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다시, 북부
북부, 록스턴 공작가의 대저택에 마차 한 대가 멈추어 섰다.
먼저 마차에서 내려 클로에를 향해 손을 내미는 이든의 모습에 북부 록스턴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눈을 의심했다.
“아버지는?”
다른 사용인들과 달리 능숙하게 표정 관리를 하는 나이가 지긋한 노신사는 공작가의 유능한 집사 로더릭이었다. 그는 이든의 물음에 여상히 대답했다.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는 앞장서 그들을 안내했다.
집사를 따라 서재로 올라가자 이든의 아버지이자, 선대 공작 가이사 록스턴이 무릎 위에 책을 펼친 채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흘긋 클로에와 이든을 보고는 책을 덮고 겹쳐 있던 다리를 풀었다.
눈가의 주름을 빼면 이든 록스턴과 판박이인 사람이었다. 나긋한 태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내리누르는 위압감도. 이든이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는 뻔했다.
“그래. 나들이가 제법 즐거웠던 모양이구나. 둘 다 얼굴이 편 걸 보니.”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질 뻔했다. 얼굴이 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 클로에를 지그시 바라보던 가이사가 축객령을 내렸다.
“얼굴 봤으니 됐다.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 피곤할 텐데.”
그저 오랜 나들이를 갔다 온 아들 부부에게 말하듯, 가이사에게서 생각보다 여상한 대답이 들려왔다.
클로에는 이번만큼은 가이사가 자신을 나무랄 줄 알았다. 그 바쁘다는 이든 록스턴을 제도까지 오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가이사가 지나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서 오히려 더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쨌건 두 사람이 가이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려던 참이었다.
“클로에.”
이든과 함께 방을 나서려던 클로에를 가이사가 불렀다. 클로에의 뒤로 가이사의 말이 내리꽂혔다.
“세 달은 너무 길었다.”
이든 록스턴이 제도로 내려와 클로에에게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이었다.
이든 역시 그것을 느낀 모양인지 어딘가 머쓱한 얼굴로 클로에를 흘긋 내려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클로에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가이사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무심한 태도였지만 그 기저에 깔린 게 걱정이었다는 것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클로에는 어딘가 가슴 언저리가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불쾌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생소한 것이었다.
그녀의 부모라는 사람들은 클로에에게 저런 식으로 말해 준 적 없었다. 오히려 얼른 사라져 버리라며, 폭언으로 매도를 했다.
곱씹을 가치가 없는 기억이라고 생각하며 멍하니 클로에가 가이사의 서재에서 나올 때였다. 집사 로더릭이 그녀와 이든에게 다가왔다.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장시간 마차를 타고 온 주인 부부의 여독을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늘 하루 먹은 것이라고는 마차에 오르기 전 마셨던 차 한 잔이 전부였지만 식욕이 없던 클로에는 조심스레 식사를 물리려 했다. 하지만 클로에는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먹기 편한 걸로, 침실로 가져와.”
“침실이라 하시면…….”
로더릭은 클로에와 이든, 둘 중의 누구 침실을 말하는지 알 수 없어 말끝을 흐렸다. 그런 로더릭의 동요를 모르는 척 이든이 클로에만을 보며 물었다.
“내 침실로 할래요, 당신 침실로 할래요?”
“식사할 생각 없…….”
“부부 침실로 가져와.”
클로에가 거절하기도 전, 이든은 로더릭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두 사람의 결혼식 날, 형식적이었던 첫날밤 이후로 부부 침실은 있으나 마나 한 곳이었는데, 그곳으로 식사를 가져오라니.
로더릭은 꽤 놀랐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제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궁금해지는 상황이었으나 충실한 집사는 반문하지 않았다.
클로에는 제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결정에 이든에게 불만을 표했다.
“안 먹는다고 했잖아요.”
“오늘 먹은 것도 없잖아요. 억지로 먹일 생각은 없으니까 일단 들기라도 해요.”
하지만 이든의 의지는 굳건했다.
의견이 다른 주인 부부의 다툼은 결국 아랫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뿐이라는 걸 클로에도 알고 있다. 미동도 없이 두 사람의 앞에 공손하게 서 있는 로더릭을 흘긋 바라본 클로에는 마지못해 알겠다는 대답을 했다.
로더릭은 클로에와 이든의 다툼을 신기한 듯 흘긋거리는 하인들을 향해 두어 번 손뼉을 치고는 능숙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제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변화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 * *
클로에는 의외로 편식이 심하다. 은근슬쩍 채소를 걸러 내고 있는 클로에를 보며 이든은 그렇게 생각했다. 또 그녀의 새로운 모습 하나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클로에 록스턴은 당근을 싫어한다. 이든은 머릿속으로 그것을 빠르게 되뇌었다. 어떤 계약을 체결할 때보다도 머리가 바쁘게 그것을 외워 댔다.
돌연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이든의 모습에 클로에뿐만 아니라 그녀의 주변에서 식사 시중을 들던 사용인들까지 그를 바라보았다. 오직 로더릭만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꼿꼿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이든 록스턴은 좀처럼 웃는 법이 없는 인사였다. 가혹한 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너그러운 주인도 아니었다.
그런 남자가 당근을 걸러 내고 있는 아내를 보며 실없이 웃고 있었다. 사실 이든은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클로에는 계속해서 느껴지는 그의 시선이 거슬려 입을 열었다.
“그만 쳐다보고 식사나 하세요.”
클로에의 타박에 이든은 포크로 음식을 찍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늉에 그칠 뿐이었다. 이든은 그런 다음 클로에를 보면서 물었다.
“물어볼 거 있는데.”
“뭔데요?”
클로에는 입에 있던 음식물을 꿀꺽 삼키고 그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이든이 그 모습을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오늘도 같이 자는 건가 싶어서.”
클로에의 입에서 사레들린 듯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자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사용인들이 보였다.
뜬금없는 말에 클로에는 씹듯이 말을 뱉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제도에 있을 때는 우리 계속 같이 잤잖아요.”
말 그대로 동침일 뿐이었다. 클로에와 이든 사이에는 어떠한 일도 없었다. 있었다고 한다면 그녀가 이성을 잃고 그의 뺨을 후려친 일 정도일까.
그런데 그걸 의미심장하게 말하다니. 사용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클로에는 그것이 신경 쓰였다.
“객실 침대에서 잔다는 걸 말린 건 그쪽이에요. 이곳에 내 침실이 따로 있는데 뭐 하러 같은 침실을 써요. 피차 불편하게.”
“난 안 불편하던데.”
“제가 불편해요. 또 뺨이라도 맞고 싶으세요?”
클로에의 말에 이든은 웃음을 터뜨렸고, 주변의 사용인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뭐, 그게 대가라면 기꺼이?”
“미쳤어요?”
“이렇게라도 안 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 같아서.”
포크를 들어 클로에가 골라 낸 채소들을 콕 집은 이든이 그것을 그녀의 입가에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나는 다시 바빠질 거고, 당신 얼굴이라도 보려면 침실이라도 같이 써야지. 자, 아 해요.”
얼결에 입술을 달싹인 클로에의 입으로 물컹한 채소가 들어왔다.
“싫어요?”
입 속으로 들어온 채소를 묻는 것인지, 혹은 같은 침실을 쓰는 것을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시, 싫어요.”
클로에의 대답에 이든이 빙긋 웃었다.
“유감이네요. 내 결심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을 마친 이든은 로더릭을 불러 이것저것 지시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클로에는 입 안을 굴러다니는 물컹한 채소를 씹었다.
놀랍게도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맛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 * *
목욕을 끝낸 클로에가 침실로 들어서자 침대 헤드에 기대 서류를 읽고 있는 이든이 보였다. 그걸 보며 클로에는 앞으로도 이든과 침실을 같이 쓰게 된다면 앞으로는 더 목욕을 서두르는 게 좋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그가 먼저 있는 침대에 그녀가 올라가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용기가 필요하다고나 할까.
어쨌든 두 사람이 같은 침실을 쓰게 된 건 전적으로 이든의 고집 때문이었다. 눈치 빠른 로더릭과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그것을 거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가가자 이든은 슬며시 얼굴을 찌푸렸다.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였다. 마치 역한 냄새라도 맡은 사람처럼 말이다.
방금 목욕을 마치고 온 참이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지만 클로에는 이든에게 되묻고 말았다.
“나한테서 무슨 냄새나요?”
“아뇨. 내가 아주 섣부르고 위험한 결정을 내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슨 뜻이에요?”
이든은 이내 얼굴에서 손을 내린 채 여상한 얼굴로 웃었다.
“내가 내 무덤을 팠다는 말.”
클로에는 이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팔을 들어 제 살에서 올라오는 향기를 킁킁거리며 맡았다.
평소와 달리 어딘가 들떠 있던 시녀들이 신나서 부어 댄 향유 탓에 냄새는커녕 진한 향기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향유를 써야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클로에는 스스로의 생각에 놀라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이래서야 마치 그와의 동침을 기대하고 있던 사람 같지 않은가.
클로에의 행동을 지켜보던 이든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좋은 냄새 나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제야 머쓱한 듯 코에서 팔을 뗀 클로에가 고물고물 움직여 이불 속에 파고들었다.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은 듯 등을 보인 채 눕는 클로에를 내려다보던 이든도 그녀의 옆에 누웠다.
한참을 뒤척거리던 클로에에게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뒤척이는 시간이 짧았다. 길었던 마차 여행이 고됐던 모양이다.
그가 보기에 클로에는 퍽 허약한 구석이 있었다. 깨작거리며 먹는 것만 봐도 뻔한 이야기였다.
내일부터는 조리장에게 채소를 걸러 낼 수 없을 정도로 잘게 자르라는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든은 멍하니 클로에의 작은 등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작은데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에드윈 린다에게 클로에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듣고 나서야 자신이 손만 올려도 깜짝깜짝 놀라던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어렸을 때면 지금보다도 더 작고 약했을 텐데.
이든은 손끝으로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얼마나 말랐는지 네글리제 너머로 도드라진 뼈가 하나하나 만져질 정도였다.
그때 클로에가 끄응, 소리를 내며 그를 향해 몸을 틀었다. 작은 온기가 폭 이든을 향해 파고들었다. 조금 전부터 그를 은근하게 괴롭히던 향유의 향기가 그를 훅 덮쳤다.
“…….”
제도에 있는 내내 당했던 일이다. 평소에는 조용하기 짝이 없는 클로에에게는 의외로 잠버릇이 있었다. 그게 또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어 이든은 클로에가 불편하지 않도록 자세를 바꿨다.
고른 숨을 내뱉으며 잘 자던 클로에가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얼굴은 울 것처럼 찡그린 채였다. 그런 그녀의 입이 달싹였다.
엄마-, 하고 그녀가 중얼거렸다.
에드윈 린다에게 듣기로 선대 후작 부인은 가여운 여인이었지만, 어렸던 클로에에게는 모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클로에는 어째서 그녀를 이렇게 애타게 찾는 걸까.
이든은 제 품속에 파고드는 클로에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며 달래듯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점차 클로에의 숨소리가 다시 고르게 변했다.
어린 아이가 어리광을 부리듯 가슴팍에 볼을 비비적거리는 그녀의 행동에 이든은 조금 전보다 탁한 숨을 내뱉었다.
저 혼자 긴 밤이 되리라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주인 부부를 깨우기 위해 조용히 침실로 들어온 로더릭과 시녀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클로에가 이든의 가슴팍 위에 고개를 올린 채 잠들어 있었고, 이든은 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린 채로 로더릭과 시녀를 향해 나가 있으라는 듯 조용히 손짓했다. 그마저도 클로에가 뒤척거리니 바로 멈추었다.
공작저에서 볼 일이 없는 생소한 풍경이었다. 로더릭은 얼이 빠져 있는 시녀를 데리고 클로에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침실을 나섰다.
아무래도 공작저에 봄이 찾아오려는 모양이었다.
* * *
공작저에 봄이 찾아올 거라는 로더릭의 생각과 달리 최근 들어 이든의 심기는 부쩍 나빴다. 봄은커녕 겨울, 그것도 혹독한 겨울이 공작저에 찾아왔다.
이유는 확실했다.
“어디 갑니까?”
“걱정 말아요. 또 제도에 멋대로 내려가는 건 아니니까.”
이런 식으로 무심히 말하고는 따르는 기사 하나 없이 공작저를 나서는 클로에 때문이었다.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클로에는 북부로 돌아온 이후 매일 이 시간 즈음이면 꼬박꼬박 공작저를 나섰다. 그것도 평소와 달리 수수한 옷차림을 한 채로 말이다.
로더릭의 말에 따르면 클로에는 제도로 내려가기 전에도 가끔 저런 차림으로 공작저를 나서곤 했단다. 그는 모르고 있던 일이었다.
그녀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불쾌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든은 공작저를 떠나는 단출한 마차를 바라보았다. 그 마차는 공작가의 신분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을 때 사용하는 마차였다.
매일 같은 시간대에 만나는,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은 상대.
알지도 못하는 상대를 떠올리며 이든은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를 규칙적으로 두들겼다.
“알아볼까요? 마부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아낼 수 있을 텐데요.”
레이가 이든에게 물었다. 클로에에 관한 일이라면 그게 뭐든지 질색하던 인사가 그렇게 물으니 어째서인지 이든은 기분이 더욱 저조해졌다.
레이 포트먼, 그의 충직한 부하가 클로에의 비밀을 알고 있다. 린다 후작을 제외하고는 오직 그밖에 모르던 일이었는데.
황태자에게서 클로에를 보호하듯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레이의 모습은 이든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평소의 그라면 황태자보다도 클로에의 안위를 우선순위에 둘 리가 없었다.
그런 레이가 황태자 앞에서 클로에의 안위를 챙겼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잠시 레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든은 결국 고개를 돌렸다.
“됐어. 휴일에 일 시킨다고 불평할 때는 언제고.”
오늘은 레이 포트먼의 몇 없는 휴일 중 하루였다. 그는 달에 한 번은 무슨 일이 있어도 휴가를 내곤 했다.
이든의 거절에 레이는 서둘러 공작저를 나섰다.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치는 수밖에. 남녀의 치정 문제에 끼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그것도 클로에 록스턴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낸 레이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가 금쪽같은 휴일에 향하는 곳은 딱 세 군데로 정해져있다. 제과점과 포목점, 그리고 고아원이다.
세 군데 모두 레이 포트먼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들이었으나, 어쨌든 모두 들르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하지만 제과점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어쩌죠? 방금 어떤 아가씨가 쿠키를 다 사가셨어요. 다시 구우려면 시간이 꽤 걸리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레이는 아이들의 간식거리를 포기하고 포목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머, 방금 전에 어떤 아가씨가 거의 다 주문해 가셨는데. 모레 오후쯤은 돼서야 발주한 천이 다시 올 거예요.”
남아 있는 천은 옷감용이 아니거나 고아원에서 취급하기에는 지나치게 고급인 것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도대체 그 ‘어떤 아가씨’가 누구기에 그가 필요한 것만 쏙쏙 사 가는지. 두 아가씨가 동일 인물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분명 기분 탓일 거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와 퍽 취향이 겹치는 까탈스러운 인사가 아닌가.
그가 들렀던 두 가게는 질적으로 그가 아이들을 위해 고르고 고른 최적의 가게들이었다.
그가 매달 고아원으로 향하는 이유는 그가 공작가의 도움을 받아 고아원에 후원을 하기 때문이었다. 남들은 모르는 그의 은밀한 선행이었다. 이로 인해 공작가의 명성은 높아지고, 레이 또한 자기만족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빈손으로 마차에 오른 레이는 번화가를 벗어나 한산해지기 시작한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레이 포트먼은 계산적이고 가식적인 인간이다. 그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성격 덕에 가축만도 못했던 삶을 곳을 벗어나 이든 록스턴이라는 사람 옆에서 번듯하게 한 사람의 몫을 하며 살고 있으니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덜컹거리며 마차가 멈추어 섰다. 고아원에 도착한 것이다. 마부에게 원래 삯보다 넉넉한 돈을 쥐여 준 레이는 평소와 다른 고아원의 상태를 깨달았다. 고아원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조용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고아원이 소란스러웠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해사한 웃음소리. 그런 소리가 고아원을 채웠다.
그 소란의 중심을 향해 고개를 돌린 레이 포트먼은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가식적이고 계산적인 레이 포트먼보다 이곳에 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아이들 사이에서 웃고 있었다.
클로에 록스턴. 그녀였다.
* * *
“레이 오빠다!”
클로에의 주변에서 뛰어다니던 여자아이 한명이 레이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그 소리에 클로에의 시선 역시 아이를 따라 레이에게로 향했다.
“…….”
레이와 눈이 마주친 클로에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는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주춤주춤 멀어지기 시작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레이는 헛웃음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여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던 클로에가 슬며시 머리카락을 놓고는 코를 문질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바보 같은 짓거리였다.
“어, 어쩌다가 온 거예요. 어쩌다가.”
“어쩌다가, 이 먼 곳을요.”
이 고아원은 번화가와 한참을 떨어진 곳이었다. 주변에 있는 것이라고는 성당과 신도들이 운영하는 과수원뿐이었다.
클로에가 입고 있는 수수한 드레스에는 아이들이 묻혔을 게 뻔한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평소의 클로에 록스턴을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행색이었다.
주변에서 두 사람을 말똥말똥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아이들의 손에는 오늘 레이가 미처 사지 못한 쿠키가 들려 있었다. 레이 포트먼과 취향이 퍽 겹치는 까탈스러운 인사가 누구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그, 그럼 나는 이만…….”
클로에는 레이에게서 몸을 돌려 도망쳤다. 그러나 그것도 그녀에게 달려온 누군가로 인해 막히고 말았다.
“후원금만으로도 충분하다니까. 뭘 그렇게 잔뜩 사 오신 거예요.”
고아원의 원장, 로셰 버겐트가 클로에를 향해 다가오며 온기가 스민 잔소리를 줄줄 쏟아 냈다.
공작 부인인 클로에를 향해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로셰가 클로에의 정체를 모르든가, 아님 클로에가 그것을 용인하고 있든가. 둘 중 하나였다.
레이가 알고 있는 클로에는 제멋대로에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아이들하고 어울리거나, 허름한 고아원 원장의 무례를 참고 넘길 만한 인사가 절대로 아니었다.
황궁에서 한 번, 지금 고아원에서 또 한 번. 레이는 자꾸 클로에의 비밀을 하나씩 알게 되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것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로셰는 클로에의 앞에 서 있는 레이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포트먼 씨!”
레이는 로셰를 보고 반갑게 웃어 주었다. 저런 식으로 웃는 레이 포트먼이라니. 클로에는 그의 웃는 모습에 도리어 소름이 끼쳤다. 그녀가 알고 있는 레이는 무언가를 경멸하고 있거나, 무표정하거나. 둘 중 하나인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녀에게만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한 달 만이네요, 버겐트 씨.”
“내 정신 좀 봐. 오늘이 오시는 날이었다는 것도 잊고 있었네요.”
이미 면식이 있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클로에는 당황했다. 레이에게 고아원 따위 어쩌다 오게 된 거라고 잡아떼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머리를 굴리느라 말이 없는 클로에의 모습에 로셰는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소개도 안 하고 참. 클로에 양, 인사해요. 포트먼 씨는 록스턴 공작저에서 오신 분이에요.”
‘클로에 양.’
레이에게 그것은 생소하기 짝이 없는 호칭이었다. 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그녀가 공작 부인이 된 이후로는 아마 절대로 불릴 일이 없을 호칭이었다.
상황을 모르는 로셰는 빙글빙글 웃으며 소개를 이어갔다.
“공작가에서 정기적으로 고아원에 후원을 해 주시거든요.”
클로에는 모르는 일이었다. 알았다면 절대로 이곳으로 오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공작가의 비공식적 후원까지 클로에가 파악하고 있을 리 없었다.
클로에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셰는 레이에게 클로에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작년부터 고아원에 꼬박꼬박 찾아와서 기부도 하고 아이들도 돌보고 있어요. 얼마나 기특한 아가씨인지 몰라요.”
로셰의 말이 이어질수록 클로에의 눈동자가 로셰와 레이 사이를 바쁘게 움직였다. 당황한 티가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때 멀리서 들리는 아이 울음소리에 로셰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둘만 남자 레이가 클로에를 향해 물었다.
“어쩌다 온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쩌다 온 거 맞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작년부터 와서 꼬박꼬박 기부도 하시고, 아이들도 돌보신다고요. 그것도, 어쩌다가. 그런데 왜 공작가의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까요?”
레이의 눈에 클로에가 고개를 돌리고 슬쩍 입술을 무는 게 보였다.
클로에는 시선을 피하면서도 항변했다.
“내가 기부를 하든, 아이들을 돌보든 그게 포트먼 씨랑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죄라도 졌나요?”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숨기냐는 뜻입니다. 그 덕에 괜히 공작가에 이상한 소문만 돌지 않습니까.”
수수한 차림으로 일정한 시간마다 저택 밖을 나서는 클로에 덕에 공작저에는 그녀가 평민 남자를 만나고 다니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녀가 사실을 말했다면 그런 이상한 소문 따위는 돌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레이의 귀로 클로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멋대로 그렇게들 생각하는 걸 내가 무슨 수로 막아요.”
“그런 소문이 괜히 돕니까?”
그의 반론을 들은 클로에는 눈을 치켜떴다.
“내 탓이라는 거예요?”
“고아원에 가는 것뿐이라고 각하께 말하면 됐잖아요.”
클로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까부터 레이는 그녀를 나무라듯 말하고 있었다. 그게 기분이 나빴다.
“내가 왜 포트먼 씨에게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호위 기사라도 좀 데리고 다니시든가요.”
그의 말에 클로에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눈을 굴리는 클로에를 향해 레이가 말을 이었다.
“겁도 많으면서 왜 기사 한 명 안 데리고 다니십니까? 그러다 또 어떤 쓰레기한테 손목 잡히려고. 바들바들 떨었잖아요, 그때.”
레이의 지적에 클로에는 발끈했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황궁에서 그랬잖습니까!”
두 사람의 언성이 어느새 높아졌다. 어쩌다 보니 씩씩거리고 있는 두 사람에게 어느새 다가온 로셰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 두 사람 아는 사이셨나요?”
서로를 향해 쏘아붙이던 두 사람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골치가 아픈 듯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겠지만 이분은 록스턴 공작…….”
하지만 레이의 말이 완성되기도 전에 클로에가 황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
“공작가에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저도.”
레이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클로에는 그런 레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죠, 포트먼 씨?”
동조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흉흉한 눈빛이었다.
“…그랬나 보군요.”
할 말은 많았지만 레이는 꾹 눌러 삼켰다. 그때, 그의 소맷자락을 클로에가 손끝으로 잡아당겼다. 레이가 클로에를 돌아보았다.
“잠깐 얘기 좀 하죠, 포트먼 씨.”
“그러죠, 공작…….”
무심결에 레이가 정체를 밝히려 하자, 클로에의 날 선 눈빛이 그에게 쏟아졌다. 한숨을 삼킨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린다 양.”
그 후, 클로에는 로셰와 아이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레이를 끌고 가 당부했다.
“내가 누군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몰랐으면 해요.”
“그래도 공작가에는 말씀해 놓으십시오. 각하께서 걱정하고 계십니다.”
“싫어요.”
그럴 거면 이든 록스턴과 사생활을 간섭하지 말자는 조건 따위를 왜 걸었겠는가. 애초에 먼저 그 조건을 건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이든 록스턴이다.
그저 그런 약속 따위가 아니라 이 결혼의 전제 조건이고 계약이었다. 레이 포트먼은 모르겠지만 지금 클로에의 고집은 정당한 권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는 그런 상황을 전혀 몰랐기에 공작가의 심복이 할 수 있는 제안을 던졌다.
“호위라도 데리고 다니시든가요.”
그 말을 들은 클로에는 얼굴을 찌푸렸다.
“차라리 내가 누군지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 그래요?”
“은밀히 붙여 놓겠습니다.”
“나는 내가 여기 있는 걸 다른 사람이 아는 게 싫어요.”
적어도 납득할 만한 이유는 말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레이가 보기에 클로에의 고집은 어린아이들이 부리는 투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레이가 그녀에게 부당한 것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왜 싫다는 겁니까?”
“난 뭐 마음 편하게 있을 곳도 못 둬요?”
클로에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이 말이 제멋대로 사는 여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클로에 역시 원래 하려던 말은 아니었는지 아차 싶은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불편해서 공작저에는 못 붙어 있겠다, 호위도 싫다, 각하께는 말하지 않겠다. 뭐 어쩌자는 겁니까?”
“그 사람한테는 내가 적당히 말해 놓을게요. 포트먼 씨는 하던 대로 하세요.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나 싫어하잖아요?”
“싫어하는 게 아니라……!”
레이의 입이 탁 다물렸다. 그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린 채로 클로에를 바라보다가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클로에 록스턴이라는 여자는 그에게 있어 사고나 치고 다니는 공작가의 골치 아픈 마님이었다. 그런데 비밀리든 공식적이든 고아원에서 봉사를 하고 있었다는 건 박수라도 치고 싶을 정도로 반가운 일이었다. 이든 록스턴의 최측근으로서 그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클로에의 말대로 그녀를 모른 척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클로에의 이면을 그가 알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던 그 모습을, 스스로 상처를 헤집던 그 모습을 이미 봤는데, 어떻게 모른 척하란 말인가.
이든은 한숨을 내쉬며 클로에에게 제안하는 수밖에 없었다.
“달에 한 번으로 해요.”
“뭘요?”
“이곳에 오는 거요.”
그의 말에 클로에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왜요?”
“달에 한 번은 저도 와야 하거든요.”
어지간한 것은 다 무시할 수 있는 클로에였지만 지금 이 말은 거슬렸다. 클로에는 짜증 어린 태도로 레이를 쏘아붙였다.
“지금 나더러 당신이랑 이곳에 같이 오자는 거예요?”
“부인께서 치고 다니는 사고를 누가 수습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입을 꾹 다문 채 레이를 노려보던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제가 마음 편하게 있고 싶다는 말, 못 들으셨어요?”
“제게 인정을 기대하시는 겁니까?”
하, 클로에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내가 당신의 말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어요.”
“공작 부인으로서 명령을 하고 싶으시거든, 공작 부인의 모습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레이는 클로에의 말을 간단히 거부했다.
잠시 후, 레이의 얼굴에 사교용 미소가 떠올랐다. 그린 듯 매끄럽지만 서늘하기 짝이 없는 그런 미소.
“그러니 제게도 당신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답니다, 린다 양.”
* *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한지 흙 경단을 만들던 클로에의 손에서 흙이 그대로 뭉개졌다.
모래성을 쌓던 고아원의 아이가 클로에의 손에서 뭉개지고 있는 흙 경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녀에게 물었다.
“언니, 레이 오빠랑 싸웠어?”
레이 오빠. 클로에에게 있어 생소하기 짝이 없는 호칭이었다. 클로에는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러다 근처 벤치에 앉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레이와 눈이 마주치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상냥한 얼굴로 웃어주었다
“그런 거 아니야. 안 싸웠어.”
“나는 레이 오빠가 화내는 거 본 적 없는데.”
아이의 말과 달리 클로에가 본 레이 포트먼은 오히려 기분이 좋을 때가 드문 사람이었다. 부르르 떨며 고개를 흔들던 클로에는 제 앞에서 길게 지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언제 다가왔는지 지척에 서 있는 레이가 그녀를 아니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예요?”
“그야 린다 양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제 욕을 하시니.”
린다 양. 레이의 입에서 그 호칭이 나올 때마다 클로에는 쭈뼛 소름이 돋았다. 아니면 속으로 그를 향해 구시렁거리던 게 들켜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냥 이름으로 부르세요. 듣기 싫으니까. 아예 안 부르면 더 좋고요.”
“저도 그냥 레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안 부르시면 더 좋겠지만요.”
클로에의 손에 들려 있던 흙 경단이 또다시 사정없이 뭉개졌다.
결국 고아원에 오는 건 레이 포트먼을 동행 한 채 주에 한 번씩 오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가 이든에게 다 말하겠다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해 댔기 때문이다.
클로에도 클로에지만 레이에게도 분명 번거롭고 귀찮은 일일 게 뻔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그동안 자신이 가십과 사고를 몰고 다니긴 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클로에는 비뚤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분하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그녀가 아니라 레이였다.
레이에게서 고개를 돌린 클로에가 다시 아이들과의 흙 놀이에 열중했다.
그런 클로에를 바라보던 레이는 기가 찬 듯 웃었다.
애들보다 클로에가 더 신난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발치에는 이미 수십 개의 흙 경단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클로에 록스턴이 손이며 드레스며 흙을 다 묻혀 가며 흙장난이나 하고 있다니.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다. 잘 보니 얼굴에도 흙을 묻힌 채였다.
쯧, 하고 작게 혀를 찬 레이가 클로에를 향해 손수건을 내밀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손수건을 멀뚱히 바라보며 물을 뿐이었다.
“뭔데요?”
“얼굴 좀 닦아요. 애도 아니고 그게 뭡니까.”
클로에는 손수건을 거부하는 것을 택했다. 클로에가 흙이 묻은 손등으로 얼굴을 문지르자 그녀의 얼굴은 더 더러워졌다. 옆에서 아이들이 그녀의 얼굴을 보며 꺄르륵 웃어 댔다.
영문도 모른 채 얼굴을 만지작대는 클로에의 모습에 결국 레이가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클로에가 몸을 움츠러뜨렸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은 몸을 굳혔다.
“…….”
두 사람이 아차 싶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어색함이 흘렀다. 클로에와 달리 레이의 얼굴은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제대로 좀 닦아요. 그 꼴로 공작저로 돌아가면 또 별 소문이 다 날 테니.”
레이는 그녀의 손에 손수건을 억지로 쥐여 주고는 다시 원래 앉아 있던 벤치에 털썩 앉았다. 그녀를 배려하는 건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지 클로에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였다.
그녀가 공작저로 돌아갈 때가지 갈 생각이 없는 듯 하는 일도 없이 자리를 지키는 레이 덕에 클로에도 결국 평소보다 일찍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가 아무 걱정 없이 안락하게 지내던 유일한 공간마저 결국 누군가에게 들켰다. 그게 레이 포트먼인 게 차라리 다행인 건지, 최악인 건지.
그가 이든 록스턴의 유능하고 충직한 부관이라는 사실은 클로에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나란히 공작저로 들어오는 레이와 클로에의 모습에 공작저의 모두가 수군거렸다. 레이 포트먼이 클로에를 싫어하는 건 공작저에서 유명한 이야기였다. 정작 당사자인 클로에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불거진 적은 없지만, 어쨌든 두 사람이 이든도 없이 함께 들어오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다들 의아해했다.
그것은 이든도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야?”
이든의 물음에 레이는 여상히 대답했다.
“오늘 길에 마주쳐 모시고 왔습니다.”
매끄러운 거짓말이 레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클로에 록스턴의 부탁 따위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사실대로 말하려니 흙 경단이나 굴리며 아이처럼 놀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레이는 마음이 불편해 말할 수가 없었다.
레이는 공작저에 돌아오자마자 집사 로더릭을 찾았다.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로셰에게 듣기로 지난 1년 간 클로에가 고아원에 후원한 금액이 상당했다. 그런데 공작 부인의 앞으로 배당된 공작가의 예산안에 그만큼 큰 금액이 움직인 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걸 알았다면 고아원에 있던 클로에를 보고 그 정도로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장부 정리를 도맡아 하던 로더릭에게서 장부를 넘겨받은 레이는 뜻밖의 사실에 눈을 의심했다.
“로더릭 님. 이 장부, 어떻게 된 일입니까?”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말씀 드릴까도 생각했지만…….”
로더릭이 말끝을 흐렸다.
클로에 록스턴의 앞으로 배당된 예산은 단 한 푼도 쓰인 적이 없었다. 예산은 1년 치가 넘게 그대로 쌓여 있었다.
클로에 록스턴은 사치가 심한 여인이다. 그녀가 입고 있는 화려한 드레스와 먹고 마시는 값비싼 음식들. 거기에 고아원의 후원금까지. 그 모든 것을 공작가의 돈이 아닌 다른 돈으로 충당했단 뜻이다.
공작가의 돈이 아니면 친정인 린다 후작가의 돈일 거다. 그것 말고는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돈은 정당한 그녀의 재산이었다. 공작 부인에게 할당되는 당연한 예산. 그런데 왜 이 예산을 쓰지 않았던 것일까.
장부를 든 채로 이든을 찾아간 레이는 그에게 그것을 보여 주었다. 갑자기 찾아가 장부를 들이미는 레이를 보고 이든은 의아해했지만 곧 서류에 집중했다.
그리고 회계 장부를 읽어 내리는 이든의 표정이 점점 굳기 시작했다. 그런 이든을 향해 레이가 말했다.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장부만 보며 침묵하던 이든이 장부를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서 레이를 지나쳐 곧장 클로에의 방을 찾아갔다. 이제 막 씻고 나온 듯 가운 차림의 클로에가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굳어 있는 이든의 얼굴에 클로에가 시녀들을 향해 잠시 나가 있으라는 듯 손짓했다.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시녀들이 방을 나가자 클로에가 물었다.
“어쩐 일이에요?”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이든이 제게 내민 장부의 정체를 파악한 클로에는 미간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고아원에서 레이 포트먼을 마주친 덕분에 그녀의 기분은 좋지 않았는데 신경 쓰지도 않던 사항까지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클로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뭐가요?”
“제가 뭘 묻는지 모르겠습니까?”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거죠.”
그런 클로에를 보며 이든은 한 자 한 자 곱씹듯 물었다.
“왜 공작가의 돈을 쓰지 않은 겁니까?”
클로에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아 내며 여상히 대답했다.
“돈은 나도 많아요.”
“그걸 묻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 돈 안 썼다고 지금 저한테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계속 묻고자 하는 의도와 다른 답을 하는 클로에의 행동에 답답해진 이든은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유를 묻는 겁니다. 굳이 후작가의 돈을 쓸 필요가 있었습니까? 돈이 모자랐어요?”
“남의 돈 쓸 필요 있나요?”
그녀와 그를 구분하는 발언에 이든의 얼굴이 싸늘히 굳었다.
“남의 돈?”
“당신 돈이잖아요.”
“우리가 부부라는 사실 잊었습니까?”
“가족 놀음 할 생각 없어요. 요즘 무슨 바람이 불어서 당신이 내게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하고 클로에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바보 같은 관계인지. 가족이라는 게 그래요.”
완벽한 거절이고, 거부였다.
그리고 그것은 클로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그가 자꾸 그녀의 약한 마음을 불쑥불쑥 튀어나오게 만드니까.
“제가 남자들을 만나는 게 싫으면 정리할게요. 로더릭에게 맡겨 놨던 안살림도 신경 쓰고요. 그거면 만족하시겠어요?”
“공작 부인으로서의 의무를 다 하겠다?”
“그런 셈이네요. 그러니 제 일에 상관하지 마세요.”
이든이 비딱하게 웃으며 한 걸음 한 걸음씩 클로에를 향해 다가왔다.
다가오는 이든을 피해 뒷걸음질 치던 클로에가 침대에 걸려 털썩 뒤로 주저앉자, 그가 그녀를 따라 허리를 숙인 채 나직이 말했다.
“겁도 없지. 여기서 당신이 의무를 운운할 줄이야.”
그의 숨결이 클로에에게 닿았다. 낯설기 짝이 없는 감촉이라 클로에는 그를 밀어냈다.
“저리 비켜요.”
“내가 여기서 잠자리를 원하면 어쩌려고 그런 소리를 해? 아내의 의무를, 공작 부인으로서의 의무를 다 하라고 그대를 협박하면?”
이든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듣는 그의 하대에 클로에의 몸이 굳었다. 그런 클로에를 내려다보는 이든의 눈동자는 싸늘했다. 짧았던 시간이었지만 제도에서 보았던 그의 배려와 다정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것을 보고 왈칵 두려워졌지만 클로에는 아닌 척, 강한 척을 하며 그에게 맞섰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예요?”
“내가 협박 따위를 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불리하진 않은 건 같은데.”
그 말에 클로에가 할 말은 없었다.
변명거리를 잃고 자존심을 세우지 못하는 클로에 린다라는 사람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이든은 허리를 펴고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는 당신과 잘 지내고 싶어. 계약으로 묶인 관계든 뭐든. 내가 당신의 남편이고, 당신이 내 아내인 이상.”
그 말을 듣자 클로에의 동공이 불안한 듯 흔들렸다. 이든을 바라보는 시선이 계속 어긋났다. 클로에는 그러면서도 이든을 보려 애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
“나한테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제발.”
클로에의 말에 이든은 가슴 언저리 속의 무언가가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게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진창에 처박힌 것처럼 불쾌한 기분인 것은 확실했다.
그런 이든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에는 무릎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제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공작가의 돈을 쓰지 않은 것 때문에 당신이 화를 낼 줄은 몰랐어요.”
“혹시라도 이혼을 하게 될 때 뒤탈이 있을까 봐 안 썼겠지.”
마치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클로에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런 클로에를 내려다보는 이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니라고 말 안 하네.”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 클로에는 겁이 났다. 긴장으로 심장이 쿵쿵거렸다.
앞으로 매일을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몰랐다.
그 결정의 끝이 체념이든, 확신이든.
“…나랑 잘래요?”
난데없는 클로에의 말에 그가 눈썹을 휘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겠어요?”
불안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하고선 고집스럽게 이든의 눈을 피하지 않은 클로에가 덧붙였다.
“그것만큼 확실한 계약은 없겠죠. 방금도 잠자리 운운하셨잖아요.”
클로에의 말을 듣고 이든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듯 대답 없이 내려다보기만 하는 이든을 향해 클로에가 말했다.
“잠자리가 필요하면 상대가 되어 줄게요. 아이가 필요하면 낳아 줄 거고요. 애초에 그런 결혼이었잖아요?”
그 잔인한 말에 이든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갔다. 하지만 그 얼굴을 보고서도 클로에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굳이 내게 잘해 줄 필요 없어요. 내가 당신을 거부할 일은 없을 테니까.”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할 테니 건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 이상 제게 다가오지 말라고.
그 말에 이든의 눈에 불빛이 번뜩였다.
“지금 누구를 발정 난 짐승 취급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든은 그녀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건 알고 말하는 겁니까?”
위협적인 이든의 태도에 클로에는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도 이게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손을 대는 즉시 거절했을 텐데. 어쩐지 이든의 손은 두려우면서도 떨치고 싶지 않았다.
클로에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알아요.”
그녀의 대답에 이든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아니, 그녀는 모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씹어 먹고 싶어지는 그의 기분을 안다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각오해요, 그럼. 난 봐줄 생각 없으니까.”
그 말과 동시에 클로에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티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감춰지지 않았다. 그 모습이 연약한 사슴처럼 보였다.
* * *
침대 위에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아 있는 클로에의 귀로 물소리가 들렸다.
부부 침실도 아닌 클로에의 침실에서 이든 록스턴이 씻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미룰 수 없던 일이다. 어차피 다른 남자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의 품에 안기게 될 거라면 지금이 나았다. 오히려 지금이라면 단념하기도 더 쉬울 테니까.
물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운 차림의 이든이 젖은 머리를 닦으며 욕실에서 나왔다.
그의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벌어진 가운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것을 따라 시선을 밑으로 내리던 클로에는 훤히 보이는 그의 가슴팍에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탁탁 털어 낸 이든이 클로에가 앉아 있는 침대 위로 올라왔다.
“더 미뤄 달라면 미뤄 줄 수 있는데.”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클로에를 향해 그가 말했다.
“괜찮아요.”
의연한 척 가운의 매듭을 스스로 푸는 클로에를 이든은 빤히 바라보았다. 가운이 서서히 벌어지고 그녀의 가슴골이 살짝 보였다.
망설이듯 멈칫하는 클로에의 가운 자락을 이든이 잡아당겼다. 가운이 흘러내리며 클로에의 동그란 어깨와 봉긋한 가슴이 드러났다.
긴장했는지 클로에의 가슴이 한 차례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하얗고 말캉한 살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클로에는 자꾸만 머릿속을 스치는 제 아비의 모습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제 어미의 위에 올라타 헉헉거리던 그 짐승의 모습을 그와 겹쳐보기 싫었다. 그는 제 아비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클로에의 동요는 이든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이든은 클로에를 안심시키듯 상냥하게 물었다.
“왜 떨어요?”
“안 떨었어요.”
“왜. 내가 당신의 아버지처럼 굴까 봐?”
클로에가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알고 있다. 이든 록스턴이,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었던 그 치부를, 어째서 그가…….
클로에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된 채로 그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그렇게 허술하게 굴어놓고서 내가 모르길 바랐어요?”
그가 알고 있다. 세상에서 감춰진 진실까지. 클로에는 그 말에 이든을 추궁했다. 제 안에서 분노가 일었는지, 격통에 가까운 슬픔이 덮쳤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나한테 잘해 줬어요? 내가 불쌍해서? 아니면 나랑 자고 싶어서?”
그동안 그녀가 보였던 허세가 그의 눈에는 얼마나 같잖았을까.
잠자리 사정이었다면 이든은 그녀의 비위를 맞추고 할 것도 없었다. 후계자 문제를 들먹이며 멋대로 그녀를 안았을 것이다.
그보다 그녀의 안에서 도대체 자신은 어떤 사람인 건지. 이든은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클로에가 그의 손을 사납게 쳐 냈다.
클로에는 자신의 나약한 민낯이 드러난 것 같아 수치스러웠다.
그런 그녀를 이든이 달랬다.
“걱정 말아요. 그것 때문에 잘해 준 거 아니니까.”
그러고는 그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가까워지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클로에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든은 그 말을 끊었다. 뒤에 이어질 말이 예상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이든은 계속 부드러운 어조를 유지한 채 클로에와 대화했다.
“그게 잠자리 때문일 거 같아요? 고작?”
“그게 아니면 나랑 가까워지고 싶을 이유가 없잖아요.”
“자기 자신이 그 정도의 가치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든이 보기에 클로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치와 평가가 낮은 사람이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확실히 보였다. 세상 누구보다 제멋대로 자유롭게 사는 이 여자는 사실 꽤 비관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상은 얼마나 어두웠던 걸까. 한 발자국만 내디뎌도 세상은 그렇게까지 어둡지 않은데. 이든은 그것을 클로에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체념한 표정을 짓던 클로에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다른 남자들은 모두 그걸 원했어요, 나한테.”
“그래요? 다른 남자 누구?”
무심결에 줄줄이 이름을 읊을 뻔한 클로에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이든을 올려다보니 그는 쯧, 하고 작게 혀를 차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그 이름들을 듣지 못한 게 퍽 아쉬운 얼굴이었다.
클로에의 팔에 걸려 있는 가운을 마저 벗겨 낸 이든은 그녀가 그것을 다시 입지 못하도록 아예 바닥에 휙 던져 버렸다. 바닥에 허물처럼 떨어져 있는 가운을 내려다보는 클로에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까 말한 거 다 지켜요. 남자 만나지 않겠다는 거요.”
이든이 그렇게 말하자 클로에는 떨어진 가운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런 클로에를 향해 그가 여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약속 기대하고 있으니까.”
그의 의중을 파악하듯 그를 빤히 바라보는 클로에의 모습에 그가 작게 웃으며 클로에의 무릎을 잡고 슬쩍 잡아 당겼다. 방심하고 있는 클로에는 그대로 풀썩 몸이 뒤로 넘어갔다.
제 양옆을 팔로 짚은 채 내려다보는 이든의 모습에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어미 위에 올라타 허리를 흔들던 제 아비의 역겨운 뒷모습이 그의 위로 겹쳐보였다.
더 짜증나는 것은 이든에게 그따위 인간을 겹쳐보는 자기 자신이었다.
눈을 감고 바들바들 떨던 클로에는 제 볼 언저리를 부드럽게 매만지는 손길에 눈을 반짝 떴다.
“힘들면 나중에 해요.”
봐주지 않을 테니 각오하라고 했으면서. 그는 이렇게 또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그녀를 기다렸다. 다정한 이든 록스턴은 그녀를 아프게 만든다.
그녀가 찾았던 남편은 제 부모라던 인간들 덕분에 생긴 반발심과 오기를 충족시켜 줄 사람이었다. 이렇게 자꾸 기대고 싶어지고, 매달리고 싶어지면 결국에는 그녀도 그들과 똑같아 지는 게 아닐까.
비논리적인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트라우마라는 것은 본디 그런 것이었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만의 두려움이다.
“괜찮아요, 그냥 해요.”
그녀의 고집에 그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겪어야 했을 일이라며, 끔찍한 고통은 한 순간일 거라며 클로에는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갈비뼈 언저리에 닿는 따뜻하고 촉촉한 느낌에 작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이든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은 채로 그녀의 갈비뼈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뭐, 뭐하는 거예요?”
“몸이 이게 뭐예요.”
그가 손가락으로 뼈가 도드라진 그녀의 갈비뼈 부근을 매만졌다. 간지러운 느낌에 그녀가 허리를 뒤틀자 그가 작게 웃었다.
“뼈밖에 없잖아.”
“…상관없잖아요.”
“당신이 나를 품다가 부러지면 어떡해.”
이든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클로에의 허리는 그가 양손으로 꽉 쥐면 부러질 것처럼 가늘었다.
“안쓰럽게.”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납작한 배에도 잘게 입을 맞췄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에 클로에는 도리어 무서워졌다. 익숙하지 않았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클로에에게 그것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 그거 하지 말아요.”
“어떤 거요?”
“배에, 하지 말아요.”
그가 웃었다. 그의 숨이 배꼽 언저리에 닿자 클로에는 부르르 떨었다. 안절부절못하는 클로에의 모습을 보고 히죽 웃던 그가 말릴 새도 없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지분거렸다.
“흣!”
클로에가 황급히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이든이 허벅지를 붙잡는 바람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든은 점점 은밀한 곳으로 손을 옮겨 갔다.
클로에의 몸이 번쩍 튀었다. 그녀 자신조차 제대로 만져 본 적 없는 곳에 그의 손이 닿았다. 다리 사이의 정점에 그의 손가락이 오가자 허벅지와 발끝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멈추지 않는 손길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애원하는 어투로 그에게 말했다.
“하, 하지 마요.”
“잘 안 젖네. 많이 무서워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노골적인 말들에 클로에의 얼굴이 그 이상이 없을 정도로 붉게 달아올랐다. 클로에는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듯 그와 시선을 피하고 말을 내뱉었다.
“그, 그냥 하면 되잖아요.”
“그냥 넣으라고? 아플 텐데.”
이든은 클로에의 말을 들은 척만 하고 계속 클로에의 입구를 풀어 주는 데 집중했다. 그의 손길이 집요해질수록 클로에의 입에서도 달뜬 숨이 터져 나왔다.
“아, 앗!”
간지럽고 생소한 느낌에 클로에가 허리를 비틀며 바들바들 떨었다. 그의 손끝이 정점을 흔들 때마다 발가락이 저절로 곱으며 허리가 튀었다.
그녀가 예상했던 것 중에 이런 것은 없었다. 간지럽고, 뜨겁고, 애가 타고. 그녀가 아니게 될 것만 같은 기분. 참을 수 없어 클로에는 이든의 머리를 밀어냈다.
“그거, 하지 마요. 이상해요”
“조금만 더 참아 봐요.”
이든은 그녀의 저항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의 안으로 그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달래듯 다른 손으로 허리를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에 클로에는 움찔움찔 떨며 이불자락만 그러쥐었다. 내벽을 긁어내리는 손가락의 감촉이 너무나 생경했다.
“너무 좁은데.”
그러더니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고개를 마구 흔드는 클로에를 향해 그가 물었다.
“아파요?”
아픈 건 아니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려던 클로에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가 멈추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짓말.”
멈칫했던 게 티가 났는지 그가 작게 웃으며 그녀의 안에 있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나갔다가, 들어갔다가. 질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젖었어요.”
“응, 아, 앗!”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에선 그의 움직임을 따라 형편없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클로에의 손목을 그가 조심스럽게 붙잡아 내렸다.
“안기겠다고 말했으면 각오했어야지.”
그가 나직이 웃으면서 덧붙였다.
“나 꽤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한번 마음먹은 건 끝까지 하는 편이거든.”
그의 손가락이 무언가를 찾듯 살짝 굽혀진 채 내벽 여기저기를 찔렀다.
“응, 읏…….”
그 순간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건드렸고,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배에 힘이 들어가고 발가락이 절로 곱는 느낌이 들었다.
“흐읏!”
“여기, 기분 좋아요?”
고개를 마구 흔들었지만, 그의 손가락은 집요하게 한 부분을 찔러 댔다.
“아앗, 하아, 앗!”
클로에가 허리를 움찔움찔 떨며, 그의 손가락을 물고 있는 질벽을 조였다.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움찔, 허리가 휘었다.
거칠게 숨만 몰아쉬고 있는 클로에를 내려다보던 이든이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손을 뺐다. 주르륵, 그의 손가락을 타고 투명한 액체가 뚝뚝 흘렀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이든을 올려다보고 있던 클로에는 축축하게 젖은 그의 손을 보고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사내를 두려워하고 잠자리를 거부했던 게 무색하게 그녀의 몸은 그의 손길 아래 착실하게 반응했다.
클로에의 손을 치운 이든은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에 멈칫했다. 그러고는 당황한 듯 그녀의 눈가를 쓸며 물었다.
“아팠어요?”
대답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다 그녀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마저도 그녀가 무서워하거나 거북해 할까 봐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던 클로에가 웅얼거렸다.
“이거, 이상해요…….”
그녀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이든은 잠시 그녀의 우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한없이 인내심이 얄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 좋았어요?”
클로에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하지만 백금발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귀가 새빨갰다. 그런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은 드물게도 상대를 놀리고 싶어졌다. 조금 더 짓궂게 그녀에게 속삭였다.
“앗, 앗, 하고 당신 우는 소리 듣기 좋던데.”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제 신음소리에 클로에가 그의 품에서 발버둥 쳤다.
침대 위에서의 이든 록스턴은 그녀가 알고 있던 남자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녀가 알고 있던 것 보다 나른하고, 제멋대로에, 야릇한 사람이었다.
그의 품에서 발버둥 치던 클로에는 자신의 배를 쿡쿡 찌르는 무언가에 고개를 밑으로 내렸고, 가운 속 그의 허리춤에 무언가 튀어나온 것을 보고 얼굴을 확 붉혔다.
발기한 남성의 신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후다닥 뒤로 멀어지려는 클로에를 놓아준 이든은 침대에서 내려가 욕실로 향했다.
클로에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행위가 중단된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클로에를 향해 이든은 고개만 돌린 채로 물었다.
“왜. 끝까지 하고 싶어요?”
언제나 단정하던 그녀의 남편은 흐트러진 가운 차림에, 붉은 눈가를 하고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흔드는 클로에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뜨린 이든은 미련 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들렸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클로에는 화끈거리는 양 볼을 손으로 감쌌다. 어렸을 때의 영향이겠지만 클로에는 남녀 간의 정사라는 것에 대해 기저에서부터 불쾌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견고한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든 록스턴이라는 남자는 그녀가 알던 세계를 자꾸만 부정하게 만들었다.
클로에에게 있어 결혼이라는 건 그녀의 유일한 가족인 에드윈을 안심시킬 수 있는 수단, 혹은 그녀가 부린 오기의 결과물이었다.
그녀는 제 아비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피력하기 위한, 그런 고집과 오기. 잠자리를 피할 수 있고, 그녀의 난잡한 사생활을 감수해 줄 수 있는 남자면 결혼상대가 누구였든 상관없었다.
이든 록스턴은 그런 면에서 가장 적합한 결혼 상대라고, 처음 만났을 때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는 잘 모르겠다. 그는 자꾸만 클로에를 기대하게 만든다. 어쩌면 그녀도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바보 같은 기대.
괴물의 자식은 괴물일 게 뻔했다. 그녀의 몸 안에는 그 남자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클로에가 자기만의 늪으로 막 빠지려는 순간 욕실 문이 다시 열렸다.
다시 샤워를 했는지 그의 머리카락 끝에서 또다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내던 그는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클로에를 보고는 넌지시 말했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나한테 다 보이는데.”
그의 말에 클로에는 황급히 무릎을 내리고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그런 클로에를 보며 작게 웃던 이든은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짧게 들리는 물소리와 함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욕실에서 다시 나온 이든의 손에는 물이든 대야와 수건이 들려있었다. 클로에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 하시려고요?”
“다리 사이, 안 불편해요?”
이든의 물음에 클로에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듣고 나니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다리 사이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이 축축함은 그녀가 그의 손길 아래 착실히 반응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불편함보다는 창피함이 더 컸다.
그런 클로에를 눈치챘는지 이든은 수건을 물에 적시고는 그녀가 덮고 있던 이불을 훌러덩 걷어 냈다.
“내, 내가 알아서 할게요.”
“싫어요.”
이리저리 자신의 손길을 피하는 클로에의 발목을 턱 붙잡은 이든은 슬쩍 그녀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클로에의 몸이 속절없이 벌러덩 뒤로 눕혀졌다.
클로에가 발버둥 치자 그가 그녀의 다리를 붙잡으며 여상히 말했다.
“아까 다 봤는데 뭐 어때요.”
따뜻한 물에 적셔진 수건이 허벅지 사이에 닿았다. 부끄럽고 창피한 것은 클로에뿐인 듯 이든의 손길은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클로에 혼자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양손에 얼굴을 가린 채 클로에가 물었다. 이든은 수건을 치우며 자상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오늘 있었던 일을 거북해할까 봐.”
“잠자리 거부할 일 없다고 했잖아요.”
“누굴 발정 난 짐승 취급하는 건지.”
대답하는 이든의 눈가가 찌푸려져 있었다. 클로에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 좋아해요?”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클로에는 자신이 물어 놓고도 놀라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클로에 록스턴과 이든 록스턴, 두 사람에게 이것만큼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 있을까.
이든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 클로에는 침대에 털썩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잊어요, 지금 질문.”
이불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무언가 말하려 했던 이든은 입을 다문 채 그녀의 옆에 천천히 몸을 뉘였다. 그러다 문득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인지 이불이 움찔거리는 게 이든의 눈에 보였다. 이불 속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웃어요?”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당신일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애매한 대답이었다. 아직 좋아하는 게 아니니 안심하라는 건지, 당신을 좋아하게 될 거니까 안심하라는 건지.
하지만 클로에는 그의 대답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요?”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이불 속에서 들려오는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이든이 이불을 걷어 내려 하자 클로에가 필사적으로 이불을 붙잡으며 그것을 막았다.
결국 이든은 이불을 걷어 내는 것을 포기하고 조용히 그녀의 뒤에서 그녀의 머리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 클로에가 움찔거리는 것이 이불 너머로도 보였다.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클로에는 그의 말에 또 한 번 움찔했다.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내가 우리 아버지라는 사람처럼 될까 봐요.’
그 말을 애써 삼킨 클로에는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애틋한 감정은 두 사람의 결혼에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클로에가 마음이 불편할 이유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 낸 클로에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든이 옆으로 누운 채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마주친 이든의 눈에 클로에가 움찔 뒤로 물러나자 이든이 팔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
파르르 떨리는 동공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클로에를 향해 이든은 나긋하게 말했다.
“유감이지만 지금 나는 당신이 조금 더 좋아졌어요.”
그리고 내일은 더, 모래는 그것보다도 더 좋아질 거라는 비논리적인 예감이 들었다. 이든 스스로에게도 생소한 감정이었다.
클로에는 그의 말에 부러 차갑게 대꾸했다.
“착각하는 거예요.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동정심이 드니까.”
“내가 그렇게 정 많은 인간으로 보일 줄은 몰랐는데.”
그의 말과 달리 클로에는 에드윈을 제외하고 이든만큼 다정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성격은 다정함의 지표가 될 수 없었다.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은 하나 같이 친절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은 그녀의 몸을 원하거나, 더러는 후작가의 재산을 원하기도 했다.
이든이 클로에와 결혼한 것도 결국은 배경 때문이었다.
그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원했던 일이었고, 다른 누군가와 결혼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정략결혼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이든은 그녀에게 과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부정하듯 이든이 말했다.
“당신이 싫었으면 처음부터 결혼 안 했어요.”
애초에 정략결혼이 꼭 필요할 만큼 공작가의 사정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이든은 어차피 하게 될 결혼이라면 계약적인 부분이 있어야 서로 간에 편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결혼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처음 만났던 그날, 클로에와 말문을 트는 순간 이든은 그녀와 잘 지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근거는 없었다.
이든의 뜻밖의 말에 클로에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이든은 그런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당신이 좋아질 것 같다는 말이에요.”
“…….”
눈을 뜬 채로 기절한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 자요. 당장 뭐 어쩌자는 거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기에 두 사람은 방금 전까지 누구보다 친밀하고 야릇한 행위를 했다. 하지만 클로에는 애써 모른 척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도망치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그저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그가 듣지 못했으면. 지금 당장 클로에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 * *
침대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클로에는 밖에서 들리는 분주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이든은 먼저 일어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미 한참 전에 일어난 듯 서늘한 옆자리를 매만지던 클로에는 그런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덮고 있던 이불자락을 꼼지락거리며 매만졌다. 그러다 돌연 드는 무기력감에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하는 일이 없으니 무기력감이라도 느끼는 것일까.
공작 부인으로서 공작가의 안살림에 손대지 않은 건, 이든의 말대로 언제 하게 될지 모르는 이혼 때문이었다. 스스로도 유책 배우자라는 자각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대충 걸칠 때였다.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나예요.”
이든이었다.
“들어오세요.”
그녀가 가운을 여밈과 동시에 문이 열리며 이든이 들어왔다. 클로에는 슬며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지난밤의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클로에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기 힘들었다.
그가 분명 고백 비슷한 것을 했다. 그 전에는 더 없이 부부다운 행위를 했고.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동요를 그에게 티 내기 싫어 부러 덤덤한 척 물었다.
“어쩐 일이에요?”
“어제 그런 밤을 보내 놓고 첫 마디가 어쩐 일이냐니.”
노골적인 이든의 말에 클로에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제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던 그의 손가락의 느낌이 여전히 선연했다. 그 감각을 떠올리자 괜스레 뱃속이 꾸욱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 감각을 떨쳐 내듯 클로에는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결국 끝까지 하지 않았다. 그 고백 비슷한 것도 흐지부지 끝나 버렸고. 그러니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고, 클로에는 이미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회피는 이든에게 통하지 않았다.
“내 손길에 그렇게 앙앙 울었으면서, 어떻게 아무 일이 없어요.”
적나라한 이든의 말에 클로에가 경악하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날 왜 그렇게 봐요? 사실인데.”
혹여나 밖에 있는 누군가 듣기라도 했을까 클로에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다급히 문 너머를 살피는 클로에의 모습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이든은 그녀의 벌어진 가운 자락을 꼭꼭 여며 주고는 침실 밖의 누군가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들이 무언가를 잔뜩 들고 우르르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게… 다 뭐예요?”
방 안의 침대와 테이블을 가득 채운 보석함을 보며 클로에가 미심쩍은 얼굴로 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이든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 빙긋 웃어 주었다.
“목걸이랑 귀걸이죠. 보석도 있어요. 장인을 부르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가공해 줄 거예요.”
이든의 말은 클로에가 바라던 답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이든을 재촉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나요?”
“린다 후는 당신이 보석을 좋아한다고 하던데.”
여전히 나오지 않는 대답에 클로에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래서요?”
클로에의 표정이 안 좋아진 것을 본 이든은 이번에는 제대로 답을 주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당신이 공작가의 돈을 쓰지.”
이든의 속셈이 이번에는 밝혀졌다. 클로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다 마음에 안 드니까 도로 가져가라고 하세요.”
“마음에 안 들면 팔아요. 용돈 정도는 될 텐데.”
용돈 수준이 아니라 저택을 사고도 남을 돈이 될 거다. 클로에는 이든과 실랑이를 벌일 기력을 잃었다. 이든이 그런 그녀를 보고 밉지 않게 호소했다.
“마음에 들 때까지 보낼 생각인데. 화낼 건가요?”
농담으로 하는 소리 같지가 않았다. 클로에가 하는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하자, 시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보석함을 척척 정리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녀가 받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던 모양이다.
“에드윈이 내가 보석을 좋아한다고 하던가요?”
“후작을 핑계로 들면 당신이 받을 것 같았거든요.”
그 대답에 클로에는 입을 다물었다. 말이 오가면 오갈수록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침실에서 나갈 생각을 않고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이든의 모습에 결국 클로에가 물었다.
“더 할 말 있어요?”
“같이 식사하자고요.”
“알아서 먹을게요.”
클로에의 말에 이든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다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양 손으로 감쌌다. 화들짝 놀란 클로에가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이든은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치수를 가늠하듯 손으로 허리를 매만지던 그가 말했다.
“이만큼. 이만큼 될 때까지는 살 좀 찌워요. 어제 깜작 놀랐으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제 클로에의 맨몸을 보고 이든은 그녀가 어디 아픈 것을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비쩍 말라서는 그의 손길에 파르르 떠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작아서 나를 어떻게 품으시려고.”
이든의 손이 가운 너머로도 느껴지는 그녀의 갈비뼈를 매만졌다. 그러다 그의 손이 그 부근 어딘가의 말캉한 살을 스쳤다.
클로에의 입에서 신음 섞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성적인 감각보다는 놀란 마음에 흘러나온 소리였지만 창피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야릇한 소리에 이든의 손이 멈칫했다. 클로에는 새빨개진 얼굴로 얼른 입가를 가렸다.
무언가 말하려는 이든의 말을 끊으며 클로에가 말했다.
“잘못 들은 거예요.”
“뭘?”
“뭐, 뭘 들었든, 잘못 들은 거라고요.”
하지만 이든은 클로에의 변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여기 약한가 봐요.”
말캉한 살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는 그의 뻔뻔한 행동에 클로에가 파드득 떨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 아니라니까요!”
그녀의 비명 같은 외침에 이든이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클로에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나가요, 나가!”
그녀가 마구잡이로 밀치자 마지못해 이든이 침실을 나서며 말했다.
“식사할 거니까 내려와요.”
“나중에 먹을게요.”
그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새빨개진 클로에가 이불을 뒤집어쓰자 이든에게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클로에는 이불 속에서 이불을 펑펑 발로 찼다. 이든의 앞에서 자꾸 바보 같은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지는 일도, 창피함을 느끼는 일도 다른 이의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이든 록스턴, 오직 그의 앞에서만 클로에는 어린 아이가 되기도, 여자가 되기도 했다.
그런 스스로의 변화를, 클로에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