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관계의 변화 (6/8)

5. 관계의 변화

다리 사이는 얼얼했고, 허리는 시큰거리는 느낌에 클로에는 꼼짝도 하기 싫어졌다. 이게 단 하루 만에 괜찮아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일 고아원에 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연락은 해 둬야 할 텐데.’

공작가의 사람을 시켜 연락을 하기에는 그녀의 신분이 탄로 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로셰나 아이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에 걸려 결국 클로에는 누워 있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게다가 멋대로 약속을 어기는 건 내키지 않았다. 고아원에 서신을 보내려면 이든이 없는 지금이 적기였다.

그녀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둘. 공작저의 마부와 레이 포트먼뿐이다. 레이와는 뭔가를 부탁하고 들어줄 만한 관계가 아니었고, 지금 그는 이든과 함께 영지 시찰을 나갔으니 클로에는 당연히 마부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클로에가 방을 나서자 시녀들이 그녀를 따랐다.

그녀는 나름대로 자신이 멀쩡히 걷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초야의 후유증으로 어기적거리며 걷고 있었다. 결국 그녀를 불안한 얼굴로 지켜보던 시녀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마님, 시키실 일이 있다면 저희들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괜찮아.”

“그럼… 의사라도 부르시는 게.”

클로에는 시녀의 말에 그제야 제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르륵 타오르듯 붉어지는 클로에의 얼굴에 시녀들도 덩달아 당황했다. 그들도 귀가 있는지라 모시는 주인마님의 소문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 부부의 침실 사정을 겁 없이 떠드는 이들은 없었으나 핏자국이 배어 있는 부부 침실의 시트에 그들이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소문 속의 록스턴 공작 부인은 정숙을 모르는 음탕한 여자였다. 그런 사람과 눈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여인의 간극은 컸다.

“나, 나중에 불편하면.”

클로에는 기어코 공작저의 마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클로에가 찾는 마부가 오늘 이든의 영지 시찰을 따라갔다는 것과 이든이 생각보다 빨리 공작저로 돌아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멀리서 들리는 말발굽소리에 클로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든은 영지 시찰을 나갈 때 보통 해가 다 져서야 오곤 했다. 즉 평소의 이든이라면 이렇게 빨리 귀가할 리 없었다.

클로에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는 사이 공작가의 마차가 대문을 지나, 클로에와 멀지 않은 곳에 멈추어 섰다.

말을 몰던 마부가 제일 먼저 클로에를 발견했고, 그 다음엔 레이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든이 그녀를 발견했다.

“클로에?”

이든이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엉거주춤 서 있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그와의 마주침을 달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서둘러 일을 끝내고 공작저로 돌아왔을 정도로 그녀가 뭘 하고 있나 궁금할 지경이었는데. 하지만 이든은 불만을 삼켰다.

“여기서 뭐 합니까?”

“어, 음. 산책이요.”

클로에의 대답에 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공작저를 나서기 전 보았던 클로에는 지난밤 거칠었던 그로 인해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산책이라니. 게다가 멀쩡한 정원을 놔두고 마차장에는 왜 온단 말인가.

“밖에 나갈 생각이었어요?”

클로에가 주기적으로 공작저를 나서 어디론가 나간다는 사실은 이든도 알고는 있었다. 서로 사생활은 개입하지 말자는 결혼 전의 조건도 있었고, 그녀가 불편해할까 봐 물었던 적은 없지만 이든은 심히 그것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라니까요.”

한눈에 보아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마님과 그런 제 부인을 바라보고 있는 공작의 대치에, 비밀을 알고 있는 마부는 땀을 뻘뻘 흘렸다. 만약 공작이 사실을 알고 그를 문책한다 해도 그는 할 말이 없었다.

마부가 주인 부부의 대치에 기절하기 직전,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서신을 보낼 데가 있던 것뿐이에요.”

그에게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사실을 말하는 게 나았다. 예전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지만 클로에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 말을 듣고 이든은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녀들을 시키지 그랬어요, 몸도 안 좋은데.”

그의 말에 클로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몸이 안 좋은 건 전적으로 그의 탓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은 아무런 책임도 없는 양 말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내색할 수 없었던 클로에는 말을 돌렸다.

“제가 직접 보내고 싶어서요.”

이든은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제 물음이 그녀에게 취조처럼 들릴까 섣불리 묻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클로에는 그의 침묵이 도리어 무서워졌다.

“고아원에…….”

클로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아원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세 남자가 반응했다. 마부는 말할 것도 없이 놀랐고, 레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든은 난데없이 나오는 고아원 얘기에 의아했다.

“고아원이요?”

“제가 아이들을 돌보는 곳이 있어요. 내일은 그곳에 가지 못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서신을 보내려고 했던 거예요.”

고아원, 클로에의 은밀한 나들이, 레이 포트먼. 드디어 그를 거슬리게 만들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하나 맞춰지기 시작했다.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어째서 클로에가 그것을 자신에게 숨겼는가에 대한 것이지만.

그때, 이든의 뒤에 서 있던 레이가 입을 열었다.

“클로에 님. 버겐트 씨에게는 제가 이미 서신을 보내 두었습니다.”

“언제… 아니, 왜요?”

약간의 침묵 끝에 레이가 대답했다.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아서요.”

레이의 대답에 클로에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녀가 지난밤 이든과 무엇을 했는지 공작저의 모두가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부리는 사람이 많은 귀족가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일부는 남편의 사랑을 받은 흔적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클로에는 그럴 만큼 뻔뻔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근거 없는 소문을 흘려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민망함이었다.

“어, 어쨌든 고마워요.”

“별말씀을.”

클로에가 화제를 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레이가 말을 받았다.

자신만 모르는 타인의 대화를 듣는 것을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레이 포트먼과 클로에 록스턴의 대화라니. 불과 몇 달 전만해도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 두 사람이 퍽 가까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분명, 이때까지만 해도 이든은 그게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 * *

이든이 그녀의 비밀스러운 나들이에 대해 알게 된 이후로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그중 가장 큰 변화가 클로에가 그의 앞에서 그 나들이에 대해 편하게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요, 포트먼 씨?”

물론 그를 향해 편하게 말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든은 제 앞에서 도란도란 고아원이 어쩌고, 아이들이 어쩌고 떠들고 있는 클로에와 레이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나보다 저 녀석을 더 편안해하는 거지?’

잠자리를 가진 이후로 클로에는 이든을 피했다. 대놓고 피하는 건 아니지만 이든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에는 충분한 정도였다.

역시, 그날 밤 너무 거칠었던 걸까.

기계적으로 서류에 사인을 하던 이든은 멀리서 레이를 향해 웃는 클로에의 얼굴에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클로에.”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하는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클로에의 그런 기묘한 반응을 레이 역시 눈치 챘는지 흘긋 그녀를 살폈다. 이제는 그것조차 기껍지 않아 이든은 레이에게 잠시 물러나 있으라는 듯 눈짓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이든의 집무실이었다. 클로에는 이곳에 올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고아원의 후원금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레이와 공작 부인의 앞으로 배당된 예산안에 대해서까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서서 구두로 할 얘기는 아니었고, 후원금에 대한 문제는 이든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레이가 그녀를 이든의 집무실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어쨌든 며칠 동안 클로에가 이든을 피한 게 무색한 결과였다,

레이가 집무실을 나가자 이든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클로에의 맞은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

“말해 봐요.”

“뭐, 뭐가요?”

“왜 나 피해요?”

이든이 묻자 클로에가 펄쩍 뛰었다.

“아, 안 피했어요.”

“내가 뭐 실수했어요?”

직접적인 그의 물음에 클로에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에 이든은 더 속이 탔다. 혹시 그날, 그녀의 트라우마를 후벼 판 것이 아닐지 이든은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그날 당신을 무섭게 했어요?”

“아니에요!”

그녀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다급하게 외쳤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라니 다행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다급한 외침에 놀라기는 이든도 마찬가지였다. 이든은 놀란 얼굴로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무서운 게 아니라…….”

그녀의 입이 달싹거렸다. 어째서인지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라서.”

개미만 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이든의 미간이 좁아졌다.

“뭐라고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클로에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망치듯 집무실을 벗어나려는 클로에가 문을 열기 전, 그가 그녀의 뒤에서 문을 손바닥으로 쾅 닫았다.

생각보다 크게 난 문소리에 화들짝 놀란 클로에가 안간힘을 쓰며 문고리를 잡아당겼지만 이든의 힘을 비쩍 마른 그녀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무슨 뜻이에요?”

바로 등 뒤에서 묻는 이든의 목소리에 클로에가 몸을 움츠러뜨리자 그는 그녀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문을 붙잡고 있는 손은 그대로였다.

만약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는다면 지금까지 그를 피했던 것도 모른 척 넘어가 줄 수 있을 만큼 그는 관대함이 생겼다.

귀엽기 짝이 없다.

그의 팔 안에 갇힌 채 우왕좌왕하던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말했다.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두 사람이 나누었던 행위는 완벽한 타인인 두 남녀가 주고받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친밀한 행위였다.

다른 사내에게는 보여 준 적 없었던 그녀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보인 건 차치하더라도, 그 칠칠맞은 얼굴과 반응이라니! 그것도 1년 가까이 남이나 다름없었던 이름뿐인 남편에게 말이다.

“그, 그리고 나만 이상했고.”

그의 팔 아래로 보이는 클로에의 뒷덜미가 붉었다. 그 모습에 절로 단전 부근에 열기가 모여 이든은 다른 한 손으로 목을 갑갑히 죄는 크라바트를 슬쩍 끌렀다.

그런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에가 덧붙였다.

“당신은 여유로워 보였는데.”

“…….”

그녀의 말을 한참 동안 곱씹던 이든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누구더러 여유로웠다는 건지. 자제력 하나 못 챙겨서 그녀를 거칠게 탐하지 않았던가.

클로에는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문고리를 잡은 손에 안간힘을 썼다.

잠시 방심하고 있던 이든은 덜컥 하고 열리는 문에 다시 힘을 꾸욱 줬다. 맥없이 다시 닫히는 문에 클로에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이든과 눈이 딱 마주치자 다시 황급히 뒤로 돌았다. 그의 눈에서 미처 갈무리되지 않은 열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침대 위에서 보았던 눈빛이다. 어째서 갑자기 그가 자신을 저런 눈으로 내려다보는지 클로에는 알 수 없었다.

클로에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내리고는 웅얼거리듯 말했다.

“방에 갈래요. 보내 줘요.”

하지만 이든은 클로에가 한 말을 흘려 넘기고 이전에 했던 말에 집중했다.

“그러니까 지금 같이 밤을 보낸 게 부끄러워서 나를 피했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정리하니 세상 순진한 아가씨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이든과의 잠자리는 그녀의 안에 정립되어 있던 가치관을 통째로 흔드는 대사건이나 다름없었다.

끔찍할 거라 생각했던 사내와의 잠자리는 그녀에게 완벽한 일체감, 혹은 결핍되어 있던 그녀의 안의 무언가를 채워 주는 충만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든 록스턴이 그녀를 다정하게 안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비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클로에는 자신이 그런 다정함에 한없이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즉, 다정한 이든 록스턴은 클로에에게 가장 친밀한 행위를 나눈 사람이자, 가장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된 것이다.

이든은 제 팔 안에 갇혀서 낑낑거리는 클로에를 뒤에서 번쩍 안았다. 뒤에서 덜렁 들린 클로에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뭐하는 거예요!”

발버둥치는 클로에를 집무실 책상에 앉힌 이든이 그녀의 양옆에 손을 뻗은 채 서서 중얼거렸다.

“알고 그러는 건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

“뭐, 뭐가요.”

“자꾸 나를 부추기잖아요, 당신이.”

뭘 부추겼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클로에는 일단 부정하고 보았다.

“그런 적 없어요.”

“지금도 그러고 있어요.”

점점 자신을 향해 허리를 숙이는 이든을 피해 클로에가 몸을 뒤로 빼자, 그가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안 도망갈 거라더니.”

그의 말에 클로에는 발끈해서 반박했다.

“여기, 당신 집무실이잖아요.”

“집무실이 아니면 괜찮다는 뜻이에요?”

“그건 아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든은 클로에의 무릎 뒤로 손을 넣고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클로에가 말릴 새도 없이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클로에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이였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클로에와 이든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부를 때까지 찾지 마.”

이든은 레이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돌아다니던 사용인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주인 부부의 사생활을 모른 척했다. 창피함은 모두 클로에의 몫인 듯 이든은 거리낌이 없었다.

“어, 어디 가는 거예요!”

“침실이요.”

덤덤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기에 클로에는 제 귀를 의심했다.

“침실을 왜…….”

“이 대낮에, 왜겠어요?”

그가 야릇하게 웃었다. 경악한 클로에가 그를 밀어내며 발버둥쳤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든이 폭신한 침대 위에 살포시 그녀를 내려놓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것이 클로에는 이상했다.

“왜 그렇게 웃어요?”

“당신이 귀엽게 구니까.”

“귀엽…….”

할 말을 잃은 듯 입술을 달싹이던 클로에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런 말은 생전 처음 듣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물론 실제로도 처음이었다.

이든이 침대에 걸터앉자 클로에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왜 자꾸 도망쳐요?”

“당신이 자꾸 오잖아요.”

“싫어?”

“싫다는 게 아니라!”

“다행이네요, 싫은 건 아니라서.”

클로에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이든 록스턴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느낌이었다.

입을 굳게 다문 채 무릎을 모아 안는 방어적인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이 나직이 말했다.

“당신이 날 피하는 동안 내가 얼마나 별생각을 다 한 줄 알아요?”

혹시나 자신이 그녀를 겁먹게 만든 건 아닐까, 너무 경솔했던 건 아닐까. 이든은 처음으로 초조함에 밤잠을 설치는 경험을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의 남자로서의 자존심은 박살이 났다. 첫 잠자리를 가진 직후부터 부인이 남편을 피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든은 클로에에게 애원하듯 말할 수밖에 없었다.

“피하지는 말아요. 싫다는 건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은 클로에에게 있어서도 싫은 건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았고, 이럴 때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맞는 건지, 그녀는 누구에게도 그것을 배우지 못해서 그랬던 것뿐이다.

그것 때문에 이든이 상처를 받은 건 아닐까. 클로에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에요. 싫은 건 아니었어요.”

클로에는 멀찍이 앉아 있는 이든에게 다가가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든의 얼굴을 흘긋 올려다보고는 잡고 있던 소맷자락을 슬며시 당겨 보았다.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었고, 힘도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약했지만 이든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 주었다.

그의 소맷자락만 붙잡은 채로 망설이듯 꼼지락거리던 클로에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향한 곳은 침대를 짚고 있던 그의 손등이었다.

그의 손등 언저리에서 한참을 망설이듯 움찔거리던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검지를 움켜쥐었다. 마치 손바닥에 손가락을 올리면 그것을 움켜쥐는 갓난아이 같은 행동 같았다.

누군가는 그것을 인간의 안에 내재되어 있는 생존 본능이라 했고, 누군가는 애정을 향한 갈구라고 했다. 이든은 그녀의 손길이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게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닿기만 해도 기겁을 하던 얼마 전을 생각하면 이 소꿉장난 같은 접촉마저도 대단한 발전이었다.

그녀의 최선과 그의 최선의 간극이 너무나 큰 탓에 이든의 마음이 심란해지려 할 때였다. 클로에가 덧붙였다.

“…그래도 당신이 안는 건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참는다니.’

이든은 그녀의 말에 좋아해야 할지 아쉬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참는 게 아니라 나는 당신도 같이 즐거웠으면 좋겠는데. 그때, 아프고 괴롭기만 했어요?”

그의 물음에 클로에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김이 날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정신없이 그에게 매달리며 신음을 내지르던 자신을 클로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너무… 이상하단 말이에요. 정신이 하나도 없고. 그러니까, 나는 그게 조금 무서워요.”

이든이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나도 그래요. 이상하고 정신이 아득해져.”

그러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데 나는 그게 환장할 정도로 좋거든요.”

이든은 그녀의 귓가에 머물던 입술을 그대로 내려 그녀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움찔거릴 뿐 클로에가 피하지 않자, 그는 그녀의 턱을 붙잡고 그녀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대로 그녀가 침실에서 도망쳐 버려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이든은 서툴게나마 입맞춤에 응하는 클로에의 모습에 급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겨우 제 손가락 하나를 잡는데도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농밀한 키스를 퍼붓던 그가 살짝 입술을 떼고 나직이 말했다.

“싫으면 거부해요. 지난번처럼 따귀를 때려도 되니까.”

제도의 후작저에 있을 때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를 떠올린 클로에가 머쓱해진 듯 슬며시 눈알을 굴리며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어요.”

“허락해 주는 거예요?”

“안 도망갈 거라고 했잖아요.”

“일주일을 피했으면서.”

대답을 바란 투정은 아니었는지 이든의 입술이 다시금 클로에의 입술을 덮었다.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있던 이든의 손이 그녀의 등으로 향했다.

뷔스티에와 코르셋까지 착장하고 있던 지난밤의 파티 드레스와 달리, 지금 클로에가 입고 있는 건 하늘하늘한 실내용 드레스였다. 그가 그녀의 등을 지분거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드레스가 헐거워지며 그녀의 어깨에서 떨어져 허리 부근에 말렸다.

피부에 닿는 찬 공기에 클로에가 바르르 떨자 그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맨등을 쓸었다. 그녀의 척추 마디마디를 차례로 매끄럽게 만지던 그가 손에 닿는 그녀의 속옷과 함께 그녀의 드레스를 한꺼번에 벗겨 냈다.

순식간에 나신이 된 클로에와 달리 이든은 크라바트부터 베스트까지 곧장 외출을 해도 무방할 정도로 단정한 차림새였다. 그 간극이 주는 민망함에 클로에는 괜스레 그의 크라바트를 죽 잡아당겼다.

“부추기는 거라면 곤란한데.”

“그, 그런 게 아니라 나만 벗고 있잖아요.”

클로에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뜨린 이든이 클로에가 잡아당겨 헐거워진 크라바트를 끌러 내렸다.

남부인들과 달리 피부가 하얗고, 머리칼 색이 짙은 북부인들의 특징 때문인지는 몰라도, 베스트의 단추를 풀고, 양손의 커프스 버튼을 차례로 푸는 이든의 모습은 어딘가 퇴폐적인 구석이 있었다.

셔츠를 벗고 바지 버클을 풀어내던 그가 클로에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그가 탈의하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클로에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천장으로 쳐들었다.

난데없이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 클로에를 향해 그가 물었다.

“뭐 합니까?”

“아, 안 봤어요.”

“보라고 일부러 천천히 벗고 있었는데. 기대하는 것 같기에.”

그의 말이 놀리는 것처럼 들려 클로에는 발끈했다.

“기대 같은 거 안 했어요!”

“아쉽네요.”

그는 여상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하고는 클로에를 향해 몸을 틀었다. 벗으라고 한 것을 클로에였지만 막상 근육이 촘촘히 짜여 있는 그의 흠 없는 몸이 눈앞을 채우자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두웠던 지난밤과 달리 지금은 훤한 대낮이었다. 지나치게 모든 것이 잘 보였다. 클로에의 눈에 이든의 몸 구석구석이 잘 보이듯, 이든에게도 그녀의 몸이 잘 보일 게 분명했다. 클로에는 그런 상황이 부끄러워졌다.

“좀 밝은 것 같아요.”

“좋네요. 잘 보이고.”

“뭐, 뭐가요?”

“여러 가지가요.”

이든의 대답에 클로에는 새빨개진 얼굴로 창가를 가리켰다.

“커튼 닫을래요. 밝은 데서는 못해요.”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은 놀릴 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귀여웠지만, 자그마치 일주일을 도망 다녔던 클로에다. 또 겁을 먹고 도망치면 곤란하니 이든은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이든이 커다란 창가 양옆에 묶여 있던 커튼 줄을 풀어냈다.

“이제 됐어요?”

암막 커튼이 아니었기에 방 안은 어슴푸레한 정도였지만 클로에는 그 정도에도 안심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든이 그녀를 팔 안에 가두고 천천히 애무를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녀의 가슴을 지분거리며 목 언저리에 입술을 묻고 있던 이든은 그녀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을 느꼈다.

처음 잠자리를 가졌던 날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클로에는 이든의 팔 안에 갇혀 있는 듯한 자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조금 무서워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든은 그녀에게서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제게서 멀어지는 이든의 모습에 클로에는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침대 헤드에 등을 대고 기대앉은 이든은 클로에를 잡고 일으켜 제 허리 위에 앉혔다. 영문도 모른 채 그의 손길을 따라 움직이던 클로에는 하체가 맞닿은 야릇한 자세에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하면 덜 무서워할 것 같아서.”

클로에는 그가 그것을 눈치채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조금 놀랐다. 그의 말대로 사내의 팔 안에 갇혀 있는 듯한 자세는 조금 거북했다.

무섭고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은 사라졌지만 다른 의미로 곤란했다. 코앞에서 마주한 이든의 얼굴과 맞닿은 신체가 너무나 적나라했다.

“응, 흐읏…….”

게다가 이든의 애무가 훨씬 자유로워졌다. 그는 눈앞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클로에의 표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으며 집요하게 손을 움직였다.

“왜, 흐으, 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래야 당신이 어딜 만졌을 때 좋아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

이든의 손이 클로에의 다리 사이, 예민한 정점에 닿았다. 그가 지분거리기 무섭게 클로에는 바르르 떨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아, 아, 앗!”

그녀의 비부가 조금씩 젖기 시작했다.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쾌감의 산물이 그의 다리까지 적시기 시작했다.

이든은 이미 한참 전부터 팽팽하게 발기한 제 신체의 끝을 클로에의 입구에 맞추고는 천천히 파고들었다.

붙잡고 있는 그녀의 엉덩이를 놓고 그대로 하체를 올려붙이고 싶은 욕구를 이든은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잠, 잠깐, 너무 깊……!”

처음보다 깊게 파고드는 자세에 클로에가 겁을 집어 먹었다. 그의 목에 팔을 감은 채 매달리는 클로에의 등을 매만지며 이든은 탁한 숨을 토해 냈다.

“괜찮으니까 힘 빼요. 내가 잡고 있으니까.”

이든의 말에도 클로에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든이 그녀의 엉덩이와 허리를 받쳐 주고 있었지만 불안해져서 무릎으로 버티고 섰다. 너무 센 자극은 이성이 날아가는 것 같아 무서웠다.

고집스러운 클로에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그러나 탁해진 웃음소리를 흘린 이든은 결국 그 상태로 허리를 움직였다.

클로에가 무릎으로 버티고 서 있는 탓에 이든의 성기가 반복적으로 얕게 그녀의 안을 오갔다. 강한 자극을 좋아하지 않는 클로에에게는 만족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이든의 욕구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

제 위에서 작게 신음을 흘리는 클로에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이든이 그녀의 골반을 붙잡고 살짝 내렸다.

“하읏!”

클로에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어깨에서 얼굴을 뗀 클로에가 원망 섞인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 흣, 깊은 거, 아앗, 싫어요.”

“조금만 더, 응?”

투정하는 클로에를 달래며 이든이 그녀의 골반을 더 내렸다. 더 깊이 내벽을 파고드는 느낌에 클로에가 바르르 떨었다. 무릎에 힘이 빠졌는지 그녀가 움찔거릴 때마다 그의 성기가 그녀의 안으로 더 깊이 박혔다.

“아, 아, 앗.”

“기분 좋아요?”

“무, 흐읏, 무서워,”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의 위에 올라탄 채로 신음을 내지르며 매달리는 모습은 꽤 이든의 마음에 들었다.

이든이 받쳐 주고 있던 그녀의 허벅지를 슬며시 놓으려 하자 그녀가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노, 놓으면 안 돼요.”

클로에의 부탁에도 묘한 웃음을 흘리기만 하는 이든의 얼굴에 클로에는 불안해졌다.

“조금만 더요.”

이든의 손이 클로에의 허벅지에서 떨어졌다.

“하악!”

어느 때보다 깊이 파고드는 감각이 선연했다. 배 속이 그의 것으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이든에게서 들리는 만족스러운 그르렁거림에 클로에는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때렸다.

“시, 흣, 싫다고 했는데!”

아프지도 않은 주먹질에 이든은 웃으면서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긴장으로 단단하게 굳어 있는 그녀의 허리를 풀어 주며 그는 조심스럽게 하체를 움직였다.

그녀가 그의 것을 뿌리까지 머금었다가 토해 냈다. 그녀의 안에서 나온 액체에 그의 것이 번들번들해져 있었다.

“아, 하아, 아흑……!”

그가 허릿짓을 해 댈 때마다 그녀의 소담한 가슴이 그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그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녀가 제 위에 올라탄 이 체위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시각적으로나 감각적으로나 동하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그녀의 허리선을 타고 그의 손이 올라와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단단해진 분홍빛 정점이 그의 손바닥에 쓸릴 때마다 그는 그녀의 질벽이 사정없이 자신의 것을 조이는 것을 느꼈다.

조금씩 그의 허릿짓이 빨라졌다. 그녀의 신음 소리가 높아지더니 그의 허리 양옆으로 벌어진 그녀의 허벅지가 바르르 경련했다.

이든은 제 목에 팔을 걸고 매달리는 클로에의 등을 껴안으면서 마지막으로 깊게 그녀의 안에 자신을 묻었다.

“흐읏, 읏!”

클로에의 마지막 신음은 숫제 우는 것에 가까웠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짙은 자극에 클로에는 바들바들 떨며 절정의 여운이 가시길 기다렸다.

“괜찮아요?”

그가 아릿하게 붉어진 그녀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물었다. 파르르 떨리는 숨을 내뱉던 클로에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제 얼굴을 가렸다. 이성이 돌아올수록 찾아오는 것은 창피함과 부끄러움이었다.

“깊은 거, 싫다고 했는데…….”

“미안해요, 미안.”

이든은 달래듯 그녀의 허리를 토닥였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는 지금 짙은 만족감에 그녀의 투정이든 뭐든 다 받아 줄 수 있을 정도로 관대해졌다.

사실 이대로 한 번 더 제 욕심껏 그녀를 탐하고 싶은 욕구가 들었지만 제 위에서 힘이 빠져 늘어져 있는 클로에를 보고 이든은 천천히 그녀의 안에서 제 것을 빼냈다.

주르륵, 클로에의 다리 사이에서 떨어진 그의 정이 그의 다리와 시트를 적셨다. 절로 그의 음심을 부추길 만큼 야릇한 광경이었다.

이든의 시선을 따라 제 다리 사이를 바라본 클로에는 얼굴을 붉혔다.

그가 그녀의 안에 파정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한 클로에가 어쩔 줄 몰라 하자 결국 이든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잡고 제 위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하얀 액체가 후두둑 떨어졌다. 클로에의 얼굴이 그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올랐다.

이불을 더럽힌 끈적한 액체를 잠시 바라보던 이든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닦아 줄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욕실로 들어간 그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는 수건과 대야가 들려 있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클로에의 다리를 손쉽게 벌린 그가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그녀의 다리를 정성스럽게 닦아 냈다. 처음에도 그랬고 그는 언제나 잠자리 후를 더 신경 쓰는 편인 것 같았다.

잠자리에 거부감이 있던 그녀 때문일지도 몰랐다. 혹시나 그녀가 이런 행위에 거부감을 가지게 될까 봐.

점점 닦여 나가는 그의 정을 멍하니 바라보던 클로에가 어렵게 입을 뗐다. 그녀는 어쩌면 그에게 아주 불쾌할 수도 있는 부탁을 해야 했다.

“저…….”

그녀의 목소리에 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클로에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할 말이 있는데.”

“저, 가 아니고 이름 불러요. 내 이름.”

뜻밖의 요구에 클로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클로에를 보며 이든은 불만을 토해 냈다.

“당신 내 이름 부른 적 한 번도 없는 거 알아요?”

클로에가 이든을 칭하는 호칭은 언제나 당신, 혹은 그쪽이었다. 그마저도 감지덕지일 만큼 그녀는 그를 지칭하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일이 적었다. 레이처럼 성으로 부르는 일마저도 없었다.

결혼 전을 포함해 가끔 공작님, 혹은 록스턴 공작님이라고 부를 때도 있었으나, 그것은 이든에게 아주 기껍지 않은 호칭이었다. 이든은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단호하게 말했다.

“이든이라고 불러 봐요. 그럼 뭐든 들어줄 테니.”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이던 클로에가 입을 딱 다문 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든의 안에서도 오기가 자라났다.

입에 붙지 않은 이름이니 어려울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제 이름을 부르는 걸 거부할 줄은 몰랐다.

“내 이름, 아직은 부르기 어려워요?”

그가 묻자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예상외의 반응에 이든은 의아해졌다.

“그럼 왜 안 불러 줘요?”

듣고 싶은데. 그가 덧붙였다.

망설이듯 이불자락만 만지작거리던 클로에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름을 부르면… 뭔가 바뀔 것 같아서.”

이름을 부르면 그녀의 안에 정립되어 있던 그와 그녀의 관계가 뒤바뀔 것 같았다. 그게 나쁜 방향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문득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이든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바뀌겠죠.”

클로에는 눈을 크게 뜨고 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런 클로에를 향해 이든이 말을 이었다.

“당신과 내 사이가 더 가까워질 테니까.”

그 대답에 클로에는 오히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클로에가 생각하기에 이든 록스턴만큼 그녀와 가까운 남자는 없었다. 그런데 이 이상 어떻게 가까워진단 말인가.

이런 클로에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이든은 클로에를 재촉했다.

“내 이름 불러 봐요, 클로에.”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제 이름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그것은 기이한 경험이었다. 클로에는 제 이름이 저렇게 다채롭고 따사롭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제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로 그에게 같은 것을 경험하게 해 줄 수 있을까. 망설이던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든.”

그녀의 부름에 이든은 미동도 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 보기 드문 광경에 클로에가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는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 채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니 클로에의 마음에 용기가 자라났다.

“이든.”

다시금 클로에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입 안이 간질간질했다. 세상 달콤한 사탕을 입에 문 듯 입 안 가득 설렘이 퍼졌다.

클로에는 그것이 설렘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계속 부르고 싶은 단어라는 건 자각했다.

다시금 이든, 하고 중얼거리는 클로에의 모습에 결국 이든이 그녀의 입에 제 입술을 부딪쳐 틀어막았다. 입술이 짧게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이제 그만 불러도 괜찮아요.”

하지만 클로에는 그의 기분을 살피듯 빤히 얼굴을 쳐다보았다. 결국 그가 이야기를 돌렸다.

“하고 싶은 말 있다면서요. 말해 봐요.”

클로에의 입이 다시금 꾹 다물어졌다.

한참 동안 망설이는 그녀를 이든은 재촉 한 번 없이 기다렸다.

“아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뜻밖의 단어에 이든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해 보면 그리 뜻밖의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방금 전까지 몸을 섞고 있던 사이였고, 이든은 그녀의 다리 사이에 묻어 있던 제 정을 닦아 내기까지 했었다.

제 반응을 살피듯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클로에를 향해 이든이 나직이 말했다.

“괜찮아요, 말해 봐요.”

“아이는 조금 나중에… 나중에 가지고 싶어요.”

귀족가에서 후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클로에도 알고 있다.

하지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부모가 아이에게 얼마나 가혹한지도 알고 있었다.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아이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아직은, 무서워요. 저는 분명히 좋은 부모가 되지 못할 거예요.”

이든은 그녀가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그녀의 의견에 따를 생각이었다.

낳는 것도, 그에 따르는 고통과 위험도 모두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후계에 대한 것으로 배우자에게 부담을 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결심이 서기 전까지는 피임약… 먹고 싶어요. 당신에게 곤란한 부탁인가요?”

초조한 클로에의 얼굴을 잠시 내려다보던 이든은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가를 매만지는 그의 손길은 다정했다.

“이런 문제는 망설이지 말고 말해요. 괜찮으니까.”

이든의 시선이 클로에의 얼굴을 지나 납작한 아랫배로 향했다. 이미 저 안에 이든은 몇 번이고 제 정을 토해 냈다. 자칫하다가는 클로에가 공포를 채 떨치기도 전에 아이를 가질 수도 있었다. 이든은 서둘러 말했다.

“내일 바로 의사 부를게요. 약은 먹지 마요. 내가 피임할게요.”

클로에가 몇 번이고 망설였던 게 무색한 대답이었다.

“…고마워요.”

“아니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이든의 시선은 여전히 클로에의 아랫배를 향해 있었다. 너무 심각한 얼굴이라 도리어 클로에가 그를 위로해야 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사실 그가 제 부탁을 거절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집안 간에 결합하여 후계자를 낳는 게 목적인 결혼이었다. 대부분의 귀족이 그런 결혼을 했다.

이든이 그녀와 아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클로에는 그녀가 그렸던 가장 최악의 미래는 다가오지 않을 거라고, 암시를 걸 듯 스스로를 다독였다.

* * *

클로에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의사의 진단에 이든은 눈에 띄게 안심했다.

그런 이든의 모습에 도리어 심란해진 쪽은 클로에였다. 오히려 아이를 바라지 않았던 것은 그였던가 싶었을 정도로 이든은 크게 안심했다.

공작가에 주치의가 다녀간 후로 두 사람의 침실 사정이 약간은 바뀌었다. 시녀들은 당연하다는 듯 클로에의 시중을 부부 침실에서 들었고, 침대 옆 테이블에는 전에 없던 물건이 매일 같이 준비되어 있었다.

향유였다. 잠자리에 익숙하지 않은 새 신부를 위한 것이었다.

물건의 용도조차 몰랐던 클로에는 그것을 몸소 그녀에게 사용해 준 이든 덕분에 그게 무엇인지 완벽하게 깨달았다.

어쨌든 공작 부부의 관계가 전과 다르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것을 방증하듯, 해가 뜬 지 오래인데 공작 부부의 침실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특히나 오늘은 클로에가 고아원에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늦기 전에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클로에의 예정은 어그러질 예정이었다.

“아, 앗, 아앗.”

클로에는 그와 마주 본 채 그의 다리 위에 올라타 있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려고 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이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제, 흐읏, 그만…….”

“언제쯤 익숙해질래요?”

이든의 물음에 클로에는 고개를 흔들었다. 평생 익숙해질 감각이 아니었다.

여전히 클로에는 자극이 너무 세면 도망치려 했다. 거의 습관이나 다름없는 몸짓이었다. 의미 없는 몸짓이기도 했다. 이든의 손에 허리를 꽉 붙잡힌 채 바르르 떠는 게 고작이었다.

“바, 흐응, 밖에서 시녀들이…….”

“기다리겠죠.”

클로에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자꾸만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았다.

“더, 늦, 으면, 포트먼 씨가 기다릴, 흐읏! 거예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레이의 이름에 이든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 여기서 다른 남자가 기다린다는 말이 나올 줄을 몰랐는데.”

그의 허릿짓이 거세졌다. 퍽퍽 살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제 안에서 거칠게 박히는 그의 성기에 클로에는 흡사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질렀다.

“앗, 하악! 아, 아!”

너무 센 자극에 클로에가 무릎으로 버티며 그의 침입을 거부하자 그는 그녀의 골반을 붙잡은 채 거세게 허리를 쳐올렸다.

“응, 흐읏! 갑자기, 왜…….”

“후, 나만 두고 다른 남자랑 사이좋게 나들이를 가고.”

“나들이, 아니, 흣, 아닌 거 알잖, 아요!”

이든은 대답 대신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가 그녀의 목에 이를 세우자 일순 그녀의 내벽이 조였다. 이든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렀다.

그가 그녀의 목에서 입술을 떼어 내자 선명하고 붉은 자국이 나타났다. 이든은 그것을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 * *

침실 문이 열린 건 그 후로 30분은 더 지나서였다. 가운 차림의 공작은 얼굴이 아주 활짝 피어 있었고, 그와 달리 공작 부인은 침대에 늘어져 숨만 색색거리고 있었다.

방 안을 감도는 짙은 색향에 클로에의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온 시녀들은 얼굴을 붉혔다.

도대체 이든 록스턴은 1년 동안 어떻게 참아온 건지. 사용인들은 그런 불경한 생각을 했다.

힘이 빠진 클로에가 침대에서 고물고물 일어나려 하자 이든이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그의 품에 안긴 클로에가 원망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다.

“일부러 그런 거죠.”

“뭐가요?”

이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웃었다.

클로에가 보기에 그는 그녀가 고아원에 다니는 걸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사실은 레이와 함께 가는 게 못마땅한 것이었지만 거기까지는 클로에가 알 턱이 없었다.

“내가 거기 가는 거 싫어요?”

“그건 아니에요.”

내키지는 않지만요. 그가 덧붙였다.

“왜요?”

“위험하기도 하고, 꼭 직접 가야 하는 건가 싶어서.”

가타부타 대답이 들려올 줄 알았던 클로에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흘긋 클로에의 얼굴을 내려다본 이든이 물었다.

“무슨 생각해요?”

그녀는 이든의 물음에 상념에서 깨어난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별생각 안 했어요.”

거짓말. 이든은 그 말을 애써 삼켜 냈다.

본인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클로에는 가끔 아무런 목표도, 사고도 없는 사람 같은 얼굴을 했다.

애써 그 얼굴을 모른 척해 준 이든은 이미 따뜻한 물이 받아져 있는 욕조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다음엔 나도 같이 가요.”

이든의 말에 클로에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누군지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니지 그래요?”

“허락만 해 주면 그러고 싶은데.”

클로에가 뭐라고 하기 전 이든은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욕실을 나섰다.

욕실을 나서는 그의 표정은 어딘가 싸늘한 구석이 있었다.

* * *

“몸은 좀 괜찮아요?”

만나자마자 걱정스럽게 안부를 묻는 로셰의 모습에 클로에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화르륵 얼굴을 붉혔다. 초야의 후유증으로 고아원에 오지 못한 게 떠올랐다.

물론 로셰가 그 사실을 알 리는 없겠지만, 클로에는 괜스레 민망하고 머쓱해졌다.

“네. 이제 괜찮아요.”

“너무 무리해서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얼굴이 반쪽이 됐네.”

클로에의 얼굴이 반쪽이 된 건 전적으로 이든의 탓이었다.

그는 밤낮없이 그녀를 유혹해 댔다. 그녀가 다정함에 약하다는 것을 눈치챈 이후로는 그것을 양껏 이용하기까지 했다.

“그, 그래요?”

“아주 사흘 밤낮은 잠도 안 잔 사람 같아. 오늘은 좀 쉬다가 가요.”

사흘 밤낮은 잠도 안 잔 사람.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클로에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옆에 서 있던 레이의 눈치를 보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덤덤하기 짝이 없는 그의 얼굴에 클로에는 남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실제로도 레이는 남의 잠자리 사정을 듣고 흥분할 만큼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었고, 로셰와 클로에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분명히, 그랬다.

“야, 너도 봤어?”

“응.”

고아원에서 나이가 제법 있는 남자 아이들이 발그레한 얼굴로 구석진 곳에 모여 떠들고 있었다.

기껏 해 봐야 풋풋할 정도의 야한 얘기나 하고 있겠거니 하고 지나치려던 레이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 석 자에 사레라도 걸린 사람처럼 기침을 해 댔다.

“클로에 누님, 목에…….”

클로에 목 어쩌고 하는 순간 레이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원인과 결과를 추론해 냈다. 그리고 조속하게 몸을 돌렸다.

바람이 일 정도로 빠르게 클로에를 찾아 돌아다니던 레이는 한가롭게 빨래의 물기나 털어 대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그녀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는 것 정도일까.

빠르게 클로에에게 다가간 그의 시선이 절로 그녀의 목으로 향했다. 그녀의 목 뒤쪽에 적나라한 키스 마크가 보였다.

그것을 눈에 담는 순간 레이는 고아원에 모여서 야한 얘기나 떠들어 대던 어리숙한 소년들처럼 귓가가 화끈해졌다. 처음으로 제 귀를 가리는 단발머리에 감사할 지경이었다. 주인 부부의 사생활 따위를 알게 되는 건, 사절이었다.

분명 고아원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숄 하나를 두르고 있었다. 움직이다 불편하니 벗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붉은 자국이 드러났다.

시녀들은 숄만 둘러 주면 다인가! 이런 건 말을 해 줘야지!

록스턴 공작의 수석 보좌관인 그가 어째서 이런 일까지 일일이 신경 써야 하는 건지.

“포, 포트먼 씨?”

굉장한 기세로 제게 다가오는 레이의 모습에 클로에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화가 나 보이는 얼굴 같기도 했고, 어딘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레이 포트먼이 부끄러워 할 리는 없으니 클로에는 전적으로 전자의 것이라 생각했다.

“왜, 왜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

“화가 난 게 아니라……!”

레이는 절로 높아지려는 제 목소리를 깨닫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클로에가 조금은 겁에 질린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는 자켓 주머니에 걸려 있던 포켓 치프를 꺼내들고는 황급히 그녀의 목에 둘렀다. 그녀가 도망갈 새도 없이 아주 빠른 속도로 이뤄진 일이었다.

클로에는 당황하며 물었다.

“뭐, 뭐하는 거예요?”

“두르고 있어요. 마차에 타기 전까지는… 아니, 공작저에 돌아가기 전까지는요.”

빠르게, 그러나 꼼꼼하게 그녀의 목에 손수건을 두른 그는 제발 제 얼굴이 붉다는 것을 클로에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클로에는 그의 이상을 모르는 듯했다.

“도대체 무슨…….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

젠장.

클로에의 반문에 레이는 애써 욕을 삼켜 냈다. 그런 레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에는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당황하고 있던 레이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그녀의 손이 레이의 이마에 닿았다.

“엄청 뜨거워요.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레이가 클로에의 손을 쳐냈다. 당황한 탓에 생각보다 거칠게 쳐졌다.

허공에 내쳐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클로에가 황급히 손을 내리고 그를 향해 말했다.

“미안해요. 이런 거 싫어할 텐데.”

예전의 클로에였다면 레이에게 손을 뻗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이든과 친밀하게 지내다보니 성인 남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클로에는 자신의 변화를 깨달았다.

레이는 상황이 엉망진창으로 꼬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야 하나, 혹은 굳이 자신이 그럴 필요가 있나, 생각하다 결국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다 보인다고요.”

레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요?”

“목에… 그거요.”

“목에 그거?”

그의 말을 따라하던 클로에는 마침내 그 뜻을 깨달았다. 클로에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녀는 오늘 아침 이든이 유난히 그녀의 목덜미를 입술로 지분거렸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황급히 손으로 목을 감쌌다.

“모, 몰랐어요.”

당연히 몰랐겠죠. 레이는 비뚤게 튀어나갈 뻔한 말을 애써 참아 냈다. 그래도 타박하는 어투는 감추지 못했다.

“한창 예민할 나이의 남자아이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오면서 그런 것도 조심 못 합니까?”

“왜 화를 내고 그래요?”

숫제 억울하기까지 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레이는 모르는 척 반박했다.

“내가 언제 화를 냈습니까?”

“지금도 계속 내고 있잖아요!”

“두 분 또 싸우세요?”

돌연 옆에서 들리는 제삼자의 목소리에 클로에와 레이는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로셰가 빨래더미를 든 채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이전의 대화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로셰는 두 사람의 옆을 태연하게 지나 빨랫줄 앞에 서서 빨래의 물기를 탁탁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싸우다 정드는 법이에요~.”

싸울 상대가 없어서 모시는 상사의 부인과 싸우겠냐마는 레이는 저도 모르게 발끈했다.

“누가 정이 든다고……!”

격하게 부정하는 레이의 모습에 클로에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그녀도 레이 포트먼과 정이 들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저 정도로 질색을 하니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도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 자신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레이를 지그시 노려보던 클로에는 로셰가 가지고 온 빨래더미를 번쩍 들어 올리고는 그에게서 휙 뒤를 돌았다. 누가 봐도 기분이 잔뜩 상한 모습이었다.

그런 클로에의 뒷모습을 보며 레이는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클로에와 이든의 사이가 부쩍 가까웠다. 그녀의 기분이 상한 채로 저택에 돌아오면 이든은 분명 그를 추궁할 것이다.

그것만은 사절이었다. 사랑에 빠진 그의 주인은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 * *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고아원에서 공작저로 돌아온 클로에와 마주친 이든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저로 돌아온 클로에의 얼굴이 어딘가 불퉁했기 때문이다.

보기 드문 그녀의 모습에 이든은 불안하면서도 신기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평소의 얼굴과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뭐랄까, 조금 더 어린아이가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서운함 비슷한 것이 있었다. 예전의 이든이라면 느끼지 못했을 아주 미묘한 차이였다.

클로에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든은 아침에는 보지 못했던 스카프 하나가 그녀의 목에 감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게 맞는다면 레이의 포켓 치프다.

이든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목에 감겨 있는 스카프를 잡아당겼다. 천이 헐거워지며 보인 것은 적나라한 정사의 흔적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스카프를 이든에게 빼앗긴 클로에가 멍하니 서 있다가 황급히 손으로 목을 감쌌다. 그걸 본 이든은 피식 웃었다.

“내가 새긴 건데 내 앞에서 굳이 가릴 필요 있어요?”

능청스럽기 짝이 없는 이든의 말에 클로에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내가 오늘 이것 때문에 얼마나……!”

클로에는 불만을 토하려 했지만, 말을 완성하는 것이 부끄러워 말끝을 흐렸다. 이든은 그런 클로에가 사랑스러웠다.

“레이가 뭐라고 했어요?”

이든이 묻자 클로에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은 사실과 거의 비슷한 상황을 얼추 도출해 냈다.

“내 까칠한 부관이 그대에게 또 한소리 한 모양인데.”

그렇게 대답하는 이든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클로에는 반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이든은 클로에를 침대에 앉히고는 의자를 끌어와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았다. 의자 등받이에 턱을 기대고 앉은 그는 어딘가 소년 같은 구석이 있었다.

“레이에게 그대를 따르지 말라고 말해 놓을까요?”

혹하는 제안이기는 했으나 사실 레이가 그녀를 감시한다거나, 그녀의 행동에 제재를 가하는 건 아니었다.

레이는 그녀가 그러하듯 아이들을 돌보고 후원금에 관한 문제로 로셰와 이야기를 했다. 그가 고아원에서 하는 일은 그뿐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록스턴 공작의 최측근보다는 마음씨 좋은 자원봉사자로 보였다. 그녀의 기분 문제로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냥 두세요. 정말 별일 아니었으니까.”

머뭇거리던 그녀가 덧붙였다.

“제가… 혼자 착각했던 부분이 있어서, 그게 좀 창피했을 뿐이에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이든의 물음은 집요하게 묻는다는 느낌보다는 평온한 일상을 묻듯 부드럽고 다정했다. 실제로도 그는 여전히 의자 등받이에 턱을 기댄 채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클로에는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저는… 제가 포트먼 씨와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했거든요.”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이든의 손길이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클로에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다 제 착각이었어요. 포트먼 씨는 저와 친해질 생각이 없대요.”

“아, 그래요.”

나직해진 이든의 목소리에 클로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나 조금 전과 변함없이 나긋하게 웃고 있는 이든의 얼굴에 클로에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안심을 했다. 그의 목소리가 화난 것처럼 들린 건 그녀의 착각이었던 거다.

이든은 클로에를 보며 상냥하게 물었다.

“레이랑 친해지고 싶었어요?”

“꼭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머뭇거리던 클로에가 그의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

“친구가… 없어서.”

그녀의 대답은 이든에게 뜻밖의 대답이기도 했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던 이든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클로에가 미간을 좁혔다. 그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친구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저도 포트먼 씨처럼 까칠한 사람은 별로예요.”

이든은 웃지 않기 위해 입술에 힘을 꾹 줬다.

아, 왜 이렇게 귀엽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이든은 그날로 고트 백작저에 연통을 넣어 제 사촌 디아나를 불렀다.

클로에에게 말상대라도 붙여 주고 싶은 마음 반, 레이 포트먼이라는 괜찮은 남자를 그녀에게서 떼어 내고 싶은 치졸한 질투 섞인 마음 반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든은 이게 얼마나 섣부른 판단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 * *

공작저로 고트 백작가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 한 대가 들어섰다.

이든이 부르자마자 디아나는 한달음에 공작저로 달려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든의 부름은 핑계였고, 깐깐한 제 어미를 피해 공작저로 도망친 참이다.

“공작저에 오는 건 진짜 오랜만이에요.”

클로에는 제 앞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디아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난 번 고트 백작저에서 어색하게 헤어졌던 게 무색하게 그녀는 클로에에게 지나치게 스스럼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클로에는 기본적으로 타인과 일정한 거리감을 두는 편이었다. 록스턴 공작가의 인간들은 하나같이 그녀가 타인에게 벅벅 그어 놓은 선을 넘나드는 재주라도 있는 건지.

한참을 재잘거리던 디아나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클로에의 시선에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백작저에서 제 어미가 그녀에게 저지른 무례를 디아나는 코앞에서 보았다. 어쩌면 클로에는 그녀가 공작저로 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디아나는 조심스럽게 클로에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불편하신가요?”

클로에는 디아나의 물음에 당황했다. 불편한 거라고 한다면 또래의 동성과 어떤 얘기를 나누어야 할지 모르는 것 정도일 뿐이었다.

그런데 침묵이 그녀에게 다른 의도로 보인 모양이다.

여전히 클로에에게서 답이 없자 디아나는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해요, 제가 눈치도 없이.”

그런 그녀를 멍하게 바라보던 클로에는 다급히 그녀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일단 붙잡고 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한 행동에 놀랐다. 디아나 역시 놀랐는지 동그랗게 뜬 눈으로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안 불편해요.”

클로에는 디아나의 소맷자락을 붙잡은 채로 횡설수설했다.

“그,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네? 네…….”

“제가 친구가 없어서요!”

클로에의 마지막 외침이 메아리치듯 넓은 응접실에 잔상을 남기며 울렸다.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침묵과 기류가 흘렀다.

침묵을 깨뜨린 건 디아나가 흘린 작은 웃음소리였다. 웃음을 참는 게 여간 힘들었던 모양인지 그녀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안, 푸흡, 미안해요.”

디아나의 소맷자락을 놓치듯 놓은 클로에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친구가 없다니, 맞는 말이지만 다시 생각해도 바보 같은 말이었다.

혼자만의 늪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는 클로에를 내려다보던 디아나는 그녀 모르게 입을 가려 가시지 않은 웃음기를 숨겼다.

이 어리숙한 여인을 보고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린 건지.

알리사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온 공작저였지만, 디아나는 클로에 록스턴이라는 사람과 꽤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클로에는?”

일을 마치고 공작저로 돌아온 이든은 보이지 않는 클로에의 모습에 그녀를 찾았다.

“마님께서는 디아나 아가씨와 나들이를 가셨습니다.”

로더릭의 말에 이든은 꽤 놀랐다. 디아나야 원체 명랑한 녀석이니 그렇다 쳐도 클로에가 첫날부터 그녀를 따라 쪼르르 나들이를 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낯을 가리고 꺼리는 건 어른 남자에게만 그러는 것이었는지. 애초에 두 사람이 친해지라고 디아나를 부른 것이니 한편으로는 다행인 일이었다.

분명 이때까지만 해도 이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 *

“여기가 요즘 북부에서 제일 유명한 디저트 카페예요. 북부 남자들은 이런 곳에 오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는지, 절대 같이 안 오려고 한다니까요?”

디아나가 클로에를 데리고 간 곳은 달콤한 향기로 가득 찬 디저트 카페였다. 확실히 보수적인 북부 귀족 사내들이 오기에는 다소 꺼려지는 장소임은 분명했다.

“제도의 남자들도 그런가요?”

그녀가 아는 제도의 남자들이 제대로 된 기준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클로에 역시 이런 카페에 오는 게 처음이었다.

“저도 이런 곳에 오는 건 처음이라 잘 모르겠어요.”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클로에가 덧붙였다.

“여자 친구는 디아나가 처음이에요.”

발그레한 얼굴로 웅얼거리는 클로에의 모습에 디아나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 언니, 조금 많이 귀엽다.

“왜 그래요?”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디아나를 보고 클로에가 걱정하는 어조로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신이 추태를 부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디아나는 금세 태연하게 클로에에게 웃어 주었다. 클로에는 그런 디아나의 대답에 안심하며 웃었다.

그 웃는 표정이 디아나의 마음에 박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감정을 감추는 데 성공했다.

대신 디아나는 클로에의 손을 맞잡고 비장하게 말했다.

“우리 많은 걸 같이 해 봐요.”

* * *

클로에가 공작저로 돌아온 건 해가 질 무렵이 다 되어서였다. 이든은 나란히 꼭 붙어서 돌아오는 디아나와 클로에의 모습에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클로에는 그에게는 지어 준 적 없는 해사한 웃음을, 디아나를 향해 마구 지어 대고 있었다.

뭐랄까. 이든은 남편을 빼앗긴 정부인의 마음이 들었다.

“클로에.”

이든의 부름에 클로에는 그제야 그를 발견한 듯 그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계신 줄 몰랐어요. 언제 들어오셨어요?”

있는 줄도 몰랐단다. 이든은 클로에의 말에 섭섭해졌다.

요즘 그는 저택에 혼자 있는 부인을 위해 집으로 일찍 들어오곤 했다. 아무래도 눈앞에 있는 부인은 그것을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이든은 흘긋 클로에의 옆에 딱 붙어 있는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내에게 절절 매는 사촌 오라비를 놀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보였다. 그 마음에 응해 주고 싶지 않았던 이든은 다시 클로에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나들이가 즐거웠던 모양입니다.”

“네. 디안이 여기저기 데리고 가 줬어요.”

발그레한 얼굴로 웃는 클로에의 얼굴에는 여전히 가시지 않은 즐거움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이든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얼굴이기도 했다.

게다가 디안이라니. 애칭은 또 언제 주고받았단 말인가.

이든은 클로에가 저렇게 웃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기도 하고, 그게 오롯이 제 사촌 녀석의 공이라는 게 떨떠름하기도 했다.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와요.”

적어도 해가 진 후는 온전히 부부의 사적인 시간이었다. 디아나가 끼어들 틈이 없는…….

그러나 그의 기대는 클로에의 다음 말에 무너졌다.

“오늘은 디안이랑 같이 자고 싶어요.”

“…….”

이든의 얼굴이 웃는 채로 굳었다. 디아나는 처음 보는 이든의 모습에 바닥을 치며 웃고 싶을 정도였다. 그 이든 록스턴이 아내와의 시간을 방해받아 어쩔 줄 모르고 있다니.

더 웃긴 건 그가 그것을 절대로 제 아내에게 티 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클로에는 처음 사귄 동성 친구 때문에 설레 이든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저 친구랑 같이 자 보고 싶었거든요.”

결정타였다. 저 말 한마디로 인해 이든 록스턴은 절대로 아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

이든이 대답하지 않자 밝았던 클로에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안 되나요?”

“…그럴 리가요. 편할 대로 해요.”

그가 승낙하자 클로에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요즘 들어 표정을 알아보기 쉬워졌지만, 그래서 이든은 더 속이 쓰렸다.

클로에는 웃으며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사용인을 시켜 손님방으로 떠나갔다.

클로에의 팔짱을 낀 채로 그에게서 멀어지던 디아나가 고개만 돌려 그를 향해 싱글벙글 얄밉게도 웃어 댔다.

서늘한 얼굴로 디아나를 쳐다보던 이든은, 디아나를 따라 자신을 쳐다보는 클로에의 모습에 언제 그랬냐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무래도 레이 포트먼보다 성가신 녀석이 아내의 옆에 붙어 버린 것 같다.

* * *

오늘은 디아나랑 어디에, 내일은 디아나랑 저기에. 클로에는 디아나와 꼭 붙어서 이든은 안중에도 없었다.

예쁘게도 꾸미고 디아나와 함께 공작저를 나서는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은 심란해졌다.

클로에는 디아나의 앞에서는 재잘재잘 잘도 떠들면서 제 앞에서는 여전히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를 피한다기보다는 딱히 그에게 할 말이 없는 눈치였다. 이든으로서는 그게 더 충격적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결혼 조건만 맞으면 굳이 이든이 아니어도 결혼했을 여자였다. 거기까지 떠올리자 이든은 급격하게 마음이 선득해졌다. 클로에에게 자신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일지도 몰랐다.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서늘한 얼굴로 서류에 서명을 하는 이든을 보고 있던 레이가 넌지시 운을 뗐다.

“나들이라도 가시던가요.”

난데없는 제안에 이든은 우울하게 대답했다.

“나들이 따위를 할 기분이 아니다.”

“클로에 님이랑요.”

레이의 입에서 클로에라는 이름이 나오자 이든의 손에 들려 있던 만년필이 끼리릭,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서류 위에서 미끄러졌다.

심상찮은 이든의 모습에 레이는 괜한 말을 했나 싶었다.

이든은 만년필을 탁 내려놓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레이를 쳐다보았다.

“레이.”

“예.”

무거운 음색에 레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모레 일정 비워 놔.”

그렇게 공작 부부의 나들이는 레이 포트먼의 대수롭지 않은 한마디로부터 시작되었다.

* * *

“영지 시찰이요?”

이든을 따라 클로에도 영지 시찰을 한 번쯤은 가는 게 어떻겠냐는 집사 로더릭의 말에 클로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껏 이든이 영지 시찰을 가면서 그녀를 데리고 갔던 적은 없었다. 애초에 공작 부인의 업무 중에 영지 시찰 같은 게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워낙 그녀가 공작 부인으로서의 업무에 손을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몰랐던 것일 수도 있었다.

알겠다는 클로에의 대답에 로더릭은 쓰고 있던 모노클을 고쳐 썼다. 본의 아니게 주인마님을 속이게 되어 유감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내일은 주인 부부의 첫 나들이. 공작가의 집사로서 좌시할 수 없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 법이다. 최근 부쩍 가까워진 주인 부부의 평화를 위해, 로더릭은 바쁘게 움직였다.

* * *

“너무 화려한 것 같은데.”

이든을 따라 영지 시찰을 가는 클로에의 옷시중을 들던 시녀들은 클로에의 중얼거림에 움찔거렸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아름답기만 한 걸요, 마님.”

옷이 이상하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다만 영지 시찰보다는 귀족 아가씨의 나들이에나 어울릴 법한 드레스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래도 평소보다 산뜻하고 가벼운 차림인 것은 분명했기에 클로에는 잠자코 시녀들의 손에 몸을 맡겼다. 이상하리만치 공을 들여 자신을 꾸미는 시녀들이 조금 이상했지만 제 본분을 다 하는 시녀들을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다 됐습니다, 마님.”

클로에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영락없는 귀족 아가씨였다. 평소와 다른 점을 꼽자면 틀어 올리던 머리를 내려 미혼으로 보인다는 것뿐이다. 덕분에 공작 부인으로 보이지는 않겠지만 클로에는 여전히 시녀들이 미심쩍었다.

방을 나선 클로에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소파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이든이었다. 그녀가 나오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클로에.”

클로에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든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그의 뒤로 비치는 햇살 때문일지, 아니면 오늘따라 유난히 완벽한 그의 옷차림 때문일지.

몸에 감긴 하얀 셔츠와 네이비 베스트, 그 안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크라바트까지. 오늘의 그는 완벽한 북부의 미남이었다.

원래 취향이 그랬던 것인지, 없던 취향이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클로에는 처음으로 어른 남자를 보고 잘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게 겉으로 티가 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녀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그녀가 하고 있던 생각과는 터무니없이 동떨어진 것이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차려 입고 시찰을 가시나요?”

“시찰?”

이든은 슬쩍 클로에의 뒤에 서 있던 로더릭과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안 그런 척 제 시선을 피하는 그들의 모습에 이든은 대충 로더릭이 이 나들이 뭐라고 둘러댔는지 눈치챘다.

어쩐지 선뜻 자신과의 나들이에 클로에가 응했다 싶었다. 눈치가 좋은 집사는 이래서 필요하다. 이든이 그에게 금일봉이라도 주어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이든은 클로에의 시선을 눈치챘다. 그녀는 이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요?”

“뭐가요?”

“이렇게 입는 게 마음에 들면 앞으로도 이렇게 입고 다니게요.”

클로에는 제 마음 속을 이든에게 들킨 것 같아 괜스레 뜨끔했다.

“다, 단정하시네요.”

“당신도 예뻐요.”

물 흐르듯 나오는 칭찬에 클로에의 얼굴이 속절없이 붉어졌다.

그녀는 지금까지 온갖 미사여구가 다 붙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도 별 감흥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 남자의 한마디에 이렇게 어리숙하게 구는 건지.

엉거주춤 서서 입만 달싹거리고 있는 클로에의 모습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킨 이든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제게로 다가오는 이든의 손을 보며 클로에는 제도 후작저의 응접실에서 그가 제게 손을 내밀었던 그날을 떠올렸다.

그를 피해 움츠러들었던 자신과, 처음 보는 이든 록스턴의 당황한 얼굴.

그에게 제 치부를 들킨 것 같아 울고 싶었던 그날을 기준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녀의 이름뿐인 남편은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 많아졌고, 그녀는 그의 손이 예전만큼 무섭지 않았다. 그것을 증명하듯 지금도 클로에는 자연스럽게 그가 내민 손에 제 손을 올리고 있었다.

느릿한 동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든은 재촉 없이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이든의 손에 클로에의 손끝이 닿았다. 가볍게 그녀의 손을 쥔 이든이 고개를 숙여 클로에의 손등에 입술을 댔다.

제도를 포함한 남부인들은 손등 키스를 거의 하지 않는다. 보수적인 북부 귀족들에게나 남아 있는 관습이었다.

제도의 여인들은 이런 북부의 문화를 동경하곤 했다. 클로에는 그런 것에 큰 의미도, 관심도 둔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든의 입술에 닿은 손등이 불에 덴 듯 화끈했다. 긴장으로 파르르 떨린 손등을 그가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의 손등에서 고개를 드는 그의 얼굴엔 미처 참아 내지 못한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이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클로에는 황급히 그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늦겠어요. 이만 가요.”

이든은 클로에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시찰이 아니라 그와 단둘이 가는 나들이라는 걸 알아도 과연 저렇게 서두를지. 이든은 제게서 등을 보인 채 서 있는 클로에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같이 가요.”

손에 깍지를 끼며 그는 세상 달콤한 얼굴로 웃었다.

클로에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이미 마차에 오른 후였다.

“포트먼 씨는요?”

클로에가 레이의 행방을 묻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든이 영지 시찰을 나갈 때면 언제나 그가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차에는 그녀와 이든뿐. 그 외에는 기껏해야 이 마차를 몰고 있는 마부 한 명이 다였다. 두리번거리는 클로에를 보며 이든이 웃으며 말했다.

“남편이랑 있으면서 다른 남자를 찾아요?”

“놀러 가는 게 아니니까요.”

“놀러 가는 거 맞아요.”

예상치도 못한 답변이 나왔다. 클로에는 이든의 저의를 살피듯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찰은요?”

“난 시찰 간다고 한 적 없는데.”

그제야 클로에는 로더릭과 시녀들의 수상한 행동들이 이해 가기 시작했다. 어쩐지 지나치게 그녀를 꾸민다 했다.

드러난 진실에 동요하는 클로에에게 이든은 숨겨 왔던 불만을 드러냈다.

“당신이 나를 너무 방치해 뒀잖아.”

그러고 보니 최근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짧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말도 없이 사람을 데려 나오다니. 그 점이 억울했던 클로에는 한숨 쉬며 말했다.

“애도 아니고…….”

“애가 아니니까-.”

그가 손을 뻗어 클로에의 목 언저리에 묶여 있는 매듭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부인께서 나를 달래 주셔야죠.”

그의 말은 어딘가 야릇한 구석이 있었다. 불그스름해진 얼굴을 숨기듯 클로에가 티가 나도록 시선을 피하자 이든은 작게 웃었다.

“그래서 싫어요? 나랑 놀러 가는 거.”

싫다기보다는 갑작스럽고 낯설었다. 그녀가 아는 이든 록스턴은 일밖에 모르고, 비합리적, 비효율적인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전히 그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로 차창에만 시선을 두고 있던 클로에가 나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런 건 별로 안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당신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 말에 클로에의 시선이 이든에게 닿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이든의 눈꼬리가 야릇하게 휘었다.

“그 말괄량이 녀석이랑 노느라 나는 안중에도 없었잖아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를 대하는 듯한 이든의 말투에 클로에의 얼굴이 빨개졌다. 클로에는 그 얼굴을 하고서 이든에게 주장했다.

“평범하게 같이 나들이를 가자고 했다면 갔을 거예요.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거짓말. 이든은 웃는 얼굴로 그 말을 삼켰다. 지금도 그녀는 그와 단둘이 있는 게 못내 어색하고 불편한 눈치였다. 그것이 이든에게는 뻔히 보였다.

하지만 이든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클로에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기대되네요, 오늘 나들이.”

* * *

입맛에 맞는지 오물오물 맛있게도 먹는 클로에를 보며 이든은 희미하게 웃었다.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게 이런 건지. 그는 비논리적인 감각에 이성이 지배당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나들이에 발 벗고 나선 집사 로더릭이 몸소 예약해 놓은 이 레스토랑의 요리는 클로에의 입맛을 사로잡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말도 없이 먹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디아나와 있을 때는 재잘재잘 말도 잘하더니.

결국 아쉬운 사람이 먼저 나서는 법이다. 이든이 그녀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다.

“디아나랑은 보통 뭘 하면서 놀았어요?”

그의 물음이 갑작스러웠는지 클로에가 작게 기침을 했다. 이든은 황급히 그녀에게 물 잔을 건넸다.

클로에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무 먹는 것에만 열중했나 싶었다. 처음에는 그와 마주 보고 식사를 하는 게 어색해서 먹는 것에 집중했지만 나중에는 너무 맛있어서 그를 잠시 잊었다.

어느 정도 기침이 멎은 클로에는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 그냥 남들 하는 거 했어요.”

“남들 하는 거 어떤 거요?”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승마장 같은 곳도 가 보고. 다음번에는 카지노에 데려다준다고 했어요.”

‘카지노.’

이든은 조용히 제 사촌의 이름을 읊조렸다.

고트 부인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요즘에는 점차 바뀌고 있다지만 여전히 카지노는 귀족 사내들의 전유물이었다. 카지노에 출입하는 여인들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런 곳에 클로에까지 데려가려 했다는 것이 이든은 거슬렸다. 하지만 그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카지노는 가고 싶으면 나랑 같이 가요. 위험하니까.”

“그런가요?”

도대체 디아나 그 말괄량이 녀석이 제 아내에게 뭘 가르쳐 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사는 세계가 점점 넓어지는 것이 안심이 되는 동시에 이든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새장 속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새가 처음으로 마주한 넓은 세상을 동경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니까.

마주했던 두려움이 사실은 별거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도 클로에는 그의 옆에 있어 줄까.

이든은 어쩌다 그녀의 결혼 상대에 부합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든은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최근 이든은 그 사실을 계속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 이든을 보던 클로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불편하신가요?”

클로에의 물음에 이든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어째서 저런 결론을 도출해 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다 사실 클로에라는 여인이 보이는 것과 달리 얼마나 비관적인 사람이었는지 떠올렸다.

“나 그렇게 옹졸하지 않은데.”

그의 말에 그녀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 그런 게 아니라…….”

몇 번인가 입을 달싹이던 클로에가 겨우 다음 말을 꺼냈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거 싫어하셨거든요.”

그 거대한 괴물은 저택에 아내를 가두고, 부정으로 태어난 존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은 제 딸을 세상으로부터 단절시켰다.

그게 그 남자가 제 아내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남들이 다 뭐라 해도 그 남자에게는 그것이 사랑이었던 모양이다.

지독한 일이다.

차가운 골방에 갇혀 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던 클로에는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닫고는 정신을 차렸다. 클로에는 이든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아… 그게, 그러니까……. 당신이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얼른 먹어요.”

이든은 그녀의 앞으로 이것저것 접시를 내밀었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한 채 이든을 바라보던 클로에는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혹은 자신이 원했던 대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모래라도 한 움큼 집어삼킨 사람처럼 입맛이 똑 떨어져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음식을 깨작거리는 클로에를 바라보던 이든이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억지로 먹을 필요 없어요. 배부르면 그만 밖에 나갈까요?”

클로에는 흘긋 그의 얼굴을 살폈다. 이든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지만 클로에는 또 자신 때문에 분위기를 망친 건 아닐까 불안해졌다.

게다가 이든의 앞에 놓인 접시에는 손댄 흔적이 거의 없었다.

클로에는 엉겁결에 들고 있던 포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먹고 가자는 의미였으나 그녀의 행동이 그에게 그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

다른 의미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자신이 한 짓을 깨달은 클로에가 감전된 벌레인 양 파드득 떨 때였다.

“나 먹으라고 준 건가요?”

그의 물음에 기겁한 클로에가 다시 손을 거두려했지만 그녀의 손목은 아직 이든에게 붙잡혀 있는 채였다.

작게 웃음을 흘린 그가 그녀가 내민 포크에 꽂혀 있던 고기 한 점을 먹었다.

포크를 물고 있는 이든의 붉은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던 클로에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의도치 않게 다정하기 짝이 없는 연인 놀음을 한 느낌이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클로에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이든이 이번에는 좀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보면 내가 괴롭힌 줄 알겠네.”

그렇게 말하며 이든은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클로에는 그가 놓자마자 괜스레 음식을 먹는 척 그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귀엽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이든은 드물게도 장난기가 솟았으나 관두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다시 식사에 열중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끝내기에는 뭔가…….

아쉬운데.

“아까 맛있었어요.”

이든의 한 마디에 클로에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고, 이든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 *

맞선 자리보다도 어색했던 식사 시간이 끝나고, 이든과 클로에는 광장을 거닐고 있었다. 광장은 어째서인지 로더릭이 이든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한 나들이 명소였다.

그리고 지금 이든은 집사가 왜 이곳을 추천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발칙한 집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든은 광장 곳곳에서 보이는 다정한 연인들의 모습에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귀족가의 정점인 공작가의 집사답게 로더릭은 돌려 말하는 기술이 노련했다.

광장을 거니는 연인들은 대부분 평민이나, 작위가 낮은 일부 귀족이었다. 보수적인 귀족들과 달리 그들은 애정행위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북부 귀족과 비교했을 때의 얘기다.

두 사람 사이에 주변의 연인들과는 달리 어딘가 서먹한 기류가 흘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의 연인들을 바라보던 이든이 클로에를 향해 물었다.

“손잡아도 돼요?”

일상적인 것을 묻는 듯한 목소리였다. 실제로도 일상적인 물음에 가까웠으나 클로에에게 그것을 일상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누군가의 손을 잡았던 적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기에 그녀는 이든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소, 손은 왜요?”

“잡고 싶어서요.”

클로에는 누군가 멋대로 제 손을 잡는 걸 싫어했다. 그러나 이건 이것대로 곤란했다. 어째서인지 낯이 뜨거워졌다.

거절의 말도, 승낙의 말도 하지 않는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싫으면 빼도 돼요.”

말과 달리 이든은 그녀의 손에 아예 깍지까지 껴 버렸다. 클로에가 항의하듯 올려다보자 이든은 그것을 못 본 척 근처에 있던 카페테리아를 가리켰다. 능청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실 클로에에게 더 신기한 건 이런 행위에 불쾌해하지 않는 자기 자신이었다.

클로에는 자신의 손등을 덮은 그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깨끗한 손톱, 기다란 손가락. 고운 손이었다. 그러나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약간의 굳은살과 저보다 굵은 뼈마디는 완연한 사내의 것이었다.

“조금만 더요.”

돌연 제 몸을 유영하던 그의 손가락이 잡은 손 위로 겹쳐 보였다.

화들짝 놀란 클로에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흔들자 위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딸기 맛 싫어요?”

“네?”

난데없는 물음에 클로에가 고개를 들자, 카페테리아의 메뉴판을 가리키고 있는 이든이 보였다.

그의 앞에는 발그레한 얼굴의 점원이 그를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익숙한 일이었는지 이든은 개의치 않은 채 점원에게 몇 가지 디저트를 주문할 뿐이었다.

근처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이든은 클로에가 손의 깍지를 풀려고 하자 은근히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당황한 클로에가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저 점원이 나를 너무 무섭게 쳐다보잖아요.”

사실은 무섭지도 않으면서. 클로에는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좋겠네요. 저렇게 예쁘고 발랄한 아가씨가 관심을 다 보이고.”

어째서인지 절로 목소리가 뾰족하게 튀어나갔다.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던 클로에는 그의 입꼬리가 희미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여전히 그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클로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랑 이혼해도 걱정은 없으시겠어요.”

그러자 깍지를 낀 손에 악력이 강해졌다. 클로에는 그를 돌아보았다.

웃고 있는 한편 어딘가 서늘하기 짝이 없는 이든의 얼굴에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였나 자각한 눈치였다. 나들이를 나온 부부가 나눌 대화는 분명 아니었다.

이든은 손에 힘을 풀고 검지의 손등을 가볍게 쓸었다.

“이혼은 안 돼요. 안 해 줄 거야.”

제국법상 폭력이나 도박 등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남편의 동의가 없으면 이혼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런 법이 있다 보니 아내보다 남편의 신분이 더 높을 경우, 이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협박보다는 어딘가 애원에 가까웠다.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을 깨뜨린 건 두 사람에게 다가온 점원의 발랄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이든에게 뭔가를 잔뜩 어필하며 케이크를 줄줄이 내려놓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디저트들이 테이블 위를 채웠다. 결국 먼저 입을 연 쪽은 이든이었다.

“먹어요.”

“…이렇게 많이는 못 먹어요.”

어색한 침묵을 이어 갈 생각은 없었기에 클로에는 조심스럽게 포크를 들었다.

어째서인지 그와는 자꾸만 엇나가는 느낌이다. 그것도 그녀가 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미안해요.”

클로에의 입에서 나오는 미안하다는 말에 이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분 상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자격지심에서 나온 말일 뿐이었다. 세상 어떤 여자도 자신보다는 나을 거라는 그런 치졸한 마음 때문에.

그녀 자신이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기저에 깔린 그 두려움 때문에.

사과를 하는 클로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또다. 그녀가 또 그런 얼굴을 했다.

아무런 목표도, 사고도 없는 그런 얼굴. 그럴 때마다 클로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이든은 불안해졌다.

“…화났어요?”

클로에는 갑작스러운 이든의 행동에 놀란 듯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겁에 질린 클로에의 얼굴에 이든은 그녀의 팔을 놓고 흘러내린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놀랐다면 미안해요.”

이든은 클로에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느꼈다. 불안함이 낳은 그의 성급한 행동에 그녀가 겁을 먹었다.

이런 걸 원했던 건 아니었다.

자리에 털썩 앉은 이든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그러다 오늘 하루 주변의 연인들이 그러했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라도 붙잡고 있어야 그녀가 제 옆에 있어 줄 것 같았다.

눈앞에 있는 여인의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저 남들이 사는 것만큼, 딱 그 정도의 관계를 원했을 뿐인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녀는 자신에게 겁을 먹지 않게 되는 걸까.

이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든과 클로에 두 사람과 달리 다정한 연인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클로에.”

클로에는 이든의 부름에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음성은 조금 전의 소란을 무마하듯 부드러웠다.

“나도 저거 해 줘요.”

이든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클로에는 얼굴을 화르륵 붉혔다. 그곳에는 사이좋게 서로 파르페를 떠먹여 주고 있는 달달하기 짝이 없는 연인 한 쌍이 있었다.

“미, 미쳤어요?”

“아까는 해 줬잖아요.”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건 클로에에게 있어 얼결에 일어난, 사고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그건, 어쩌다가…….”

목까지 벌게져서 제 시선을 피하는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은 웃음을 터뜨렸다.

“부끄러워요? 우리 저런 것보다 더한 짓도 많이 했는데.”

이든의 말에 클로에는 화들짝 놀라 혹시나 누가 들었을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은 웃음을 참았다.

애초에 그녀가 해 줄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반응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생각보다 너무 기겁을 해서 조금 심란해졌다.

“장난이었으니까 얼른 먹어요. 지난번에 보니까 좋아하던데.”

그가 클로에의 앞으로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자신을 챙기기 바쁜 이든의 모습에 클로에는 망설이듯 포크로 케이크를 콕 찍었다.

그러고는 곧장 이든의 코앞으로 그것을 내밀었다. 이든의 사고가 정지했다.

이든이 얼른 먹지 않고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클로에는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해, 해 달라면서요.”

차마 그가 먹는 것은 보지 못할 것 같아 고개를 돌리고 있던 클로에는 제 손목을 감싸는 온기에 저도 모르게 이든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로 포크를 제 입가에 가져갔다. 그의 붉은 입술에 하얀 흔적을 남기며 사라진 생크림은 어딘가 야릇한 느낌을 주었다.

포크를 내려다보던 이든이 눈꺼풀을 달싹 올리고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괜스레 화들짝 놀란 클로에가 파드득 떨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포크는 테이블에 힘없이 떨어졌다. 포크에 묻어 있던 생크림이 그녀의 팔에 질척하게 흔적을 남겼다. 그와 동시에 이든의 눈꼬리가 야릇하게 휘었다.

뭐가 위험을 감지한 클로에가 피하기도 전 이든은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제 입가로 가져갔다.

할짝, 이든의 혀가 클로에의 가는 팔을 살짝 핥았다.

“읏……!”

클로에가 팔을 뒤로 빼려하자 그는 가볍게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능청스럽게 말했다.

“잘 먹었어요.”

그녀가 건네준 케이크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팔에 묻은 생크림을 말하는 것인지, 클로에는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린 클로에는 이든의 눈에 어린 갈무리되지 않은 열기를 미처 보지 못했다.

* * *

클로에와 이든이 공작저로 돌아오자 로더릭을 포함한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두 사람을 기대어린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노골적이었는지는 모르는 척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이든은 익숙하게 제 겉옷을 받아드는 로더릭을 향해 말했다.

“덕분에 별난 경험을 다 하는군.”

별난 경험이라는 말에 괜스레 오늘 자신이 저질렀던 만행이 떠올린 클로에가 움찔거렸다. 얼마나 티가 나도록 움찔거렸는지 옆에 서 있던 로더릭에게도 보일 정도였다.

그런 클로에의 모습에 로더릭은 어딘가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만족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이든은 디아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로더릭에게 물었다.

“디아나는?”

“적적하셨는지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사람을 시켜 모셔 올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실컷 놀다 오라고 해. 백작저에서는 그러지도 못할 텐데.”

디아나에 대한 배려를 이유로 들었지만 사실은 단란한 부부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더 컸다. 로더릭은 충실한 집사답게 이든의 명을 잘 따랐다.

“알겠습니다. 달리 필요하신 것이라도?”

“조용히 쉬고 싶으니 부를 때까지는 올라오지 마.”

“알겠습니다.”

바로 시녀를 불러 씻을 생각이었던 클로에는 아무도 올라오지 말라는 이든의 말에 의아해했다. 그러다가도 어차피 같은 욕실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니 그러려니 했다.

공작저의 본채에서 가장 큰 욕실인 부부 침실의 욕실은 이든이 클로에에게 양보하였고, 그는 원래 자신의 침실에 붙어 있던 욕실을 이용하곤 했다.

그러나 부부 침실의 욕실 앞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이든의 모습에 클로에는 불안해졌다.

“왜 그렇게 보세요?”

“같이 씻을래요?”

너무나 태연한 말투라 클로에는 이든이 묻는 바를 인식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그의 말뜻을 알아듣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되물었다.

“뭐, 뭐라고요?”

“같이 씻자고요. 내가 씻겨 줄게요.”

이든이 손을 뻗어 클로에의 목 언저리에 매듭지어진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클로에는 당황하여 이든의 시선을 피했다.

“시, 시녀들이 더 편해요.”

“아마 안 올라올 텐데. 내가 부를 때까지는 올라오지 말라고 했으니까.”

슬며시 설렁줄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클로에의 모습에 그는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가 속삭였다.

“같이 해요, 응?”

이든은 자신의 사근사근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클로에가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답도 못하고 엉거주춤 뒤로 도망가다, 클로에의 등이 콩 벽에 닿았다.

예전의 클로에라면 잔뜩 당황해서 매몰차게 거절했을 게 뻔한 요구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망설이듯 한참을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조금만 유혹하면 넘어올 것 같아 이든은 한껏 상냥함을 가장해 클로에에게 웃어 주었다.

“오늘 많이 돌아다녀서 피곤하잖아요. 내가 다 해 줄게요.”

다 해 주겠다는 것이 씻겨 주겠다는 것뿐만은 아니었지만 이든은 제 시커먼 속내를 숨겼다.

“안 돼요?”

사락-. 이든의 손가락이 클로에의 목 언저리에 묶여 있던 리본을 풀어냈다.

애초에 선택지는 하나였던 모양이다.

* * *

욕조는 두 사람이 들어가 있어도 무리는 없을 만큼 널찍했지만, 이든과 클로에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비좁았다.

클로에는 제 등에 닿아 있는 이든의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느꼈다. 그와 더불어 그의 숨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여전히 긴장한 채인지 빳빳하게 몸을 굳히고 앉아 있는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를 감싸 안았다. 물론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클로에는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촤르륵, 욕조의 물이 넘실거리다 밖으로 넘쳤다.

“편하게 있어요.”

클로에를 다독이듯 그녀의 배를 감싸고 있던 그의 손이 천천히 원을 그리듯 움직였다. 엉덩이 뒤로 닿는 흉흉한 것과는 사뭇 다른 다정한 손길이었다.

“내가 불편해요?”

이든은 덤덤히 물었지만 클로에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곤란했다.

굳이 편함과 불편함 그 두 가지 중에서 고른다면 불편함에 가까웠다.

그러나 세상 그 어떤 사람도 클로에와 이 정도로 친밀한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바꿔 말하자면 클로에는 그 누구에게도 이런 행위를 허락한 적이 없었다.

이런 일을 했고, 하도록 허락한 건 오직 이든뿐이었다.

“긴장… 했을 뿐이에요.”

“왜 긴장했을까. 무섭게 대하지 않았는데.”

두려움에서 기인된 불편함은 아니었다. 그저 전과는 달리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게 되었을 뿐이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어려워지다니. 알 수 없는 딜레마였다.

이든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겨우 두 달이에요.”

“뭐가요?”

“우리가 자주 있기 시작한 지 겨우 두 달이라고요. 사람마다 가까워지기까지 저마다 다른 시간이 필요해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제 배 위를 감싸고 있는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당신이 싫은 건 아니라고, 고작 이 행동으로 그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건 큰 욕심일까, 하고 클로에는 생각했다.

제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필요한 사람. 이든은 클로에가 제 손등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바라보다 물었다.

“내가 너무 빨라요?”

“네?”

“나들이도, 지금도. 당신이랑 가까워지고 싶어서 내가 욕심낸 건데.”

클로에의 어깨 위에서 그는 고개를 비비적거렸다.

“내가 너무 급했다면 미안해요.”

이든의 사과에 클로에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그녀에게 미안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 한 명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클로에의 답에 이든은 다소 안심했다.

“그럼 내게 어디까지 허락해 줄 수 있어요?”

이든은 제 손등 위에 겹쳐진 그녀의 손을 보며 물었다.

“손잡는 건 괜찮아요?”

작은 머리통이 눈앞에서 위아래로 흔들리는 것을 보며 이든은 조금 더 용기를 냈다.

“이건요?”

팔을 뻗어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팔 아래로 느끼지는 말캉한 여체에 잠시 이성이 흔들렸지만 그는 가까스로 참았다.

하지만 밑에서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안는 것까지는 무리인 건가 싶어 그가 그녀에게서 팔을 떼어 내려는 찰나, 클로에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안아 주는 건 좋아요.”

괜찮다는 것도 아니고 좋다는 대답이 들려올 줄은 몰랐다. 이든은 클로에의 대답 때문에 밀려오는 흥분을 누르며 나직이 물었다.

“그 이상은요?”

클로에가 그의 팔을 꼭 붙잡은 채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이든의 기대감이 폭삭 주저앉았다.

그래도 안아 주는 건 좋다는 게 어딘가. 손만 올려도 소스라치게 놀라던 지난날을 떠올리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욕실에서 이것저것 해 보고 싶었던 욕심을 버리고 이든은 빠르고 담백하게 그녀를 씻겼다.

정말 씻기기만 했다. 고작 포옹이 최선인 여자에게 제 욕심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갈빗대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여체를 눈앞에 두고 있자니 느껴지는 건 성욕보다는 안쓰러움이기도 했다.

먹는 걸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클로에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했다. 많이 먹지 않을 뿐이지.

이든의 손이 그녀의 갈비뼈 부근을 매만졌다. 그러자 노곤해졌는지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던 클로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움찔거렸다.

“흐읏!”

“아, 간지러웠어요?”

“이, 이상한 짓 하지 마세요.”

이든은 이번에는 조금 억울했다. 사심이 조금도 없었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그것보다는 뼈가 드러난 마른 몸이 신경 쓰였을 뿐이었다.

이든은 클로에의 팔을 뒤에서 슬며시 들어 올렸다. 팔이 올라가자 그녀의 어깨뼈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툭 치면 부러지겠어요.”

클로에의 반듯한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그가 시비를 거는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저도 힘세요.”

퍽이나. 매일 밤 그의 밑에서 애벌레처럼 바르작거리는 게 다였으면서. 무엇보다 힘이 약하다고 놀리는 게 아니었는데.

제 어깨를 밀어내며 신음을 흘리던 클로에를 떠올리자 가라앉고 있던 욕구가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다행이랄지, 아쉽다고 해야 할지 클로에가 먼저 물에서 일어나려 했다. 물속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 어지러운 모양이었다.

반쯤 몸을 일으키려던 클로에가 슬며시 그가 있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눈 감아요. 일어날 거니까.”

아, 또 이렇게 귀여운 짓을.

눈을 감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클로에는 그의 앞에서 털을 바짝 세운 동물처럼 경계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그가 눈을 감기 전까지는 조금도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자, 됐어요?”

천천히 눈을 감자, 그의 귀로 촤르륵 물이 넘치는 소리와 함께 찰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눈꺼풀이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자 이든은 손등으로 아예 제 눈을 가렸다.

‘그냥 눈 뜰까.’

어차피 이미 다 봤는데. 이런 짓, 저런 짓 이미 다 해 봤지 않는가.

“다 됐어요.”

이든의 고민이 길었던 건지, 겁 많은 그의 아내가 서둘러 옷을 걸친 건지. 이든이 눈을 떴을 때 클로에는 이미 가운에 감싸여 있었다.

아주 야무지게도 매듭지어진 가운의 끈을 지그시 바라보며 이든은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이든이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자 그를 쳐다보고 있던 클로에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가, 갑자기 일어나면 어떡해요!”

“다음부터는 고함을 치면서 일어날까요?”

이든의 농담 섞인 말에 클로에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음부터는 같이 목욕 안 할 거예요.”

클로에는 그렇게 말하고는 후다닥 욕실을 벗어났다.

목욕도, 잠자리도 의연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클로에는 그의 앞에만 있으면 예전과 달리 바보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입은 그 머리에서 정제되지 않은 채 나온 말들을 그대로 내뱉었다.

예전에는 어떻게 말했더라. 어떻게 그에게 또박또박 대들었지. 잘한 것도 하나 없으면서.

생각에 잠겨 있던 클로에는 욕실 문이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침대로 몸을 던졌다.

“벌써 자요?”

이든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녀가 자는 척을 하는 걸 눈치채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로에는 평소와 달리 머리도 말리지 않았고, 여전히 가운 차림이었다.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대답하지 않는 클로에를 바라보던 이든은 욕실에서 새 수건을 하나 가져와 그녀의 옆에 걸터앉았다.

눈꺼풀이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정없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클로에는 끝까지 자는 척을 그만두지 않았다.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이미 저질러 버린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사락사락,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있으니 청각이 예민해졌다. 그녀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클로에는 지금 그녀가 제일 무서워하는 성인 남자의 앞에서 눈을 감은 채 그 누구보다도 무방비하게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단순히 긴장이 될 뿐, 두려운 감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클로에의 걱정과 달리 이든은 조심스럽게 클로에의 머리를 제 다리 위에 올려놓고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수건으로 말려 주기 시작했다. 서툴기는 했지만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자는 척을 하던 클로에는 그의 손길 아래 점점 노곤해져만 갔다.

‘안 되는데…….’

그의 무릎을 베고 잘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클로에는 누군가를 옆에 두고서 편하게 잠들지 못했다. 그와의 잠자리 후에 거의 기절하듯 잠들 때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기분 좋아.’

그 짤막한 감상이 클로에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클로에의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던 이든은 제 무릎을 베고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잠든 클로에를 내려다보았다.

기껍게도 제 품안에서 편안히 잠든 그녀의 모습에 이든은 희미하게 웃었다.

조심스레 그녀의 머릴 손으로 받치고 침대에서 일어난 이든은 그녀를 똑바로 침대에 눕혀 주었다.

아직 그가 바라는 것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지만, 클로에는 착실히 변해 가고 있었다. 그에게 마음을 열어 가고 있었다.

그것을 방증하듯 클로에는 요즘 악몽을 꾸지 않았다.

이 작은 여인에게 허락된 밤의 안식이 영원하기를. 이든은 클로에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넘겨주며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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