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당신과 나의 거리 (3/8)

2. 당신과 나의 거리

공작가의 타운 하우스에 마련된 공작 부부의 침대는 성인 남녀 두 명이 누워도 이리저리 굴러다닐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널찍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란히 침대에 누운 이든과 클로에의 간격은 서너 사람이 들어가 누워 있어도 될 정도로 널찍했다.

서로 간에 보이지 않는 선이라도 있는 것처럼 꼿꼿하게 누운 두 사람에게서는 움직임이 없었다.

클로에에게 침대 위의 남자라는 것은 제 아비가 그랬듯, 여자의 위에 올라타 목을 물어뜯는 괴물과도 같았다. 어린 날 그녀가 보았던 그 검고 거대한 괴물은 여전히 그녀의 뇌리에 남아 때때로 그녀를 좀먹어 갔다.

그런 그녀의 옆에 남자가, 그것도 이든 록스턴이 누워 있다니. 클로에는 지금 이 상황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라면 제 옆에 누워 있는 이에게 그 정도의 거북함은 느끼지 않는다는 것 정도일까.

그녀와 그 사이에 조건 하나가 걸려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물론 담보라고는 그와 그녀 사이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신뢰뿐이지만.

결혼 조건으로 그녀가 그에게 내걸었던 건, 사실 그가 무시하면 그만인 것일지도 몰랐다. 법적으로도 신분으로도 그녀에게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그가 잠자리를 원하면 어떡할까, 아이를 원하면 어떡할까.

형식적이었던 그 첫날밤, 클로에는 날이 밝을 때까지 결국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인 건 그 후로 1년은 그와 같은 침대에 누울 일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아니,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멋대로 북부를 떠나 제도로 내려온 지 세 달. 그 세 달 동안 그에게 무슨 심경에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결과가 이거다.

그와 그녀가 같은 침대에 누워 있다.

“혹시 가주님이 아이 얘기를 하시던가요?”

클로에가 이든에게 물었다. 그가 원한 건 부부 관계가 아니라 말 그대로 동침일 뿐이었지만, 그가 그녀에게 굳이 이런 걸 요구할 만한 이유라고 한다면 그것뿐이었다.

“아닙니다. 아버지가 당신에게 그런 소리를 하던가요?”

“아뇨, 그건 아니에요.”

아이 문제가 아니라면 뭘까. 곰곰이 생각하던 클로에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혹시 저랑 하고 싶으세요?”

클로에는 그가 콜록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잘못들은 걸까.

“뭐라고요?”

“저랑 잠자리를…….”

그녀가 망설임 없이 내뱉는 말의 내용에 혼미해진 이든이 클로에의 말을 끊었다.

“언젠가는 필요하겠죠. 저도 수도승처럼 지낼 생각은 없으니.”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어쩐지 우습고 바보같이 느껴져 이든은 눈을 감았다. 잠이나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금 그녀가 제 음심을 만족시켜 줄 게 아니라면.

이든은 자신의 대답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언젠가는 필요하겠죠라니. 허세나 다름없었다. 옆에서 풍겨 오는 달큰한 향유의 향기에 그의 인내심은 얄팍해져만 갔다. 이러다가는 일이 날 것 같았다.

이든은 감은 눈에 힘을 주며 클로에에게 말했다.

“그만 자요. 오늘 많이 놀란 것 같은데.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겠다니. 계속 같은 침실을 쓸 생각인 걸까.’

입 안에 맴도는 물음을 삼킨 채 클로에는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올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1년 전만큼 그와의 동침이 무섭지 않다는 것이었다.

* * *

볼에 닿는 따뜻한 감촉에 클로에는 그것에 더욱 파고들었다. 꼭 짜 맞춘 듯 폭 감기는 온기였다.

그것에 볼을 비비적거리던 클로에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클로에의 시야에 흰 피부가 들어왔다. 사람의 피부였다.

자신이 볼을 비비고 있던 것이 이든의 가슴팍이라는 것을 깨달은 클로에는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클로에는 조심스레 이든을 살폈다. 다행히, 그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슬며시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했지만, 클로에는 잠결에 저를 끌어안은 이든의 품에 폭 갇히고 말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성인 남성을 향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또다시 작동했다.

꼼지락거리며 그의 품을 벗어나려던 클로에는 힘에 부쳐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를 깨우고 일어나면 그만이겠지만 그건 어째서인지 내키지 않았다.

그와 그녀가 누워 있는 위치로 보건대, 굴러온 것은 클로에였다. 이든은 지난밤 누웠던 그 자리 그대로였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클로에는 얼굴이 좀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와 이렇게 붙어서 자는 건 어린 시절 에드윈과 함께 잤을 때를 빼고는 없는 일이었다.

항간에 떠도는 악질적인 소문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매일 침실에 불러들이는 남자가 다르다는 둥, 혹은 그녀가 애인의 침실에 드나든다는 둥.

그 소문의 근원이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 본인들이라는 걸 알고 있다.

잠자리를 거부하자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자존심을 챙겼다. 애초에 부러 그런 자들을 골라 만났으니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상대가 누구였든 잠자리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아비는 그것을 제 어미를 묶어 둘 용도로 사용했다.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제 어미를 힘으로 누르고, 억지로, 거칠게.

그 결과가 무엇을 향해 치달았는지 클로에는 눈앞에서 보았다. 한 여자의 인생이, 한 아이의 인생이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후, 클로에는 단 한 번도 남녀 간의 친밀함을 가져 본 적 없었다.

따져 본다면 이든 록스턴, 그녀의 이름뿐인 남편은 어쩌면 그녀와 가장 친밀한 행위를 나누는 남자일지도 몰랐다.

한 침대에 누워,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녀는 그동안 만났던 어떤 남자와도 이 정도의 친밀함을 나누지 않았다.

클로에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에 맞고 터진 입가를 포함해 생소한 풍경이었다. 자고 있는 이든 록스턴과 햇살이라니.

빤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클로에의 눈에 툭 불거진 그의 목젖이 보였다. 매끈하고 가느다란 그녀의 목과는 달리 남자의 곡선을 가진 목이었다.

문득, 만져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충동이 두려움을 이긴 걸까. 행동이 사고를 앞서 나갔다.

충동적으로 뻗은 손에는 이미 그의 목젖이 닿아 있었다. 단단하고 따뜻한 감촉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그때였다.

“간지러워요.”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클로에가 화들짝 놀라 뻗었던 손을 거뒀다. 언제부터였는지 눈을 뜨고 있는 이든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황했는지 입을 꾹 다문 채 눈만 깜빡거리는 클로에를 향해 그가 나른하게 물었다.

“여기, 만져 보고 싶어요?”

어딘가 야릇하게 들리는 구석이 있는 말이었다. 고개를 흔드는 클로에의 모습에 그가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언제부터 깨 있었어요?”

“목젖, 만질 때부터.”

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더 얼굴이 화끈해진 클로에는 남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의 충동이라니. 퍽 드문 경험에 호되게 당한 느낌이었다.

“만지고 싶으면 만져 봐요.”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손을 뻗어 클로에의 손목을 잡았다. 클로에는 놀라 팔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손도 클로에의 팔과 같이 딸려 왔다.

“뭐 하는 거예요?”

“그쪽도 멋대로 내 몸에 손댔으니까.”

반박할 거리가 없는 말이었다. 클로에의 손목을 잡은 이든은 그대로 그녀의 손을 자신의 목 언저리에 갖다 댔다. 클로에의 손에 단단한 이든의 목과 어깨가 닿았다.

클로에의 손이 닿은 제 어깨 언저리를 내려다보던 이든이 속눈썹을 천천히 올리더니, 이내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의 검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클로에는 어째서인지 긴장했다.

“어때요?”

그가 그녀에게 감상을 물었다.

남자의 목을 더듬거리고 나서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클로에가 그의 의중을 가늠하듯 가만히 올려보기만 하자 그가 재차 물었다.

“거북하고 무서워요?”

“…….”

이든의 물음에 클로에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제도로 온 이래 그녀가 이미 몇 차례 이상한 행동들을 보였으니 눈치챘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 올 줄은 몰랐다.

“무슨 뜻이에요?”

“당신이 날 불편해하고, 겁을 내는 것 같기에.”

그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클로에가 불편해하는 건 이든 록스턴뿐만이 아니었다.

클로에가 손을 빼내려고 하자 그가 손목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녀가 벗어나고자 한다면 충분히 벗어날 만큼의 힘이었지만, 그의 의도는 확실히 전해졌다.

이든은 클로에가 답하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불편했던 클로에는 다시 한번 대답을 회피했다.

“그게 중요한가요?”

“안 중요합니까?”

“이대로도 잘 지내왔잖아요.”

“사업적인 파트너로서? 아니면 부부로서?”

이든의 물음에 클로에가 그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목을 빼냈다.

“저와 부부로서 지내고 싶다는 뜻인가요?”

“앞으로도 내 옆에 있을 여자는 당신뿐일 거고, 내가 안을 여자도 당신뿐일 테니까. 정략결혼이든 뭐든 난 정부를 둘 생각 없어요. 이건 결혼하기 전에도 말했던 걸로 아는데.”

그 말대로, 이든은 자신이 약속한 바를 썩 잘 지키는 남편이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이든과 이런 대화를 하는 게 불편하고 거북했다.

“도대체 나랑 뭘 하고 싶은 거예요?”

“부부다운, 그런 일이요.”

느릿하게 말하며 이든은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엄지로 느릿하게 쓸었다. 그 감촉에 클로에는 자신도 모르게 파드득 떨었다.

“자, 잠자리는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 주시겠다고 했잖아요.”

“딱히 잠자리 얘기를 한 건 아니었는데.”

이든의 말에 클로에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 혼자 그런 쪽으로 생각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든은 클로에의 붉어진 목덜미를 내려다보았다. 어째서인지 목이 탔다.

“마침 얘기가 나왔으니 해 봅시다.”

“뭐, 뭘요?”

“잠자리에 대해 운운해 보자고요. 어제 내게 하고 싶냐고 물었던 건 당신이잖아.”

클로에의 입술이 달싹였다. 할 말은 많은데 쉽사리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그건…….”

이내 입을 꾹 다문 채 이불만 내려다보던 클로에에게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당신을 거부할 일은 없어요.”

그런 계약 결혼이었다. 클로에가 이든을 거부할 일은 없다.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클로에의 대답에 이든의 입가에 비딱한 미소가 걸렸다.

‘겁도 없지. 내가 어떤 걸 요구할 줄 알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자꾸만 비뚤어지려는 속내를 감춘 이든이 물었다.

“나더러 여인을 겁간하는 불한당이 돼라?”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그가 클로에의 목 언저리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움츠러뜨렸다. 그 모습에 이든은 손을 거두었다.

“손만 뻗어도 그렇게 겁을 먹으면서 나더러 당신을 안으라고?”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하고 클로에는 이불자락만 그러쥐었다.

그에게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자고 했던 건 그냥 잠자리 때만 참아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냥 눈 한번 딱 감고 참으면 다 지나가겠지, 그런 생각을 했다.

이든 록스턴은 그런 그녀의 이기적인 마음을 눈치챘다. 어쩌면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클로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이든이 뜻밖의 말을 했다.

“우리 조금만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언뜻 들으면 그가 그녀를 유혹하고 있다고 착각할 만큼 나긋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클로에는 계속 대답이 없었다. 그가 클로에에게 부드럽게 종용하듯 물었다.

“그러기 싫어요?”

그 재촉이 클로에는 부담스러웠다. 1년이나 지났지만 미룰 수만 있다면 계속 미루고 싶다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종용을 하다니. 클로에는 두려움 어린 어조로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난 변한 거 없어요. 당신이 내게 뭔가를 자꾸 들키는 것뿐이지.”

이든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클로에의 네글리제자락을 붙잡았다. 그러자 클로에는 화들짝 놀랐다.

“뭐예요?”

“대답하고 도망가요.”

“누가 도망을 간다고……!”

말재간 하나는 레이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던 클로에가 궁지에 몰린 쥐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이든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는 모습에 클로에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얼른 대답해요. 나랑 가까워질 건지, 말 건지.”

“싫다고 하면요?”

“내 결심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만 알아 뒀으면 해요.”

그는 침대 옆의 협탁에 손을 뻗어 그 위에 있던 것을 클로에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황실 파티 초대장이요.”

어째서인지 형편없이 구겨져 있는 초대장을 조심스럽게 넘겨받은 클로에가 미심쩍은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이걸… 왜 주는데요?”

“내가 당신이랑 거기에 갈 거니까.”

그 말에 클로에는 동요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보며 나른하게 웃던 그가 덧붙였다.

“내 결심에는 변화가 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 * *

이든 록스턴이 미쳤다. 클로에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게 아니라면 그와 그녀가 마주 보고 식사를 할 일은 없었을 테니까.

“안 바쁘세요?”

클로에의 물음에 그가 여상히 대답했다.

“바빠도 식사는 해야죠.”

지금은 식사 시간이 아니었다.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클로에야 모르겠지만, 이든은 분명 아니었을 거다. 그런데 식사 때가 다 지난 늦은 아침 식사 자리에 끼다니. 미친 게 틀림없었다.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건 클로에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다이닝 룸 한편에는 이든을 떨떠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레이 포트먼이 있었다.

“포트먼 씨. 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 해요.”

클로에가 레이에게 말했다. 시중을 드는 것도 아니고, 멀뚱히 곁에 서 있는 사람을 보자니 도리어 그녀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이는 곧장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이미 먹었습니다.”

분명 레이는 이든과 함께 식사를 했다. 고로 이든 록스턴은 두 번째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을 방증하듯 이든은 앞에 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그는 식전주로 나온 와인을 간간이 삼킬 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그는 클로에를 향해 물었다.

“원래 그것밖에 안 드십니까?”

“식사 안 할 거면 나가세요. 신경 쓰이니까.”

“다행이네요. 신경은 쓰인다니.”

그의 태연하기 짝이 없는 말에 고기를 썰던 클로에의 손이 멈추었다. 그 모습을 흘긋 바라본 이든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식사는 같이해요.”

챙, 그녀가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가 사납게 그릇을 쳤다. 클로에는 이든을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이랑 내가 식사 시간이 겹쳤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건 어렵지 않겠어요?”

“가끔은 이렇게 얘기를 나누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지금 우리 사이에 좋은 말이 오갔던가요?”

날카로운 클로에의 말에도 그는 웃었다.

“좋은 말이 오가도록 노력해야죠.”

이든의 말에 그의 뒤에 서 있던 레이의 표정이 구겨졌다. 클로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그가 계약 조건들을 잊은 게 분명했다.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클로에는 진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록스턴 공작님.”

공작님이라는 호칭에 그의 눈썹이 슬며시 좁아졌다. 어딘가 언짢은 기색이었다.

“말씀하세요, 부인.”

“저희가 약속했던 결혼 조건을 지킬 생각이 있긴 하신가요?”

클로에의 말에 이든의 뒤에 서 있던 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클로에와 이든 사이에 있었던 결혼 조건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결국 참지 못한 레이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조건이라니요?”

“레이.”

클로에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든이 그를 향해 잠시 물러나 있으라는 듯 눈짓했다. 무언가 더 말하려던 레이는 이내 못 이기듯 다이닝 룸을 벗어났다. 그는 주인 부부의 사적인 얘기에 끼어들 정도로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레이가 나가고, 다이닝 룸에는 둘만 남았다. 끝까지 레이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던 클로에가 다시 이든을 보았다.

“포트먼 씨에게 말하지 않으셨나 봐요.”

속뜻은 이것이었다. 측근에게마저 비밀로 할 정도라면 당신도 켕기는 것이 있는 게 아니냐. 하지만 이든은 여전히 태연했다.

“우리의 잠자리 사정까지 남에게 얘기할 필요는 없죠.”

그 모습에 클로에는 약이 올랐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뻔히 아는 주제에 이든은 모르는 척 화제를 돌리고 있었다. 클로에는 그 사실을 되짚어 주었다.

“저희의 결혼 조건이 잠자리뿐은 아니었을 텐데요.”

클로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탁, 이든의 손에 들려 있던 와인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이든의 시선이 클로에에게 향했다.

클로에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자꾸만 시선을 피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이윽고, 이든의 입이 열렸다.

“제가 당신의 사생활을 간섭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아닌가요?”

되묻는 이든에게 클로에는 톡 쏘듯 내뱉었다. 그러나 이든은 태연하게 웃었다.

“그럼 하는 김에 더 합시다. 다른 남자들도 정리해요.”

정리라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클로에는 반박하기 위해 곧장 입을 열었다.

“이봐요.”

“내가.”

하지만 클로에의 말은 이든이 끊는 바람에 이어지지 못했다. 둘의 시선이 뒤엉켰다.

“내가 많이 봐주고 있었다는 생각, 해 본 적 없습니까?”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클로에를 향해 이든이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한 계약은 서로의 사생활을 지켜 주자는 거였지, 어느 한 쪽을 우습게 봐도 된다는 건 아니었는데. 내가 유책 배우자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 어쩌시려고.”

그의 말에 클로에는 미간을 찌푸렸다.

“날 협박하는 거예요?”

“협박이 아니라, 상기. 그동안 부인께서 내 체면을 퍽 상하게 했던 것 같은데.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던 조건, 잊었어요?”

그 점을 지적한다면 클로에에게 할 말은 없었다. 더 할 말이 없어진 클로에는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쏘아붙였다.

“빨리 북부로 돌아가 버리기나 해요.”

“내가 북부로 갈 땐 당신도 같이 가는 겁니다.”

끝까지 클로에의 속을 긁어내리는 이든이었다. 그녀가 다이닝 룸을 박차고 나가자, 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레이가 화들짝 놀라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클로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화를 부추기는 쪽이었지 본인이 화를 내는 쪽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화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그를 지나쳤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다이닝 룸으로 돌아온 레이가 이든에게 물었다. 사이가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두 사람이 싸웠던 적은 없었다. 싸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얼굴 보기도 힘든 사이였다.

그런데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든 록스턴의 얼굴에 상처가 있었다. 뺨이 부어오르기까지 한 것이 척 보기에도 거나하게 한 대 얻어맞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이든 록스턴의 뺨을 때릴 수 있는 사람이라니. 클로에 록스턴밖에 없었다.

“부인께서 살벌한 얼굴로 나가시던데. 결혼 조건은 또 뭐고요.”

하지만 이든은 레이의 물음을 무시했다.

“이틀 후에 황궁에 갈 거야. 너도 준비해.”

명백한 회피였지만 레이에게 추궁할 권한은 없었다. 게다가 뒤바뀐 화제도 가볍게 넘길 만 한 게 아니었다. 결국 레이는 이든의 속셈대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황녀의 탄신연에 가시려고요? 피곤하실 텐데요.”

“클로에도 갈 거야.”

이든의 대답에 레이는 멈칫했다. 이때껏 클로에는 파티에 참석할 때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옆에 끼고 다녔었다. 파티에 참석한다니, 그것은 이든의 부관인 레이의 입장에서 달가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또 애인 생기셨답니까?”

레이가 빈정거리자 이든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레이 포트먼. 클로에의 파트너는 나야.”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은 레이는 놀라며 그에게 되물었다.

“각하께서 부인과 함께 가신다고요?”

“그래.”

대답을 한 이든은 곧장 일어서서 다이닝 룸을 벗어났다.

이든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레이가 그를 이상하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파트너를 강요하다니,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유치한 짓을 했다.

클로에 때문이다. 다른 남자와는 가깝게 지내면서 정작 남편인 그만 불한당 취급을 하니까. 누구라도 자존심이 상할 만한 일이었다. 그것뿐이다.

그것뿐이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든은 문득 피딱지가 앉은 제 입가를 매만졌다.

* * *

다행히 이틀 사이 이든의 얼굴에 있던 상처는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옅어졌다.

레이 포트먼이 타운 하우스의 주치의를 닦달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는 제 주인이 얼굴에 자잘한 상처를 단 채로 입궁하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었다.

어쨌든 레이의 덕에 두 사람이 괜한 구설수에 오를 일은 없었다.

그러나 록스턴 공작 부부의 입장을 알리는 목소리에 연회장 내의 공기가 술렁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당연한 반응이었다.

클로에는 둘째 치더라도 이든 록스턴은 제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사가 아니었다. 그런 인사가 말 많고 탈도 많은 부인과 함께 입궁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갈라지는 인파 사이로 유유히 걸어 들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귀족들은 경악했다.

이든 록스턴이 다정하게 클로에 록스턴의 허리에 팔을 감고 들어오고 있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조차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황제 부부와 황태자, 그리고 파티의 주인공인 비비안 황녀에게 인사를 올리는 동안 두 사람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어마어마했다.

특히 비비안은 클로에의 등장과 동시에 노골적일 정도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녀의 시선에서 치기 어린 적의가 느껴졌다. 그녀가 이든 록스턴에게 절절 매는 걸 클로에도 알고는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인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뒤돌아 걸었다.

“그냥 저분이랑 결혼하시지 그랬어요. 어차피 하게 될 정략결혼이라면 상대가 황실인 것도 나쁘지 않은데.”

주변과 거리를 확인한 클로에가 이든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이든이 얼굴을 찌푸렸다.

“황녀의 나이를 모르십니까?”

“열 살 차이 정도야 귀족들 사이에서 별것 아니죠.”

“열한 살입니다. 나이 차는 둘째 치고 그녀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고요. 부인께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새삼 궁금해지는데.”

“어차피 정략결혼이잖아요?”

배경이 괜찮으면 그런 것쯤이야 신경 안 쓰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클로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잘난 것이라고는 어미를 닮은 얼굴과 집안밖에 없는 클로에가 록스턴 공작 부인이 될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자연스럽게 클로에와 이든의 대화는 끊겼다.

황녀가 제 오라비의 손을 잡고 연회장의 중앙으로 나왔다. 벌꿀처럼 달콤할 것 같은 진한 금발에 해사하게 웃는 얼굴. 비비안은 클로에가 보기에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녀와 달리 가족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받으며 자라 온 티가 듬뿍 났다.

멍하니 비비안과 비안테를 바라보던 클로에는 그런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이든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제 얼굴에 피어오른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부러움 또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파티의 주인공인 황녀가 첫 춤을 추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귀족들의 차례다. 하지만 이든과 클로에에게 춤은 한없이 먼 얘기이기도 했다. 그동안 어떤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춘 적은 없었다.

클로에는 당연하다는 듯 슬며시 그와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클로에의 허리에 감긴 이든의 팔에 힘이 풀리지 않았다.

턱하니 이든의 팔에 몸이 걸린 클로에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제 그만 놓아 달라는 뜻이다. 그런 그녀에게 이든이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그것도 당신에게 다 보고해야 하는 건가요?”

“이왕 온 거 제대로 협조해요. 소문, 신경 쓰이잖아요?”

이든은 능글맞았다. 그런 이든의 속을 긁고 싶어 클로에는 이죽거렸다.

“저는 제게 어떤 소문이 돌던 신경 쓰지 않는답니다, 공작님.”

잠시 클로에를 내려다보던 그가 살짝 고개를 숙여 클로에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도에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는 아십니까?”

“클로에 록스턴이 염치없고 미친 여자라는 소문이요?”

스스로의 평판을 적나라하게 든 클로에에게 이든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제가 바람피운 아내를 찾으러 제도까지 왔다고 하던데.”

“맞는 말 아닌가요?”

그가 나직이 웃었다. 그러더니 소문 하나를 더 꺼내 놓았다.

“이든 록스턴이 아내에게 빠져서 정신 못 차리고 있다는 소문은요?”

예상외의 내용에 클로에는 멈칫했다. 그가 단지 자신을 데리러 온 것뿐인데 소문이 대체 어디까지 커진 것일까. 클로에는 살짝 머쓱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녀와 결혼하기 전의 이든 록스턴은 어떤 구설수에도 오른 적이 없는 칼 같은 사람이었다.

“기분 나쁘셨겠어요.”

하지만 그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아 놀라는 중입니다.”

“…….”

클로에가 빤히 이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담백하고 예의바르기만 한 얼굴이었다.

예전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기는 했다. 그러나 최근의 그는 클로에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들을 입 밖으로 내곤 했다.

“유감이네요.”

“유감?”

클로에는 되묻는 이든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다 물었다.

“요즘 정말 왜 이래요?”

“뭐가요?”

그가 시치미를 뗐다.

“내가 당신을 겁냈던 거?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이래요? 그게 우리가 한 결혼에 큰 문제가 되나요?”

클로에의 직접적인 물음에 이번에는 이든의 얼굴이 굳었다. 알고 있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녀의 입으로 들으니 속이 뒤틀렸다.

클로에 록스턴이, 정략결혼이었다지만 그의 하나뿐인 아내가 그를 겁낸다. 이유를 물어야만 했다.

“내가 당신에게 뭔가 했습니까?”

“아무것도요.”

여전히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든은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클로에는 그를 겁내는 것일까. 클로에가 뒷말을 덧붙였다.

“당신은 아무 문제없어요. 좋은 남편인 것도 알아요.”

“그런데요?”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클로에는 내뱉지 못할 말들을 마음속에 숨겨 두었다. 그가 자신의 남편인 이상 클로에는 그와 가까워질 생각이 없다는 것을.

대답이 없는 클로에의 모습에 이든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대로 그에게서 멀어지려는 클로에를 본 이든이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클로에는 그의 손끝에 붙잡힌 소맷자락을 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 난리가 있었던 지난밤에도 그는 그녀의 네글리제 자락을 붙잡았었다. 마치, 그녀를 배려하듯이.

그것을 깨닫자마자 후작저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명치끝이 쑤셨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클로에가 말했다.

“당신 말대로 우리가 가까워졌다가, 내가 비비안 황녀처럼 당신을 귀찮게 쫓아다니면 어쩌려고 이래요?”

우리 아버지처럼 당신에게 집착하면, 내가 당신의 인생을 망쳐 버리면, 그때는 어떡할래요.

클로에는 턱 끝까지 차오른 제 치부를 삼켜 냈다.

“당신도 그건 싫을 거 아니에요. 그런 거 귀찮아하시잖아요.”

“그렇게 생각해요?”

부정에 가까운 물음에 클로에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다 물었다.

“제정신이에요?”

제정신이냐는 물음에도 그는 빤히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클로에가 손으로 제 이마를 매만졌다. 이야기가 겉돌았다. 아니, 그녀의 안에서 정립된 가치관이 조금 흔들린 느낌이었다.

“우리, 지금 너무 이상해요. 이상하다고요.”

“뭐가요?”

“모든 게 다요. 나처럼 닳고 닳은 여자한테 왜 이래요? 다른 사람들이 그러듯이 나한테 차라리 욕을 해요. 이런 식으로 괴롭히지 말고.”

괴롭다는 듯 토로하는 클로에의 모습을 보고 이든의 반듯했던 이마가 좁아졌다.

“괴롭힐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소맷자락을 잡았던 손을 매끄럽게 움직여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들어올렸다. 클로에가 뿌리치고자 한다면 그럴 수 있을 정도로 느릿한 동작이었다.

클로에의 손이 그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있었다.

이든의 시선이 클로에에게 닿았다. 그는 그녀에게 이 앞에 벌어질 일들에 대한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경악인지, 체념인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클로에를 보고 그는 그녀의 손등에 제 입술을 내리눌렀다.

경건한 손등의 키스. 요즘은 제도에서 찾아보기 힘든, 보수적인 북부 사람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행동이었다.

이든 록스턴이 클로에 록스턴에게 춤을 신청했다.

이든이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춤 신청을 하자 연회장이 술렁였다.

속닥거리는 사람들을 한 번 훑은 클로에가 이든을 향해 말했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어요. 당신 정말…이상해요.”

그녀는 그를 향해 연신 이상하다는 말을 했다.

“부인께서는 다른 사람 시선 같은 거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비난하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꼭 붙어서 다정하게 움직이는 것과 달리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들은 신랄한 구석이 있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귀족들은 선망의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든과 클로에는 겉보기에는 퍽 아름다운 한 쌍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주변에서 춤을 추던 귀족들의 파트너가 몇 번이고 바뀔 동안 두 사람은 그대로였다. 이든이 클로에의 옆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클로에에게 다가오려고만 하면 이든이 클로에를 허리를 감싼 채 웃는 낯으로 상대방을 쫓아냈다.

말 그대로 쫓아냈다. 록스턴 공작의 서슬 퍼런 웃는 얼굴에 다들 도망간 지 오래라 두 사람의 주변은 유난히 휑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든의 파트너 역시 내내 클로에였다는 뜻이다. 비비안 황녀를 포함한 연회장의 여인들은 애가 탔다.

특히 비비안은 분하고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 파티의 주인공이 그녀가 아닌 클로에 록스턴이 된 기분마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내내 록스턴 공작 부부에게로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선망이든 질시든 비비안은 달갑지 않았다. 하다못해 이든의 옆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게 자신이라면 모를까. 비안테에게 떼를 써서 그를 파티에 초대한 게 무색한 결과였다.

표정 관리를 못하고 있는 비비안의 옆으로 누군가 와인을 홀짝이며 다가왔다. 그녀의 오라비, 비안테였다.

“그만 포기해, 비비. 그는 이미 유부남이라고.”

“어차피 정략결혼이잖아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폐하와 내가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니?”

비안테는 쯧, 혀를 찼다. 이루어지지도 않을 사내에게 목을 매는 제 여동생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생일인데 이렇게 꿍해 있지 말고.”

“오라버니는 도대체 누구 편이에요?”

“굳이 따지자면 나는 이든 록스턴의 편이란다.”

그러니 네가 포기하렴, 비비안. 아무래도 그는 제 아내에게 단단히 빠진 듯하니.

비안테는 애써 그 말을 삼켜 냈다. 제 동생의 성가신 투정을 굳이 찾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어딜 봐도 이든은 제 부인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정작 클로에 록스턴의 쪽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 * *

이든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클로에의 소문 때문일지는 몰라도 그녀를 향해 남자들의 시선이 몰렸다. 그들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빤히 보일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감히 누구를 거리의 창부 취급을 하는 건지. 그것도 남편인 그를, 록스턴 공작인 그를 앞에 두고서.

“거슬리는군.”

“뭐가요?”

클로에의 물음에 그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클로에는 싱겁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든은 그런 클로에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의 눈에 비뚤어져 있는 그녀의 머리 장식이 보였다. 그것을 고쳐 주기 위해 손을 뻗었던 이든은 올라가는 제 손을 보고 움찔거리는 클로에의 모습에 손을 멈추었다.

“미안해요.”

이든이 먼저 사과했다. 그의 사과에 클로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언가를 참아 내듯 입술을 한 번 꾹 깨문 클로에가 말했다.

“제 문제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덧붙였다.

“기분 나빠해도 괜찮아요. 이해할 테니까.”

“기분 안 나빴어요. 내가 경솔했고.”

“…….”

클로에는 이든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이든 록스턴은 이상한 사람이다. 그녀가 결혼을 마음먹었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안에서 정립되어 있던 모든 가치관이 그의 앞에서는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속절없이 허물어지려 했다.

“잠깐 쉬다 올래요. 혼자 있고 싶어요.”

클로에가 이든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어딘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이든은 마지못해 그녀를 놓아주었다. 물론 레이에게 그녀가 불편해하지 않을 선에서 뒤를 따르게 했다.

클로에를 향해 음심을 숨기지 않는 놈들이 바글바글한 곳이었다. 평소라면 클로에를 따르는 것을 못마땅해했을 레이가 순순히 그녀의 뒤를 따르는 것을 보면 그것이 이든의 기우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든 록스턴은 그것이 거슬렸다. 그것도 몹시. 그에게는 더 이상 아내에 대한 소문을 좌시할 이유가 없었다.

* * *

테라스의 난간에 팔을 대고 기댄 클로에는 머리를 훑고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답답했던 속이 풀렸다.

클로에가 이든과 결혼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결혼은 그녀가 그녀의 아버지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니까.

에드윈을 안심시키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그는 언제나 클로에를 더 챙겨 주지 못해 안달인 사람이었다. 클로에가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이나마 더 누렸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처음 그녀가 남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던 건 일종의 오기에 가까웠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노라고, 내 아비가 했던 짓 때문에 더 이상 망가지지 않고 있노라고, 그것을 어떻게든 에드윈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분명 시작은 그것이었고, 가벼운 만남이 주는 적당한 정도의 애정도 좋았다.

클로에가 원했던 것은 관계가 깊어질 일이 없는 애정이었다. 깊은 애정은 두렵다. 제 아비와 같은 사람이 될지도 모르니까.

클로에는 그렇게 부모에게서 받지 못한 결핍된 애정을 그들에게서 채우곤 했다.

결혼은 그것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진심이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그러나 클로에는 이든 록스턴이라는 남자에게 속절없이 휘둘렸다.

계속 이렇게 휘둘리다 만약 그녀가 제 아비와 똑같은 괴물이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클로에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최악의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다.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각오가 필요했다.

사랑에 빠지지 않을 각오. 혹은 애정에 허덕이지 않을 각오.

파르라니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뒤돌아선 클로에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을 뻔했다. 레이 포트먼이 그녀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로에는 겨우 비명을 억누르고 레이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어요?”

제 청승맞은 짓거리를 그가 보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제 치부를 들키는 건 이든 한 명으로도 충분했다.

“숙녀가 쉬고 있는 테라스 안에 멋대로 들어오다니요. 그렇게 안 봤는데 무례한 구석이 있으시네요, 포트먼 씨.”

하지만 레이는 여전히 자신을 가늠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끊어 내듯 클로에가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어요?”

“그건 아닙니다.”

“그것도 아닌데 왜 남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실까.”

클로에의 말에 레이의 반듯한 미간이 좁아졌다.

“저라고 좋아서 쫓아다니는 건 아니니 오해 마시길.”

“제가 또 사고 칠까 봐요?”

클로에가 생각나는 대로 묻자, 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모르시는 겁니까?”

“뭘요?”

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있는 사내들이 부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아, 그거.”

클로에의 입에서 여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레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알고 계셨습니까?”

“모를 리가요. 저렇게나 노골적인데.”

평이한 클로에의 어조에 레이의 얼굴에 경멸의 기색이 스쳤다. 그는 그 마음을 별로 숨기지 않고 클로에에게 내뱉었다.

“즐기고 계신 거라면 곤란합니다.”

클로에는 비뚜름하게 웃었다. 레이 포트먼의 안에서 자신이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녀가 자초했던 일이니 고까울 것도 없었다.

“즐기고 있는 걸로 보일 줄은 몰랐네요.”

하지만 클로에의 대답에 어째서인지 레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클로에는 그의 침묵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는 지금 그녀의 말을 부정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걱정 말아요. 황궁에서 외도를 저지를 만큼 저도 간이 크지는 않답니다, 포트먼 씨.”

클로에는 그렇게 말하고는 레이를 지나쳐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적반하장인 그녀의 태도에 기가 차서 쫓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레이는 착실하게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조금 전과 달리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제대로 말을 고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질책이 떠올랐으나,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던 클로에는 그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조용히 시간이나 때우다 돌아갈 생각으로 사람들이 한산한 곳으로 발을 옮기던 클로에는 제 손목을 잡아채는 누군가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 거칠게 그것을 뿌리쳤다.

날 선 클로에의 기세에 당황한 상대가 과장되게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놀래라. 접니다, 부인.”

눈앞에 보이는 낯익은 얼굴에 클로에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오랜만입니다. 호르세 백작 영윤.”

얼마 전 가십지에 클로에와 함께 실렸던 인사, 데미안 호르세였다.

그는 방금처럼 멋대로 손목을 잡거나 불필요한 스킨십을 하는 경박한 사내였다. 그리고 그런 부류는 클로에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이기도 했다.

가벼운 만남은 좋지만 멋대로 제 몸에 손을 대는 건 달갑지 않다. 여인에게 강압적인 부분이 있는 남자는 제 아비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불편한 심기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사교적으로 대응했다.

“부르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놀랐잖아요.”

“그러면 재미가 없으니까요.”

재미. 나직이 중얼거린 클로에가 매끄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멋대로 손대지 말아달라고. 그런데 손부터 대시다니. 신사가 아니셨나요?”

“저는 우리 사이가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요.”

기껏 해봐야 연회장에서 몇 번 마주치고, 오페라 극장의 에스코트를 한 번 받은 것뿐이다. 그것을 저급하기 짝이 없는 가십지에서 멋대로 클로에와 데미안의 관계에 대해 자극적으로 떠들어 댄 것이다.

데미안은 클로에의 충고를 농담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혹은 여인의 싫다는 말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가진 인간이든가.

그가 은근슬쩍 클로에의 손을 다시 잡으려 했다. 클로에는 그의 손길을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밀었던 손이 무시당해 머쓱해진 데미안은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록스턴 공작 각하와 함께 오셨던데. 별일이네요, 부인.”

돌연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든의 얘기에 클로에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그녀의 안에서 이든 록스턴은 정의되지 않은 무언가였다.

듣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 따위 남자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는 게 불쾌했다. 클로에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닐 텐데요.”

하지만 노골적으로 불편해하는 클로에를 보고서도 그가 히죽 웃으며 클로에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왔다.

“어차피 공작 각하께서도 다 알고 계신 거 아닙니까?”

“뭘요? 제 남편이 알아야 할 만큼 저희 사이에 뭔가가 있었나요?”

그 말에 데미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데미안을 향해 클로에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한 발자국만 더 다가오면 사람을 부를 겁니다, 호르세 경.”

데미안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공작 부인이든 후작 영애였든 상대는 사교계의 창부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는 여자였다. 그런 소문이나 달고 다니는 주제에 매번 까칠하게 굴지 않는가.

지난번 오페라 극장에서 만났을 때도 그녀는 그가 손목 한번 잡은 걸 가지고 요란하게 놀라며 그에게 무안을 주었다.

‘이 남자, 저 남자와 침대에서 구르는 주제에. 겨우 손목 가지고.’

“공작 부인. 누가 보면 제가 부인을 겁탈이라도 하려는 줄 알겠습니다.”

그가 클로에를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섰다. 그가 가까이 오자 술 냄새가 물씬 풍겼다.

데미안이 기어코 클로에를 향해 손을 뻗자 클로에는 거칠게 그의 손을 쳐 냈다.

그녀도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나온 학습된 방어였다.

사실 그녀는 이미 이든의 일로 정신이 줄타기를 하는 사람처럼 위태로워져 있던 상태였던지라 평소처럼 부드럽게 거절하지 못했다.

데미안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는 턱에 뻣뻣하게 힘을 주고 클로에의 앞에 다가갔다. 그녀는 얼어붙은 채 그를 볼 뿐이었다.

그때, 데미안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호르세 백작 영윤. 록스턴 공작 부인의 앞입니다. 예를 갖추십시오.”

클로에의 뒤를 따르고 있던 레이였다.

데미안은 차갑게 굳은 레이의 얼굴에 흠칫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곱상한 샌님이라고 생각했던 레이 포트먼은 코앞에서 마주하자 생각보다 어깨가 떡 벌어진 다부진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험악한 레이의 기세에 데미안은 말도 않고 몸을 돌렸다.

도망치듯 멀어지는 데미안을 보며 레이는 작게 혀를 찼다. 클로에 록스턴은 어떻게 만나도 저런 놈들만 골라서 만나나 싶었다. 그것도 이든 록스턴이라는 한 치의 모자람 없는 사내를 남편으로 두고서 말이다.

그리고 클로에를 돌아보았다. 클로에는 놀라기라도 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자업자득이기는 했지만 데미안이 더욱 무례했던 것은 사실인지라 레이는 클로에에게 상태가 어떤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데미안은 멀어진 지 오래인데 클로에는 데미안이 잡았던 제 손등을 내려다보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입으로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면서.

어딘가 이상한 클로에의 모습에 레이가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자, 클로에는 그를 피해 한 걸음 물러났다.

“부인?”

레이의 부름에 눈에 보일 정도로 화들짝 놀란 클로에는 도망치듯 그의 앞을 벗어났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클로에는 입술을 깨물었다. 뒤에서 레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작정 도망쳤다.

무작정 눈앞에 보이는 문을 열고 들어간 클로에는 테이블 밑으로 기어 들어가 숨었다.

클로에는 쪼그려 앉아 두 귀를 틀어막은 채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제게 다가오는 아비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차가운 골방의 책상 밑에 숨었던 그 어린 시절처럼.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그림자 속에 갇혀서 어른이 되지 못했다.

클로에는 귀에서 손을 떼고 데미안이 잡았던 손등을 드레스자락에 문질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손톱으로 긁으며 그의 흔적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 손등 위로 입술을 내리눌렀던 이든의 온기가 떠올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엉망진창.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제 마음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멋대로 애정을 바랐다가, 멋대로 그것을 두려워했다가. 어른이 되었다가, 다시 아이가 되었다가.

다시 손톱으로 손등을 긁어내리는 클로에의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클로에는 자신을 향해 길어지는 그림자를 피해 더욱 몸을 움츠러뜨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상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클로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레이였다. 급하게 그녀를 쫓아온 듯 어딘가 흐트러진 그가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클로에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의아함이 섞인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클로에 록스턴이다. 무서울 것 하나 없는 사람처럼 제멋대로 사는 미친 여자.

그런 여자가 어린애처럼 테이블 밑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레이는 그녀의 손등에 맺혀 있는 붉은 핏방울을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피가 나고 있잖습니까.”

그가 그녀를 향해 무릎을 굽히자 클로에는 뒤로 넘어지듯 그를 피했다. 명백히 그를 두려워하는 모양새였다. 클로에 록스턴은 어째서인지 겁에 질려 있었다.

레이는 피가 배어 나오는 클로에의 손등을 흘끔 바라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저렇게까지 겁에 질리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이든에게서 떨어진 지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사이에 있었던 일이라고는 술 취한 망나니 하나가 그녀에게 치근덕거린 것뿐이었다.

“…….”

그래, 그것뿐이었다.

설마 그가 겨우 손 한번 잡았다고 저러는 건가? 그 클로에 록스턴이?

데미안이 과거 그녀에게 몹쓸 짓이라도 했던 건가 싶었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사교계가 조용할 리 없었다. 속사정이야 모르지만 겉보기에는 오히려 클로에가 그에게 무안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레이가 클로에를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자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의 손을 피했다. 이 따위 연기를 해서 그녀가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가 자신이어서야 더욱더.

“클로에 님.”

레이의 나직한 부름에 클로에가 흠칫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겁에 질려 있는 그녀의 모습에 레이는 그녀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믿기지는 않지만 클로에 록스턴이 그에게 겁을 먹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제야 클로에도 주변을 둘러볼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그러다 마주친 레이의 얼굴에 클로에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몸에 각인된 어린 날의 기억은 가끔 이런 식으로 표출되곤 했다. 이든 록스턴의 앞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레이에게 보인 추태를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또 어떤 허세를 부리며 자신을 방어해야 할지 클로에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약한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었다. 그게 도움이 되었던 적은 그녀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없었다.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

레이의 질문에도 클로에는 대답 없이 테이블 밑을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느껴지는 건 창피함과 곤란함이었다.

“거기 머리 조심…….”

쿵, 적막한 방 안에 클로에의 머리와 원목 테이블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클로에와 레이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스쳤다.

“괜찮으십니까?”

클로에는 대답 없이 후다닥 테이블 밑에서 기어 나왔다. 레이는 그런 그녀를 부축하려다 제 손길을 피했던 그녀를 떠올리고는 손을 거두었다.

“각하께 돌아가십시오.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레이는 몸을 돌렸다. 그것을 보고 클로에는 반사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레이는 무언가 제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건 고개를 폭 숙이고 있는 클로에의 정수리였다.

“…뭡니까?”

레이는 클로에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그녀를 경계했다. 그런 레이에게 클로에는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지 말아요.”

“무슨 말을…. 설마 각하께 말하지 말아달라는 겁니까?”

끄덕끄덕, 작은 머리통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평소 매섭게 쏘아 붙이던 것을 생각하면 사람이 달라도 너무 달라 레이는 조금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혹시나 지금 보고 있는 게 클로에의 탈을 쓴 다른 무언가는 아닐까, 하는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

그 말을 하자, 옷자락을 쥔 클로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것을 본 레이는 나직이 덧붙였다.

“노력은 해 보죠.”

그리고 레이는 자신의 옷자락을 살짝 당겼다.

클로에는 마지못해 그의 옷자락에서 손을 톡 떨어뜨렸다. 그런 클로에를 내려다보던 레이가 문득 물었다.

“왜 그런 겁니까?”

“…….”

하지만 클로에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고 있지도 않았다.

클로에가 등 뒤를 졸졸 쫓아오는 건 생각보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레이는 저도 모르게 뒤를 흘긋거렸다. 그런데 손등을 손톱으로 긁어 대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하지 마십시오, 그거.”

얼른 뒤돌아 그녀에게 다가간 레이가 그녀를 향해 손수건을 내밀었다.

“피나잖습니까.”

하지만 클로에는 멍하게 손수건을 바라볼 뿐이었다.

레이는 받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클로에의 손에 억지로 손수건을 감아 놓았다. 다행히 그가 그러는 동안 클로에는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고분고분한 클로에 록스턴은 그것대로 기분이 나빴다. 레이는 빨리 이든에게 그녀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르고, 클로에와 나란히 방에서 나오는 레이의 모습에 황궁에는 애먼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클로에 록스턴이 남편이 부리는 최측근 레이 포트먼마저 건드리기 시작했노라고.

그녀가 자기 남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참석한 황실의 파티에서 그의 부하와 뒹굴었다느니 어쩌니, 하는 악질적인 소문이 따라붙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 * *

남의 눈치 안 보기로는 클로에 못지않던 그 레이 포트먼이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애써 그의 시선을 무시한 클로에는 이든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얼른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애초에 이든이 되도 않는 고집을 부려 오게 된 파티였다. 클로에는 그렇게 이든을 탓했다.

제게로 다가오는 클로에를 보고 있던 이든이 얼굴을 찌푸렸다. 손수건에 감싸인 그녀의 손등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좀 긁혔어요.”

그녀의 상처를 살펴보려고 이든이 손을 뻗자 클로에가 손을 제 등 뒤로 숨겼다.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피곤해요.”

이든은 흘긋 클로에의 뒤를 바라보았다. 레이 포트먼이 어딘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고개를 슬며시 젓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이든은 클로에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일단 돌아가죠. 이 정도 자리 지키고 있었으면 충분하니.”

비안테가 들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정도로 오만한 말이었다.

어떻게든 황실과 연줄을 맺고 싶어 하는 이들이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황실 파티, 그것도 황녀의 탄신연이었다. 하지만 이든은 하등의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예상대로 비안테는 이든이 좀 더 머물다 있기를 바랐지만, 그의 낯빛이 평소보다도 서늘한 탓에 눈치껏 그의 귀가를 허락했다.

공작가의 타운 하우스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도 클로에는 말이 없었다. 그저 습관적으로 손수건에 감싸인 손등을 긁어 댈 뿐이었다.

“그만해요.”

결국 손수건에 피가 배어 나오자 이든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화들짝 놀라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얼른 손에 힘을 풀었다.

“내가 당신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끝까지 추궁하길 바라요?”

이든의 시선이 그녀의 머리에서 손수건이 감긴 손등으로 훑듯이 내려왔다.

“손은 다쳤고, 머리 장식은 없어져 있고.”

이든의 말에 클로에는 손으로 더듬더듬 제 머리 언저리를 매만졌다. 보석이 박혀 있던 핀 대신 흐트러진 머리칼만이 만져질 뿐이었다.

클로에는 변명하기를 포기했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할 줄 알고. 아주 나쁜 생각을 할지도 모르는데.”

그 말에 클로에가 이든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신경 안 써요.”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든은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클로에에게 물었다.

“대체 왜 이렇게 비뚤어진 겁니까?”

“나 원래 이런 사람인 거 몰랐어요? 알면서 결혼했잖아요. 도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 거예요?”

그렇게 대답하는 클로에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그 모습은 마치 울음을 억지로 참아 내는 아이처럼도 보여서 이든은 결국 한숨과 함께 그녀에게 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애초에 다그칠 생각은 아니었다.

클로에는 이든에게 잡혀 있는 제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나 이든은 답지 않은 고집을 부리며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이내 클로에 역시 의미 없는 반항을 그만두었다.

어쩌면 그의 손길에 기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든 록스턴은, 자꾸만 클로에를 약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클로에는 그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 * *

씻고 돌아와 침실로 돌아온 클로에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 서류를 읽고 있는 이든의 모습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든이 그녀보다 먼저 침대에 있던 적은 처음이었다. 형식적이었던 첫날밤도, 어쩌다 같이 자게 되었던 지난 밤들도. 언제나 클로에가 먼저 등을 돌려 누워 있을 때, 이든이 그녀의 옆자리에 조심스레 누울 뿐이었다.

클로에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든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이리 와요, 피하지 말고.”

“피한 적 없어요.”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 이든은 들고 있던 서류를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물었다.

“왜, 내가 당신을 덮치기라도 할까 봐?”

“…….”

클로에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라리 그게 무서웠더라면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것보다도 두려운 것이 생겼다.

저 남자에게 진심으로 빠져 버리면 어떡할까, 자신이 제 아비라던 사람처럼 변해 버리면 어떡할까. 전전긍긍하게 되는 이 마음을 숨기고 싶어졌다.

“당신이 괜찮다고 할 때까지 그럴 일 없어요.”

그러면서도 당신의 다정함에 속절없이 기대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클로에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 그의 옆에 누웠다. 그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눕는 것뿐이라고, 속으로 그렇게 되뇌면서. 그러나 긴장감에 심장이 쿵쿵거렸다. 두려움을 느꼈을 때와는 미묘하게 다른 박동이었다.

클로에의 손가락이 붕대 위로 닿았다. 까드득, 손톱이 붕대 위를 긁는 소리가 적막한 침실을 울렸다.

클로에는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막 침대에 누운 이든은 붕대가 긁히는 소리에 클로에를 돌아보았다.

“클로에.”

이든의 부름을 듣지 못한 듯 클로에가 등을 보인 채 누워 손등만 긁고 있자 결국 그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 작은 손길에도 얼마나 놀라는지 몸을 앞으로 움츠린 그녀가 침대 밑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이든은 급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놀란 건 이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클로에를 침대에 눕히고도 불안해진 이든은 그녀를 덜렁 들어 올렸다.

“뭐 하는 거예요!”

놀란 클로에가 발버둥치기도 전에 이든은 그녀를 침대 한가운데에 폭 내려놓았다. 애초에 그녀가 그를 피해 침대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누워 있지만 않았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사고였다.

괜히 혼자 놀랐던 게 머쓱해진 클로에가 이불을 덮으며 그에게 등을 돌려 누우려 할 때였다. 이든이 그녀를 향해 여상히 말했다.

“손 좀 줘 봐요.”

“뭐라고요?”

“잡고 자게요. 상처 긁지 마요.”

그 말에 클로에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클로에가 그럴 거라고 이미 예상했던 이든은 덤덤한 얼굴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도톰히 감겨 있는 붕대 끝이 조금 해졌다. 그녀가 손톱으로 긁어 댄 탓이었다. 그게 이든은 거슬렸다.

“왜 자꾸 상처를 긁어요.”

“…아파서.”

무심결에 대답했던 클로에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픈 게 손등의 상처가 아니었다는 걸, 그가 모르길 바랄 뿐이다.

그런 클로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든은 클로에의 손을 잡은 채로 그녀의 옆에 누웠다.

클로에는 동요했다. 그녀가 타인을 향해 벅벅 그어놓은 선을 이든 록스턴이라는 남자는 이런 식으로 한 꺼풀씩 벗겨 내곤 했다. 그게 어쩐지 싫지만은 않은 것이 클로에는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손, 놔주세요.”

“싫어요.”

그는 클로에의 말을 무시하고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이대로 자겠다는 심산이었다.

클로에는 그런 이든을 내려다보았다.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에게서 제 아비와 같은, 여인을 덮치고 목을 물어뜯던 괴물의 면모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망설임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클로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고집이든, 그녀의 고집이든 클로에는 그와 실랑이를 하는 것도 지쳤다.

흘러가는 물길 위에 뜬 나뭇잎처럼 그대로 휩쓸려가고 싶은 이 마음을, 그는 알고 있을까.

손목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신경 쓰여 잠이 올 것 같지 않던 클로에는 어느샌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녀에게 오늘 하루는 너무나 고되었다.

클로에에게서 고른 숨소리가 흘러나오자 반대로 이든의 눈꺼풀은 천천히 올라갔다.

“…….”

그는 자신에게 손목을 잡힌 채로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싫어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부린 고집이었다. 그래서 사실 자신과 닿아 있는 채로 그녀가 잠들 거라고는 사실 생각지도 못했다. 정 불편해하면 모르는 척 놓아줄 생각이었다.

황궁에서 데미안 호르세와 있었던 일을 레이에게 들었다. 그것을 말하는 레이의 얼굴은 어딘가 껄끄러워 보였다. 말하지 않으려 했다가 고민 끝에 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쨌든 레이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 그녀를 따라붙던 악질적인 소문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그녀 스스로도 그 소문을 부정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든은 조심스럽게 클로에의 손등에서 붕대를 풀어냈다. 어딘가에 긁혔다며 그녀가 둘러댔던 게 무색하게 한눈에 봐도 그녀가 제 손톱으로 긁어 댄 자국이었다.

“…….”

아무래도 그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클로에 록스턴, 아니 클로에 린다라는 여인에 대해 그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을, 이제야 새삼 깨달았다.

* * *

쿵쿵쿵, 클로에는 반복적으로 들리는 안정감 있는 소리에 편안함을 느끼며 몸을 꼼지락거렸다. 그러자 무언가 나직한 한숨소리와 함께 그녀가 베고 있던 것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불만스럽게 그녀가 얼굴을 비비자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제야 클로에는 다시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의외로 잠버릇이 있네.”

누군가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클로에는 슬며시 눈을 떴다.

포근하고 편안하다. 아직 잠에서 덜 깨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는 클로에를 향해 누군가 말했다.

“더 자요.”

나직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어렸을 때 에드윈과 함께 잘 때를 빼고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클로에는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이곳에 에드윈이 있을 리 없잖은가.

이 기묘한 기분을 저번에도 느꼈던 것 같다. 이든 록스턴의 품에 안겨서 아침을 맞이했던 그날처럼.

“…….”

코앞에서 마주친 이든의 검푸른 눈동자에 클로에는 몸을 바싹 굳혔다. 쿵쿵쿵, 제게 안정감을 주던 그 소리가 빨라졌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들리는 소리가 이든의 것이 아니라 클로에, 그녀에게서 들린다는 것이었다.

이든의 손이 클로에의 등에 닿았다. 등을 감싸는 온기에 클로에 작게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엄청 빨리 뛰네.”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가 여전히 굳어 있는 클로에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나직이 물었다.

“왜 긴장했어요?”

“아, 안 했어요.”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클로에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침대를 짚으려 했다가 얼결에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단단한 남자의 가슴팍에 클로에는 기겁을 하며 손을 뗐다. 그러다가 그의 가슴팍 위로 엎어지며 코를 박았다.

클로에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의 앞에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이든은 제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똑바로 일으켜 주었다. 자신의 가슴팍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그녀는 시각적으로나 감각적으로나 위험한 구석이 있었다. 얇디얇은 네글리제는 말캉한 여체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관심이든 동정심이든, 마음이 동하기 시작하니 신체적인 끌림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든은 자신을 무서워하는 상대에게 그런 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부러 덤덤하게 물었다.

“오늘은 좀 어때요.”

“뭐, 뭐가요?”

“내 위에서 잘 자던데.”

이든이 웃으며 말하자, 클로에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건… 그냥, 잠결에…….”

클로에는 계속 말을 돌리며 부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는 게 어디인가. 이든은 그것으로 만족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 어디 가요?”

클로에는 자신이 먼저 물어 놓고서도 아차 싶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행선지를 물을 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든은 그녀의 물음이 꽤 기꺼운 듯 작게 웃음을 흘렸다.

“잠깐 볼일이 있어서요. 쉬고 있어요. 심심하면 레이라도 부려 먹던가.”

레이가 들으면 기겁할 만한 말이었다. 그의 시답잖은 농담에 클로에는 그가 대답을 얼버무렸다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이든 록스턴은 에드윈 린다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는 그것을 클로에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 * *

후작저에 기별도 없이 찾아온 손님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록스턴 공.”

어쩌면 예상했던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에드윈은 그가 제도로 온 시점부터 언젠가는 자신을 찾아올 거라 생각했다.

“기별도 없이 찾아와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에드윈은 이든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사용인들까지 물린 후, 에드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클로에 때문입니까?”

그렇게 묻는 에드윈의 얼굴에 오늘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한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이든이 생각하기에 에드윈은 클로에에게 지나치게 무른 감이 있었다. 보통의 귀족가에서 상상도 못할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클로에를 보고도 그는 뒤처리를 수습할 뿐 클로에를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에드윈이 그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든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모습을 보고 에드윈은 목을 가다듬었다.

“클로에가 마음에 차지 않으실 거라는 거 잘 압니다.”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 에드윈이 결연한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게 될 거라고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돌려보내 주시기만 하면 제가 조용히 데려가겠습니다.”

에드윈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든은 클로에를 돌려보낸다는 소리는 입 밖으로 낸 적도 없다. 의아함에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일단 이든은 에드윈의 오해를 풀기 위한 답을 했다.

“저는 그녀와 이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예, 압니다. 이혼할 생각이… 없으시다고요?”

에드윈이 화들짝 놀라 커다래진 눈으로 이든을 바라보았다.

이든은 에드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에드윈 린다와 클로에 린다는 퍽 닮은 구석이 있었다. 외모보다는 조금 더 본질적인 무언가였다.

당황하던 에드윈은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이든에게 물었다.

“그러면 찾아오신 이유가…….”

에드윈의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예상 가는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니 더욱 불안했다.

이든은 그런 에드윈을 보며 물었다.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 물음에 에드윈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작저가 그 사람에게 끔찍했던 이유. 이제는 제가 들을 때도 된 것 같은데.”

“그건…….”

에드윈은 당혹스러웠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리고 그 이유가 에드윈에게 있어서도 아픈 기억이기 때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에드윈의 망설임을 알아본 것일까, 이든은 대답을 종용했다.

“알아낼 방법이 없어서 찾아온 건 아닙니다.”

에드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상대는 그 록스턴 공작이다. 그의 말대로 그가 알아내고자 한다면 못 알아낼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이곳에 찾아온 건 클로에의 입장을 배려한 게 분명했다. 그가 그녀의 과거를 들쑤시기 시작하면 그만큼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될 사람이 늘어나게 될 테니까.

에드윈은 거칠게 얼굴을 한 번 문지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은 걸 제가 멋대로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럴 자격, 제게는 없거든요.

에드윈이 나직이 숨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런 에드윈의 모습에 이든이 짤막하게, 그러나 직구나 다름없는 말을 내던졌다.

“그 사람이 저를 무서워합니다.”

그 말을 들은 에드윈이 몸을 굳혔다. 그는 자신이 들은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이든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에드윈이 테이블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정이 되지 않는 듯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주변을 서성이던 그가 이든에게 물었다.

“그 아이가… 그 아이가 아직도 그런다고요?”

‘아직도.’

그렇다는 건 전에도 그랬다는 뜻이겠지.

이로써 확실해졌다. 클로에 린다는 남자를 무서워한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아이가 허구한 날…….”

본디 가십이라는 건 원래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건 에드윈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철썩 같이 믿었다. 이미 괜찮아진 거라고. 제 마음 하나 편해지자고, 또 그렇게 그 아이를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에드윈이 손에 얼굴을 묻은 채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한참 만에 나온 그의 대답은 조금 의외의 것이었다.

“…클로에가 남자를 무서워하는 건, 저희 아버지 때문입니다.”

에드윈과 클로에의 아버지. 선대 린다 후작에 관한 이야기는 귀족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금슬 좋은 부부가 한날한시에 죽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에드윈의 말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다들 금슬 좋은 부부가 한날한시에 죽었다며 떠들어 댔죠.”

손에서 들린 에드윈의 얼굴에는 자조적인 미소가 얹혀 있었다.

“저희 아버지가 얼마나 지독한 인간이었는지도 모르고.”

제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에드윈의 얼굴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밖에 우스꽝스러운 소문이 났더군요. 후작가에 괴한이 쳐들어와서 후작 부인을 죽이고 달아났다고. 선대 후작은 그것을 보고 실의에 빠져 자살을 했다고. 집안 어른들이 그렇게 무마한 모양입니다.”

이든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영문 모를 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굳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에드윈이 과거 얘기를 한다는 건, 소문과 진실이 달랐기 때문이리라. 이든은 입술을 달싹이고 있는 에드윈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다시 어렵게 입을 뗀 에드윈이 말했다.

“괴한이라면 괴한일지도 모르겠네요. 저희 어머니를 죽인 게 그 사람이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이든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에드윈은 이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를 죽이고 클로에를 그렇게 만든 게 저희 아버지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이든은 미간을 찌푸리며 에드윈을 빤히 바라보았다.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든을 향해 에드윈이 덧붙였다.

“압니다. 지금 제가 하는 얘기가 후작가의 약점이나 다름없다는 것. 수치스러운 가정사죠. 소문이 나면 클로에에게 더 좋을 것도 없고요.”

그 후, 에드윈에게서 나오는 말은 가관이었다. 클로에 린다라는 아이의 삶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얼마나 끔찍했는지.

에드윈이 새로운 사실을 알려줄 때마다, 그녀가 밤마다 울며 제 어미를 찾던 것이 떠올라 이든의 턱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대체 왜 이렇게 비뚤어진 겁니까?”

이든은 눈을 감았다.

‘그따위로 묻는 게 아니었는데.’

“그 아이가 처음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저는 안심했어요. 괜찮아진 것 같아서. 남들 사는 것처럼은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손으로 눈가를 가린 에드윈이 덧붙였다.

“제 기대가 그 아이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모양입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에드윈이 이든에게 말했다.

“그 아이, 다시 후작저로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이든은 그녀를 후작저로 보내 달라는 에드윈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이혼을 원하는 겁니까?”

“그 아이의 입장을 배려해 달라는 뜻입니다. 보나마나 무리해서 한 결혼일 게 뻔한데.”

“…….”

클로에의 입장. 그녀가 이든 록스턴과 결혼한 이유. 그게 그다지 애틋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든 스스로도 짐작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든은 클로에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내키지가 않습니다만.”

난데없이 이든의 거절에 에드윈은 눈만 껌뻑거렸다. 그런 에드윈을 향해 이든이 덧붙였다.

“그 사람이 그걸 원한다면 모르겠지만, 제가 먼저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이든의 말에 에드윈은 나직한 한숨을 터뜨렸다.

“제가 또 멋대로 그 아이를 다루려고 했군요.”

오기든 뭐든 클로에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에드윈이 이든에게 물었다.

“공께서는 좋은 혼처가 많았지요. 그 아이와 달리.”

“무슨 뜻입니까?”

“그저 하나뿐인 오라비의 걱정일 뿐입니다. 각하께서 클로에를 어떻게 하고 싶으신 건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어서요.”

뜻밖의 물음이었다. 린다 후작가의 남매는 그의 말문을 막는 재주가 있었다. 그녀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그것은 이든의 안에서도 정의되지 않은 물음이었다.

그런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일까. 에드윈이 이든에게 하는 말은 그가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동안 그 아이와 그리 가깝게 지내지 않으셨던 것 압니다. 클로에가 고분고분 말을 듣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요.”

요컨대 시답잖은 이유로 그 아이를 데리고 있는 건 아니냐는 말이었다. 이든은 에드윈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 그에게 에드윈이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조금이라도 짐이 된다고 생각하시면 지금 보내 주십시오.”

에드윈은 말을 마치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14년 전, 그때 그는 제 여동생을 지켜 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키고 싶었다. 더 이상 폭군 같았던 아버지는 없고, 그는 여동생을 지켜줄 수 있을 정도의 어른이 되었다.

“저는 두 번 다시 그 아이가 버려지는 걸 바라지 않아요. 공께서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요.”

에드윈이 하는 말에 이든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끝까지 책임질 수 없을 것 같았다면 처음부터 결혼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이제 와서 클로에를 보내 달라니. 에드윈은 이 제안에 이든이 기꺼워할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하지만 이든 록스턴은 클로에 린다를 이대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그걸 위한 방문도 아니었다.

“후작께서는 아직 소문을 듣지 못하셨나봅니다.”

이든의 얼굴에 나긋한 미소가 얹혔다. 그 웃는 얼굴에 어째서인지 에드윈은 묘하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사람들은 제가 요즘 아내에게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린다고 하던데.”

에드윈도 그 소문을 듣기야 들었다. 헛소문일 게 분명하다고 치부했지만 말이다. 클로에가 어떤 아이인지, 그리고 이든 록스턴이 어떤 남자인지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당연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간 모양이다.

이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에드윈을 향해 말했다.

“방금 들은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

에드윈은 그를 멍청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이든은 그런 에드윈에게 한번 웃어 주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에드윈은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무래도 제도에 떠도는 그 소문이 아주 헛소문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마냥 달가워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 * *

타운 하우스로 돌아온 이든은 집 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클로에의 모습에 지나가던 시종을 붙잡았다.

“클로에는?”

“황궁에 가셨습니다.”

“황궁?”

뜻밖의 대답에 겉옷을 벗던 이든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추었다.

“…그게, 황녀 전하께서 마님께 티파티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그걸 또 굳이 갔다는 말인가.

비비안 황녀가 클로에를 황궁으로 초대한 이유야 듣지 않아도 뻔했다. 철없는 황녀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는 걸 그녀도 모르지 않을 텐데.

애초에 당일에 초대장을 보내는 것 자체가 거절해도 할 말이 없는 무례한 짓이었다.

언짢아 보이는 이든의 모습에 시종이 덧붙였다.

“포트먼 씨가 마님을 따라갔으니 별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레이가?”

레이는 클로에라면 질색하는 인사였다. 그런 그가 클로에를 따라 입궁을 했다니.

팔에 걸려 있던 겉옷을 다시 걸친 이든이 시종을 향해 말했다.

“마차를 준비해.”

* * *

“와 주셔서 기뻐요, 공작 부인.”

황녀 비비안이 클로에의 두 손을 잡고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장갑 아래 아직 다 낫지 않은 손등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의중을 파악하듯 클로에가 지그시 바라보자 비비안은 그녀의 손에서 빠르게 손을 떼고는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들떠서 그만…….”

풀이 죽은 듯한 비비안의 모습에 여기저기서 그녀를 위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황녀가 준비한 황궁의 티 룸에는 클로에 말고도 제도의 귀족 영애들과 부인들이 있었다.

“공작 부인은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으시니까요.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황녀 전하.”

클로에에게 멋대로 다가온 것은 비비안 황녀였고, 클로에는 아직 입조차 벙긋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그녀를 순진한 황녀의 기를 죽이는 매정한 이 취급을 했다. 하지만 클로에에게 그것은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상처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클로에를 향해 말했다.

“부인의 얼굴을 보기가 얼마나 힘들던지요. 도통 저희들에게는 시간을 내어 주시지 않아서.”

‘저희들에게는’이라. 요컨대 남자들이랑 어울릴 시간은 있으면서 여인들과의 다과회에는 참석할 생각이 없었냐는 비꼬는 말이었다.

클로에도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오늘의 모임이 어떤 분위기로 흘러갈지는 방금 전의 일로 확실해졌다. 클로에는 그들의 같잖은 도발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아시다시피 제가 좀 바빠서요. 그 이유는 제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여상한 클로에의 대답에 그들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클로에는 이 정도로 자신이 기죽을 거라 그들이 생각했다는 게 더 우스웠다. 세상 사람들의 비난이 무서웠다면 그 이든 록스턴과 결혼하지도 않았을 거다.

“부인께서는 친구가 많으신가 봐요!”

그 사이를 끼어들듯 비비안이 손뼉을 치며 클로에를 향해 말했다. 풋, 옆에서 귀부인들이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클로에는 입술 끝을 매끄럽게 올렸다.

“그러게요. 저를 원하는 친구들이 많네요.”

그러면서 클로에는 나른하게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중얼거렸다.

“가끔은 피곤하답니다.”

귀부인들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클로에를 흘긋거렸다. 부채가 그들의 얼굴을 가리기 전 그들의 얼굴에 스친 경멸과 함께 피어오른 것은 분명한 질시였다.

“그런데 공작님과 함께 오시지 않으셨네요?”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하듯 황녀가 물었다. 그녀가 클로에를 황궁으로 초대한 목적에는 그것도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예. 바쁜 사람이니까요.”

애초에 클로에의 제멋대로인 나들이에 그가 동참했던 적은 없었다. 그것을 바란 적도 없고. 눈앞의 이들이 그것을 알 리는 없겠지만,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 대답을 듣고 비비안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포트먼 경이랑 함께 오셨더라고요.”

갑자기 황녀의 입에서 나오는 레이의 이름에 클로에의 눈썹이 슬며시 역으로 휘었다. 그리고 비비안은 그런 클로에를 보며 빙긋 웃으며 말했다.

“부인께서는 포트먼 경과 가까운 사이인가 봐요.”

“남편의 부관이니까요. 자주 볼 수밖에요.”

“그렇구나.”

비비안은 그렇게 말끝을 흐리며 그녀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공작 부인의 것이지요?”

비비안이 내민 것은 황궁에서 클로에가 잃어버렸던 머리 장식이었다.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제 것이네요.”

“파우더 룸에 떨어져 있더라고요.”

비비안의 말에 클로에는 그날 저녁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녀가 막무가내로 열고 들어갔던 방이 파우더 룸이었던 모양이다.

클로에는 비비안에게서 제 머리 장식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비비안은 해사하게 웃을 뿐, 장식은 주지 않았다. 그리고 물었다.

“포트먼 씨도 함께 계셨죠?”

비비안의 말에 주변이 술렁였다.

파우더 룸은 특별한 일이 없다면 사내들이 드나들 일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함께 드나드는 남편의 부관과 떨어진 머리 장식.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비난받아 마땅한 일까지도 떠올리게 만들었다.

비비안이 무엇을 의도하고 싶은지 클로에도 대충은 짐작했다.

그녀가 클로에를 곤란하게 하고자 했다면 반쯤은 성공했다.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그들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지만 클로에가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것이었으니까. 다행히, 황녀의 반응으로 보건대 그날 있었던 클로에의 기행에 대해서는 모르는 눈치였다.

“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안 궁금하신가 봐요?”

여상한 클로에의 물음에 비비안의 웃는 얼굴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그러나 이내 해사하게 웃는 낯으로 돌아왔다.

“글쎄요? 저는 사내들과는 파우더 룸에 함께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비밀 얘기라도 나누셨나요?”

순진한 비비안의 말에 귀부인들이 웃음기 어린 입가를 가리며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날 선 시선들이 클로에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그것이 그리 아프지 않았다.

“비밀 얘기라면 비밀 얘기였지요.”

그날 일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녀의 치부였다. 바보처럼 테이블 밑으로 기어 들어가 바들바들 떨던 자신을 레이 포트먼이 보았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태연히 대답한 클로에는 비비안의 손에서 제 머리 장식을 가져갔다.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그냥 버리셨어도 괜찮았는데.”

어린 황녀의 치기 어린 질투 정도야 클로에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비밀 얘기라면 비밀 얘기였지요.”

티 룸 안에서 들리는 클로에의 목소리에 레이는 슬며시 이든의 눈치를 살폈다.

티 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레이가 이든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진실이라면 진실, 거짓이라면 거짓이었다.

그 안에서 황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남녀 간의 일이란 건 없었다. 단지 예상치도 못했던 클로에의 이면을 그가 보게 되었을 뿐이다.

최근 이든이 클로에를 대하는 태도로 보건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레이는 클로에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나름대로 노력했다.

“알고 있어.”

이든의 나직한 대답에 그의 뒤에 서 있던 황태자, 비안테는 머쓱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비비안이 또 짓궂은 일을 벌였군.”

이든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하는 비안테를 타박했다.

“알고 계셨으면 좀 말리지 그러셨습니까.”

“명분도 없이 여인들의 일에 내가 끼어들라고? 아쉽지만 나는 자네 같은 팔불출이 아니라서.”

쯧, 작게 혀를 찬 이든이 손짓하자 옆에 서 있던 시종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티 룸의 문을 열었다.

이든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황녀의 앞에서 매끄럽게 웃고 있는 제 아내의 얼굴이었다. 기죽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또 저렇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이든은 어딘가 심란해졌다.

남편의 부관과의 외도를 의심받는 상황에서도 저렇게 웃을 수 있다니.

하지만 태연한 두 사람과는 달리 다른 이들은 크게 동요했다.

“고, 공작님?”

이든의 얼굴을 확인한 비비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비비안. 오라비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구나.”

이든의 뒤에 서 있던 비안테가 입을 열자 티 룸에 있던 모든 이가 일어나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라버니와 공작님이…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나야 공작의 협박을 이기지 못해 온 것일 뿐이란다.”

비안테의 말에 비비안의 시선이 슬며시 이든에게로 향했다.

티 룸에 등장한 이래 그는 비비안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을 뿐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 인사마저도 그녀가 황족이 아니었더라면 하지 않았을 게 느껴질 만큼 형식적이었다.

이든에게 티 룸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그러나 이든은 그런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클로에만을 바라보았다.

“클로에.”

이든의 입에서 나온 클로에라는 이름에 티 룸에 있던 모든 여인들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클로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귀족들의 앞에서 그가 클로에를 이름으로 불렀던 적은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퍽 다정한 사이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내뱉은 낯선 제 이름에 클로에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 클로에를 보며 이든은 웃으며 말했다.

“황궁에 갔다고 해서 놀랐어요.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황실에서 티파티가 있던, 시장 바닥에서 무도회가 열리던 클로에가 제 행선지를 이든에게 말하고 다녔던 적은 없었다. 이렇게 클로에의 행선지를 파악하고 있다는 양 말을 하는 것은 비비안의 무례한 초대를 경고하는 게 분명한 말이었다. 그 의도를 눈치챈 비비안은 움찔했다.

그런 비비안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든이 말을 했다.

“데리러 왔어요.”

데리러 왔다는 이든의 말에 귀부인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귀족들 대부분이 정략결혼을 한다. 클로에처럼은 아니더라도 정부를 두는 귀족들이 많았고, 대부분 제 배우자보다는 애인의 마중을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제 배우자를 데리러 몸소 왔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무렇지 않게 데리러 왔다고 말하는 그 모습에서 그들은 새삼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다시 깨달았다.

이들 중 몇몇의 남편은 황궁의 문턱조차 넘기 어려웠다. 애초에 이들 역시 황녀의 변덕이 아니었다면 오늘 티파티에 초대되지도 못했을 변변찮은 가문의 부인들이었다.

입지가 탄탄한 귀부인들이었다면 비비안이 치기 어린 마음에 연 이 티파티에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클로에가 어떤 사람이든 록스턴 공작가를 건드려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만 돌아가죠.”

이든은 멍하니 서 있는 클로에의 손을 잡은 채 흘긋 비비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감정이 비치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황녀 전하. 무례를 용서하시길.”

이보다 더 완벽한 거절은 없었다. 턱을 바들바들 떨며 아무 말도 못하는 황녀에게서 등을 돌린 이든은 클로에를 데리고 티 룸을 빠져나갔다.

그때 클로에의 손에 들려 있던, 비비안이 돌려준 머리 장식이 떨어졌다. 그것을 주운 것은 다름 아닌 레이였다.

사르륵 흘러내리는 자신의 머리를 귀 뒤로 넘긴 레이가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부인들을 향해 싱긋 웃었다. 사교용 미소였다. 레이 포트먼은 절대로 남들에게 저런 식으로 웃는 인사가 아니었다.

곱상한 그의 웃는 얼굴에 귀부인들 중 몇몇이 얼굴을 붉혔다.

“실례했습니다. 마님께서 이것을 자주 떨어뜨리네요.”

레이는 평소에 클로에를 향해 쓰지도 않던 마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 후, 그의 시선이 황녀에게 닿았다. 레이는 빙긋 웃으며 황녀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한 말씀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씀, 하세요.”

비비안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레이는 꾸벅 감사의 인사를 하고선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께서는 마님에 한해서는 걱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제가 마님을 따라 파우더 룸에 따라간 게 이것으로 설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레이는 말꼬리를 늘이며 예의 바른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파우더 룸에 머리 장식이 떨어져 있는 일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파우더 룸의 용도는 본디 여인들이 화장을 고치고 머리를 다듬는 곳이었다. 달리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레이의 말에 비비안과 귀부인들의 얼굴이 수치심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레이는 아랑곳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클로에의 머리 장식을 든 채로 이든의 뒤를 따르는 레이를 보고 있던 비안테는 귀부인들을 향해 말했다.

“파티가 이미 파한 것 같은데. 타고 돌아갈 마차는 있으신지?”

축객령이나 다름없었다. 황급히 그를 향해 인사를 올리고 티 룸을 벗어나는 귀부인들을 바라보던 비안테가 제 여동생을 향해 말했다.

“과했다, 비비안.”

“오라버니!”

“나는 널 제법 사랑스럽게 여긴다만, 말했잖니.”

비안테가 비비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나는 이든 록스턴의 편이라고. 그를 불쾌하게 만들지 말거라. 아끼는 신하를 잃고 싶지 않거든.”

제 오라비까지 세 명의 남자에게 연달아 쓴소리를 들은 비비안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티 룸을 나서는 비안테의 귀로 찻잔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제 여동생에게 시달릴 것을 생각하니 그는 벌써부터 두통이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 * *

공작가의 마차 앞에서 비안테가 클로에를 향해 말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공작 부인. 그 아이가 아직 철이 없어서.”

“아직 어리시니까요.”

클로에의 대답에 비안테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서는 보통 아닙니다, 전하, 하고 그의 비위를 맞출 법도 한데. 색다른 반응에 비안테는 그녀에게 호감마저 느꼈다.

“전에는 미처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눴네요. 비안테 시아누…….”

비안테가 클로에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 때였다. 그들 사이에 옆에 있던 두 남자가 끼어들었다.

비안테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두 남자를 떨떠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뭐 하는 건가?”

비안테가 내민 손은 클로에가 아닌 이든이 잡고 있었고, 클로에의 앞은 레이가 슬며시 가린 채였다. 마치 그녀를 보호하듯이.

이든과 레이의 눈이 마주쳤다. 두 남자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깨뜨린 건 비안테의 푸념이었다.

“내가 뭐 칼이라도 빼든 줄 알겠어.”

이든에게 잡힌 손을 빼 들며 비안테는 무해하다는 듯 두 손을 들어보였다. 두 남자의 유난에 클로에가 다 머쓱해질 지경이었다.

미묘해진 분위기에 비안테가 화두를 돌렸다.

“북부로는 언제 돌아갈 셈이야?”

비안테의 물음에 클로에는 이든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제도로 내려온 것은 단순한 변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북부로 올라가게 되면 무언가 바뀔 거라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녀 자신이든 다른 무엇이든, 어쨌든 그녀가 바라는 건 아니었다.

변화는 두렵다. 지금 이 위태롭고 엉망진창인 삶마저 그녀가 간신히 찾아낸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그것도 겨우 버티고 있는데 변화라니. 클로에에겐 힘들었다.

그런 클로에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이야기는 진행되었다.

“황녀 전하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돌아갔을 겁니다.”

“거기에는 나도 이견이 없군.”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응수하는 비안테의 곁으로 시종 하나가 다가왔다. 그가 비안테의 귀에 뭐라고 속삭이자 비안테의 얼굴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비비안이 분에 못 이겨 또 무슨 사고를 치는 모양이야. 이만 가 보는 게 좋겠어.”

비안테의 말에 이든이 질린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었기에 비안테는 비비안을 두둔했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그대가 좋다고 그러는 건데.”

그 말을 듣고 이든은 살짝 곁눈질을 하더니 클로에의 소맷자락을 잡으며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관심 없습니다.”

비안테는 이든이 잡고 있는 클로에의 소맷자락을 흘긋 내려다보며 흐응, 하고 웃었다.

손목도 아니고 소맷자락이라니. 저 애들 소꿉장난 같은 짓은 뭐란 말인가.

이든 록스턴답지 않은 소심한 행동에 비안테가 흥미가 동하려는 찰나, 멀리서 와장창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안테는 작게 혀를 차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멀어지는 비안테를 바라보던 이든이 클로에에게 물었다.

“이런 곳에 뭐 하러 옵니까. 나한테 말도 없이.”

“당신도 나한테 오늘 어디 가는지 말 안 해 줬잖아요.”

말하고 나니 투정처럼 들리는 것 같아 클로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든은 그런 클로에를 향해 덤덤하게 물었다.

“이만 돌아가는 게 어때요.”

타운 하우스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든은 클로에에게 북부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

클로에가 입을 다물자 그가 다시금 그녀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그러다 슬며시 그녀의 손목에 손가락을 감았다. 그녀가 피하고자한다면 피할 수 있을 만큼 느릿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클로에는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돌아가요, 이제.”

그녀가 싫다고 해도 어차피 돌아가야 했다. 그걸 그도 모르지 않을 텐데 굳이 저런 식으로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안 돌아가도 되나요?”

혹시나 해서 묻는 클로에를 향해 이든이 대답 없이 웃었다. 안 된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서늘한 웃음이었다.

“안 될 거면서 자꾸 물어보지 마요.”

클로에가 새침하게 대꾸하자 이든이 쿡쿡 웃었다.

마차를 타고 타운 하우스로 돌아가는 와중에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북부로 돌아가기 싫어요?”

“…그건 아니에요.”

달라진 눈앞의 남자가, 앞으로 달라질 것 같은 미래가 조금 두려워졌을 뿐이다.

속내를 감추며 입을 꾹 다문 클로에를 향해 그가 말했다.

“내가 잘할게요, 앞으로.”

“내가 언제 그런 걸 걱정했다고…….”

클로에의 말이 끝을 맺지 못하고 끊어졌다. 그가 나른하게 웃으며 클로에의 장갑 위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고 있었다.

그곳은 상처가 있는 손등 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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