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가시꽃의 딜레마 (7/8)

6. 가시꽃의 딜레마

이른 겨울이 찾아오는 북부답게 날씨가 제법 서늘해졌다.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든은 공작저로 배달된 파티 초대장들을 벽난로에 와르르 쏟아부었다. 종이가 타는 매캐한 냄새가 그의 집무실을 채웠다.

“공작저로 오는 모든 편지는 내게 가져와.”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장작불을 바라보며 이든이 덧붙였다.

“클로에의 앞으로 오는 것도.”

누군가 들었다면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만한 말이었지만 이든의 앞에 서 있던 레이와 집사 로더릭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로더릭이 집무실을 나서자 레이가 이든에게 물었다.

“이걸로 괜찮아질 일이 아닙니다. 하루 빨리 이 소문이 어디서 퍼졌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이의 말에 이든은 피곤한 듯 손으로 눈두덩을 문질렀다.

북부에서 소문 하나가 퍼졌다.

린다 후작가의 가주는 미치광이였다고. 광증에 걸린 그가 결국 제 아내를 죽이고 따라서 자살을 한 거라고.

린다 후작가의 수치가, 클로에가 어떻게든 숨기고 싶어 하던 그녀의 과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클로에에게 따라 붙는 더러운 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교계의 소문은 부풀어지기 마련이다.

클로에가 후작 부인의 부정으로 태어난 아이라느니, 어미에게 보고 배운 게 그런 것뿐이라 그렇게 자랐다느니. 온갖 억측과 거짓이 뒤섞인 소문이 나돌았다.

후작저에서 일했던 수많은 사용인들의 입을 전부 막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문이 나는 일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퍼지기 시작한 게 후작가가 있는 제도가 아닌 북부라는 점도 의심스러웠다.

무엇보다 퍼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누군가의 악의가 개입되어 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황녀인가?’

클로에를 황궁의 티파티까지 초대해 가면서까지 모욕을 주려던 사람이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알고자 한다면 황가가 찾지 못할 정보 또한 없을 테니.

생각에 잠겨 있는 이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레이는 북부에 퍼진 소문이 헛소문만은 아님을 깨달았다. 이든이 소문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떠도는 말 중에 어떤 말이 진실이고 어떤 말이 거짓인지 레이는 몰랐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알게 된 건 클로에 린다라는 사람의 삶이 순탄치는 않았을 거라는 것이었다.

아내의 부정으로 태어난 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된 아이.

레이는 테이블 밑에 웅크리고 앉아 제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던 클로에를 떠올렸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어쩌면 미안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클로에의 소문을 믿고 그녀를 향한 적의를 감추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것도 아주 유별나게 티를 냈다.

“일단 되는 대로 다 알아보겠습니다. 정보 상인들에게도 연락을…….”

그때였다. 누군가 집무실의 문을 두들겼다. 그 노크소리가 다급했다.

“무슨 일이지?”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로더릭이었다. 그는 평소답지 않게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고트 백작 부인께서 공작저에 오셨습니다.”

* * *

이든과 레이가 다급히 응접실로 내려갔을 때에는 이미 알리사와 클로에가 마주한 채였다. 두 사람의 옆에는 디아나와 사용인들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든은 손으로 거칠게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뻔뻔한 것에도 정도가 있지.”

주눅 든 기색 없이 꼿꼿하게 서 있는 클로에의 모습에 알리사는 기가 찬 듯 허, 하고 웃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클로에가 덤덤히 말했다.

“내 아버지라는 사람의 죄예요. 내가 아니라.”

“어떤 공작 부인이 사생아라는 소문을 달고 다녀!”

사생아.

그 단어를 면전에서 듣는 건 14년 만이다. 그녀의 아비라던 작자가 죽은 지 어언 14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클로에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고모님.”

보호하듯 클로에의 앞에 선 이든이 알리사를 불렀다.

“연락도 없이 공작저엔 어쩐 일이십니까.”

이든의 물음에 알리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도 알고 있었니?”

“그게 중요합니까?”

“이든 록스턴!”

제 이름을 부르는 알리사의 목소리에 이든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고트 백작 부인.”

신분을 지적하는 호칭에 알리사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그 호칭에서 알리사는 벽을 느꼈다.

이든이 알리사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그 이상은 공작가에 대한 월권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내 아내에게 무례를 저지르지 마십시오.”

지금의 이든은 조카가 아닌 록스턴 공작이었다.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고지식하고 보수적이기 짝이 없는 그녀를 입 다물게 하기에 이보다 명확한 방법이 없었다.

이든은 옆에서 이 사태를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던 디아나를 불렀다.

“디아나.”

“네, 넵!”

“네 어머니 데리고 돌아가.”

쫓겨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알리사가 일그러진 얼굴로 바라보자 이든은 덤덤히 덧붙였다.

“아버지께서 나오기 전에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좋은 소리 듣지 못하실 테니.”

이든의 말에 알리사는 기가 찼다.

가이사도 이든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단 말인가. 온갖 더러운 꼬리표를 달고 있는 공작 부인이라니!

알리사의 고개가 클로에를 향해 돌아갔다. 태연한 클로에를 보니 알리사는 창자가 꼬이는 것 같았다.

“염치없는 것.”

이든이 클로에의 앞을 가린 채 디아나를 향해 말했다.

“디아나, 모시고 나가.”

이든의 싸늘한 목소리에 디아나는 서둘러 알리사의 팔을 붙잡고 응접실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알리사는 디아나의 팔을 뿌리치고 기어코 클로에를 한 번 지그시 노려본 후 제 발로 응접실을 나갔다.

알리사와 디아나가 나간 응접실은 침묵에 휩싸였다. 사용인들은 클로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과 이든, 레이를 차례로 둘러본 클로에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일도 없던 사람처럼 굴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졌다.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클로에를 바라보고 있던 이들의 입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님!”

클로에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 * *

클로에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사위가 어두워진 후였다. 어둑하지만 익숙한 침실의 풍경에 클로에는 다시 눈을 감았다.

“염치없는 것.”

귓가로 알리사의 한마디가 맴돌았다.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시작된 결혼이었다. 그러니 고작 그 말 한마디에 상처 받을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울고 싶은 건.

그녀를 울고 싶게 만드는 건, 지금 그녀의 옆에서 침대에 기대 잠들어 있는 이 남자 때문이다.

클로에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이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가 한 번 움찔거리더니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클로에.”

클로에의 얼굴을 확인한 이든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가에 불안히 매달려 있는 눈물 때문이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어.”

울음기 때문인지, 클로에의 목소리는 잔뜩 억눌려 있었다. 손으로 제 눈가를 가려 버리는 클로에의 손을 치운 이든이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왜 그래요. 괜찮으니까 말해 봐요.”

“싫어.”

이든은 그녀가 자신에게 말하기 싫은 거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녀의 말들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나, 너무 싫어.”

내가 너무 싫어.

창피해.

가끔 그녀가 짓곤 하던 표정의 이유를, 이든은 이제야 깨달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

“클로에.”

이든이 조심스럽게 클로에를 안자 그녀는 평소와 달리 제 옷자락을 붙잡은 채 매달렸다. 어떻게든 의지할 곳을 찾으려는 사람처럼 절박한 몸짓이었다.

무서워, 창피해, 짜증나.

횡설수설 중얼거리며 우는 클로에는 얼핏 잔뜩 화가 난 아이처럼도 보였다.

한참 동안 이든에게 매달려 울던 클로에가 힘이 빠진 듯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댄 채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부모라던 작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드러나는 것보다 무서웠던 게 있어요.”

이든은 클로에의 말을 조용히 들어 주었다.

“내가… 그 따위 인간들에게 버림이나 받는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게, 그걸 사람들이 아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무가치한 인간. 클로에가 지금껏 자신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걸 먹고, 좋은 일을 하면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았어요.”

그녀가 부리던 사치, 남자들에게 받던 가볍기 짝이 없는 애정. 그 모든 게 그녀의 자기혐오를 감추기 위한 발악이었다. 그녀가 부렸던 허세는 결국 그런 것이었다.

“나한테 왜 고아원을 가냐고 물었었죠.”

이든은 제 옷자락을 잡고 있는 클로에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 일을 하면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았어요.”

그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바뀌는 건 없는데.”

이든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서 떼어 냈다. 클로에는 눈물로 엉망인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얼굴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붙잡은 이든이 엄지로 그녀의 눈가를 쓸었다.

“왜 바뀌는 게 없어요.”

클로에의 눈가를 매만지는 이든의 손길은 느릿하고 부드러웠다.

“나랑 결혼했잖아요.”

이 결혼이 그녀의 오기인 동시에 용기였다는 걸, 이든은 알고 있다.

이든의 말에 클로에의 얼굴이 다시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리고 고아원의 아이들이 당신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요. 레이한테 들었어요.”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는 듯 벌게지기 시작한 그녀의 눈가와 목덜미를 보고 이든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이렇게 사랑받고 있으면서.”

이든은 제게 매달리는 클로에를 꽉 끌어안았다.

클로에는 그에게 매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서워졌다. 이 사람마저 내게서 등을 돌리면 어쩌지, 하고.

클로에는 자신이 끝이 보이지 않는 딜레마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다시 멀어지는 게 두려워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게 두렵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법을 모르는 클로에는 그저 이든의 허리를 꽉 끌어않을 뿐이었다. 이렇게 하면, 이 순간만큼은 그가 어디로 가지 못할 테니까.

고작 이런 게 클로에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녀는 인간관계가 너무나도 서툰, 아홉 살에서 멈춰 있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 * *

이든이 제도의 린다 후작저로 편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에드윈이 북부 공작저로 찾아왔다.

언제나 날이 서 있던 그의 여동생은 어딘가 수척해 보여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그런 에드윈의 모습을 예상치 못했는지 클로에는 잠시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에드윈은 어떤 말도 없이 위로를 하듯, 혹은 위로를 받듯 제 여동생을 끌어안은 채 울기만 했다.

이 아이가 제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도망치듯 한 결혼이라는 걸, 왜 알아채지 못했던 걸까.

“클로에. 너무 힘들면 후작저로 돌아와도 돼. 후작저가 싫으면 다른 곳이라도 괜찮으니까.”

클로에의 옆에서 에드윈의 말을 듣고 있던 이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후작저로 데려가라고 에드윈을 부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 그녀가 원한다면 결국은 보내 주겠지만.

이든에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클로에도 공작저보다는 가족인 에드윈의 옆이 더 편할지도 몰랐다.

“나 안 가요.”

생각에 잠겨 있던 이든은 클로에의 뜻밖의 대답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에드윈 역시 놀란 듯 그녀를 살짝 입을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남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클로에가 다짐하듯 말했다.

“안 갈 거예요. 여기 있을래요.”

“하지만…….”

에드윈이 반박하기 전에 클로에가 이든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클로에의 모습에 에드윈은 망설이다 품속에서 낡은 편지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클로에를 향해 그것을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이걸 너한테 보여 줘도 될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만약 그녀가 공작저에 남겠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 편지의 존재를 숨긴 채 조용히 그녀를 제도로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클로에는 남는다고 했다.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편지를 들어올렸다. 오래되어 보이긴 했지만 상대방을 위해 고심해 골랐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예쁜 편지지였다.

[미안해.]

그러나 편지에 쓰인 말은 그 한 마디가 다였다. 누가 쓴 건지, 누구를 위해 쓴 건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클로에는 에드윈이 왜 이런 이상한 편지를 준 것인가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에드윈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가 남긴 거다.”

그의 말에 클로에의 얼굴이 굳었다. 클로에는 떨리려는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고 에드윈에게 물었다.

“누구한테요?”

“글쎄. 남겨진 사람들 중에 있겠지.”

클로에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편지를 보았다. 속이 거북해졌다. 다시 에드윈에게로 편지를 내밀었다.

“보고 싶지 않아요.”

“클로에.”

“그 편지의 주인이 적어도 나는 아닐 거예요.”

완고한 클로에의 태도에 에드윈도 결국 편지를 다시 거뒀다. 이 편지 한 장으로 무언가 바뀔 거라는 기대를 한 건 아니었지만, 이것을 숨기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에드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로에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따라붙었다.

선대 가주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난 탓에 젊은 가주인 에드윈은 오랫동안 후작가를 비워 둘 수 없었다.

아쉬워하는 클로에를 보며 에드윈은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저, 네 얼굴 한번 보러 왔을 뿐이야.”

에드윈의 눈이 여전히 이든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있는 클로에의 손으로 향했다.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이든과 가볍게 악수 후 응접실을 나가려는 에드윈을 클로에가 다급히 불렀다.

“오라버니.”

클로에가 저렇게 그를 부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에드윈은 잠시 그녀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상처가 마를 날이 없었던 어리고 작은 동생. 그때를 떠올리니 떠나는 발걸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자주 갈게요.”

“…그래. 편지도 자주 좀 보내고. 네 근황을 가십지에서 보는 건 이제 정말 사절이야.”

그의 농담 섞인 질책에는 여전히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런 에드윈의 모습에 클로에도 결국은 희미하게 웃을 수 있었다.

클로에의 웃는 얼굴에 에드윈의 눈이 조금 커졌다.

‘웃기도 하는구나.’

부모가 죽고 저 아이가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있던가. 있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웃음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가면을 쓰듯, 애정을 듬뿍 받고 있는 사람처럼. 클로에의 웃음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이든 록스턴. 클로에를 변하게 만든 건 아마 저 남자겠지. 그녀가 소중하게 붙잡고 있는 그의 소맷자락이 그 증거나 다름없었다.

이제야 저 아이의 안에서 14년 전 멈추었던 시곗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찾아온 북부에서 클로에의 변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에드윈은 이곳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건물을 빠져나가는 에드윈의 걸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 * *

방으로 돌아온 클로에는 침대에 걸터앉아 허리를 숙여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클로에.”

그런 그녀의 앞에 이든이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살폈다. 고개를 들어 올려 보니, 클로에의 눈가가 붉었다. 그러나 울고 있지는 않았다.

“왜 그래요, 응?”

다정한 그 물음에 클로에는 잠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무 화가 나요. 고작 그 편지 한 장으로 용서받으려 했던 걸까요?”

이든에게서 대답을 바라고 했던 질문을 아니었는지, 클로에는 곧장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를 버리는 일은 어려웠을까요?”

“클로에.”

“내가 걱정은 됐을까요?”

그녀가 연이어, 재차 물었다.

“그 사람의 안에서 나한테… 그 정도의 가치는 있었을까요?”

손을 뻗어 클로에의 얼굴을 매만지며 이든이 입을 열었다.

“당신의 가치를 정하는 건 그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럼 나는…….”

“자기 가치는 자기가 정해야죠.”

클로에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적어도 나한테 당신은 무가치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가 나직이 덧붙였다.

“당신이 많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클로에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녀의 볼을 매만지던 이든이 손으로 그녀의 눈가를 부드럽게 훔쳤다.

“시녀를 불러 줄게요. 오늘은 이만 쉬어…….”

“안아 줘요.”

바닥에서 일어나던 이든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그는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바짝 굳은 채 클로에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 안아 줘요.”

클로에는 혹시나 이든이 도망이라도 갈까 얼른 그의 옷자락을 덥석 붙잡았다.

여전히 이든이 굳어 있자, 클로에는 살짝 긴장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싫어요?”

“그럴 리가요.”

옷자락을 붙잡는 걸로도 모자랐는지 클로에는 아예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있었고, 이든은 일어나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캉한 살이 그의 하체에 여과 없이 닿고 있었다.

툭 치면 부서질 것 같은 팔로 버티고 있는 클로에를 내려다보던 이든은 한숨과 함께 그녀는 덜렁 안아 들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안 해요.”

그녀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듯 말했다.

“후회한 적 없어요.”

“뭐라고요?”

“…지금까지 당신이랑 했던 거.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단 말이에요.”

그녀의 말을 이해하자 이든의 귓가가 화끈해졌다. 클로에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그를 부추기곤 했다.

이든은 그녀를 침대에 내려 주고는 물었다.

“그래도 먼저 하자고 했던 적은 없었잖아요.”

온기를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다. 더불어 이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어서. 그런 이기적인 마음을 그에게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걸까. 클로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클로에는 자신의 마음을 이든에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용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싫어요?”

“이용해요.”

클로에가 망설이며 물었던 게 무색하게 그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클로에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클로에의 눈을 빤히 보며 말을 계속했다.

“이용하고 싶으면 이용해요, 다 줄 테니.”

“그런 건…….”

“내게만 하면 돼. 다른 사람은 안 돼.”

이든이 말을 마치자마자 클로에의 등 뒤를 지분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레스가 헐거워지는 느낌과 함께 그녀의 가슴이 반쯤 드러났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끌어 내리며 이든이 말했다.

“당신이 어떤 말도 안 되는 말을 해도 나는 그걸 핑계 삼아서 당신을 안겠지만.”

이든이 슬쩍 그녀의 허리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허리 부근에 말려 있던 드레스가 그녀의 엉덩이를 지나 다리를 타고 벗겨졌다.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왜 나를 원하는지.”

순간의 성욕이든, 잘못된 의존이든 이든은 그녀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그를 올려다보던 클로에가 물었다.

“말 안 하면, 안 해 줄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이든이 숨을 살짝 흩뜨렸다.

“부추기는 방법도 여러 가지네요.”

이든의 입술이 다급하게 클로에의 입술을 덮었다.

평소 움츠러들기 바빴던 그녀가 서툴게나마 그의 입맞춤에 응했다. 오늘의 클로에는 이든을 함락시키기 위해 작정한 사람 같았다.

입을 맞추며 클로에의 허리를 쓸어내리던 이든이 손을 클로에의 속옷에 댔다. 속옷을 젖히고 물기를 머금기 시작한 속살을 지분거리자 그녀의 허리가 뒤틀렸다.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미약한 신음이 이든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물기를 펴 바르듯 그녀의 비부를 문지르던 이든의 손가락이 조금씩 그녀의 안을 파고들었다.

“아, 아앗…….”

조금씩 그의 손가락이 깊이를 더할 때마다 클로에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점점 숨을 헐떡이는 클로에에게서 입술을 떼어 낸 이든은 그녀의 허벅지를 붙잡아 넓게 벌린 채 손의 움직임에 속도를 더했다.

“아, 아! 아앗!”

그의 움직임을 따라 그녀의 신음 소리가 점점 높아져 갔다.

“하악!”

단말마 같은 신음과 함께 그의 손가락을 옥죄는 힘이 강해졌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바르르 떨고만 있는 클로에의 안에서 손가락을 빼낸 이든은 다급히 셔츠 단추를 끄르며 침대 옆 서랍으로 팔을 뻗었다.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이든을 올려다보고 있던 클로에는 서랍을 여는 소리에 그를 향해 물었다.

“…오늘, 피임 안 하면 안 돼요?”

이든이 커다래진 눈으로 클로에를 내려다보았다.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클로에의 눈동자를 본 이든은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조급해할 필요 없어요.”

“그래도…….”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고 결정해요.”

지금의 클로에는 불안정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굳히려는 태도는 옳지 않았다. 그녀의 가치를 정하는 건 남편도, 아이도 아니었다.

여전히 불안하기만 한 클로에의 표정에 이든은 작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에 잘게 입을 맞췄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니면 이거 없이 하는 게 더 느낌 좋아요?”

짓궂은 말에 클로에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런 게 아니라……!”

이든은 키득거리며 셔츠를 마저 벗었다. 할 말이 많은 듯 우물쭈물하던 클로에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그녀는 지금 너무 마음이 급하고 불안했다.

클로에는 팔을 뻗어 이든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금으로서는 그에게 닿는 것만이 그녀의 불안을 가라앉혔다. 과거에 그를 무서워하던 게 우스운 결과였다.

클로에가 먼저 그에게 닿아 오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잠시 굳어 있던 이든은 그녀를 마주 안았다.

“자꾸 부추기면 곤란한데.”

“빨리… 해 줘요.”

자꾸 얄팍해져만 가는 제 인내심을 느낀 이든은 이미 한계치까지 달아오른 제 신체를 그녀의 입구에 맞추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흐읏.”

빠듯한 입구가 그의 것을 조였다. 언제나 시작을 버거워하는 그녀는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게 아니라 자꾸만 그에게 달라붙는다는 것이었다.

“클로에, 잠깐… 윽.”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건지, 클로에가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아예 그의 허리를 감아 버렸다. 그의 것이 그녀의 안에 더 깊게 박혔다.

본능적으로 허리를 처박으려던 이든은 겨우 자제하고 클로에를 달랬다.

“자꾸 이러면 감당 못 해요.”

그래도 클로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자꾸만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내벽도 사정없이 꿈틀거리며 그의 것을 조였다. 이든의 입에서 탁한 숨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후……. 오늘은 도망치지 말아요.”

이든은 그녀를 조심스레 품에서 떼어 낸 채, 그녀의 양옆에 팔을 짚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평소라면 무서워했을 이 자세에도 클로에는 열에 달뜬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이든의 허릿짓이 조금씩 빨라졌다.

제 아래에서 입술을 깨문 채 신음 소리를 참는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클로에의 입술에 힘이 빠진 틈을 타 이든은 그녀의 입 안에 제 손가락을 넣었다.

“입술, 깨물지 마요.”

“하아, 아, 아, 앗!”

혹시나 그의 손가락을 깨물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신음만 내지르던 클로에는 이든이 거칠게 허리를 밀어 넣자 그의 손가락을 콱 물어 버렸다.

아플 법도 한데 이든은 그녀의 치열을 쓸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아, 클로에.”

그녀의 질벽이 빠르게 수축하기 시작했다.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느 때였다면 클로에가 견딜 수 없는 감각에서 도망치려 그를 밀어 댈 때였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클로에는 다급히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타인의 온기를 찾는 그 다급한 손짓에 이든은 기꺼이 제 목을 내주었다.

이든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자 클로에는 원래 제 것이었던 것처럼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거의 제 위에 앉히다시피 안겨 있는 클로에를 끌어안은 이든은 거칠게 그녀의 안에 제 분신을 박았다.

“하악!”

절정이 찾아왔다.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바들바들 떨기만 하던 클로에는 제 등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에 천천히 그에게로 무너져 내렸다.

제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로 쌕쌕거리는 숨을 내쉬는 클로에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뉘인 이든은 천천히 제 것을 그녀의 안에서 빼냈다.

땀과 애액에 젖은 그녀의 몸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을 닦아 주기 위해 이든이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클로에가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어디… 어디 가요?”

“닦아 줄 테니까 쉬고 있어요.”

이든이 달래듯 말했지만 클로에는 붙잡은 팔을 놓지 않고 고개를 흔들며 고집을 부렸다.

“몸이 식으면 추울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요.”

하지만 여전히 클로에는 그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클로에의 옆에 누워 그녀를 끌어안았다.

도대체 뭐가 그녀를 이렇게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어디 안 가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나 두고 가면 안 돼요. 당신은 나 두고 가면 안 돼.”

말도 안 되는 불안이다. 언제나 전전긍긍하는 쪽은 이든이었다.

지금 그녀의 불안을 이용하는 건 오히려 그였다. 이렇게라도 그녀가 그에게 매달려 줬으면 좋겠으니까.

이든은 영원히 클로에가 자신을 의지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 *

그 후로 클로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든의 품에 안겼다. 그녀가 먼저 원했던 일이었지만, 언제나 지쳐 쓰러지는 쪽도 클로에였다. 불안한 마음에 무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거의 기절하듯 쓰러져 자고 있는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이든은 가운을 바닥에 널브러진 가운을 걸치고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가 집무실로 갔을 때는 이미 레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가 들고 있던 서류 하나를 이든에게 내밀었다.

누군가의 신상 명세서였다. 그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든의 머리 위로 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4년 전, 린다 후작가에서 일했던 시녀입니다.”

서류를 읽어 내리던 이든의 미간이 좁아졌다.

“지금은 헤링스 백작저에서 일하고 있다, 라.”

“네. 아무래도 의심스러워서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도 북부 사교 파티에서였고요.”

톡, 톡-. 이든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들기는 것을 바라보던 레이가 물었다.

“사람을 시켜 더 알아볼까요?”

“아니.”

“하지만…….”

“들쑤시고 다녀 봤자 소문이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겠지.”

이든은 소리가 나도록 서류를 덮었다.

“더 알아낼 필요 없어.”

“그렇다고 그냥 두기에는……!”

“그냥 둔다고는 안 했어.”

반박하는 레이의 말을 끊고 이든은 웃었다. 등골이 서늘해질 만한 웃음이었다.

“북부 귀족들이 모일 만한 파티가 있나 알아 봐. 클로에랑 갈 거니까.”

“이 시국에요?”

“경고하기에 좋은 자리니까.”

“…알겠습니다.”

이든의 말대로였다. 상대의 어쭙잖은 도발에 성을 내는 것이야 말로 소문을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그들이 건드린 게 누구인지 상기시키는 게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달리아 헤링스.

이든이 클로에와 결혼하기 전, 록스턴 공작 부인이 될 이로 꼽히던 여인.

클로에와 이든의 사이가 남보다도 못하던 1년 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그녀는 아주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른 셈이었다.

북부에서 록스턴 공작을 건드리면 어떤 결과가 돌아오는지 이참에 북부 귀족들에게 알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 * *

이든이 내미는 파티 초대장을 불안하게 받아 든 클로에가 그것을 읽어 내리곤 미간을 좁혔다. 이든은 손가락을 뻗어 클로에의 미간을 펴며 말했다.

“걱정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그게 아니라…….”

“나랑 같이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북부로 돌아온 후, 클로에는 북부 사교 파티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의 집안에 대해 소문이 난 후로는 아예 공작저 밖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이든은 클로에가 그런 이유 때문에 어색해한다고 생각했다.

“와인 시음회네요?”

그러나 클로에는 이든이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것을 물었다. 몰랐던 사실에 이든이 오히려 되물었다.

“그랬나요?”

“모르고 계셨어요?”

어떤 파티든 북부의 귀족들이 대거 모이는 큰 규모의 파티를 찾았을 뿐이었다. 거기에 맞는 파티가 포르테 백작저에서 열리는 파티였을 뿐, 그게 와인 시음회였는지 무도회였는지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레이가 형편없는 파티의 초대장을 구해 왔을 리도 없으니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그냥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가든파티예요.”

포르테 백작가는 북부의 주류 유통을 맡고 있는 가문이었다. 날씨가 추운 북부에서는 양조용 포도 재배가 어려워 와인은 거의 다른 지방에서 수입해 왔기 때문에, 그의 상회는 제법 규모가 컸다.

북부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는 알코올의 힘이 필요했기에, 이런 자리가 있을 때면 북부 귀족들이 집합하곤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로는 딱 맞았다.

“저 술 마셔 본 적 없어요. 그래서 부담스러운데…….”

그때,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든이 신기해하며 물었다.

“한 번도?”

“네.”

생각해 보니 클로에가 술을 입에 대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사교 파티에서 와인 잔을 들고 있는 걸 본 적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식전주조차 마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이든은 클로에가 술을 꺼리는 것을 눈치채고는 그녀를 설득했다.

“안 마셔도 상관없으니 걱정 말고 같이 가요.”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요?”

굳이 와인 시음회에 참석해 놓고 술 한 모금 입에 넘기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클로에를 향한 소문은 지금도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든이 클로에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럼 한번 마셔 보죠, 뭐.”

“술을요?”

“나랑 마셔요. 내 앞에선 실수해도 상관없잖아요.”

클로에는 자신과 피를 나눈 형제인 에드윈이 술에 취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술에 아주 약했다.

와인 한 잔에도 얼굴이 벌게져서는 실없이 웃어 대던 그를 떠올리자 클로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이 이든의 앞에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일단 혼자 마셔 볼게요.”

클로에의 거절에 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마시는 건데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혼자 마셔요.”

“그럼 시녀랑…….”

“시녀랑 겸상을 하시려고?”

클로에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가이사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그, 그럼 포트먼 씨랑…….”

이든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누구랑 먹는다고요?”

이든이 서늘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대담하기도 하시지. 외간 남자랑 단둘이 술을 마시겠다고 남편한테 말하고.”

“그, 그런 게 아니라!”

“나예요, 레이예요?”

어째서 두 사람 중 한 명으로 골라야 하는 선택지가 된 건지 모르겠다. 안절부절못하던 클로에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이든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같이 마시면 되잖아요.”

이든이 얼굴에 승자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좋은 와인으로 준비해 놓으라고 할게요.”

보기 드물게 티가 나도록 즐거워 보이는 이든의 얼굴에 클로에는 불안해졌다. 에드윈과 자신의 주량이 다를 바 없을 거라는 알 수 없는 예감이 들었다.

* * *

침실에 간단히 준비된 안주와 와인을 보며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누가 보면 와인이 아니라 독배를 들라고 했다고 오해할지도 모를 정도였다.

뽁, 하고 와인 코르크가 빠지는 소리에 몸을 움찔거리는 클로에를 보고 이든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잔 속에 채워지는 붉은 액체를 멍하니 바라보는 클로에를 향해 이든이 물었다.

“왜 술을 한 번도 안 먹어 봤어요? 누가 권한 적도 제법 있었을 텐데.”

“…아버지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아버지라는 말에 이든은 괜한 것을 물었나 싶었다. 그녀가 남들과 다르게 굴 때, 그것의 이유가 보통 그녀의 아비에게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술만 먹으면 더 무서워졌거든요.”

그 말을 듣고 이든은 클로에에게 내밀었던 와인잔을 다시 거뒀다.

“억지로 마실 필요는 없어요.”

“괜찮아요. 앞으로 이런 자리가 몇 번이나 더 있을지도 모르고.”

이든이 말릴 새도 없이 클로에는 와인 잔을 가져가 입술에 댔다. 그녀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붉은 액체를 불안하게 바라보던 이든은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인상을 찌푸리는 그녀의 모습에 이든은 얼른 과일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별로예요?”

이든에게서 과일을 받아먹은 그녀가 그것을 오물거리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괜찮아요.”

“그거 다행이군요.”

그 후 몇 번인가 잔이 더 오갔지만 클로에는 이든이 생각했던 것보다 멀쩡히 잘 마셨다.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네.”

대답도 멀쩡히 잘하는 것을 보며 클로에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가 가늠하던 이든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와인을 입에서 주르륵 흘릴 뻔했다.

“그거… 벗게요?”

“네.”

이번에도 대답만큼은 잘했다.

그러나 클로에는 평소에 그녀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하고 있었다. 이든의 앞에서 드레스를 훌훌 벗고 있던 것이다.

‘취한… 건가?’

“더워.”

클로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거치적거리는 드레스를 허물 벗듯이 벗어 버렸다. 그러고는 속옷차림으로 주섬주섬 침대 위에 올라가는 게 아닌가.

속옷에 감싸인 그녀의 엉덩이와 그 아래로 뻗은 하얀 허벅지를 보며 이든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뭐, 뭐하려고요?”

이든은 바보처럼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피곤해. 잘래요.”

아예 속옷까지 벗으려 하는 그녀를 보며 이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상 이상의 파괴력을 가진 장면이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클로에, 그 이상 벗으면…….”

이든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클로에의 풀어진 모습이 사정없이 이든의 심장을 쥐어짰다.

베개에 머리를 폭 파묻고 있던 클로에가 이든을 향해 스스럼없이 팔을 벌렸다. 안아 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엉거주춤 클로에에게 다가간 이든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았다. 손에 닿는 그녀의 맨살이 새삼 낯설었다.

클로에의 행동들이 사정없이 이든의 심장을 쥐어짰다. 이든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취했어요?”

“네, 그런 것 같아요.”

클로에는 조금의 부정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에는 술에 취하기 전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든의 품에 안겨 있던 클로에가 주섬주섬 그의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예요?”

“이 느낌 별로예요.”

몇 번인가 헛손질을 한 클로에가 그의 셔츠 단추를 몇 개 풀고는 드러난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클로에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맨살에 닿는 천의 감촉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클로에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흘린 이든이 그녀에게 물었다.

“내일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네.”

네, 라는 말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클로에는 연신 네, 네 하고 대답하면서 그에게 달라붙었다.

“키스해도 됩니까?”

이든의 물음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든의 입술에 먼저 입술을 부딪쳐 왔다.

이든이 말캉한 가슴을 지분거렸을 때는 간지러운지 웃기까지 했다.

“좋아요?”

“응, 좋아.”

솔직한 그녀의 반응에 이든의 귓가가 화끈거렸다.

클로에가 다른 놈이랑 술을 마시게 해선 절대 안 된다는 경고가 이든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그런 그를 향해 클로에가 칭얼거렸다.

“더 해 줘요.”

“어디까지 해도 됩니까?”

잠시 생각하던 클로에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하고 싶은 데까지.”

결정타였다. 여기서 이든의 집 나간 인내심이 다시 돌아올 수는 없었다.

이든은 아예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그가 목 언저리에 얼굴을 묻자 클로에는 간지러운지 몸을 움츠리며 작은 신음 소리를 냈다.

천천히 그의 머리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클로에의 새된 신음 소리도 커졌다. 평소처럼 억누른다거나 참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 역시 흥분감이 고조됐다.

속옷 너머가 살짝 비칠 정도로 이미 눅진하게 젖어 있는 클로에의 밑을 확인한 이든은 그녀가 벗기다만 셔츠와 바지를 벗어던지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녀의 속옷을 벗겨 내자 속옷과 다리 사이에 길게 실이 늘어졌다. 절로 하반신에 피가 몰릴 만큼 야릇한 광경이었다.

술기운 때문인지는 몰라도 클로에는 그 어느 때보다 풀어져 있었다.

뻣뻣하게 발기한 신체의 선단을 그녀의 입구에 맞춘 채 허리로 꾹 누르자 별다른 저항 없이 그녀의 몸이 열렸다. 축축하고 뜨거운 그녀의 내벽이 그를 사정없이 휘감았다.

그녀는 바르르 떨며 허리를 뒤틀었다. 그 모습에 이든은 일순 사정감이 휘몰아쳤다.

“하아… 기분, 좋아요?”

“기분, 좋아…….”

평소였다면 절대로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술에 취한 클로에는 아주 솔직했다.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그는 그렇게 물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질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클로에가 대답 없이 신음만 흘리자 그는 평소 클로에가 지나치게 느끼던 부분을 찔렀다.

“아, 하읏!”

“여기가 좋아요?”

그녀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클로에는 허리를 휘며 자지러지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이든은 그녀의 골반을 붙잡고 본격적으로 움직임을 더했다. 퍽퍽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클로에의 신음 소리, 이든의 나직한 신음 섞인 숨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아, 하아, 읏!”

클로에의 손톱이 이든의 어깨를 긁어내렸다.

“윽……!”

이든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골반을 붙잡은 채 그는 제 정을 쏟아 냈다.

제 밑에서 바르르 떨며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는 클로에를 내려다보던 이든은 그녀의 안에서 제 것을 빼냈다. 그것만으로도 자극이 되는지 클로에는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이든이 그녀에게서 일어나려 하자 몽롱해진 그녀의 눈동자가 이든을 따라붙었다.

“어디 가. 가지 마요.”

매번 관계 후에는 그가 몸을 닦아 준다는 걸 알면서도 클로에는 그를 붙잡았다.

“가지 말라니까…….”

“몸 식으면 감기 들어요.”

그를 붙잡은 채로 빤히 바라보던 클로에가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당신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든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취기에 뭉개진 클로에의 발음은 부정확했다. 느릿하게 감기는 클로에의 눈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뒤늦게 물었다.

“뭐… 라고요?”

“좋아… 한다… 고.”

그러니까 가지 마. 그 말을 끝으로 클로에의 눈은 완전히 감겼다. 취기와 성적 만족으로 인한 노곤함을 이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엉거주춤 선 채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이든이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습게도 다리에 힘이 풀린 걸지도 몰랐다.

난데없는 고백을 하고 새근새근 잠이든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기억해야 할 텐데. 나를 먼저 부추긴 건 당신이라는 걸.”

각오해야 할 거예요.

이든은 잠이든 제 아내의 입가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 * *

숙취의 증상이 으레 그러하듯 클로에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이불 속에서 꿈틀거렸다.

“일어났어요?”

누군가 클로에를 향해 물 잔을 내밀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물 잔을 받아드는데, 클로에의 머릿속으로 잔상 하나가 스쳤다.

“좋아… 한다… 고.”

클로에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녀의 손에서 뚝 떨어지는 물 잔을 순발력 좋게 받아 챈 이든이 다시 그것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삽시간에 벌게지는 그녀의 얼굴을 본 이든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다행히 기억이 나나 봐요. 어제 아주 날 잡아먹으려고 작정을 했던데.”

“내, 내가 뭘요…….”

“나 좋아한다고 했던 건 기억해요?”

물 잔을 거의 떠밀 듯이 이든에게 넘긴 클로에가 이불 속으로 들어가 공처럼 몸을 말았다.

“아,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아무것도!”

“소용없어요. 내가 이미 다 들었으니까 못 물러요. 그러니까…….”

클로에가 붙잡고 있던 이불이 강제로 벗겨졌다. 클로에의 눈에 이불을 든 채로 웃고 있는 이든이 보였다.

보기 드물게 어린아이처럼 웃던 그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이제 그냥 나한테 와요.”

“…….”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모습이 클로에에게는 너무나 눈이 부셔, 그녀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볼을 감싸는 온기가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누군가의 예상치 못한 손길이, 클로에는 처음으로 두렵지 않았다.

* * *

포르테 백작저에서 열리는 가든파티는 여느 때보다 귀족들이 북적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의 3공 중 하나인 록스턴 공작이, 소문이 무성한 부인과 함께 참석했기 때문이다.

귀족가에서 사생아와 관련된 소문은 아주 민감한 것이었다. 과연 고명한 록스턴 공작가에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사람들의 이목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부터도 문제가 많았던 사람이니 귀족들을 클로에가 당연히 친정인 린다 후적저로 돌아가게 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그것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한가롭게 와인 시음이나 하는 가든파티에 참여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일부 귀족들은 그들이 보여 주기 식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겠냐며 의심했다.

“여기 묻었어요.”

물론 아내의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나 떼 주고 있는 이든 록스턴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든은 클로에가 관심을 보였던 음식들을 직접 가져와 그녀에게 먹이기도 했다.

북부 귀족들은 보수적이고 구시대적인 남자들이 많았다. 아내의 시중을 받는 남편들은 많아도, 남편의 시중을 받는 아내는 거의 없었다.

그것을 방증하듯 귀족 사내들과 달리 파티에 참여한 귀부인들은 클로에를 조금은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소문의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이든 록스턴이 아내를 존중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록스턴 공작 각하.”

파티의 호스트인 알론 포르테가 이든에게 다가왔다. 그는 좋게 말하면 눈치와 처세술이 좋은 사람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천생 장사치였다. 지금 다가온 이유도 속셈이 있어서였다.

주최자가 다가와 인사하자, 이든은 인사치레를 했다.

“초대해 줘서 고맙군, 포르테 백작.”

“저희가 영광이지요.”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말 붙일 기회만 엿보고 있던 귀족들이 클로에와 이든, 두 사람의 곁으로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헤링스 백작 부부와 달리아 헤링스도 있었다.

포르테 백작은 파티의 목적에 맞게 클로에와 이든, 두 사람에게 와인 잔을 건넸다.

“남부 보티뉴 지방에서 가져온 와인입니다. 맛이 나쁘지 않죠.”

이든은 그것을 정중히 거절했다.

“부인께서 술을 못해서. 다음을 기약하지.”

이든의 말에 클로에가 그의 옷자락을 슬쩍 흔들며 불만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 잔 정도는 마셔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것을 위한 술 마시는 연습이 아니었는가.

그녀를 내려다보던 이든이 클로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번에 취하면 나를 어떤 말로 놀라게 하시려고.”

그의 속삭임에 클로에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 모습을 귀족들이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아내의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이는 이든 록스턴이나, 밀어라도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붉히는 클로에나 오늘 그들이 예상했던 두 사람의 모습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다.

포르테 백작은 눈치껏 적절한 순간에 웃음을 터뜨려 귀족들 사이에 맴도는 침묵을 깨뜨렸다.

“이것 참, 제가 미처 생각을 못했군요. 다른 마실 것이라도 준비해드릴까요, 부인?”

“괜찮습니다. 괜히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요.”

포르테 백작이 클로에를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도라면 모를까 그녀는 북부 사교계에서 그다지 모습을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주한 그녀는 가십지에 실리던 것처럼 요란하고 유별난 사람이 아니었다.

‘경고로군.’

백작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시종에게 건네며 생각했다.

오늘 공작이 이 파티에 참석한 이유는 경고나 다름없었다. 제 아내를 향해 삿된 말을 하는 이들을 향한 경고.

애초에 공작이 몸소 참석할 만큼 중요한 파티도 아니고, 술도 마시지 않을 거면서 뭘 하러 왔겠는가.

그는 자신이 아내를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 보여 주려는 것이다. 소문을 잠재우는 게 어렵다면 차라리 이러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편히 즐기게. 그저 부인의 심란한 마음을 달랠 겸 왔을 뿐이니.”

넌지시 최근 일어난 사건에 대해 운을 떼는 이든의 모습에 귀족들은 눈치를 봤다.

그들도 클로에를 향한 소문을 모르지 않았다. 아니, 열심히 화제에 올렸었다.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소문을 퍼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든이 그들에게 전하는 명확한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 이는 없었다. 회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예, 예예. 그럼 이만…….”

싸늘해진 분위기에 포르테 백작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다른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든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귀족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목표를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헤링스 백작.”

다른 귀족들 틈에 끼어 이든에게서 멀어지려던 헤링스 백작 부부는 이든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클로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데없이 헤링스 백작을 부르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의아함을 느꼈다.

헤링스 백작 일가가 그들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고, 공작 각하.”

“오랜만에 뵙는군요.”

이든의 시선이 흘긋 그들의 옆에 있는 달리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해소되지 못한 의아함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영애도 오랜만입니다. 지난 번 고트 백작저에서 보고 처음이던가요?”

“네, 네……. 아마도.”

“피차 서로에게 실례를 저질렀던 것 같은데, 그때의 일은 이만 잊도록 하지요.”

달리아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고트 백작저의 일이라면 클로에도 보았다. 이든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달리아는 울고 있었고, 이든은 그녀에게 ‘경고’를 했다고 말했었다.

헤링스 백작은 제 딸과 달리 이든이 자신을 왜 부른 건지 도통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런 백작에게 이든은 웃으며 말했다.

“헤링스 백작.”

“예, 예, 공작 각하.”

“저택에 하녀를 들일 때는 조금 더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예?”

달리아의 얼굴이 더 희게 질렸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든은 서늘하게 웃었다.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고, 내뱉는 하녀가 집안에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덕분에 공작가가 조금 시끄러워서.”

이든의 말을 한참 곱씹던 헤링스 백작이 제 아내와 달리아를 돌아보았다. 헤링스 백작 부인은 백작과 마찬가지로 영문을 모른다는 얼굴이었고, 달리아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고 있었다.

겁에 질려 있는 달리아의 모습에 대충이나마 어떻게 된 상황인지 직감한 헤링스 백작은 달리아에게로 다가갔다.

“이…, 이……!”

헤링스 백작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달리아의 뺨을 철썩 내리쳤다. 북부에서 록스턴 공작의 눈 밖에 나는 건 이곳에서 살지 않겠다 천명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달리아가 연회장 바닥을 굴렀다.

그 소란에 연회장에 흐르는 연주가 멈추었고, 귀족들의 시선이 몰렸다.

그들은 난데없이 일어난 일에 놀란 얼굴로 헤링스 일가를 바라보았다.

헤링스 일가는 나름대로 북부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가문이었다. 게다가 달리아 헤링스는 전형적인 정숙한 북부의 미인으로 북부 사교계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달리아 헤링스를 아버지라는 사람이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리다니. 그녀가 무언가 단단히 잘못한 일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클로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헤링스 일가와 이든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얼추 사실에 가까운 것을 추론해 냈다.

어느 날 갑자기 퍼진 그녀의 소문. 달리아 헤링스. 그리고 그녀를 향한 이든의 경고. 어렵지 않은 얘기였다.

“고, 공작 각하…. 아, 아직 이 아이가 철이 없어서 저지른 일입니다. 부디…….”

헤링스 백작이 거칠게 달리아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고는 소리쳤다.

“너 얼른 사과드리지 못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든을 바라보던 달리아가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이든을 바라볼 때와 달리 눈에 적의가 가득했다.

“어째서…….”

“달리아!”

“…내 자리였어요.”

달리아가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내 자리였다고요. 저 여자가 아니라 내 자리였다고요!”

달리아의 악에 받친 외침에 헤링스 백작 부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다, 달리아!”

“온갖 더러운 소문 다 달고 다니는 저 여자보다 내가 못한 게 뭔데!”

사교계의 창녀라 불렸던 클로에와 정숙한 꽃이라 불렸던 달리아였으나, 눈앞의 상황은 오히려 반대였다.

클로에는 이 상황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달리아는 성질을 못 이겨 악을 쓰고 있었다.

“더 들을 가치도 없군.”

이든은 클로에를 데리고 돌아섰다. 그는 놀란 얼굴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포르테 백작에게 다가가 사과했다.

“파티를 망쳐서 미안하군. 다음번에 공작저에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지.”

“마, 말씀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처음부터 파티에는 미련이 없었던 모양인 듯 이든은 빠르게 연회장을 벗어났다. 이미 레이가 공작저의 마차를 준비해 둔 상태였다.

마차에 오른 이든은 조심스럽게 클로에의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뭐가요?”

“이렇게 요란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이든은 그저 사과를 받아 내고 싶었을 뿐이다. 알리사 못지않게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헤링스 백작이 달리아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때릴 줄은 이든도 몰랐다. 그래서 달리아가 소문에 관해서 모두의 앞에서 말하게 될 것도 예상할 수 없었다.

의기소침해하는 이든을 빤히 바라보던 클로에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지금 속이 좀 시원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다가도 씁쓸히 덧붙였다.

“별로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요.”

헤링스 백작이 달리아를 향해 손을 올렸을 때, 이든은 제 옆에서 크게 움찔거리던 클로에를 느꼈다. 확실히 그녀로선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으리라.

이든이 클로에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뭐가요?”

“남들이 아는 게 무서웠다면서요.”

부모에게 버림받은 무가치한 인간. 그게 클로에 린다라는 사실을.

“잘 모르겠어요.”

클로에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처음 알았을 때보다는 덜 무서워요.”

클로에도 어렴풋이 그 이유를 짐작하고는 있다.

이미 그때부터 그에게 마음이 기울고 있었던 거다. 애정을 갈구하는 상대에게, 의지하고 있던 상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애정의 모순이다.

인간관계를 향한 두려움보다 애정이 더 컸던 적이 없는 클로에는 그것을 모르고 살았다.

클로에는 무언가 말하기를 망설이듯 입술만 달싹였다. 그것을 발견한 이든이 물었다.

“할 말 있어요?”

클로에가 이든의 옷자락을 잡았다.

보통 그녀가 이런 행동을 할 때면, 상황은 이든이 상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다.

“…나 좋아해요?”

바로 지금처럼.

클로에의 뜻밖의 물음에 이든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에 클로에의 얼굴이 빨개졌다.

“지금까지 내 행동이 답이 되지 않았나요? 고백도 했던 것 같은데.”

클로에가 우물쭈물 말했다.

“…난 그런 거 잘 몰라요.”

“내가 말했잖아요.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당신일 거라고.”

이든은 제 소매를 붙잡고 있는 클로에의 손을 들어 올리고는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좋아한 지 꽤 됐는데.”

이보다 요망한 고백은 없었다.

* * *

이든과 클로에가 포르테 백작저에 다녀온 후로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클로에를 향한 소문들은 가라앉았다. 이든 록스턴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은 건 귀족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북부에서 그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제도에는 린다 후작가의 젊은 가주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헤링스 백작가의 말로가 그다지 좋지 않으리라고 귀족들 누구나 예상했다.

어쨌든 소문이 가라앉자 클로에의 일상도 돌아왔다.

한 가지 변한 게 있다면 클로에와 이든의 사이가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는 것뿐이었다.

가까워졌다고는 해도 이든이 강아지처럼 클로에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뿐이었다.

가령, 갑자기 고아원에 따라가 보고 싶다고 한다던가.

“절대로 누구인지 말하면 안 돼요.”

“알았다니까요.”

클로에의 당부에 이든은 제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하지만 클로에는 그런 이든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든은 부유한 평민들이나 입을법한 옷을 입고도 귀족이라는 것이 확 티 났기 때문이었다.

‘뭐지. 뭐가 문제인 거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정한 이든의 차림새를 발견한 클로에는 목까지 잠겨 있는 그의 단추 하나를 풀었다.

“…….”

그래도 부족했다.

이든의 옷을 더듬거리며 그를 흐트러뜨리던 클로에는 위에서 들리는 나직한 웃음소리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꾸 그렇게 더듬거리면 나 오해할지도 몰라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사람처럼 클로에는 그에게서 후다닥 멀어졌다.

이든은 그런 클로에를 보며 웃다가 그녀가 흐트러뜨린 자신의 옷매무새를 내려다보았다. 흐트러진 이든은 오히려 뭔가 더 위험해 보일 뿐, 평민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뭐, 귀족으로 보인다한들 고아원의 사람들은 그가 록스턴 공작 본인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할 테지만. 클로에는 그것을 위안 삼아 공작저를 나섰다.

오늘은 클로에가 처음으로 레이가 아니라, 이든과 함께 고아원을 가는 날이었다.

* * *

“평소에도 이렇게 직접 돌아다니며 샀습니까?”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의 제과점에서 아이들이 먹을 간식거리를 고르는 클로에를 보며 이든이 물었다.

“네.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요.”

“위험하게, 시종도 한 명 없이.”

“포트먼 씨랑 같이 다녔는걸요.”

클로에의 입에서 나오는 레이의 얘기에 이든은 빙긋 웃었다.

아무래도 레이의 휴일을 조정해야 할 것 같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겠다.

익숙한 손길로 아이들을 위한 간식과 장난감을 고르던 클로에의 귀에 무언가 삑삑거리는, 작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맞은편 가게 한편에 빽빽이 걸려 있는 새장이 보였다.

색색의 새들이 새장 속, 나무 막대에 앉아 있었다. 고아원에 갈 때가 아니면 이런 곳까지 나올 일이 없는 클로에로서는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클로에가 그녀답지 않게 관심을 보이며 홀린 듯이 다가가자 이든은 웃음을 삼킨 채 그녀를 뒤따랐다. 클로에가 무언가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드문 일이었기에 이든은 그녀가 원한다면 동물이든 무엇이든 다 구해 줄 용의가 있었다.

“마음에 들면 공작저에도 한 마리 데려오죠.”

이든의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 하루도 안 가서 풀어 줄지도 몰라요. 새장은 답답해 보이잖아요. 예쁘긴 하지만.”

과한 의미 부여일지도 모르지만, 클로에가 저렇게 말할 때마다 이든은 속이 선득해졌다. 혹여나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가 그녀의 아비가 그랬듯 그녀를 갑갑하게 만든 것일 까봐.

이든은 부러 그녀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럼 저건 어때요. 저거 좀 당신 닮았는데.”

이든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클로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를 닮았다고요?”

클로에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가리킨 건 삼삼오오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는 고슴도치였기 때문이다.

“내가 고슴도치 닮았다고 한 거예요, 지금?”

“당신이 고슴도치보다는 좀 더 귀엽죠.”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이었다. 클로에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사람을 지켜보던 가게 주인이 거들었다.

“손을 타기 시작하면 주인에게는 가시를 세우지 않는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가게 주인의 말에 이든이 키득거리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거봐요, 당신 닮았잖아.”

“내, 내가 언제 가시를 세웠다고……!”

찔리는 게 제법 많았기에 클로에는 벌게진 얼굴로 말까지 더듬었다. 그런 클로에를 향해 이든이 나직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고슴도치 딜레마라는 말, 알아요?”

“별로 좋은 말일 것 같지는 않네요.”

부루퉁한 클로에의 목소리에 이든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고슴도치들은 추워도 서로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대요. 자기 가시가 남에게 상처를 입힐까 봐, 다른 고슴도치의 가시에 자기가 상처 입을까 봐.”

인간관계와 퍽 닮은 고슴도치의 생리에, 클로에는 머리를 맞대고 모여 있는 고슴도치들을 내려다보았다.

“잘만 붙어 있는걸요.”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거죠. 가시가 없는 부분을 맞대면 되니까.”

그러더니 이든이 클로에와 눈을 마주하며 얄밉게도 물었다.

“이래도 안 닮았어요?”

결국, 클로에는 성난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운 채 그에게서 휙 뒤를 돌아 버렸다. 그 모습에 이든은 얼른 그녀의 뒤를 쫓았다.

저러다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그를 향해 뒤를 돌 거다. 분명히.

그 생각을 하자마자, 클로에가 그를 돌아보았다.

“빨리 와요.”

이든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빨리 수그러든 그녀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시를 내리고 상대를 향해 경계를 푸는 작은 동물처럼.

이든은 그녀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귀엽기도 하지, 내 작은 가시꽃 아가씨.

그녀는 평생 그가 소중히 가꾸고, 그의 손에서 예쁘게 피어날, 그만의 작은 가시꽃이었다.

-가시꽃 딜레마(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