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꽃잠 (5/8)
  • 4. 꽃잠

    클로에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식탁 앞에는 이미 가이사와 이든이 앉아 있었다.

    가이사는 클로에에게 이든만큼이나 어려운 사람이었다. 이든과 그녀의 결혼을 허락한 것부터,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두 사람과 함께 아침 식사라니. 클로에는 암담했다.

    그러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아침 식사는 그런 대로 조용했다. 이든이 클로에에게 채소를 먹이려 했던 것과 그런 제 아들의 모습을 희귀한 생물 보듯 했던 가이사를 제외하면 말이다.

    식후로 나온 차를 마시며 신문을 읽던 가이사는 평소와 달리 줄줄이 나오는 디저트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디저트는 이든이 클로에를 위해 따로 주방장에게 내오라고 한 것이었다. 그는 앞으로 클로에에게 이것저것 먹여 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가이사는 그 사실을 몰랐다.

    “누가 먹는다고 이런 걸 내온 거지?”

    포크를 들었던 클로에는 가이사의 말에 슬며시 그것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런 클로에의 모습을 발견한 이든은 제 아버지를 지그시 바라보았고, 가이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헛기침을 해댔다.

    “저, 치울까요?”

    안절부절못하던 주방장이 가이사에게 물었다.

    “누가 안 먹는다고 했나?”

    가이사가 포크를 들어 보기만 해도 달아 보이는 케이크를 푹 찍었다. 그제야 클로에도 그를 따라 느릿느릿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맛있는지 도중에 희미하게 웃기까지 했다.

    가이사도 이든도 그런 클로에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식사 시간이 겹쳤던 적이 없어 그녀가 무언가 먹는 걸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야금야금 케이크를 먹어 대던 클로에는 유난히 조용해진 주변에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에게로 향한 두 남자의 시선에 슬며시 포크를 내려놓았다. 너무 정신없이 먹고 있었던 건가 싶었다.

    긴장이 풀린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가이사와 이든을 앞에 두고서 디저트나 냠냠 먹고 있을 리 없었다.

    “왜요, 더 먹지.”

    이든의 말에 가이사가 슬며시 클로에의 앞으로 디저트가 담긴 접시들을 이것저것 내밀기 시작했다. 슬쩍 눈치를 보던 클로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럽게 다시 포크를 들어 올리는 클로에의 모습에 부자의 얼굴에 안도가 피어올랐다. 그런 서로와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웃던 얼굴을 굳힌 채 괜스레 헛기침을 해 댔다.

    가이사는 들고 있던 신문을 괜스레 요란스럽게 펼쳤다. 그동안 클로에는 케이크를 맛보는데 정신을 쏟고 있었다.

    한참 동안 신문을 읽던 가이사가 신문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알리사가 초대장을 보냈더구나.”

    흘긋, 가이사가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알리사’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슬며시 포크를 내려놓는 클로에의 모습에 그는 남모르게 혀를 찼다.

    알리사 고트. 가이사 록스턴의 여동생이자, 록스턴 공작가의 최측근 가신인 고트 백작가의 안주인이었다. 공작저에서 클로에 다음으로 권위가 높은 여인이기도 했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트 부인이 클로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보수적인 북부 귀족의 대표격일 정도로 정숙한 여인이었기에 클로에를 못마땅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클로에 역시 고트 부인이 껄끄러웠다. 비난 어린 시선 정도야 클로에가 자초한 일이니 웃고 넘어갈 수 있지만, 고트 부인이 클로에에게 요구하는 것은 정숙함 따위가 아니었다.

    부인이 바라는 것은 오직 후계자였다. 바꿔 말하면 고트 부인은 클로에에게 그 정도밖에 기대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후계자 문제는 클로에에게 퍽 껄끄럽고 불편한 주제였다.

    가이사가 어쩐지 기운 없어 보이는 클로에를 향해 말했다.

    “굳이 가고 싶지 않다면 가지 않아도 괜찮다. 별로 중요한 자리도 아니니.”

    알리사가 공작저로 보낸 편지는 파티 초대장이었다. 고트 부인의 아들, 테일러 고트가 왕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거니와 고트 부인이 그녀에게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클로에가 이든 록스턴과의 결혼을 결심하면서 각오했던 것들이다.

    “클로에.”

    상념에 잠겨 있던 클로에는 이든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이든이 클로에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요.”

    “괜찮아요.”

    이든은 어딘가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클로에가 입을 다물자 더 이상 알리사에 대해 얘기하지는 않았다.

    클로에는 다시 포크를 들어올렸다. 조금 전만큼 디저트가 달게 느껴지지 않았다.

    * * *

    “아, 아, 으읏!”

    집요하게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단단한 손가락의 감촉에 클로에는 파들파들 떨며 그의 어깨에 손톱을 박았다. 몇 번이고 경험해 봤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아학!”

    짧은 절정이 오기 직전 클로에는 몸을 뒤로 빼 그의 손길을 피했다. 거의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클로에는 몇 번이나 절정 직전에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든은 그런 클로에를 다독이며 물었다.

    “왜 자꾸 도망가요.”

    “무서워서…….”

    무심결에 그의 물음에 대답한 클로에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든은 언제나 클로에의 사고가 마비되어 있을 때 말을 걸고는 했다.

    클로에의 속마음을 들은 이든은 재촉하는 기미 없이 다시 부드럽게 물었다.

    “무서워?”

    “…….”

    쾌감이라는 것은 클로에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클로에는 그 순간이 싫었다. 이성을 잃는 순간 제 안에서 제 아비와 같은 면모가 튀어나올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클로에를 바라보던 이든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가운을 클로에의 어깨에 걸쳐 주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런 날이 며칠째 지속되고 있었다. 언제나 부드러운 손길로 클로에를 애무하고는 그녀가 짧은 절정에 오르면, 혹은 그 직전에 클로에가 거부하면 그가 먼저 몸을 일으키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얼굴은 담백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의 바지 앞섬은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이든이 많이 참고 있다는 사실을 클로에도 알 정도였다.

    이든이 욕실에 들어가기 직전 클로에가 그에게 물었다.

    “왜 안지 않는 거예요?”

    클로에의 말에 이든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끝까지 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을 한 이든이 다시 클로에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클로에가 움찔거리며 슬며시 뒤로 몸을 빼려하자 그가 침대 헤드를 붙잡고는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클로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클로에의 상태를 이든이 모를 리 없었다.

    “이렇게 겁을 내는데 내가 어떻게 안아. 설마 어떻게든 한 번 하고 나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든의 말에 클로에가 정곡을 찔린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가 작게 웃었다.

    “그 정도로 만족하기에는 내가 독수공방한 시간이 좀 길지 않아요?”

    그러더니 이든은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리고 헝클어진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한 번 매만지고는 말했다.

    “내가 당신을 안지 않은 이유-.”

    “…….”

    “어디 한 번 잘 생각해 봐요. 당신이 그걸 알아야 내가 이 다음을 하지.”

    그렇게 클로에에게 난제를 떠넘긴 이든은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클로에가 그의 손길을 피하고 나면 이든은 언제나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얼마나 얼음장 같은 물로 씻고 나오는지 그가 물기를 털어내고 다시 누울 때면 옆에 있는 클로에조차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몸을 부르르 떨 정도였다.

    물소리가 들리는 욕실을 바라보던 클로에는 이든의 말을 곱씹었다.

    이든 록스턴이 자신을 안지 않은 이유.

    “…….”

    남자들을 만나고 다녔던 주제에 침대 위에서는 목석 같이 구니 재미가 없던 걸까?

    “당신이 그걸 알아야 내가 이 다음을 하지.”

    아니면 목석 같이 굴지 말고 알아서 배워 오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던 클로에는 초조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는 멈칫했다.

    이래서야 마치 그와의 잠자리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다른 누구도 아닌 클로에 린다, 그녀가 이럴 수는 없었다.

    스르륵 옆으로 쓰러지듯 침대 헤드에 기댄 클로에는 그 단단한 헤드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스스로가 어리석고 나약하게 느껴졌다.

    아니, 실제로도 어리석고 나약한 일이었다. 결혼 전의 각오가 무색하게 흔들리고 또 흔들리고 있었다. 이대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한 번쯤은 제 부모의 업보를 무시해 버려도 되지 않을까, 하고.

    어떤 무뢰배 같은 남편을 맞게 돼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각오했던 것 중에 다정한 이든 록스턴은 없었다.

    말하자면 이건 변수였다. 그가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뭐 하고 있어요.”

    침대 헤드에 머리를 콩콩 박고 있던 클로에는 제 이마를 감싸는 차가운 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든이 다른 한 손으로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 내며 클로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클로에의 기행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멍하니 이든을 올려다보던 클로에는 제 이마에 닿은 그의 손을 쳐냈다.

    가볍게 손을 거둔 이든은 익숙하게 클로에의 옆자리에 누웠다. 차가워진 그의 피부에 클로에가 부르르 떨자 그는 클로에에게서 한 뼘 정도 떨어졌다.

    그래 봤자 다음 날 아침이면 꼭 붙어 있을 거다. 클로에가 잠결에 그에게 굴러가든가, 이든이 그녀를 끌어안든가 해서.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클로에는 슬며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요?”

    “어차피 아무것도 안 할 거면 따로 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거, 지금 당장 안아 달라는 뜻이에요?”

    클로에가 얼굴을 구기자 이든이 작게 웃으며 클로에의 가운 자락을 잡아당겼다.

    “농담이에요. 그러니까 가지 말아요.”

    클로에는 이든과의 대화를 종잡을 수 없었다. 따라가기 벅찼고, 무슨 말로 대꾸를 해야 할지 언제나 고민이 됐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 겪어 보지 못했던 일이다.

    그녀는 어떤 다정한 말을 들어도, 혹은 비난을 들어도 웃어넘기는 게 일상이었던 사람이다.

    그랬던 그녀가 이든 록스턴의 말에만 대답을 하지 못하는 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껄끄러움의 기저에 깔린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배려라는 것을, 이 사람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는 것을 그녀는 몰랐다.

    클로에는 마지못해 그의 옆자리에 몸을 뉘였다. 그녀가 눕자 이든은 그녀의 가운 자락을 꼭꼭 여며 주고는 턱 밑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답답해요.”

    “이러고 있어요. 또 찬물 뒤집어쓰기는 싫으니까.”

    꼼지락거리며 이불을 밑으로 내리려 애쓰던 클로에의 움직임이 단박에 멈추었다. 그녀는 아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는 이든을 향해 등을 보였다. 이든은 그런 그녀를 보고 피식 웃더니 나직이 말했다.

    “잘 자요.”

    방금 전까지 그녀의 다리 사이를 지분거리며 그녀를 진득하게 애무했던 남자치고는 목소리가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집요했던 그의 손길이 떠오르자 아랫배가 꾹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슬쩍 이불을 걷어 내고 이든을 향해 뒤를 돌아보자, 그는 반듯하게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모양이다.

    그녀 혼자만 조금 전의 짧은 정사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모양이다. 정작 상대는 신경도 안 쓰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차게 식는 마음에 클로에는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는 홱 고개를 돌렸다.

    클로에가 등을 돌리고 나서야 이든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

    ‘한참 멀었군.’

    다른 침대에서 잔다는 소리 따위를 하는 걸 보니 그가 그녀를 안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게 분명했다.

    도대체 소문 속의 요부는 누구란 말인가. 저런 맹하고 순진한 구석을 어떻게 숨기고 다닌 건지. 이래서 편견이라는 게 무섭다는 건지도 몰랐다.

    찬물로 씻어 내린 게 무색하게 팽창한 자신의 신체 일부를 애써 무시한 이든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클로에를 끌어안았다.

    이불 너머로 움찔거리는 그녀의 몸이 느껴졌다. 그래도 뿌리치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이든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 *

    “언니, 언니-!”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클로에는 제 드레스자락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정신을 차리고는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들이 그녀의 드레스에 매달린 채 똘망똘망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클로에는 정신을 차리고 아이들에게 가지고 있던 쿠키를 마저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생각을 정리할 곳이 필요해서 온다는 곳이 고작 고아원이었다. 막상 돌이켜 보니 제도가 아닌 북부에서 클로에가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곳은 그녀의 신분을 모르는 이곳이 유일했다.

    그녀가 자처한 일이었지만, 마음을 터놓을 친구 하나 없다는 것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퍽 씁쓸한 일이었다.

    클로에에게서 쿠키를 받아 간 아이들이 그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레이에게로 달려갔다.

    방금 전 그녀가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도 그녀의 남편의 부관, 레이 포트먼이 이곳에 있다.

    그는 지난 번 고아원에서 했던 말을 착실히 지킬 생각인지 고아원으로 향하는 클로에를 따라왔다. 그러나 딱히 감시를 할 생각은 아니었는지 그는 지금 아이들을 돌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애들이라면 질색을 할 줄 알았는데, 아이들과 놀아 주는 솜씨가 제법 능숙했다.

    클로에의 시선을 느낀 탓인지 레이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는 클로에와 눈이 딱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쳐다본 것뿐이에요.”

    그는 옆에서 제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아이를 타일러 멀리 보내고는 클로에를 향해 태연하게 말했다.

    “물어볼 것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아까부터 빤히 쳐다보셨잖습니까.”

    “포트먼 씨는 결혼할 생각 없으신가요?”

    급작스러운 클로에의 물음에 레이는 사레라도 걸렸는지 급하게 콜록거렸다. 물어볼 것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던 것은 자신이었지만 주제가 너무 뜬금없지 않은가.

    “뭐라고요?”

    “만나시는 분 없으신가 해서요.”

    다시 확인해도 똑같은 질문에 레이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그런 게 왜 궁금하십니까?”

    클로에는 그의 얼굴에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고민을 보았다. 상사의 부인과 치정 문제로 얽히기 싫은 게 여실히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포트먼 씨한테는 관심 없으니까.”

    반가워 마땅한 말이었지만, 고백한 적도 없는데 차인 느낌이 들어 레이는 기분이 나빠졌다.

    “대답할 이유 없습니다.”

    “어련하시겠어요.”

    레이는 클로에가 남의 연애사를 물어볼 줄은 몰랐던 것뿐이다. 클로에의 의중을 살피듯 그녀를 내려다보던 레이가 나직이 대답했다.

    “저는 결혼 생각 없습니다.”

    난데없는 비혼 선언이었다. 클로에가 빤히 바라보자 레이는 머쓱한지 흘러내리는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제도의 부인들이 보았더라면 얼굴을 붉혔을 만큼 곱상한 자태였다. 그런 사람이 결혼을 안 하겠다니, 아까운 일일지도 몰랐다.

    “이유를 물어도 되나요?”

    “여자라면 진절머리가 나거든요.”

    흐음, 하고 손에 턱을 괴는 클로에의 모습에 레이는 드물게도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클로에가 불쾌해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제 문제입니다. 여자들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클로에를 흘긋 바라본 레이가 덧붙였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의 사과에 클로에는 여상히 대답했다.

    “피차 마찬가지인 일에 무슨 사과를 해요.”

    “무슨 뜻입니까?”

    “그날 황궁에서 다 보셨잖아요.”

    그 보잘 것 없는 남자가 무서워서 도망치는 한심한 제 모습을. 클로에는 턱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삼켜 내고 뭉뚱그려 말했다.

    “제가 바보 같이 구는 모습.”

    레이는 클로에가 먼저 그때의 일을 입 밖으로 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황했다.

    그의 안에서 클로에 록스턴이라는 여자는 남자와 사치에 빠진, 그가 제일 쓸모없다고 여기는 부류였다. 때문에 황궁에서 그녀가 보였던 뜻밖의 모습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묻고 말았다.

    “남자가 거북합니까?”

    그 질문에 클로에는 웃었다.

    거북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각인된 기억은 그것을 혐오로, 혹은 두려움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이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아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어쨌든 클로에의 침묵과 조소는 레이에게 그럭저럭 대답이 되었다.

    “비난하고 싶으면 비난해도 좋아요.”

    “저는 비난을 하려던 게 아니라…….”

    “왜요? 비난받아 마땅한 일인데. 이런 주제에 감히 결혼을 했잖아요, 내가. 그것도 록스턴 가의 공작님과.”

    레이는 클로에가 그것을 자각하고 있다는 데에 놀랐다. 남들의 시선, 비난, 그런 것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클로에는 말했다.

    “포트먼 씨. 이게 당신을 이해시킬 만한 대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그 사람의 사이에는 어떤 약속 하나가 있어요. 그 약속을 지켜 줄 사람이라면 저는 록스턴 공작가든 지나가던 비렁뱅이든 상관없었어요.”

    말하자면 그만큼 클로에는 절박했고 이든은 이상적인 파트너였다. 잠자리에 집착하지 않고, 그녀의 사생활을 모른 척해 줄 수 있는 이름뿐인 남편.

    물론 최근의 이든은 클로에가 감당하기 버거웠다.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녀를 억지로 안기는커녕 이상한 난제 하나를 던져두고는 마지막까지 안지 않고 있었으니까.

    클로에의 말을 듣고 한참을 침묵하던 레이가 입을 열었다.

    “황궁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것을 부러 들출 일은 없을 테니. 저를 타인의 약점을 가지고 뒤흔드는 악질로 보고 계셨다면 유감이지만요.”

    레이의 말에 클로에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로 볼 수 없었을 편안한 웃음이었다. 물론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쪽도 나를 제멋대로에 말 안 듣는 상사의 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레이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클로에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보기 드문 레이 포트먼의 당황한 모습에 결국 클로에는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는 그녀의 물음에 당황한 것 이상으로 그녀의 웃는 얼굴에 놀랐다.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레이의 모습에 클로에도 웃음을 멈추었다. 그제야 자신이 크게 웃고 있다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도 낯선 일이었다.

    화제라도 돌릴 겸, 클로에가 레이를 향해 말했다.

    “그쪽을 타인의 약점을 가지고 뒤흔드는 악질로 본 적은 없지만, 고아원에 후원을 할 정도로 좋은 사람으로 본 적도 없어요.”

    “고아였으니까요.”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단정하고 곱상하기 짝이 없는 그의 모습만 봤을 때는 믿기 어려운 얘기였다. 레이는 클로에가 봤던 어떤 귀족 남자들보다 깔끔한 사람이었다. 그런 클로에의 의문에 대답하듯 그가 말을 계속했다.

    “금수만도 못한 어른들 아래서 자랐거든요. 그게 싫어서 후원하는 거예요. 부패한 고아원이 아이들에게 끔찍한 곳이라는 걸 아니까.”

    클로에가 레이 포트먼의 과거를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레이 포트먼은 공공연하게 떠도는 소문마저 없었다. 그만큼 그는 본인의 사생활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고로 지금 그가 하려는 얘기는 그의 기저에 가라앉아 있던 얘기라는 소리였다.

    “나한테 그런 거 얘기해 줘도 돼요?”

    “제가 부인의-.”

    주변에서 뛰어다니고 있는 아이들을 의식한 모양인지 레이가 그녀를 부르는 호칭을 바꿨다.

    “클로에 님의 비밀을 하나 알고 있으니까요. 굳이 숨길 만한 내용은 아니지만 제 약점 정도는 될 겁니다.”

    “약점 가지고 타인을 뒤흔드는 사람 아니라면서요.”

    “안심하시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상한 일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레이 포트먼에게 저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클로에의 모습에 레이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공간에 있을 일도 거의 없는 사이였다. 뭐랄까. 침묵이 어색한 사이다.

    “그런데 제 결혼 여부는 왜 물어보신 겁니까?”

    레이가 매끄럽게 주제를 돌렸다. 곤란한 제 속내를 들키기 싫어서 대충 던진 질문에 레이는 뜻밖의 것을 보았다. 클로에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 있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클로에는 자신이 누군가의 결혼상대로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나 록스턴 공작가의 고명한 주인에게는 더욱더.

    결혼 조건으로 그에게 잠자리에 대해서 말할 때는 솔직히 물세례를 맞아도 할 말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든이 그 조건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유감이지만 지금 나는 당신이 조금 더 좋아졌어요.”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더욱더 몰랐고. 생각에 빠져 있던 클로에에게 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하께서 무슨 말씀이라도 하시던가요?”

    “아니요!”

    괜스레 혼자 놀라서는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대답한 클로에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레이 역시 적잖게 놀란 듯 커다래진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예, 아무 말씀도 안 하셨군요.”

    그다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의 우렁찬 대답은 누가 봐도 미덥지 못했다. 그리고 레이가 그 미덥지 못함을 의심하듯 바라보았다.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이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려던 클로에에게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로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로에! 거기 줄에 걸려 있는 이불 좀 걷어 주시겠어요?”

    “네, 네! 그럼요!”

    클로에는 기다렸다는 듯 레이의 곁을 벗어났다. 로셰가 말한 빨랫줄에는 상당한 양의 하얗고 얇은 이불들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공작저의 사람들 모르게 1년이란 시간이 넘도록 고아원에 드나들며 잡다한 일을 다 한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공작 부인이었다. 그녀가 허드렛일을 하는 걸 잠자코 볼 수만은 없어 레이도 클로에를 따라 이불이 널려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이불자락 너머로 클로에가 서 있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바람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이불과 함께 휘청거리고 있는 클로에의 모습에 레이는 작게 혀를 찼다.

    뭐랄까. 레이는 클로에가 예전만큼 거북하지는 않았다.

    * * *

    집무실 창가에 서 있던 이든은 나란히 마차에서 내리는 클로에와 레이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최근 부쩍 두 사람이 붙어 다니는 횟수가 늘었다.

    클로에가 수수한 차림을 하고 공작저를 나서는 묘한 외출 날과 레이의 휴일이 겹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억측이 뒤섞인 의심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자꾸 불쾌해지는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의 레이는 클로에라면 질색하는 인사였다. 같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신경 쓰이는 것이 당연했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레이의 옆에서 스스럼없이 떠들고 있는 클로에였다. 자신은 손만 뻗어도 움찔거리면서 레이의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퍽 익숙해 보였다.

    톡, 톡, 창틀을 짚고 있던 이든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창틀을 두들겼다.

    * * *

    뜻밖에 듣게 된 레이의 과거는 그와 그녀 사이에 있던 견고한 벽에 미세한 금을 만들어 냈다.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레이의 모습은 덤덤했다. 그리고 과거에서 도피하고 있지 않았다. 언제나 도망치고 숨는 그녀와는 달리.

    그녀는 이든 록스턴을 이용해, 결혼이라는 도피처를 만들어 냈다. 클로에는 이제 그것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결혼…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애초에 그녀의 이기심에 누군가를 이용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그녀가 겪고 있는 딜레마는 그 이기심의 반동일지도 몰랐다. 혹은 벌이거나.

    물론 이든이 그녀가 내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선뜻 수락한 점도 없지 않아 있었다. 어쩌면 그가 그녀의 조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지만, 착실히 그녀의 기분에 맞춰 잠자리 사정까지 봐주고 있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나랑 이혼하고 싶어요?”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에 클로에는 놀라서 짧은 비명을 질렀다. 이든이 방 한편에 놓인 의자에 앉아 서류를 읽고 있었다.

    어쩐지 그녀의 옷시중을 들 시녀들이 방 안에 따라 들어오지 않더라니. 생각이 많아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클로에는 곤란한 상황을 무마하려는 듯 답을 얼버무렸다.

    “있는지 몰랐어요.”

    “그런 것 같았어요. 부르면 놀랄까 봐 가만히 있었는데, 당신이 같잖은 소리를 하니까.”

    이든의 말에 클로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었나 곱씹다가 입술을 입을 꾹 다물었다.

    이든은 서류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클로에를 향해 다가왔다. 클로에는 그를 피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얼마 안 가 등 뒤로 차가운 벽이 닿았다. 클로에의 눈에 이든이 손을 뻗는 게 보였다.

    클로에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채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아버지의 폭행에 학습된, 거의 반사적 행동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

    하지만 볼을 만지작거리는 부드러운 손길에 클로에는 슬며시 눈을 떴다. 자신이 생각해도 과한 반응이었기에 클로에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굴에 흙까지 묻히고. 밖에서 뭘 하고 다니는 거예요?”

    이든의 말에 클로에는 이든의 손을 치워 내고 황급히 얼굴을 매만졌다. 까끌까끌한 모래 알갱이가 만져졌다. 아이들과 놀았던 흔적을 제대로 지우지 못한 모양이다.

    혹시나 고아원에 다니는 것을 그가 캐묻게 될까, 클로에는 슬금슬금 그를 피해 뒷걸음질 쳤다. 그런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무서워요?”

    그 말에 클로에는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누가 무섭다고…….”

    “레이는요?”

    난데없이 나오는 레이의 이름에 클로에의 반듯한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말이에요?”

    “레이는 안 무섭고?”

    레이 역시 클로에에게는 피차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자주 보게 되어 전보다 편해졌을 뿐이었다. 어쩌면 오늘 듣게 된 그의 과거가 한몫했을지도 모르겠다.

    “설마 자기 부관을 의심하는 건가요?”

    “설마요. 그는 여자라면 질색을 하는 걸요.”

    다만 매일 밤 침대 위에서 그의 손길에 헐떡거리는 그녀가 그를 어려워하고, 까칠하기 짝이 없는 제 부관을 편안해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었다.

    “의심 아니고 질투일 거예요.”

    이든은 그렇게 말하고는 클로에의 얼굴에 묻은 흙먼지를 마저 털어 주고 방을 나섰다. 그가 방을 나서자마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

    시녀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그녀의 드레스를 벗기는 와중에도 클로에는 이든의 마지막 말을 곱씹느라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 * *

    다른 날과 달리 이든은 클로에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저 뒤에서 그녀를 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품이 어색하고 불편한 클로에가 고물고물 움직이며 슬며시 멀어지자 그가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내가 당신의 과거에 대해 끝까지 몰랐으면, 평생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그가 자고 있는 줄 알았던 클로에는 돌연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 파드득 몸을 떨었다.

    “안 자고 있었어요?”

    “내가 당신을 옆에 두고 잠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

    그가 이런 종류의 말을 할 때마다 클로에는 할 말이 없어졌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거다. 소문과는 달리 그녀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고, 이든 록스턴과는 이런 쪽으로 그 누구보다도 먼 사이였으니까. 잠자리를 함께하는 관계가 되었어도 아직은 어색했다.

    “그런 말 할 거면 그냥 안지 그래요. 내가 목석 같이 굴까 봐 그래요?”

    클로에는 결국 가시 돋은 말을 뱉고 말았다. 이든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의 안에서 도대체 나는 얼마나 쓰레기 같은 놈인 걸까. 그동안 나름대로 신사적으로 대해 줬다고 생각하는데.”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클로에가 이불을 만지작거리다 이든에게 말했다.

    “…포트먼 씨가 여자를 싫어하는 거 알고 있어요. 아마 그것 때문에 조금 편해진 모양이에요.”

    어째서 그에게 레이 포트먼과의 관계를 변명하고 있어야 하나 생각하면서도 클로에는 조곤조곤 그에게 말을 이었다.

    “당신처럼 제게 멋대로 구는 사람도 아니고요.”

    이어지는 클로에의 말에 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그의 숨이 목덜미에 닿아 클로에는 몸을 움츠렸다. 불쾌하다기보다는 간질간질하고 긴장이 되는 느낌이었다.

    “알아. 당신한테 이럴 수 있는 사람, 나뿐이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클로에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나른하고 기분 좋은 고양이 같은 몸짓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이든 록스턴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예전이었다면 같은 침대를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게 무색하게 이든은 클로에에게서 몸을 뗐다. 의아함에 흘긋 고개를 돌리는 클로에를 향해 그가 말했다.

    “편하게 자요. 내일 피곤할 텐데.”

    날이 밝으면 고트 백작저로 향한다. 고트 백작저가 이곳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지만 신랄하기 짝이 없을 알리사의 잔소리를 생각한다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클로에는 눈을 감았다. 이든이 평소와 달리 그녀에게서 떨어져 있으니 잠들지 못할 것도 없었다.

    “…….”

    이든의 온기가 떨어져나간 어깨가 서늘해 클로에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이불은 이든의 팔 아래 깔려 있던 모양인지 잘 끌어올려지지 않았다.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불이 그녀의 턱 끝까지 쑥 올라와 포근하게 그녀를 덮었다. 펄럭이는 이불에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들을 부드럽게 정리해 주는 그의 손길은 자연스러웠다. 그에게도, 그녀 자신에게도.

    “잘 자요.”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클로에는 괜스레 이불을 잡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얼굴이 홧홧하고 가슴 언저리가 꾹 조인다.

    너무 생소한 감각이라, 클로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클로에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어버렸다.

    * * *

    “알리사가 허튼 소리 하면 생각할 것도 없이 돌아와라.”

    가이사가 마차에 오르는 이든과 클로에를 향해 말했다.

    알리사의 초대장이 온 이후로 몇 차례 더 가이사의 앞에 그녀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게 무슨 내용이었는지 클로에가 알 턱은 없었지만 가이사가 저런 말을 하는 걸로 봐서는 좋은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클로에의 예상은 빗나가는 법이 없이 알리사는 클로에를 보자마자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공작 부인인 클로에를 향해 대놓고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 어쨌든 집안의 어른인 알리사를 향해 클로에가 먼저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트 부인.”

    알리사는 클로에를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는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모님.”

    이든이 웃는 낯으로 알리사를 불렀다. 다정히 안부 인사나 묻자고 부른 것은 아닌 모양인 듯, 이든의 웃는 얼굴은 서늘했다.

    이든의 경고가 담긴 부름과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알리사가 클로에를 향해 짤막히 말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클로에는 매끄럽게 웃는 낯으로 그녀의 날 선 인사말을 받아들였고, 이든은 가늘게 뜬 눈으로 알리사를 응시하다 보란 듯이 클로에의 어깨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클로에에게 다정한 이든의 모습에 알리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생소한 풍경이었다. 게다가 클로에는 이든의 손길이 불편한 듯 슬며시 밀어내고 있었고, 이든이 마지못해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손길을 그녀에게서 거뒀다. 이든 쪽에서 더 클로에에게 신경 쓰고 있는 듯한 태도는 더더욱 생소했다.

    “어머, 웬일이야.”

    제 어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트 부인의 딸인 디아나는 히죽거리며 클로에와 이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상황이 퍽 재밌는 모양이었다. 그런 제 딸을 흘긋 바라본 알리사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디아나. 경박하게 웃지 마라.”

    괜히 제게 까칠하게 구는 알리사의 모습에 디아나는 입술을 비죽였다.

    알리사가 저렇게 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든이 클로에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가장 크게 반대했던 사람이 알리사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금 백작저에는 알리사가 이든의 짝으로 점찍어 놓았던 북부 명문가의 헤링스 백작 영애가 와 있었다.

    알리사가 그녀에게 초대장을 보낸 저의가 무엇인지 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인지.

    하기야 이혼은 여인에게나 흠이지 사내에게는 별일도 아니었다.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알리사와, 계속 다가오는 이든의 손을 쳐내고 있는 클로에를 번갈아 보던 디아나가 중얼거렸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 * *

    ‘별일이 없을 리가 없지.’

    디아나는 저 멀리 이든에게 자꾸 다가가는 달리아와 그것을 제 옆에서 같이 바라보고 있는 클로에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달리아 헤링스. 클로에와는 정반대인 북부의 미인이었다. 정숙하고 얌전한, 그런 아가씨. 속까지 그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든이 갑자기 클로에와 결혼한다고 하기 전까지, 록스턴 공작 부인이 될 거라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여인이기도 했다.

    디아나는 흘긋 클로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같은 집안사람이라고는 해도 작년 그녀의 결혼식 때 한 번, 그리고 가끔 있었던 북부 파티에서 몇 번 본 것을 빼고는 본 적 없는 사이였다.

    소문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용한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그녀를 만나기 전 소문으로만 접했을 때는 조금 더 제멋대로에 요란한 성격의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소문 속의 클로에는 이든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 제 남편이 다른 여인과 있다고 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녀의 시선은 못 박힌 듯 이든을 향해 있었다.

    이든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공작가의 가신들이 모여들지 않았더라면 이든은 클로에의 옆에서 떨어질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디아나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클로에의 시선이 이든에게서 그녀에게 이동했다. 그리고 어색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인사를 했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어색했다. 그 어색한 공기를 환기시키듯 클로에가 덧붙여 물었다.

    “백작 영애라고 불러드릴까요, 아가씨라고 불러드릴까요?”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스스럼없는 디아나의 태도 때문인지 클로에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쨌든 디아나로선 이든과 그에게 치근덕거리는 달리아에게서 클로에의 시선이 떨어져 다행이었다. 제 어미가 뿌린 분란의 씨앗을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클로에는 인사를 나눈 후에도 떠나지 않는 디아나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알리사의 태도를 생각하면 디아나가 자신과 함께 있을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저와 함께 있으면 고트 부인이 별로 안 좋아 할 텐데요.”

    디아나의 의도를 알 수 없어 클로에는 먼저 그녀를 향해 선을 그었다.

    “지루한 사람들이랑은 어울리고 싶지 않거든요.”

    디아나의 말에 클로에는 대답 없이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 기대한 게 있었다면 유감이다. 클로에는 소문보다 보잘 것 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사였다. 그녀 스스로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대답이 없는 클로에를 가만히 바라보던 디아나가 심드렁히 덧붙였다.

    “자기랑 맞는 사람이랑 어울리는 거죠.”

    그 대답에 클로에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멋쩍은 웃음으로 대신했다. 디아나는 그런 클로에의 웃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클로에에게 디아나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면이 있을는지는 몰라도 지금 눈앞의 그녀가 그 악질적인 소문 속의 요부와 동일 인물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만큼 클로에의 웃는 얼굴에는 어딘가 어리숙한 구석이 있었다.

    “나한테 할 말 있어요?”

    아까부터 집요하게 느껴지는 디아나의 시선에 결국 클로에가 먼저 물었다. 화들짝 놀란 듯 입을 달싹거리던 디아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마음에 걸리던 것을 입 밖으로 냈다.

    “그… 어머니가 하는 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어떤 분인지 아시잖아요.”

    알리사는 자신이 공작가의 사람이라는 것에 굉장히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북부에서는 황가보다도 공작가의 영향력이 더 컸다. 록스턴 공작가에 북부의 제왕이라는 이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서도 공작가의 일을 자신의 일인 것처럼 챙겼다. 알리사에게 그 정도의 권한은 없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든 오라버니를 끔찍이 아끼시는 분이기도 하고.”

    무리도 아니었다. 이든의 친모인 선대 공작 부인이 그를 낳자마자 산욕열로 세상을 뜨면서 그를 키우다시피 한 것은 알리사였다. 알리사가 그를 아들처럼 키웠다는 건 공작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요컨대 디아나의 말뜻은 알리사를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는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클로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괜찮아요. 틀린 말씀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여전히 남들의 비난은 아프지 않다. 오히려 요즘 무서운 거라고 한다면…….

    클로에의 시선이 이든에게 닿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와인 잔이 급격하게 흔들려 잔 속의 액체가 찰랑였다. 그녀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들고만 있던 와인 잔이었다.

    클로에의 시선 끝에는 달리아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는 이든이 있었다.

    클로에를 따라 그것을 보게 된 디아나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내내 덤덤하던 클로에가 처음으로 보인 동요였다. 디아나는 조심스레 클로에를 살피며 물었다.

    “오라버니, 불러드릴까요?”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온갖 소문을 몰고 다녔던 그녀가 그를 향해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클로에가 몰고 다녔던 소문에 비하면 그가 연회장에서 만난 여인과 어디론가 사라지는 일은 가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인지도 아직 확실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그걸 알면서도 놀라고 동요한 자신이다. 은연중에 이든 록스턴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이기적인 자만심이 아닌가. 차라리 그가 다른 여인을 마음에 둔다면 더 잘된 일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름뿐인 결혼이었지 진짜 부부가 되고자 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분명, 그랬어야 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와도 될까요?”

    클로에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디아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잘 만들어졌는지는 클로에 스스로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 그럼요, 그럼요.”

    당황한 얼굴로 마구 고개를 끄덕이는 디아나를 보고 클로에는 확신했다. 지금 제 표정은 엉망진창일 거라고.

    그때였다. 누군가 클로에를 향해 다가왔다.

    “잠깐 얘기 좀 하자꾸나.”

    눈을 감은 채로 숨을 한 번 크게 들여 마신 클로에가 애써 평정심을 가장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그녀를 향해 꼿꼿하게 서 있는 귀부인, 알리사가 서 있었다.

    “네 덕에 제도가 소란스럽더구나.”

    기어코 이든이 없는 틈을 타 클로에를 찾아온 제 어미를 보고, 디아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이 닥쳤다.

    “그러게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방금 전까지 울 것 같았던 얼굴로 서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클로에는 덤덤히 알리사의 말을 받아쳤다. 알리사는 그런 클로에의 표정을 보며 탐탁지 않아 했다.

    “일개 백작 부인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고깝겠지.”

    일개 백작 부인. 고트 백작가는 록스턴 공작가의 최측근 가신이자, 북부의 중추 가문이었다. 그걸 차치하더라도 그녀는 록스턴 공작가에서 가장 입지가 탄탄한 집안 어른이었다.

    그런데도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건 클로에에게 비아냥거리기 위해서임이 분명했다.

    그런 알리사의 의도를 못 읽을 리 없었던 클로에는 그녀에게 부정하는 말을 건넸다.

    “그럴 리가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부인.”

    클로에가 답하자 알리사가 기다렸다는 듯 한탄했다.

    “방계 가문에서 자꾸 같잖은 말이 나오더구나. 네 행실이 공작 부인에 걸맞았다면 애초에 나오지도 않았을 말이지.”

    두 사람의 대치를 초조하게 지켜보던 디아나는 뒤따라오는 알리사의 말에 홀짝이던 와인을 그대로 내뱉을 뻔했다.

    “후계자라도 있으면 네 입지가 흔들릴 일은 없을 게다.”

    “어, 엄마!”

    디아나가 경악을 담아 제 어미를 불렀다. 아무리 집안 어른이라고 해도 조금 도를 지나친 발언이었다. 그녀가 클로에의 입을 다물게 할 생각이었다면 반쯤은 성공한 셈이다.

    클로에와 알리사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에 디아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입가를 가린 클로에의 손 뒤로 풋, 하고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알리사의 반듯한 미간이 좁아졌다.

    클로에는 그런 알리사를 보며 눈을 휘며 웃었다.

    “제가 아이를 가지면 그때는 누구 아이냐고 물어보시려고요?”

    “뭐라고?”

    되묻는 알리사의 목소리에는 클로에를 향한 노여움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클로에는 태연했다.

    “아닌가요?”

    클로에의 말에 부들부들 떨리던 알리사의 손이 앞에 놓여 있던 와인 잔을 향했다. 기겁을 하며 디아나가 제 어미를 말리려 할 때였다.

    탁-.

    누군가의 손이 알리사가 잡고 있는 와인 잔의 위를 덮었다. 잔 속의 와인이 찰랑이며 남자가 끼고 있던 장갑을 적셨다.

    “…이든.”

    “고모님. 이제 술은 줄이셔야죠.”

    걱정이라고 느껴질 만큼 다정한 말투였지만, 이든의 싸늘한 얼굴에 디아나는 침을 꿀떡 삼켰다. 알리사가 그의 어린 시절을 돌봐 준 고모가 아니었다면 상황은 분명 더 최악이었으리라.

    알리사의 손에서 와인 잔을 가져간 이든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디아나에게 넘겼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라, 디아나는 멍하니 그가 내미는 와인 잔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든의 웃는 얼굴에서 초조함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만 돌아가죠.”

    이든이 클로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클로에가 가만히 있자 그가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모습에 알리사는 미간을 좁혔다. 디아나는 분위기를 수습하듯 이든에게 물었다.

    “오, 오라버니. 백작저에 머물다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소적이었다.

    “같잖은 충고를 들으러 온 게 아니라서.”

    그러더니 이든이 클로에를 이끌었다. 클로에는 이든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클로에를 데리고 알리사를 지나치던 이든이 고개만 돌려 그녀를 향해 말했다.

    “고모님. 쓸데없는 일에 힘쓰지 마십시오.”

    이든의 말에 알리사가 무언가를 예상한 듯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멀리서 소란이 일었다. 달리아 헤링스가 눈물범벅인 얼굴로 어디선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작게 혀를 찬 이든은 클로에를 데리고 백작저를 빠져나갔다.

    밖에는 이미 레이가 마차 옆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든은 처음부터 백작저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마차에 오른 이든은 내내 말이 없는 클로에의 모습에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고모님이 했던 말은 신경 쓰지 말아요. 아이 문제로 당신 재촉할 생각 없으니까. 급하지도 않고요.”

    클로에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이든은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물었다.

    “화났어요?”

    “안 났어요.”

    무덤덤한 그녀의 대답에 오히려 이든은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멍하니 창문 너머에만 시선을 두던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당신 아까… 어떤 여자랑 나갔잖아요.”

    클로에를 빤히 바라보던 이든이 조금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건 또 언제 본 거예요.”

    이든의 말에 클로에가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차창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방금 한 말은 잊어요.”

    “내가 그 여자랑 있던 게 신경 쓰여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녀는 부정했지만 아무리 봐도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다. 이든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여자가 어디서 허튼 소리를 듣고 분수 모르게 굴기에 조금 경고를 해 준 것뿐이에요.”

    알리사에게 무슨 소리를 듣고 그에게 접근한 건지는 몰라도 입을 여는 족족 건방지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 감히 그의 앞에서 록스턴 공작가의 안주인에 대해 떠들어 댈 줄이야.

    마치 이든이 원래 그의 남자였던 것처럼 망상에 빠져 사는 듯한 여자였다. 그녀에게 고백 비슷한 것을 들었던 것도 같지만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질투했어요?”

    “질투 같은 거 안 해요.”

    “그럼 왜 물어봤어요?”

    묻는 것만큼이나 집요한 시선에 클로에는 살짝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잊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 질문.”

    “난 당신이 레이랑 있는 게 아주 기껍지 않던데.”

    마차 밖에서 말이 푸르릉거리는 소리와 덜컹거리는 소리. 그리고 레이의 기침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보니 그가 마차에서 멀어지려는 모양이었다.

    “포트먼 씨랑 저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저도 그 여인과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말했잖아요, 다른 여자 필요 없다고.”

    클로에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갔다. 혹시 우는 건가 싶어 이든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대려 했지만, 클로에가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면서 이를 악다물고 내뱉었다.

    “나한테 잘해 주지 마세요. 후회할 거예요.”

    “후회?”

    “당신은 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요.”

    난데없이 나오는 선대 후작의 얘기에 이든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이든을 향해 클로에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될지도 몰라요.”

    부모가 그랬다고 해서 자식까지 그럴 거라고는 할 수 없다. 이든은 그녀의 두려움이 그저 내딛지 못한 한 걸음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해가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타인의 어리석고 이기적인 바람일 뿐이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

    클로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든이 그녀와 사라지는 것을 본 순간 클로에의 안에서 제멋대로 욕심이 튀어나온 것뿐이다. 말도 안 되는 망상이 튀어나오며 그녀를 좀먹었다. 제 아비라는 괴물처럼 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동요했다. 이것이 무엇의 전조증상일지 몰라 클로에는 두려워졌다.

    “…무섭단 말이에요.”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클로에는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두 손으로 눈가를 감쌌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우리 아버지처럼 변하면 어쩌려고 이래요?”

    결국 클로에는 내내 속에 감춰 두었던 말을 입 밖으로 냈다.

    “내가, 그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인생을 망쳐 버리면 어떡해요.”

    헛된 망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녀의 어미는 그렇게 죽었다. 그녀의 배 속에 있던 빛을 보지 못한 생명도, 그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았던 클로에의 미래도,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그러기 싫어, 무서워. 어린아이 같이 중얼거리며 팔을 감싸는 클로에의 어깨 위로 커다란 겉옷이 걸쳐졌다.

    언제나 이든에게서 나던 향기가 훅 클로에의 코를 스쳤다.

    “방금 그 말, 내 멋대로 들어도 돼요?”

    “내 말은…….”

    “내가 너무 좋다는 걸로 들리는데.”

    클로에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이든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클로에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지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렇게 좋아요?”

    일그러진 얼굴로 이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클로에는 결국 눈에서 눈물을 툭툭 떨어뜨렸다. 이든은 그런 클로에를 보며 다정스레 말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약한 사람이 아니고,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보다 좋은 사람일 게 분명한데.”

    “…….”

    “말해 봐요, 내가 좋아요?”

    클로에의 입술이 달싹였다.

    “나, 난 그런 거 몰라요.”

    그녀가 살면서 보아 왔던 애정에 이든 록스턴만큼의 다정함은 없었다. 따뜻함도, 진심도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파괴적이었고, 그녀의 주변에 있던 남자들은 탐욕스러웠다. 그런 클로에에게 애정에 관해서 묻다니. 답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분명히, 분명히 후회할 거예요. 나를 원망할 거예요,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후회라면 당신이 멋대로 제도로 내려갔다는 걸 알았던 날, 이미 했어요.”

    사실은 그것보다도 조금 더 전, 밤마다 그녀가 울면서 제 어미를 찾는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섣부른 결혼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든, 그 자신이 아니라 울고 있는 저 여자에게 있어서.

    “그러니까 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줘요.”

    이든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저자세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불쾌함보다는 초조함에 입이 바싹 말랐다.

    그때 클로에의 가는 손가락이 이든의 옷자락을 꾸욱 잡았다. 밀어내는 말과 행동과 달리 간절하고 절박한 손짓이었다.

    “나는 당신을 이용한 거예요. 우리 아버지처럼 살기 싫어서.”

    “이용해요. 괜찮으니까.”

    이든은 애초에 클로에의 날 선 말과 행동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시를 세운 작은 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것뿐이다.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고 휘두르는 가시는, 그에게 단 하나의 상처도 내지 못했다.

    “괜찮아요.”

    “당신, 바보예요?”

    바보냐는 물음에도 이든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에는 온몸에 힘이 빠진 사람처럼 천천히 무너졌다.

    클로에의 이마가 이든의 가슴팍에 닿았다. 덤덤히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그의 가슴팍에서는 쉴 새 없이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 * *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마차에서 내리는 클로에의 모습에 공작저 하인들의 시선이 몰렸다.

    그 클로에 록스턴이 울었다. 지저분한 소문과 비난에도 꿈쩍도 않던 여자가 말이다.

    이든은 클로에의 붉어진 눈가를 매만지다 지나가던 하인에게 얼음과 수건을 가져오게 했다. 그 모습을 본 사용인들은, 다행히 두 사람간의 불화로 인한 문제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는지 저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모시는 주인이 바뀌는 일은 사절이었다.

    클로에는 온갖 소문을 달고 다니기는 했지만, 공작저의 사용인들에게 그녀는 모시기 힘든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관대한 주인에 가까웠다.

    클로에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간 이든은 클로에를 침대에 앉히고는 하인이 가져온 얼음을 감싼 수건을 그녀의 눈가에 댔다. 그 냉기에 클로에가 움찔거리자 어울리지 않게 섬세한 손길로 그녀의 눈가를 문질렀다.

    “내가 할게요.”

    이든의 손길을 피하며 클로에가 말했다. 마차에서 자신이 어떤 말을 지껄였는지, 누구의 옷자락을 잡고 아이처럼 울었는지 떠올리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클로에가 머뭇거리며 이든에게 말했다.

    “그, 마차에서 했던 말은…….”

    “못 물러요.”

    그가 여전히 클로에의 눈가를 진정시키는 데 집중하며 대꾸했다.

    “또 도망갈 생각이었죠?”

    “도망이 아니라…….”

    클로에가 변명하려고 했지만, 이든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우리 이렇게 하죠.”

    여전히 클로에의 눈가를 찜질해 주며 그는 평범하게 대화를 하듯 말을 이어 나갔다.

    “계약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우리가 결혼했을 때처럼.”

    “계약…이요?”

    “나랑 조금씩 가까워지도록 노력해 봐요. 나도 그 보답을 할 테니.”

    클로에는 이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으로 그가 얻을 이득이 무엇일지, 그녀가 얻게 될 보답이 무엇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뭘 위한 계약인지 모르겠어요.”

    “당신의 행복.”

    클로에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그걸로 당신이 얻는 건 뭔데요?”

    “당신.”

    이든의 대답에 클로에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든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말을 이었다.

    “나를 무서워하잖아.”

    그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든은 사실 그녀가 아는 남자들 중 제일 무섭지 않은 사람이었다.

    정작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든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다. 그 남자의 딸이니까. 그런 것만 보고 자랐으니까.

    눈동자를 굴리며 도망갈 궁리만 하는 클로에를 향해 이든이 한 뼘 더 다가왔다.

    “계약이라고 해도 별거 없어요. 남들이 하는 걸 우리도 하나하나 천천히 하는 거. 그거면 돼요.”

    또 한 뼘 더. 서로의 숨이 닿을 만큼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클로에의 동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린 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클로에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바짝 얼어 있는 클로에를 달래듯, 이든은 그녀의 양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가, 막상 눈이 마주치면 파르르 떨었다가.

    이든은 지그시 눈을 뜨고 그녀의 반응 하나하나를 눈에 새겼다. 적나라한 그의 눈빛에 클로에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든과 침대 위에서 이런저런 일을 했지만, 입맞춤은 처음이었다. 그간 침대 위에서 헐떡였던 일들이 무색할 만큼, 입맞춤이라는 것은 훨씬 더 적나라하고, 친밀한 행위였다.

    엉거주춤 손을 허공에 띄운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웃는 틈을 타 그녀가 입술을 떼기 무섭게 그가 그녀의 뒷목을 붙잡았다. 이든의 입술이 다시 집요하게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그 힘을 못 이기고 클로에의 몸이 뒤로 점점 넘어가, 이내 이불 속에 푹 파묻혔다.

    “응, 흡…….”

    숨이 모자라 클로에가 헐떡이기 시작하자 이든은 그제야 그녀에게서 고개를 들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클로에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그의 셔츠 자락만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도망갈 거면 지금뿐인데.”

    이든은 목 언저리의 셔츠가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망설이듯 그의 셔츠 자락만 만지작거리던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도망… 도망 안 가요.”

    평생을 제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도망쳐 왔다. 이든 록스턴이라는 남자에게 가로막혀 어쩌다 멈춰버린 이 길에서, 또다시 도망쳐 버리면 평생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든은 그녀의 눈가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끌러 내렸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허리를 조이고 있는 코르셋에 막혀 드레스가 내려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안 그래도 겁에 질려 있는 그의 작은 아내가 도망가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클로에에게서 몸을 일으킨 이든은 자꾸만 다급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고 그녀의 등 뒤로 보이는 수많은 매듭들을 만지작거렸다.

    한참 동안 그녀의 드레스를 매만지던 이든이 결국 클로에를 향해 물었다.

    “이거 찢으면 도망갈 건가요?”

    장난기 어린 이든의 물음에 클로에는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었다. 적어도 지금 허둥거리는 게 그녀 하나만은 아닌 것 같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이든 록스턴이 아니었더라도 그녀는 지금과 같았을까.

    몸을 일으킨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제 등 뒤를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매듭 하나를 죽 잡아당기자 그녀의 허리를 조이던 드레스가 헐거워지며 힘을 잃고 허리 아래로 허물처럼 흘러내렸다.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파르르 떨리더니 한차례 크게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매듭을 마저 풀어낸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려 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런 말이 없는 이든의 모습에 클로에는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요.”

    클로에의 목소리에 이든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의 귓바퀴가 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온몸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채로 스스로 옷을 벗는 클로에의 모습은 그의 취향을 직격하고도 남을 만큼 음심을 부추겼다.

    “예뻐요.”

    이든의 말에 클로에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입만 뻐끔거리다 고개를 돌려 버리는 클로에를 보고는 이든이 웃었다.

    “예쁘다고, 당신.”

    이든은 천천히 셔츠를 끌렀다. 투둑, 단추 풀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의 옷이 침대 아래로 떨어지자 클로에가 몸을 한차례 떨었다.

    “무서워요?”

    무섭다. 사실은 지금이라도 침실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의 어미는 제 아비의 아래 깔려서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 소리는 선연히 그녀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하지만 진심을 내뱉을 순 없었다.

    대답이 없는 클로에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은 채 번쩍 들어 올린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어떡해요, 오늘은 안 봐줄 건데.”

    클로에가 뭐라 할 틈도 없이 그녀의 허리에 걸쳐져 있던 드레스가 종아리를 지나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가볍게 그녀의 몸에서 드레스를 벗겨 낸 이든은 그녀를 제 무릎 위에 앉히고는 머리에 걸려 있던 장식들도 빼냈다. 그녀의 결 좋은 머리카락들이 폭포처럼 그의 눈앞에 쏟아졌다.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그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전처럼 무섭다고 도망가도 안 봐줄 거예요.”

    “안 도망갈 거라고 했잖아요.”

    “기특하기도 하지.”

    어린애를 대하듯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클로에가 불만스럽게 머리를 흔들자 그가 키득거리며 그녀의 입술에 잘게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을 피해 클로에가 고개를 틀자 이든은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입맞춤이 깊어졌다. 말캉한 혀가 거침없이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와 깊숙이 탐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숨도 못 쉬고 그의 어깨만 붙잡고 있던 클로에가 숨통을 튼 건, 그의 손이 말캉한 그녀의 가슴을 쥐고, 정점을 훑었을 때였다.

    “흣!”

    화들짝 놀란 클로에가 이든의 어깨를 밀어냈다. 봐주지 않을 거라며 겁을 주었던 것과 달리 이든은 그녀의 손길에 순순히 몸을 떼어 냈다.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그의 배려는 고마운 동시에 클로에의 불안을 싹틔웠다.

    그녀의 반응을 살피듯 빤히 내려다보는 이든의 눈길에,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거기까지가 최선이었다. 차마 눈을 뜨고 그의 반응을 살필 용기는 없었다.

    그에게서 어딘가 불만스러운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겁에 질린 클로에가 슬며시 몸을 떼어 내려 하자 그가 클로에의 뒷목을 붙잡은 채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놀라서 번쩍 눈을 뜬 클로에는 코앞에서 마주친 암청색 눈동자에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눈동자에 피어올랐던 것은 갈무리되지 않은 사내의 정염이었다.

    “눈 떠요.”

    이든이 입술을 떼고 나직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클로에가 타액이 묻은 입술에서 서늘함을 느낄 즈음, 그가 다시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맞춤했다. 미처 해소되지 못한 욕구의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계속 눈 감고 있을 거예요?”

    갈등이라도 하는지 파르르 떨리고 있는 클로에의 눈꺼풀을 발견한 이든은 작게 웃으며 그녀의 눈가에도 입을 맞췄다.

    여린 살에 타인의 살이 닿자 반사적으로 눈가를 움찔거린 클로에가 눈을 반짝 떴다. 그리고 이든과 눈이 마주치자 곧장 눈을 내리깔았다.

    부끄러움보다는 미약한 두려움이 느껴지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평생을 가지고 있던 남자에 대한 거북함이 한순간에 사라질 리 없었다. 이든도 그것을 이해했다.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클로에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이든은 그녀의 목 언저리에 입술을 묻었다.

    목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봉긋한 둔덕으로. 이든은 완벽한 저자세로 느릿한 애무를 했다. 다른 것은 다 제쳐 두고 오직 클로에의 기분만을 우선순위에 둔 행위였다.

    피부에 그의 혀가 닿을 때마다 클로에는 이불자락을 그러쥐며 허리를 비틀었다. 아랫배의 어딘가가 꾹 조이고, 발가락이 곱아드는 감각이었다. 생소한 감각에 도망치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 응…….”

    점점 아래로, 그녀조차 제대로 만져 본 적 없는 곳으로 이든의 머리가 내려가자 클로에는 다급히 그의 머리칼을 그러쥐었다. 결 좋은 그의 검은 머리칼이 그녀의 손가락에 얽혀 들었다.

    “그, 그만해요. 그거…….”

    클로에의 말캉한 허벅지를 붙잡은 이든이 고개를 들고는 보란 듯이 그녀의 허벅지에 입을 맞췄다.

    촉, 말캉한 살과 점막이 맞닿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도발에 가까운 그의 애무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클로에가 그의 머리카락만 붙잡은 채 바르르 떨자 그는 히죽 웃었다.

    그의 웃음기 어린 얼굴을 본 클로에가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려 하자 그는 그녀의 종아리를 제 어깨 위에 걸치고는 곧장 그녀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아, 앗!”

    말캉한 살덩이가 입구를 배회하는 감각이 선연했다.

    “그, 그만, 흐읏, 아!”

    이든의 어깨 위에 걸쳐져 있는 클로에의 종아리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평소 그랬던 것처럼 절정이 오려하자 클로에는 몸을 뒤로 빼려했다. 하지만 이든은 평소와 달리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아예 그녀의 허벅지를 손으로 감싸고는 그녀를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들었다.

    “아흑!”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휘며 크게 들썩였다. 절정이었다.

    처음으로 온전한 절정에 치달은 클로에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바들바들 떨며 거칠게 숨만 몰아쉬었다.

    이든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클로에의 한쪽 다리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든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두 눈을 가린 손을 풀지 못 하던 클로에는 제 손목을 감싸는 온기에 움찔거렸다.

    “가리지 마요.”

    힘을 주며 버티는 클로에의 손목 안쪽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지르며 이든은 기어코 그녀의 손을 치워 냈다. 쾌감에 흐려진 눈동자와 상기된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인내심을 한없이 얄팍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열과 쾌감에 달뜬 숨을 고르듯 클로에의 흉부가 크게 한 번 오르내렸다.

    “실망… 할 거예요.”

    신경을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면 지나쳤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그 작은 목소리마저 들쑥날쑥한 숨결 때문에 엉망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예상외의 말에 이든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실망?”

    “만족스럽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 만약에, 당신이 기대했던 게 있다면요.”

    “그럴 일은 없어요.”

    설마 그런 것을 걱정하고 있었던 건가.

    그녀를 둘러싼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이든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의 과거를 아는 마당에 그런 소문을 믿을 리 없지 않은가.

    “이제 와서 그런 걸 걱정했어요?”

    “처, 처음이고, 익숙하지도 않고…….”

    더듬거리며 말하는 클로에의 볼을 부드럽게 문지른 그가 말했다.

    “다정하게 안을게요, 그럼.”

    하지만 클로에는 그가 거칠게 굴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 게 아니라!”

    “저기.”

    클로에의 말을 끊고 이든이 조금 탁한 숨을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뜨겁고 단단한 것이 그녀의 허벅지에 닿았다.

    “나 이제 좀 한계인데.”

    무심결에 고개를 내렸던 클로에가 황급히 눈을 돌렸다. 불룩해진 그의 바지 앞섬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닿고 있었다.

    “들어가고 싶어요.”

    “…….”

    클로에에게서 대답이 없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넣고 싶다고요, 당신 안에.”

    노골적인 그의 표현에 클로에가 얼결에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알고 있던 그는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고, 그나마 하는 말도 정은 없지만 나름대로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이렇게 난잡한 이야기를 하는 이든을 클로에는 몰랐다.

    어쩌다 그의 입을 틀어막기는 했는데 언제 떼야 할지 때를 놓친 클로에가 엉거주춤 손을 내리려 할 때였다.

    그의 눈꼬리가 요사스럽게 휘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바닥에 말랑하고 축축한 게 닿았다.

    기겁한 클로에가 황급히 손을 뒤로 빼자 그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러다 그녀의 목 언저리에 얼굴을 묻은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 진짜 좀 봐줘요. 못 참겠어.”

    그녀가 그동안 무서워했던 거대한 남자가 그녀에게 애원을 하듯 말하고 있었다. 마치 그의 모든 것이 그녀의 손에 달린 사람처럼.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다. 그녀가 뇌리에 각인된 어른 남자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생물이었는데.

    그에게 어떻게 말을 해 줘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클로에는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든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그는 재차 그녀의 의중을 확인하듯 코앞에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고, 클로에 역시 고집스럽게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이든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오더니 그의 입술이 클로에의 입술을 덮었다. 마치 그녀의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듯 능란하고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그의 의도대로 클로에는 그의 입맞춤조차 따라가기 버거워했고, 그가 바지 버클을 풀고 있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그의 목에만 매달려 있던 클로에는 제 다리 사이에 닿는 무언가에 움찔거렸다. 습관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그의 가로막혀 도리어 허벅지로 그의 허리만 죄는 꼴이었다.

    그가 그녀에게서 고개를 들어 올리고 긴장으로 단단해진 그녀의 아랫배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달래듯 쓸었다. 그녀의 납작한 배를 선회하던 손이 그대로 내려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 닿았다.

    “흐, 흐읏…….”

    단단한 손가락이 안으로 파고드는 생경한 느낌에 클로에는 미약하게 흐느끼며 그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달렸다.

    질척하게 젖어 있는 그녀의 내벽이 그의 손가락을 틈 없이 죄었다. 그녀의 안은 긴장하고 있는지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힘 빼요. 아플지도 몰라요.”

    그의 요청에 클로에는 고개를 흔들며 그의 어깨에 볼을 비볐다. 그녀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애를 쓰는 클로에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쉰 이든은 천천히 그녀의 속에 있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흐응, 아, 앗-.”

    그녀가 반응하는 곳을 집요하게 긁어내리자 클로에가 움찔움찔 떨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조금만 참아 봐요.”

    “모, 못 참겠…….”

    그녀의 대답에 그가 묘한 얼굴을 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끙끙거리기만 하던 클로에는 그의 그런 얼굴을 미처 보지 못했다.

    “못 참겠어요?”

    뭘 못 참겠다는 것인지 클로에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의 대답이 이든의 무언가를 건드렸고, 그의 손길이 더욱 집요해졌다는 것이었다.

    “아, 하아, 앗! 자, 잠깐만……!”

    또다시 덮쳐오듯 밀려오는 쾌감에 클로에가 황급히 제 다리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그의 팔을 밀어내려 했다. 다른 손으로 클로에의 손을 가볍게 포박한 그는 손가락을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하악!”

    그녀의 허리가 휘고 안쪽은 반복적인 수축을 하며 그의 손가락을 죄었다. 이든이 그녀의 안에서 손가락을 빼내자 그의 손을 따라 미끈한 애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이든의 눈가가 흥분으로 붉어졌다.

    이든은 절로 탁해지는 숨을 애써 가다듬고 아플 정도로 발기한 제 신체의 선단을 그녀의 입구에 맞추었다.

    이미 눅진하게 젖어 있는 그녀의 비부에 닿자, 삽입하기도 전에 사정의 욕구가 치밀었다.

    제 손끝만 닿아도 겁에 질려 떨던 여인이, 지금은 제 아래서 쾌감에 흐려진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클로에의 불그스름한 눈가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이든이 하체에 힘을 실었다. 비좁은 입구가 벌어지며 빡빡하게 그의 성기를 삼켰다.

    “아, 아응… 흐-.”

    제 질벽이 한계치까지 벌어지는 고통에 클로에는 제 머리 양 옆을 짚고 있는 이든의 팔뚝을 붙잡았다.

    “아, 아파… 요.”

    이든이 삽입을 멈춘 채 클로에를 내려다보았다. 하얗게 질린 클로에의 낯에 이든은 손으로 달래듯 그녀의 볼을 쓸었다.

    팔로 그의 어깨를 마구 치던 클로에는 자신 만큼이나 힘겨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이든의 얼굴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타인이 그녀를 위해 저렇게 애쓸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든은 손을 뻗어 클로에의 눈가에 매달려 있는 눈물을 훔치고 커다란 손으로 볼을 감쌌다.

    열기가 느껴지는 말랑한 볼을 매만지던 이든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를 보고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던 클로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슬며시 다시 눈을 떴다. 그가 그녀의 코앞에 그대로 멈춰선 채였다.

    클로에는 황급히 변명했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서 그래요.”

    클로에의 말에 안심한 듯, 혹은 탁해지려는 숨을 갈무리하려는 듯 그의 입에서 나직하고 느릿한 숨이 흘러나왔다.

    그가 고개를 숙여 클로에의 얼굴에 자잘한 입맞춤을 남겼다. 눈물이 매달려 있던 눈가에도, 볼에도, 입술에도. 너무 다정한 몸짓이라 그를 피해 눈을 질끈 감았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러는 동안 그가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점점 더 깊은 곳까지 그가 닿고 있었다.

    생소한 고통, 그리고 기묘한 열기에 클로에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것을 아픔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이든은 그녀의 봉긋한 가슴과 허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어떻게든 그녀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애무였지만, 그의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클로에는 아랫배가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제 안에 들어찬 그가 더 적나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걸 느낀 건 비단 클로에 본인만은 아니었는지 이든이 미간을 좁혔다. 눅진하게 젖어 있는 따뜻한 그녀의 질벽이 사정없이 그를 조였다. 조금만 이성을 놓아도 거칠게 허리를 흔들며 그녀를 탐할 것 같았다.

    느릿한 왕복을 하던 그의 하체가 점점 더 그녀의 깊은 곳을 탐하다, 이내 뿌리 끝까지 그녀의 안에 삼켜졌다.

    “흐읏!”

    그러다 어느 예민한 부분에 닿았던 모양인지 클로에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흘러나왔다. 고통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생경한 감각에 놀란 음성이었다. 일순 질벽이 강하게 수축하며 그를 죄었다.

    “클로에.”

    으르렁거림에 가까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부른 그가 그녀의 골반을 붙잡고 천천히 허릿짓의 속도를 높였다.

    “아, 아응, 흐읏…….”

    그의 움직임이 조금씩 빨라질 때마다 클로에의 헐떡임도 커져갔다.

    “아, 아앙, 하앗!”

    이든은 그녀의 허리를 붙잡은 채 움직였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릴 정도로 격한 움직임이었다. 그의 성기 끝이 내벽 깊숙한 곳, 어딘가의 예민한 곳을 건드릴 때마다 클로에는 자지러지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클로에는 자신이 그런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지러웠고, 조금은 무서운, 그런 감각이었다.

    아랫배가 조이는 감각과 함께 질벽이 강한 수축을 해 댔다. 절정이 찾아오려 했다. 클로에는 발로 침대를 긁어 대며 습관적으로 도망치려 했다.

    이든은 그녀가 도망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려 골반을 강하게 틀어잡고는 그대로 하체를 그녀의 안에 묻었다.

    “아, 아… 앗!”

    클로에의 높은 비명과 함께 이든도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이든은 그녀의 골반을 붙잡은 채로 제 정을 쏟아 냈다. 낙인의 욕구로 점철된 파정이었다.

    이든은 자신과 이어진 채로 정사에 여운에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는 클로에를 내려다보았다.

    제 아비처럼 되는 것을 두려워하던 여인이었다. 하지만 어떨는지. 도망치는 것은 그녀였고, 붙잡은 쪽은 그였다.

    이든은 오늘의 정사로 확신했다. 자신이 그녀를 놓아줄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걸.

    * * *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것을 느끼며 클로에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일어났어요?”

    옆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클로에가 화들짝 놀라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온몸이 근육통으로 비명을 질러 댔다.

    다리 사이, 깊숙한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얼얼함에 지난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린 클로에는 얼굴을 화르륵 붉혔다.

    삐거덕거리듯 움직이는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매만졌다. 그의 손이 척추 마디마디를 꾹꾹 눌렀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클로에가 슬금슬금 무릎걸음으로 그의 손길을 피하자 이든이 양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턱 붙잡았다.

    “안 도망갈 거라면서요. 이제 와서 도망가요?”

    “도, 도망가는 게 아니라…….”

    “지금도 도망가고 있는데?”

    그의 손에 허리를 붙잡힌 채 꾸물거리던 클로에는 제 등 뒤로 느껴지는 집요한 시선에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눈으로 보이는 곳만 해도 울긋불긋 성한 곳이 없었다. 지난 밤 그의 집요한 애무 탓에 생긴 흔적들이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내와의 교합은 끔찍한 일만은 아니었다. 이든 록스턴은 다정했고, 그녀는 그와의 사이에서 완벽한 일체감을 느꼈다. 남녀 간의 정사가 그런 행위라는 것을 미처 몰랐었다.

    어째서 이렇게 가슴 벅차고 다정한 행위를 제 아비라던 작자는 그렇게밖에 이용하지 못했던 것일까.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클로에는 등 뒤로 닿는 말캉한 느낌에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뭐, 뭐하는 거예요?”

    “나만 이렇게 애가 타는 건가 싶어서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척추를 따라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있던 이든의 손은 어느새 슬금슬금 그녀의 가슴께로 올라가고 있었다.

    “자, 잠깐만……!”

    클로에가 항변했지만 이든은 그것을 무시했다. 그의 손이 말캉한 가슴의 정점을 지분거렸다. 지난밤 그가 하도 물고 빤 탓에 조금 얼얼할 정도였다.

    제 가슴을 덮고 있는 이든의 손등을 클로에가 붙잡았다. 붙잡아 내리려 했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말캉한 입술과 혀의 감촉에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응, 흐읏!”

    클로에의 하체를 가리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렸다. 가엽게도 무릎을 침대에 대고 파르르 떨리고 있는 그녀의 허벅지가 이든의 시선에 닿았다.

    이든은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사내의 정과 함께 핏자국이 그녀의 다리 사이에 말라붙어 있었다.

    지난 밤 창백해진 얼굴로 그의 아래에서 바들바들 떨던 그녀가 떠올랐다.

    처음인 그녀를 상대로 너무 이성을 잃었다. 마지막엔 제 양껏 그녀를 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이든은 그녀의 몸에서 손을 뗐다.

    붉어진 얼굴로 그를 의아하게 돌아보는 클로에의 눈가에 짧게 입을 맞춘 이든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녀를 부를게요. 불편한 거 있으면 바로 말해요.”

    조금 전의 농밀해진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담백하기 그지없는 이든의 태도에 클로에는 가슴이 덜컥였다.

    힘들지도 모르는 아내를 위한 이든의 배려라는 것을 알아차리기에 클로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박한 사람이었다.

    방금 자신이 뭔가를 실수한 것을 아닐까 고민하던 클로에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 빤히 느껴지는 이든의 시선에 다급히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정사의 흔적이 적나라한 침실의 흔적을 시녀들이 덤덤한 얼굴로 치우는 것을 보고 바로 후회했지만 말이다.

    * * *

    가이사의 부름에 이든은 그의 서재로 찾아갔다. 아무래도 어제 고트 백작저의 파티에 다녀온 클로에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이사는 하룻밤 사이에 얼굴이 활짝 핀 제 아들을 보고 혀를 찼다.

    기회주의자가 따로 없지 않은가. 자신을 빼다 박았다고 한다면야 할 말은 없지만.

    “어제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돌아왔더구나. 알리사 성격에 격식도 없이 손님맞이를 일찍 파했을 리도 없고.”

    보나마나 제 여동생의 과한 간섭이 문제일 게 뻔했기에, 가이사는 백작저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것인지 돌려 물었다.

    “고모님이 조금 과한 욕심을 부렸을 뿐입니다.”

    이든의 대답에 가이사는 눈두덩을 문지르며 작게 혀를 찼다.

    “알리사한테는 내가 따로 말을 해 두마.”

    자세한 사정을 물을 생각도 않고 알리사를 나무라려는 가이사의 모습을 보고 이든이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무엇을 말이냐.”

    “후작가, 클로에에 대한 이야기요.”

    가이사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내가 내 집안에 들일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까.”

    이든은 가이사의 의중을 살피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이든의 시선에 가이사가 덧붙였다.

    “다 큰 아들놈 결혼 가지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다. 린다 후작가 정도면 나쁘지 않았고.”

    그저 안심이 될 때까지 지켜본다던 게, 벌써 일 년이었다.

    대답이 없는 이든을 가만히 보던 가이사가 말을 이었다.

    “약한 짐승이 요란하게 가시를 세우는 법이지.”

    가시를 세운 작은 짐승을 위협해 보았자 돌아오는 것은 더 날 선 가시뿐이다. 스스로 경계를 풀기를 바랄 수밖에.

    아무래도 그날이 머지않아 올 모양이라고, 가이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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