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5화 〉105편 (105/109)



〈 105화 〉105편

질감, 냄새, 세월이 내려앉은 흔적들. 낡았다.

훑어본다. 표지를 젖히고 책장을 넘긴다. 시야를 메우듯 쏟아지는 글. 혈귀, 칼, 죽음. 단어가 점멸한다. 빠르게 전모를 살펴간다.

중후반까지 동일한 필체로 쓰였다. 연월을 감안하면 최소 수백 년 치에 달할 분량. 그 뒤로는 간격을 두고 몇 차례인가 필적이 다르다. 한 번은 누군가 옮겨적은 듯했다.


곳곳에 수선한 자국도 있다. 오랜 세월에 바랜 흠집에 비하면 최근. 그것도 얼마 전에 생겨난.


"...센쥬로."

그 아이겠지. 책을 전해주려 공을 들였을 소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를 넘어 물려왔을 염주들의 일지. 센쥬로 성미에 물건을 거칠게 대하는 모습이란 선뜻 그려지지 않는다. 훼손된 시점을 생각하면, 그리고 가장 가까운 대의 염주라면.


아버지.

무슨 이유일까. 여러 사람이 소중히 간수해왔을 책을 어째서. 그 안에 무엇이 있기에.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는다. 천천히 집중해서. 좀 더 깊이 빠져든다.

내용은 그리 상세하지는 않으나, 사소하지도 않은 일들이었다. 일전에 불꽃의 호흡과 칼을 다루는 법을 익히려 접한 기술서들. 그를 통해 파악해낸 얼개, 흐릿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수기에서는 보다 선명하게 엿볼 수가 있었다.



시작은  년 전.

키부츠지 무잔의 등장에 이은 혈귀 창궐. 각지에서 저항하던 이들. 우부야시키 가문을 중심으로 규합, 귀살대 창설.


끝없는 사투. 초월적인 혈귀들 앞에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나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그저 의기와 복수심으로 뭉친 이들이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 칼 한 자루 뿐. 그것만으로 괴물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 아닌가.


렌고쿠 가계의 검사들 또한 예외는 없다. 이를 반영하듯 수기 전반부의 내용은 수많은 이들의 삶을 짤막하게만 담고 있었다. 단명한 이가 맺지 못한 구절 아래 다음 염주가 다짐을 적는다. 오래가지 못한 기록은 다음, 다시  다음으로. 무수한 이야기는 미완으로 끝나갔다.


사백  전.


변화가 인다. 이 무렵부터 기록된 양이 늘었다. 이전보다 혈귀를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잡아냈으며, 개개인의 생존율 역시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전집중 호흡. 숨을 이용한 신체강화. 전에 없던 방식을 전투에 접목한 인물이 등장한다.



츠기쿠니 요리이치.


그에 대한 당대 염주의 감상은 경이로움  자체. 폭발적인 전투력으로 혈귀를 압도한다. 평소 흑색이던 그의 칼은 때로 붉게 물들었다. 칼날에 베인 혈귀는 어느 하나 남아나지 못했다. 괴물같은 재생력에 애먹던 귀살대원들에게는 이변이나 다름없는 일.

"해의 호흡."

그가 구사하던 호흡은 어디선가, 아니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들었다. 열차 안에서 물어오던 소년에게서.


귀살대에 요리이치가 가담한 시점이 바로 전쟁 양상이 바뀌던 시기와 일치한다. 합류한 그는 자신이 아는 바를 전수했다.


문제가 생긴다. 그 누구도 가르침을 따라하지 못했다. 검술, 호흡법,  어느 것도. 원인은 단순했다. 그가 규격 외의 존재였기 때문에.

훗날 무잔과 일전을 치른 요리이치에게서 상황을 전해들은 염주는 극심한 격차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타마요. 그녀가 무잔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던 그 날. 나타났다던 검사는 분명 요리이치. 제압당한 무잔은 도주를 택했다. 자신의 몸을 잘게 쪼갠 고깃덩이로 바꾸어서.

- 천오백. 그것 외에는 베지 못했다. 미안하다.


일순 천팔백으로 흩어진 조각들, 개중 삼백을 놓쳤다. 그리고 사과했다.

다른 이들은 그를 힐난했다. 무잔을 놓쳤다고. 언제고 다시 찾아올지 모를 그놈을 제거하지 못했다면서.


당시의 염주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상상의 범주를 벗어난 요리이치의 무력에, 그럼에도 살아나간 무잔에.

그 길로 츠기쿠니 요리이치는 귀살대를 나갔다. 사실 내몰린 것이다. 자신이 공들여 가르친 이들에게 책망당하고 사라졌다.


이때부터 쇠락은 시작됐다.


해의 호흡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자, 요리이치는 대원들 각자의 몸에 맞게 변형한 호흡을 가르쳤다. 물, 불꽃  갈래가 생겨났다. 어지럽던 칼질도  계통의 성격에 맞게 차차 체계화하고 자리잡아갔다. 원류로부터 섬세하게 지도받은 검사들은 알맞은 호흡을 만나 재능을 꽃피웠다.

혁도, 반점. 때로 전설처럼 전해지던 현상이 전설만은 아니던 전성기. 그런데 사라지고 만 거다. 그가.


요리이치의 퇴출이 신호였던 듯 사건이 뒤따른다. 반점 발현자들이 단명하는 비극.


이제는 대 혈귀전의 근간이 된 호흡에 있어서도 질적 하락이 이어졌다. 이 땅에서 모든 호흡의 원형일 요리이치를 통해 직접 전수받을 때는 부각되지 않았던 문제점이다. 원류의 변형과 그것의 전승은 다르다. 폭이 넓은 원류에서 보이던 부분이, 좁게 최적화한 파생 호흡에서는 보이지 않게 된다. 아류의 한계였다.



상현의 출현.

자신의 수명을 담보로 간신히 혈귀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해가고 있었건만, 무잔이 소생하며 만들어낸 강력한 혈귀들 앞에 귀살대는 무력했다. 몇 차례고 조직 존속이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했다.

전력이 다시금 열세에 처한 위기에 호흡을 비롯한 전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란 참으로 어렵다. 후계가 피살당하는 일도 빈번했다. 시간을 들여 전해줘도 첫 호흡의 모습을 보존하기 어려운 일일진데 혼란한 와중이라면 더더욱 곤란한 일.


그럴 수록 귀살대는, 주들은, 렌고쿠 가의 검사들은 매달린다. 어떻게든 끊어져선  된다. 반드시 후대에 남겨야만 한다.

의지의 소산이 여기 있다.


침묵.


얇은 종이가 무겁다.

넘긴다.

'렌고쿠 신쥬로'



부친의 이름. 찢긴 자국이 거칠다. 왜 그런 일이.

염주의 자리에 서고 일륜도를 휘둘렀다. 깨달은 바를 적었다.

- 실패했다.


막바지에 다다라서 문장은 부정적이 되었다.

- 실패, 실패의 연속이다. 모든 염주들의 노력은 그저 헛되었다.


무잔, 이전에 상현. 그들조차 이겨내지 못하는 지금으로선 한계다. 강해져야만 한다. 그럼에도... 방법이 없다.

유일하게 무잔에게 닿았던 일격은 해의 호흡 뿐.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아류는 가치가 없다.

베지 못한 채 죽는다. 무의미하게 죽는다. 허술하고 미약한 아류를 애써 전해봤자 죽음은 피하지 못한다. 근원을 절멸시키지 못해서야 과거도, 미래도 반복된다.


체질인가. 재능인가. 미력한 나로서는 닿지 못한다. 모두 끝맺을 그 영역에.


공백.



만약. 만일 가능성이 있다면.
너라면





글은 거기서 끝나있었다. 점점이 물먹은 자욱 너머 갈가리 찢긴 흔적이 역력하다.

언제였던가.


칼을 잡고 미친 사람처럼 휘두르는 모습을 봤다. 어머니가 숨을 거두시고 상을 치른 뒤였다. 그토록 몰두하시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한참동안,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았던 시기.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염주의 책무를 그만두셨다.



종전의 기록을 돌이켜본다. 실패. 다른 몇몇 단어같이 되풀이하던 말. 선대 염주들은 무엇을 갈망했단 말인가.


영역, 해의 호흡.

글을 남긴 자들은 특기가 있었다. 유달리 힘이 세거나, 몸이 재빠르거나, 순간적 변화를 판별하는 눈이 뛰어나거나. 그들이 갈고 닦은 절기에 특성이 반영됐고 전해졌다. 자신이 가진 가장 날카로운 장점을 벼려냈다. 그런데도 토로했다. 실패라고.

어쩌면 초대 호흡의 염주는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압도적 격차. 절대 닿지도, 넘지도 못한다. 츠기쿠니 요리이치의 경지는 벽이었다.

두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도전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저기에 들어서기만 하면 벨  있다.  칼을 상현, 나아가 무잔의 목에 박아넣을  있다 확신했다.


할  있는 최선. 몸에 맞는 호흡과 검법을 무한히 연마한다. 아는 건 그것 뿐이었다. 그렇기에 노력했다. 그래서 한계에 부딪혔다. 버티고 발버둥치며 발악했다. 결국 꺾이고 말았다. 예감했던 실패를 확인함에 그쳤다.


그것마저 남겨두었다.

자신들이 추구했던 길, 방향, 방법, 참담한 결말까지.

시도, 반복, 실패. 허무한 결과인가. 비루한 대물림일 뿐인가. 이렇게 끝인가?

애초에 그들은  남겼나? 후대에 글로 전한 이유는?


미련이다. 풀지 못한 바람이 한으로 남아 그 몸뚱이를 글자로 내보이고 있다. 어떻게든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적었다.

그들의 노력은 무의미했던가.


호흡을 익히며 접한 기술서. 되새겨본다. 검세, 동작. 장점을 극으로 갈아낸 흔적은 각각의 형마다 선명히 어려있다.

천 년, 사백 년. 무수한 이가 홀로 고뇌한 시간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혈귀를 베었고 인명을 구했다. 눈물, 웃음, 인연.


틀리지 않았다.


수없을 고독이 터온 길은 끝끝내 이어져왔다. 그 앞에는 무언가 있으리라.

칼날, 호흡은 불꽃.

손에 쥐지 못한다 할지라도, 약속된 내일이 없다 하여도.


걸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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