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3 화 쓰러진 공주님
"넬, 기분은 어때?"
"예 ...... 괜찮습니다 ......"
네로는 그 대답을 말 그대로 믿을 정도로 둔감하지않다.
깨끗하게 정돈된 면학에 힘쓰는 학생이 쓸법한 방. 심플하면서도 고급인 스파다제 침대에 넬이 몸을 눕히고있다.
이곳은 왕립 스파다 신학교 간부 후보생 전용의 여자 기숙사이다. 즉, 스파다 유학 중에 넬이 생활하는 자기 방이다.
원래는 금남인 여자 기숙사에 네로가 당연하다는듯이 들어와있는 이유는 병문안이라면 출입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나, 언제까지나, 라는건 아니다. 제한이 걸려있다.
어쨋든, 네로는 이스키아 고성에서 귀환하기 직전에 갑자기 쓰러진 동생의 병문안을 와있는 것이다.
"무리하지말고 천천히 쉬어"
"네, 오라버니 ......"
"자, 네가 좋아하는 '스위트 스마일' 푸딩 사왔어. 냉장고에 넣어둘테니 배고플때 먹어"
"...... 감사합니다"
자신의 말은 정말로 동생에게 닿은 것일까. 네로는 의심과 불안을 품었다.
넬의 활짝 갠 푸른 하늘같던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는 도대체 어떤 절망을 겪었는지 어둡고 공허한 색으로 변해버렸다.
게다가 심한 악몽에 시달려 수면 부족인 듯하다. 눈에 선명하게 새겨진 다크서클이 그녀의 정신적인 고통을 여실히 나타내고있다.
안색도 핏기가 가신 것처럼 창백하고 단아한 흑발도 어딘가 윤기를 잃은 것 같았다.
그래도 넬의 미모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닿으면 부셔져버릴 듯이 무르고 덧없어서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아름다움. 순진 무구하고 청초 가련한 그녀 본래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 참혹한 모습에 더 이상두고 볼 수 없다는 듯이 네로는 시선을 돌렸다. 그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책상 위에 넬이 보고 치우지않은 듯한 마법 교과서. 해당 페이지에는 [호루스 부스트]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파티원이없는 동안에도 넬은 혼자 공부에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노력하는 넬의 일면을 엿본 네로는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기특하고 분발하던 동생이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아니, 그 원흉에대해선 이미 짐작가는게 있다.
"...... 넬, 그 남자, 크로노와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크, 크로노 군에 대한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병에 걸려 약해진듯한 넬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마치 인격 자체가 급변한 것 같은 이상한 반응이지만 네로는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막상 그것을 다시보니 내심의 동요를 억누를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네로가 노골적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기분나쁘다는 표정을 지어도 지금의 넬은 조금도 신경쓰지않지만.
"크로노 군은 나쁘지 않아요 ...... 제가, 제, 가 ......"
중얼 중얼 의미없는 혼잣말을 반복이는 넬의 모습은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그나마 나아진 편이다.
넬이 쓰러진건 윙로드의 세 멤버가 이스키아 고성으로 돌아와 드디어 스파다로 돌아갈 때였다. 정확하게는 이미 쓰러져 있었다.
문득 생각나서 모습이 보이지않는 동생을 찾던 네로는 무너진 성벽 위에 쓰러진 넬을 발견했다.
구토한 흔적이 보였지만 다행히 기절해있을 뿐이라는걸 알고 스파다 기사단도 이미 이스키아 고성에 도착해 있어서 프리스트에게 검진받을 수 있었다.
아마도 넬의 증상은 [레디안스 · 에그]의 발동과 그 이후에도 계속된 전투에 종료 후에는 무리하여 학생들에게 치유 마법을 행사한 것때문에 마력 부족 증상일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기사단의 프리스트도 그렇게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넬이 쓰러진 이유는 마력 부족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이 원인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눈을 뜬 그녀의 첫 반응은 우는 것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큰소리로, 마치 울보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버린 것처럼 눈물을 펑펑 쏟았다.
오빠인 네로, 친구인 샬롯이 이유를 물어도 넬은 완고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차분해진 듯하더니 이번에는 심하게 우울해보이는 모습으로 역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소한 것에 또 다시 펑펑 우는 것이었다.
그런 넬의 모습은 왕족으로서도, 한 명의 소녀로서도 보일 수 없다. 개선 퍼레이드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스키아에서 스파다까지의 마차에선 잠만잤고 겉으로는 "마력 부족에 따른 쇠약에따른 특별 반송" 이라는 이유였지만 사실은 정서 불안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넬은 이 여자 기숙사의 자기 방에서 요양중이다. 방으로 돌아온 넬은 갑자기 우는일도 없어지고 다소 진정한 듯 했다.
이렇게, 네로가 크로노의 이름을 입에 담기 전까지는.
"큭, 우, 우우 ...... 크로노 구우우우우운 ......"
"미안, 넬. 이제 됐어. 이제 괜찮으니까 얌전히 자고있어"
비통한 표정으로 굵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여동생의 모습을 본 이상 더 물을 수는 없다.
그럭저럭 진정시키고 침대에 다시 눈을 감은채 조용해진 넬을 보면서 네로는 확신했다.
"...... 너 때문이군, 크로노"
동생을 미치게 한 원흉은 그놈이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멈추지 않고 솟구치는 살의. 타인에게 좋든 나쁘든 관심이없는 자신이 이정도의 증오를 품은 적이 있었을까?
아니, 있었을 리가 없다. 네로의 소중한 사람에게 태연히 손댈 수 있는 놈은 야생 몬스터 정도 밖에 없다.
하지만 믿기 어렵게도, 지금 이때 아발론의 첫째 공주인 동생을 이렇게 미치게할만한 뭔가를 저지른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크로노. 그 남자는 도대체 언제부터 자신의 귀엽고 세상에서 누구보다 소중한 여동생에게 접근, 아니, 손을 댄것일까.
넬이 남자의 이름에 '군'을 붙여서 부르는 일은 처음이다. 파티 멤버인 카이에게도 '씨'를 붙일 정도다. 그 호칭 하나로 넬이 크로노에게 다른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열고 있다는걸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사람, 오빠인 자신을 포함해서.
"안되요! 죽지마세요! 크로노 구우우운!-"
그리드고아 전 때부터 뛰쳐나올정도의 폭거를 보인 넬은 크로노 밖에 보지 않았다. 오빠인 네로는 신경도 쓰지않은데다 "비켜요!"라며 단순한 방해꾼 취급. 아마도 넬을 말리며 그리드고아의 브레스를 막고 메고 도망친 인물이 네로였다고 인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건 마치 싸우는게 처음인, 시야가 좁은 신인 모험가같았다. 그런 흉한 사람이 랭크 5라니, 말도안된다.
아니, 네로는 어떤 때라도 동생을 나쁘게 말하지않는다. 치유 마법 밖에 쓸모가 없고 방향, 음치에 요리가 맛이 없어도.
그러므로 크로노. 그 놈이야말로 증오해야할 대상이다. 지금 당장 이 애도로 베어버리고 싶다 -
그 격정을 억누르는데는 조금의 시간과 각오가 필요했다.
예의 넬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 남자에게는 궁금한 점들이 많이 있으니까.
먼저 놀란점은 결과적으로 그리드고아를 처치한 그 실력이다.
네로가 목덜미에 남긴 [고섬]의 타격을 이용하여 치명상을 주긴했지만 그 것만으로 "나의 공적"이라고 할 정도로 거만하지는 않다. 아무리 미워도, 한 명의 모험가로서, 아니, 한명의 남자로서 크로노의 전투 능력 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 그 남자는 자신에 필적할 정도의 힘이 있다. 일대일로 결투하면 아마 무사히 승리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최악, 팔 하나 정도는 각오해야 할것이다.
그만큼 강한 모험가가 나타난 일은 스파다 사람들에겐 솔직하게 기뻐해야 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네로는 싫은 예감이 들었다.
크로노의 파티, [엘리멘트 마스터]에 대해서는 이전, 식당에서의 사건이 있었던 직후에 조금 조사해봤다. 굉장한 기세로 랭크 업한 기록이 있고 라스의 오른팔을 잘랐으니 급부상해도 이상하지않을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현실은 그 예상의 더 위를 지났지만.
그래서 불안하다. 그정도의 실력을 갖고있는 사람이 왜 갑자기 스파다에 나타난걸까.
모험가로서의 명성을 원한다면 더 이전부터 활약해도 이상하지않다. 그렇지 않아도 스파다에서 모험가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더 빨리 눈에 띌 수 있는 퀘스트도 있었을 것이다.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노를 포함한 파티원들은 신학교의 모험가 코스에 다니며 평온한 학창 생활을 보냈다.
힘을 숨긴채, 눈에 띄지않은채로 조용히 즐거운 생활을 보내고 싶을 뿐일수도있다 - 그런 기분을 네로가 모를리도 없다. 왕족으로서 눈에 띄는 일에 적지않은 불만을 안고있는 이상, 그런 생활이 이상적일 정도이다.
하지만, 그 섬뜩한 기운을 발하는 크로노가 그런 평화주의자가 아닐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최악의 상상 중 하나가 네로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교섭 ......인가"
신학교에서 놀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크로노는 스파다의 둘째 왕자인 윌 하르트에게 접근하기 위해 왔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얼마나 지지율이 낮은 망상 왕자라도 왕자는 왕자. 게다가 그 검왕 레온의 아들이다.
왕족이라는 권력자를 손에 넣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는 도대체 어떤 야망을 품고있단 말인가.
마치 고대의 마왕 전설이나 창작된 영웅 전기에서 볼 수 있는, 동란의 기색이 느껴지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황당한 소설, 지나친 망상이라고 웃어넘기기엔 크로노의 행동은 결과를 보이고있다.
윌 하르트는 완전히, 영혼의 동지, 나이트 메어 버서커라고 불리는 크로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고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발론의 첫째 공주인 넬 율리우스 에루로도 - 다시 증오의 불길이 솟구쳐 오르려는 순간 깨달았다.
아니, 넬만이 아니다. 자신도 그렇다.
"피오나는 ...... 그런, 건가 ......"
대도서관에서 만난 피오나 솔레라는 미소녀. 그녀의 미모에, 아니 자신을 앞에두고도 전혀 모른다는 듯이 교묘한 그 분위기에 확실히 네로는 매료되었다. 사피르와의 약속을 내팽게치고 그녀와 어울리자고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그 만남도 모두 함정이었다고한다면.
처음 그녀와 접촉한 것은 어느 날 광장에서 간부 후보생 둘에게 헌팅되던 것을 도왔던 때다. 그게 자신을 유인하기위한 장치였다고하면 ......있을 수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피오나, 그녀는 크로노의 여자이니까.
쓰러진 넬을 성벽 위에서 찾아내기 전에, 이스키아 고성에서 감동의 재회라는 듯이 크로노와 피오나가 껴안고있는 장면이 붉은 눈동자에 지금도 확실하게 박혀있다.
지금까지는 넬의 일로 머리가 가득해서 완전히 기억 한 구석에 몰려있었지만, 재차 다시 생각해보니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왕족으로 태어났기 때문인지, 사람의 본질을 간파하는 눈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피오나는 남자에게 아첨하지않는 - 혹시 동성애자 라고 생각되버릴 정도로 이성에게 관심을 가지지않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자신의 분별력을 과신하지않도록 반성하는 동시에 피오나의 연기력에도 대단함을 느낀다. 이스키아에서 크로노와의 관계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자신은 앞으로 ...... 적어도, 친구라도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그정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스파다의 둘째 왕자와 아발론의 첫째 왕자와 첫째 공주가 농락당했다. 아니, 그게 다가 아니다. 자신이 피오나와 친해지면 윙로드의 멤버들과 친분이 생긴다.
엘리멘트 마스터의 세 번째 파티원인 릴리, 그녀도 이미 신학교에서 [행복의 요정 씨] 라고 불리며 수수께끼의 인기를 얻기 시작하고있다. 간부 후보생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었다. 즉, 차세대를 담당하는 귀족의 자제가 스스로 접근해갈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크로노도 신학생에게 새로운 마수를 뻗을 것이다.
왕후 귀족에게 자신들이 유학하고있는 곳, 학교란 미래의 인맥을 만드는 장소이기도하다. 그런 의미에서, 크로노는 귀족도 아닌데 굉장한 관계를 다지고있는 것이다.
거기에, 이번엔 마침내 훈장을 수여받았다.
크로노는 아마도 모험가 공로 훈장뿐만 아니라 왕관 훈장도 수여받을 것이다. 이스키아 마을을 구한 릴리와 피오나 두명도 모험가 공로 훈장을 수여 받았으니 그들은 스파다의 무대에 올라선 것이다.
이제는 윙로드의 빠른 랭크 업 기록을 깼다든지 이스키아에서 큰 전공을 세울 수 없었다든지를 따질 상황이 아니다.
스파다에서 확실한 인맥을 만들어 낸 후 랭크 5 몬스터로부터 이스키아를 구한 영웅으로 등장한다.
너무 작위적이다. 마치 운명이 이끌기라도 하는것같은 - 아니, 크로노는 그것을 노린 것이다. 모든 것은 그 남자의 계획대로.
"크로노 ...... 너는 도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거냐 ......"
등골이 오싹해진다. 설마, 라며 부정하고 싶지만 이 상황에서 경계심을 늦출수는 없다.
그 남자의 동향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만약 정말로 크로노가 그 용모에 걸맞는 사악한 야망을 품고있다면 -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다.
"으응 ...... 크로노, 군 ......"
동생이 흘린 달콤한 잠꼬대가 귀에 닿자 네로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던 의식을 현실로 되돌렸다.
꿈속에서도 동생의 마음을 흔들어대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화가 난다.
"...... 슬슬 시간인가?"
깨달으니 큰 창문을 통해 석양이 비치며 방을 주황색으로 물들이고있다. 침대에 누운 넬도 새근 새근 작은 숨소리를 내며 푹 잠들어있다.
"그럼 자고있어. 내일 그 녀석과 이야기하고 다시 올께"
크로노와 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어떠한 경위로 그 남자는 여동생을 데리고 이스키아 고성까지 올 정도의 관계가 되었는가? 무엇보다도 그 사실과 진심을 추궁해야한다.
만약 이 손으로 죽이는 일이 된다고해도, 적어도, 그것만은 물어야한다.
그 남자의 입에서 어떤 변명이 나오기는 커녕 최악의 사실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을 들을 각오를 한 네로는 방을 뒤로했다.
크로노의 입에서 나올 최악의 사실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