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1 화 회색 악몽
"...... 젠장"
해가 지고 나서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폭우를 맞으며 네로는 벌써 몇 번인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작금의 상황과 변덕스러운 가을 하늘이 내리는 비부터 젖어서 무거워진 영광스런 빨간 망토까지 모든게 불편했다.
(나는 ... 뭐하는거지 ...)
다시 넬에게 갈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남자 기숙사에 얌전하게 돌아갈 기분도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목적지없이 스파다의 거리를 방황하고 있는것도 특별히 재미있지는 않다.
불만스러움 - 아니, 네로의 가슴에 모여가고있는 것은 전에없던 분노다.
마음이 부서진 넬. 누구보다도 소중한 동생에게 지금의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걸 싫어도 실감했다.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동생을 미치게만든 원흉에 대한 분노.
지금은 둘다 해결할 수 없다.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게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이 정도까지 답답함에 시달린 것은 인생에서 두 번째다.
그때는 어떻게든 회복했다 - 아니, 포기했다. 아니, 스스로 단념했다. 저것은 처음부터 자신에게는 필요없었다고 되뇌이며.
그러나 그 경험은 전혀 도움이 되지않았다. 넬을 "필요 없다"고 버리는 것은 오빠로써, 왕자로써, 무엇보다 한 명의 남자로서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나도 카이처럼 바보같이 결투를 신청했어야됬나 ...... 아니, 진심으로 죽여 버렸겠지 ...)
죽여도, 어차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바꿀 수 없다. 자신이 화풀이해봐야 의미없는 것이다. 넬이 다시 건강하게 웃게되야 -
"네로 율리우스 엘로드, 맞나?"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네로의 의식이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시선을 올리자 눈에 들어온 것은 어둡고 흐린 날의 밤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검은 석판과 거기에 새겨진 밝은 백색광을 뿜어내는 고대 문자.
고대의 마왕이 판도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글이 새겨진 기념비, [제로 크로니클]이다.
아무래도 자신은 지금 신학교 근처에있는 광장을 걷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다른 사람이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귀찮은데다 대꾸해줄 기분이 아니다.
"...... 그런가"
남자의 혼잣말은 신경쓰지않고 네로는 그대로 똑바로 걸어 - 가려고했지만, 한 걸음 내딛으려던 다리가 멈췄다.
얇게 웅덩이가 생긴 조약돌길위를 딱딱한 신발 바닥으로 딛고 선 채 잠시 틈을 두고, 네로는 뒤돌았다.
"네놈, 누구냐?"
불현듯 살기를 내뿜으며 강한 경계를 드러내는 네로. 허리의 애도에 손이 가있진않지만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즉시 뽑을 수 있을만큼의 주의를 기울이고있다.
그에비해 남자는 아무반응이 없다. 뒤돌아본 네로는 남자의 모습을 제대로 보게되었다.
회색 로브에 모자를 깊게 써서 표정은 엿볼 수 없다. 육체도 나름대로 단련되었다는걸 두꺼운 겉옷 너머로도 어쩐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모습은 아니다. 스파다의 인파에 섞여있으면 사람의 눈을 끄는일은 없을 것이다.
이 심하게 수수한 모습의 남자는 네로와는 반대로 살의도 적의도 비치고있지 않다. 물론, 수상한 움직임도 없고 마법 발동의 기색조차없다. 단지 폭우를 맞으며 그 자리에 조용히 멈춰서있을뿐이다.
"상당히 기합이 들어간 놈이군. 내가 상당히 감이 좋은 녀석이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거야"
회색 남자에게서의 반응은 없다. 하지만 이 광장 전체에 사람을 자연스럽게 몰아내는 암시 · 최면 효과가있는 결계가 전개되어 있었다. 그것도 기색 감지가 날카로운 네로조차도 주의를 기울여야할 정도의 상급 은폐까지 걸려있다.
그런 결계 안쪽에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증거는 충분하다. 이런 정교하고 수상한 장치를 준비한 범인이 회색 로브의 남자인 것은 분명하다.
네로는 다른 동료가있을 가능성에 대비하고 사각에서의 공격또한 경계하며 남자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여전히 남자는 무방비하게 선 채로 조용히 입을 열뿐이었다.
"한가지, 묻겠다. 너는 마왕이 되는건가?"
"...... 응?"
너무나도 뜬금없는 질문. 설마 방심을 유발하는 작전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기습해올 기미는 없다.
빗소리만이 울리는 침묵이 이어지길 수십 초. 결국 네로는 대답했다.
"아발론의 왕이 될 수는 있겠지만, 마왕에 한해서는 아니다. 절대로"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네로는 명확하게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보통이라면 "몰라" 라고 애매하게 일축했겠지만, 이 물음에 대충 대답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고대의 마왕 미아 엘로드의 직계인 네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어도 운명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지 - 나처럼 말이다"
"헛소리 집어ㅊ - 우오옷!? "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방어했다.
정신이 들어보니 네로는 허리에서 [백왕앵]을 꺼내어 날을 겨누고 있었다.
"나쁘지않은 반응이다"
마치 그림을 품평하는 것같은 어딘가 거만한 말투. 네로가 가장 싫어하는 말투지만 지금은 분노보다 경악이 마음 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갑자기 칼을 휘둘러온 남자의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까불지 - 마!"
갑작스런 기습을 힘으로 밀어냈다. 아니, 남자가 스스로 물러났을 뿐이다.
"하, 귀찮아. 어느 조직에서 온 암살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목을 취할 생각은 버려라. 거기에 살아돌아갈 생각도 버리고."
적당히 너스레를 떨며 네로는 방심하지않고 상대를 관찰했다.
역시 남자의 모습이나 분위기에 변화는 없다. 언제 꺼내든 것인지, 어디에 숨기고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한 자루의 장검을 들고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검도 언듯 보기엔 스파다에서 파는 양산품이다. 인챈트는 커녕, 소재도 고품질 강철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저 놈은 가장 낮은 등급의 검으로 랭크 5 모험가인 네로가 휘두르는 국보급 마법 검과 단 한 합이지만 대등하게 겨룬 것이다.
네로의 날카로운 직감이 전력으로 경종을 울렸다. 이놈은 나보다 강하다, 고.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생각했다.
(격상의 상대는 이미 쓰러뜨려본 경험이 있다!)
" - [찰나 - 일섬]"
평소같은 횡베기가 아닌 수직으로 날린 원거리 공격이 광장의 포석에 깊숙히 박혔다. 하지만 그것 뿐이다.
(칫, 완전히 피한건가)
남자는 겨우 오른쪽으로 반보 이동한 것만으로 회피했다. 보고 피했다기 보다는 그 자리에 공격이 날아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여유로운 움직임이었다.
네로의 감상은 옳다. 이것은 찰나의 수 읽기가 아닌 완전한 회피이기 때문이다.
(저건 그저 직감이 날카로운게 아니야. 내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거나 전신 수준으로 '읽고'있는 건가 ...... 젠장, 정말로 귀찮은 녀석이야)
위기감이 한층 더 상승했을 무렵, 여유롭게 회피해보인 남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힘찬 발걸음, 빈틈없는 자세, 아무리봐도 일류 검객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공격 동작이지만 - 보인다.
(긴장시키다니, 귀찮게하긴!)
진심으로 움직이면 집중하기 시작한 네로의 동체 시력으로도 예측이 불가능한 움직임이 가능한 사람이다. 그것은 첫 일격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실력으로 밀리는 사람에게는 이런 방심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이다.
그리고 네로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칠 정도로 네로는 친절하지않다. 지금은 그럴 여유도없는 것이다.
"[일섬]!"
네로가 요격 기술로 선택한 것은 가장 기초적인 무예인[일섬=슬래시]
남자의 실력에 맞게 약하게 조절한 것이 아니다.
기초이기에 그 사용법은 발군. 오른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발동가능하다.
일대일 승부에서 승패는 화력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상대를 죽일만한 위력이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도' 라는 무기와 이도류라는 스타일에 맞게 개량한 네로의 [일섬]은 적어도 인간일 저 남자를 죽이기에 충분한 위력을 지니고있다.
(하지만,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 )
일격 필살로는 부족한 [일섬]은 또 다시 공격을 완전히 읽는 남자에 의해 손쉽게 피해져버릴것이다.
옆으로 휘두른 칼날은 허무하게 회색 후드의 몇 센티미터 위를 갈랐다.
이 남자는 지금 헛 스윙한 네로를 빈틈 투성이로 볼 것이다. 수련용 허수아비나 다를바없다고 말이다.
애도를 쥔 오른손은 이미 늘어져있고 왼손은 완전히 비어있다.
맨손으로 상대의 참격을 받아내는 기술은 고류 유술에도 있지만, 확실한 실력 차이를 보이는 이 남자에게 통할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끝났다 -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것이 네로의 전략이었다.
남자가 휘두르는 장검의 칼날이 움직이기 전에, 네로의 2격이 날아들었다.
" - 나와라, [신뢰]"
발동한것은 네로의 고유 마법 [블레이드 스킬]. 왼쪽 손등에 떠오른 황금의 마법진은 발현하는 속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번개. 신속의 속성. 물론 발동 속도도 빠르다.
네로의 빛나는 왼손이 날카롭게 뻗어나감과 동시에 사나운 번개빛 칼날,포스 엣지가 현현했다.
"[자돌산화]!"
[신뢰] 전용 무예의 기본 동작은 [찌르기]다. 상체를 약간 굽히고 제로 거리에서 쏘는 자세.
단지 그것만으로 바위도 꿰뚫는 강렬한 일격이지만, 번개 검에 의한 무예는 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다.
출현한 순간엔 약간 변형된 칼날과 칼자루 뿐이었지만 무예의 발동에 따라 그 형태가 변화했다. 아니, 폭발에 가깝다.
마치 샬롯의 [라인 포스 익스플로젼]과 같이 전기로 된 날이 한번에 튀어 나옴과 동시에 전면의 모든 것을 뇌격이 베어넘긴다.
이렇게, [찌르기]라기 보다는 단거리 범위 공격 마법에 가까운 기술이다.
공간 전체를 커버하면 아무리 공격을 감지한다해도 피할 수 없다.
(그래도 너는 피하겠지!)
남자에게 남겨진 유일한 회피 장소. 그것은 무예를 발하는 네로의 앞. 뻗은 왼손보다 더 안쪽이다.
네로의 기대에 부응하듯이 남자는 해방된 만뢰의 찌르기에도 주눅 들지않고 깊게 스텝을 밟아 훌륭하게 안전 지대로 도망쳐보였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공격 자세를 유지한 채로 회피하는 것은 곤란했는지 칼을 휘두르던 자세를 무너뜨리고 네로의 왼쪽으로 크게 넘어오는 듯한 자세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1격인 [일섬]에 이어 2격으로 [자돌산화]를 날린 네로. 그에 비해 공격 기회를 잃고 자세를 무너뜨린 남자.
어느 쪽이 더 빈틈이 많은 상황인가.
하지만 현실에서는 남자가 먼저 다음 손을 쓰고 있었다.
" - 큭!"
남자는 네로가 [신뢰]를 쥔 왼손의 손목을 붙잡고 서있었다.
이미 칼을 쥐고 있지 않다. 이 서로의 손이 닿는 초 접근전에서 그것이 무용지물인 것은 분명하기에 그는 검을 버리고 격투술을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나오는건가. 아니, 너라면 여기까지 올거라고 생각했다!)
잔챙이라면 [일섬]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숙련자라면 [자돌산화]에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실력자라면 두 사선을 뚫고 자신에게 도달할 것이다 - 네로는 처음부터 그렇게 예상하고 있었다.
"잡았다!"
왼쪽 손목을 잡은 남자의 손, 그것을 다시 네로의 오른손이 붙잡고 있었다.
오른손에 있었을 [백왕앵]은 [자돌산화]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놓았다. 결과적으로 남자와 네로는 똑같은 타이밍에 칼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네로가 기다려온 진정한 기회.
"一[제 1형 흘리기]!"
사용한 것은 고류 유술. 상대의 힘을 제어하고 그 기세를 반대로 자신의 공격으로 사용하는 기본기. 물론 이것도 일섬과 마찬가지로 강력하고 전능 한 성능을 자랑한다. 그러므로 기초 무예이다.
남자의 손에서 발생하는 힘의 흐름 - 그 감각에따라 네로를 힘껏 끌어 무너뜨리려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근접전에서의 정석같은 흔한 수법. 하지만 그 간단한 동작에 가해진 힘은 근육 바보 카이에 필적할 정도다. 순수한 육체 능력에서도 엄청난 스펙을 엿볼 수 있으니 역시 이 남자의 실력은 무궁무진한듯하다.
그래도, 아무리 힘이 세도 고대의 마왕이 자랑하던 고류 유술의 기술 이치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이 기술은 단지 "나보다 약한자를 제압하는"단순한 격투술이 아니다. 순수한 힘에따른 물리적 운동 에너지를 몸으로 받아들이고 달인의 기술을 다한 후 거기서 더 나아가 - 이렇게 마력을 이용한 에너지의 벡터 조작을 더한 '무예'인 것이다.
상대의 힘을 효율적으로 받아넘기기위해 마법에 의한 에너지 제어가 물리 법칙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는 강력한 반격을 가능하게한다.
그 거구를 자랑하던 랭크 5 모험가의 돌진도 한손만으로 가볍게 날려버렸다.
이스키아 마을의 모험가 길드에서받은 구스타브의 일격에 비하면 이 남자의 힘도 대단하지는 않다.
네로의 실력으로 충분히 다룰 수 있을정도의 힘이다. 발동 실패 따위가 있을 수 없다.
다음 순간, 남자의 몸은 비에 젖은 조약돌을 부술 기세로 내던져 - 졌어야 할 터였다.
" - [제 2형, 반환]"
(응? 방금 이 녀석, 뭐라고 -)
그순간, 네로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믿을 수 없다"라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왜냐하면 상대에게 흘린 모든 운동 에너지가 그 순간 일제히 반전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을 향해.
"- 가핫!?"
냉정한 현실은 네로에게 결과를 내보였다.
단단한 조약돌에 내던져진것은 상대가 아닌 자신.
겉보기엔 남자가 그저 힘껏 네로를 땅에 팽개친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간부 후보생의 증거인 붉은 망토에 감싸인 허리가 강하게 부딫혔다. 닿은 면적만큼의 땅이 깊이 함몰되며 그 주변이 얕게 패였다.
퍼석 퍼석 산산히 깨어진 포석이 충격으로 분출됬다. 하지만 그 연막을 굉장한 기세로 헤쳐나가는 그림자가 하나.
말할 나위도없이 네로의 몸이다.
바닥에 내던져진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도대체 거기에 어느정도의 파괴력이 담겨있었는지 네로의 몸은 크게 튕기며 그대로 더 날아간 것이다.
가볍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 몸을 맞이한 것은 다시 회색 조약돌 - 대신 칠흑의 석판이었다.
중력의 굴레에 얽매여 자유 낙하를 시작하기 전에 이 수십 미터 × 3 미터의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마치 마왕의 손인 것 마냥 네로의 몸을 차갑게 받은 것이다.
"...... 큭 ......윽, 아 ......"
어디까지나 엄숙하게 자리 잡은 고대의 유물 '역사의 시작 - 제로 크로니클'을 앞두며 고통스런 숨을 내쉴 수 밖에없는 네로가 웅크렸다.
마왕을 기리는 기념비의 눈앞에서 그 머나먼 후손이보기 흉하게 기어다니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무예, 마법, 거기에 체술까지. 그 젊은 나이에 이 정도라니, 대단하군"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귀에 닿았지만 그 말은 네로의 신경을 거스르기에 충분했고 완벽히 '불쾌'했다.
(젠장 ...... 깔보다니 ...)
흐릿한 시야에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비친다.
칼은 없이 맨손이지만, 그래도 이 남자라면 맨손으로도 쓰러진 상대에게 결정타를 날리는 정도는 지극히 쉬운일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공포보다 분노가 앞선다. 하지만 그런 감정만으로 일어설 수 있을 정도로 얕은 부상이아닌 것도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가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젊음의 치기라고나 할까. 최고위 모험가라면 가지고있을텐데 -"
"......큭, 닥쳐!"
하지만 남자의 조심성없는 한마디가 네로의 역린을 건드렸다.
뇌에서 불길한 기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오로지 전설의 마왕만을 동경했던 어리석은 자신이. 그 노력의 끝에있는 고통과 굴욕과 무위가.
그것을 떠올리자, 이번엔 타오르는 분노가 몸을 움직였다. 정신이 육체를 능가한다.
"웃기지 마! 누가 신 따위에게 의지할까보냐!"
" - 흠, 지금은 의지하는게 좋을텐데?"
네로가 과감히 일어서려고 한 그 순간, 어딘가 얼빠진 부정의 대사가 겹쳐흘렀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장난치는듯한 - 아니, 그 목소리엔 확실히 아이의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높이와 부드러움이 있었다.
"당신은 -"
소리가 들려온 방향, 즉 배후를 되돌아보자 시선의 끝에있던 것은 예상과 다르지않게 확실히 한 아이가 있었다. 그러나 네로의 붉은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검은 석판, '제로 크로니클'에서 나오고 있었으니까.
주의해서 보면,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고대부터 불변했던 흰색 문자는 어느새 진홍의 색조로 빛을 바꾸고 있었다. 또한 그 배열까지도 크게 변화했다는게 눈에 띄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마법진. 피처럼 새빨간 고대 문자로 구성된 원형 배열이 거대한 칠흑의 캠퍼스를 가득 사용해 그려진다.
그 마법진의 중앙에서 유령처럼 자연스럽게 칠흑의 비석을지나 "읏차"작은 목소리를 흘리며 그 아이는 네로 바로 옆 껑충 내려섰다.
"진정한 용사가 이런 곳까지 출장와주길 빌 수는 없으니까. 이번만큼은 특별한거야?"
수수께끼의 아이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네로를 내려다 보면서 단언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 동그란 붉은 눈동자. 그 어린 나이에 걸맞은 가련한 외모는 본 기억이 없다. 그 아이가 몸에 걸치고있는 것은 신학교의 남자 교복이지만, 역시 학생중에 본 기억 따윈 일체 없다.
하지만 그 모습이 의미하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깨닫고 말았다.
"흑발 적안 ...... 설마!?"
"그 설마가 맞지만 ...... 미안해, 동생 넬 짱과 마찬가지로 너도 잊어줘야겠어. 이 앞부터는 사람이 아닌 신의 영역이니까 - "
요염하게 흔들리는 진홍의 눈동자에서 네로는 눈을 뗄 수 없게됬다.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빨려들어가듯이. 다음 순간엔 의식조차 저절로 바뀌었다. "보이지 않는다"에서 "보지 않겠다"로. 압도적인 강제. 절대 복종.
하지만 그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 아이의 정체에 대해 더 깊이 알게되면 - 그러면서 네로는 더욱더 의식을 유지할 수 없게되었다.
"으, 그 ...... 뭐, 야 그건 ...... 의미를, 모르겠어 ...... "
빠르게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이름 모를 회색 남자와 이름 모를 사람이 아닌 까만 아이가 대치하는 광경을 네로는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