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logue (8/8)
  • Epilogue

    평소보다 품속의 여체가 뜨거웠다. 이든은 열기를 머금은 클로에의 허리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열 있는 거 같은데.”

    어디가 아픈 건 아니었는지 클로에는 그의 아래서 바르작대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니면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요?”

    온몸이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클로에를 보며 이든은 짓궂게 물었다.

    “빨리…….”

    녹을 것 같은 목소리로 애원하는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의 인내심도 얄팍해졌다.

    이미 눅진하게 젖어 있는 그녀의 밀부에 제 분신을 꽂아 넣은 이든은 집요하게 그녀를 탐했다. 탐하고 또 탐해도 모자랐다.

    벌써 두 사람이 결혼한 지도 3년이었다. 여전히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없었다.

    후계자의 생산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귀족가에서 3년이나 아이가 없는 건 드물었다. 그 때문에 수군거리는 이들도 있었으나, 공작가에서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알리사를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 그랬다.

    평소와 다름없던 아침 식사 시간에 일어난 소란만 아니었다면.

    “우욱…….”

    돌연 들리는 헛구역질 소리에 가이사와 이든, 그리고 옆에서 시중을 들던 이들의 움직임이 단번에 멈추었다.

    클로에가 입을 틀어막은 채 구기가 올라오는 듯 움찔거리고 있었다.

    가이사의 손에서 떨어진 나이프가 접시를 치며 사나운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이든이 다급히 공작저의 주치의를 찾으면서 공작저가 한바탕 뒤집어졌다.

    * * *

    “아이를 가졌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막 기뻐하는 것도 아닌 이든의 얼굴에 공작저의 주치의는 눈치라는 눈치는 있는 대로 끌어 모았다. 이 상황에서 섣부른 축하는 금물이었다.

    그런 주치의는 안중에도 없이 이든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클로에는 어떻지?”

    “크게 문제는 없으십니다. 다만…….”

    좁아지는 이든의 미간에 주치의는 침을 꿀떡 삼켰다.

    “다만?”

    “너무 저체중이십니다.”

    주치의의 대답에 클로에와 이든에게서 상반된 질문이 동시에 나왔다.

    “아이한테 안 좋나요?”

    “산모한테 위험한가?”

    전자는 클로에의 물음이었고, 후자는 이든의 물음이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아이한테도 안 좋고, 산모한테도 안 좋았다.

    “마님께는 조금 더 균형 있는 식사가 필요해요. 그에 더해 먹는 양을 조금 더 늘리셔야 할 것 같고요.”

    공작가에 먹을 게 없어서 못 먹겠는가. 애초에 클로에의 식사량이 적은 게 제일 문제였다.

    주치의가 클로에의 식단에 대해 이것저것 조리장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 클로에는 조심스럽게 이든에게 물었다.

    “혹시 별로 기쁘지 않으신가요?”

    “응?”

    “달갑지 않으신 것 같아서…….”

    클로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이든은 곧바로 표정을 풀었다.

    그녀가 아이를 가진 게 기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클로에에게 어떤 위험 부담도 지우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건 그녀가 아니었던가.

    “기쁘지 않은 건 아니야. 그래도 난 당신이 더 중요해.”

    이든은 출산이 여인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어미가 그를 낳고 산욕열로 명을 달리 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클로에가 앉아 있는 침대에 걸터앉은 이든이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괜찮아?”

    “뭐가요?”

    “…무서워했잖아요. 부모가 되는 일.”

    좋은 부모 밑에서 자라 본 적 없는 사람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한때 그녀는 그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것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는 좀 기뻐요.”

    클로에는 아직 납작하기만 한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이 안에 그녀의 아이가 있다.

    “에드윈 말고 가족이라는 존재를 원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클로에가 이든을 향해 팔을 뻗었다. 익숙하게 이든이 그녀를 끌어안자 클로에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어리광을 부리듯 웅얼거렸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런 걸 평생 모르고 살았겠죠.”

    당신이 너무 좋아요. 그녀가 덧붙였다.

    이든을 욕망에 불을 붙이는 말이었다.

    이든의 입술이 클로에의 입술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리고…….”

    공작 부부 사이에 감도는 야릇한 기운을 감지한 주치의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무슨 일이지?”

    얼굴이 벌게진 클로에와 달리 이든은 빙긋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주치의는 공작의 웃는 얼굴에 간담이 서늘해졌으나 할 말은 해야 했다.

    “앞으로 석 달 정도는 부부 관계는 자제해 주십시오. 아기님에게 좋지 않습니다.”

    빙긋 웃는 채로 굳은 이든의 모습을 본 주치의는 후다닥 고개를 숙인 채 공작저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록스턴 공작이 아내에게 푹 빠져 산다는 건 북부 사교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주치의가 빠져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든이 클로에를 향해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를 말려 죽일 셈인 게 분명해.”

    어쨌건 공작저에 큰 변화가 생기리라는 건 분명했다.

    * * *

    “우욱…….”

    식사량이고 뭐고 먹을 수나 있어야 늘릴 수 있을 것 아닌가.

    입에 갖다 대는 족족 구역질을 해 대는 클로에 덕분에 공작저에 비상이 걸렸다. 체중이 늘기는커녕 오히려 줄었고, 클로에는 핼쑥해진 얼굴로 기절하듯 잠이 들기 일쑤였다.

    클로에가 먼저 뭐가 갖고 싶다, 먹고 싶다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이든과 레이, 심지어 가이사까지 공작저의 세 남자가 그녀를 위해 온갖 진미를 다 갖다 바쳤으나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새벽에 갑자기 자다 말고 일어나는 클로에의 인기척을 느낀 이든이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이든에게 말했다.

    “…복숭아가 먹고 싶어요.”

    “복숭아?”

    북부의 겨울은 길다. 이제 겨우 싹눈이 트기 시작한 이른 봄. 여름 과일이 있을 리 없었다.

    구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새벽에 그것을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클로에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시 스르륵 침대에 누웠다.

    “깨워서 미안해요. 얼른 자요.”

    등을 돌리고 누운 그녀의 마른 등이 어찌나 애처로워 보이는지. 이든은 결국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클로에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춘 이든은 침실을 벗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든이 침실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쟁반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그가 들어오자 달콤한 향기가 방 안에 풍겼다.

    “이거라도 괜찮아요?”

    그가 가져온 것은 작년에 주방장이 만들어 놓은 복숭아 병조림이었다. 클로에의 얼굴이 밝아지자 이든의 얼굴에도 안도가 피어올랐다.

    이든이 유리병에서 꺼내 접시에 담아 주는 족족 복숭아는 그녀의 입으로 사라졌다.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든은 과즙이 매끈하게 묻어 있는 그녀의 입술을 보고 돌연 밀려오는 허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그녀를 품에 안고 자는 게 다였다. 그녀와 아이를 위해서라면 제 욕망 하나 참지 못하겠냐마는 그녀의 입술을 물고 탐하는 상상을 할수록 그의 허기는 짙어져만 갔다.

    “…드실래요?”

    클로에가 이든을 향해 복숭아를 내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어딘가 굶주린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로에가 내민 복숭아를 흘긋 내려다본 이든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왜 웃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클로에는 제 입술 위에 쪽, 하고 짧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온기에 그대로 굳었다.

    붉어지는 클로에의 얼굴을 본 이든은 웃음을 참으며 그녀가 제게 내밀었던 복숭아를 다시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에게 마음을 열기까지 오래 걸렸던 만큼 클로에는 인간관계의 모든 것에서 익숙해지는 게 느렸다. 이든이 예고도 없이 다가올 때면 여전히 얼굴이 벌게져서는 허둥지둥하곤 했다.

    “노, 놀랐잖아요.”

    놀랐다고 말하면서도 주섬주섬 복숭아를 집어 먹고 있는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은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정도는 봐줘요. 진짜 말라죽겠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이든의 표정이 어딘가 초췌했다.

    홍조가 띤 얼굴로 잠시 이든을 바라보던 클로에가 그에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위험한 시기만 지나면 괜찮대요.”

    이든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자신이 이해한 바가 맞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먼저 동하고, 먼저 애원하는 쪽은 이든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 말, 두 달 후에 기대해도 된다는 건가요?”

    안 그래도 주치의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들은 이든이었다. 어떤 자세가 산모에게 안전한지라든가, 조심해야할 점이라든가. 그러나 클로에가 원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지식들이었다.

    그 지식들이 드디어 빛을 발할 날이 온 것이다.

    이든은 눈을 빛냈다. 클로에는 영문을 모른 채 그저 밝아진 이든의 표정에 따라 웃어 줄 뿐이었다.

    * * *

    첫눈이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저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록스턴 공작가의 후계자가 태어난 것이다.

    출산할 때 산실에서 들리는 클로에의 비명에 록스턴 공작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물을 보였다는 것은 공작가 내부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 가이사 록스턴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선대 공작 부인이 그렇게 세상을 떴으니 무리는 아니었으나, 며느리 사랑, 아내 사랑이 극진한 남자들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이견이 없었다.

    어쨌건 록스턴 공작의 아들, 노아 록스턴은 그렇게 태어났다.

    클로에는 자신은 거의 닮지 않은, 이든 록스턴과 판박인 제 아들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제 아들을 바라보는 클로에와 달리, 이든은 어딘가 묘한 얼굴로 제 2세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너무 안 닮았어.”

    이든이 상상했던 클로에와 저 사이의 자식은 클로에를 빼닮은 무언가였다.

    그러나 막상 마주한 그의 아들은 누가 봐도 이든 록스턴의 아들이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꼬리가 내려갈 줄 모르는 이든의 얼굴을 바라보며 클로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을 닮지 않은 딸을 보며 지독한 망상에 사로잡혔던 인간이었다. 그런 휴버트 린다와는 달리 이든은 제 아이가 아내를 닮지 않아 아쉬워하고 있었다. 클로에는 이든의 이런 모습이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클로에의 생각이 무색하게 이든의 관심은 얼마못가 노아에서 클로에에게로 옮겨갔다. 제 아들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몸은 좀 괜찮아?”

    이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파의 도우미들이 옮기던 하얀 천에 묻어 있던 시뻘건 피가 여전히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이런 광경을 두 번 봐야 한다면, 아이 따위는 더 갖지 않을 테다.

    이 다짐은 훗날 노아의 여동생 타령을 이든이 묵살시켜 버리는 데에 아주 크나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것도 둘째를 가지고 싶다는 클로에의 바람에 허무하리만큼 순식간에 사라진 다짐이기도 했다.

    * * *

    공작가의 정원에 해사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꽃들 사이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제 아이를 클로에는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든은 또 그런 클로에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그녀의 관심은 명백하게 남편보다 아이를 향할 때가 많았다. 그는 그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걸로 클로에가 행복해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그때 돌연 노아가 뒤로 넘어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화들짝 놀란 클로에가 다가가자 아이는 제 어미에게 팔을 뻗으며 서럽게도 울었다. 아이의 손바닥에는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엄마, 아파!”

    노아는 그렇게 말하며 제 앞에 피어 있는 탐스러운 붉은 꽃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꽃잎과 달리 두툼한 줄기에 가시가 빼곡한 장미덤불이었다.

    사색이 된 로더릭이 후다닥 달려와 노아를 살폈다. 가시에 찔렸을 뿐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다.

    제 어미의 품에 안겨서 세상 서럽게 우는 노아의 머리를 쓰다듬은 이든이 짐짓 엄하게 말했다.

    “조심했어야지.”

    히끅거리며 장미꽃을 원망스레 바라보는 노아의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은 웃음을 삼켰다.

    이든이 클로에의 품에서 노아를 안아 들었다. 그는 이번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제 아들을 달랬다.

    “살살 만져야지. 세게 만지면 꽃이 아파서 그래.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아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해 주는 이든의 모습에 옆에 서 있던 클로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그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면 그의 이런 모습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의 이든 록스턴은 그녀에게 사생활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고, 클로에는 그와의 잠자리를 미뤘다.

    “왜 웃어요?”

    클로에가 웃는 것을 본 것일까, 이든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어 왔다. 클로에는 똑 닮은 두 사람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귀엽네요, 둘 다.”

    “귀엽다는 말은 또 처음 듣는 것 같은데.”

    이든이 요사스럽게 눈꼬리를 휘며 클로에에게 말했다. 그의 속셈이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곁에 서 있던 로더릭은 미묘한 공기에 눈치껏 그의 품에서 노아를 안아 들었다.

    “도련님, 약 바르러 갑시다.”

    로더릭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노아는 로더릭의 품에 안겨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그 눈에, 제 어미를 품에 안고 입을 맞추고 있는 아비가 보였다.

    “엄마랑 아빠, 뽀뽀한다.”

    옆에서 로더릭이 쿨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노아는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신나는지 발을 동동 흔들었다.

    바람을 타고 오는 달콤한 향에 노아는 배시시 웃으며 생각했다.

    우리 엄마는 꽃인가 보다.

    엄마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다정하고, 부드럽게 대하는 사람이니까.

    -가시꽃 딜레마 Epilogue 완(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