한 남자들도 함부러 빗대지 못할 만큼 거대했던 몸은 간신히 10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몸집이 되어있었다. 이전에는 벨투리안의 강인한 남성성을 자랑했던 거대한 남근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벨투리안은 작고 어린 소녀가 되어있었다.


    이런 일이 익숙한 것일까, 어린 벨투리안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원래 옷가지들을 가방에 넣고 그대로 어린 아이가 입을만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작은 옷들을 꺼내 입었다. 옷들은 확실히 작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아닌  여러 군데가 기워져있었다. 원래  옷을 일부러 작게 만들은  한 모양새였다.

    크게 틀린 추측만은 아닌 듯, 어린 벨투리안이 입은 옷은 여러 가지로 너무 어설프게 만들어져 있어서 얼핏 보면 누더기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런 누더기 같은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벨투리안의 모습은 특별했다. 가릴 수 없는 가냘픔이 얼굴에서 흘러나왔다. 강인해보였던 벨투리안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큰 차이였다.


    어린 벨투리안은 자신의 그런 모습을 자각하고 있는 듯, 가방에서  몸을 덮을 수 있는 후드와 얼굴을 가리는 가면, 그리고 장갑을 꺼냈다. 후드를 두른 작은 아이의 모습 또한 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입지 않은 채로 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할 것이다. 가면을  벨투리안은 가면을 잠깐 만지작거리더니 곧 목을 가다듬고 소리를 내었다.

    “아”

     한마디, 아니 한마디도 되지 않는 작은 소리였지만 그 몸집에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음성이었다. 아직 들어본 적조차 없는 어린 벨투리안의 목소리는 그 모습과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남성의 목소리로 뒤바껴 버렸다.

    장갑으로 여린 손마저 가린 벨투리안은 작은 체구 외에는 전혀 어린 아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 볼 때는 모르겠지만 아마 목소리를 들은 후의 대부분의 사람은 비정상적으로 몸집이 작은 난쟁이이나 이종족이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옷을 모두 갈아입은 벨투리안은 모닥불을 끄고는 가방에서 침낭을 꺼냈다. 아까와 같은 것이었지만 몸집이 훨씬 작아져서 품이 훨씬 남게 되었다. 벨투리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진짜 수면이었다.

    곤히 잠들었던 벨투리안이 눈을 뜬 것은 동이 트기 직전일 때였다. 날씨도 상당히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벨투리안은 눈을 뜨자마자 바로 침낭을 접어 가방에 넣고 나갈 준비를 하였다. 작은 몸집으로 큰 벨투리안이 쓰던 거대한 가방과 대검을 등에 매자 그 언밸런스함으로 인해 어린 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 되었다.

    동굴을 나와 그대로 산을 내려가는 길을 찾아 내려가던 중 벨투리안은 찍힌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 한 발자국을 발견했다. 분명 그 소년, 에리히의 것이겠지. 발자국을 잠시 바라  벨투리안은 다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흘 만의 하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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