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101편
혈해.
겐야가 조심스럽게 접근했을 때, 우선 눈에 들어온 풍경은 피바다였다. 투명한 물이었을 연못은 피보다 붉게 질려버렸다.
도우마가 살해한 신도들의 시신이 산처럼 쌓여있었건만, 난전 와중 펼쳐진 혈귀술의 질량에 짓눌려 훼손당했다. 어디에도 원형을 유지하는 일부분조차 없다. 으깨진 목판에 들러붙은 육편들이 참혹하다. 아직도 잔해에서 체액이 떨어진다. 곳곳에서 수면을 뚝뚝 두드리는 소리가 질척하게 감겨온다.
살풍경을 줄곧 보고 있자면 맨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터. 귀살대 인원이 일찍 눈에 든 건 불행 중 다행이다.
눈꺼풀 언저리를 문지른다. 터져버린 총열의 파편이 남긴 상흔에서 흐르는 피가 자꾸만 묻어난다. 그러나 지금은 지치고 아픈 자신의 몸보다 앞이 걱정이다.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한숨돌릴 것 같았으니.
"겐야 형님..."
힘없는 중얼거림이 반갑다. 하얗게 질린 안색이 이제 막 돌아오기 시작한 센쥬로가 우물거리듯 말해준다.
다섯. 겐야까지 여섯. 저마다 형편없는 몰골이지만 살았다. 어찌됐든 살았다. 허나 기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울고, 신음하고.
가늘게 떠는 시노부의 어깨를 감싼 카나오는 혼란스러웠다.
눈이 안 보인다. 오른쪽이. 꽃의 최종형을 사용한 대가다. 그럴 거라 사전에 알고는 있었지만, 몸소 겪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남은 왼눈으로도 웅크린 등 너머, 시노부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보인다. 저도 모르게 안아버린 작은 몸으로, 흐느끼는 소리로, 이전엔 짐작조차 못했을 그 얼굴이 그려진다. 생각만으로도 답답하고 아프다. 그 감각은 이전에도 몇 번이고 느꼈다. 누군가 떠나보냈을 때. 동전을 전해준 카나에를 더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유난히도 심했다. 그때마다 식은땀만 나고 말았는데.
눈이 따갑다. 이내 화끈하다. 눈시울을 따라 습기가 배어난다. 고인 물기는 넘쳐 흘러버린다. 너무나도 뜨겁고 무거워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카나오는 시노부의 어깨에 그만 뺨을 묻고 만다. 울면 벌을 받아서, 이후론 우는 법을 잊어서 울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잃을 대로 잃고 나서, 마지막 가족이 다치고 울음을 토하는 옆에 있고 난 지금에서야. 너무도 늦게 알았다. 몸이 아닌 눈으로 우는 법을.
혈귀가 가루로 사라지고 난 뒤에도, 광기어렸던 그 손톱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는 깊게도 파여서 메울 수가 없다. 몸 안의 물이 모조리 눈물로 바뀌어도 모자랄 만큼 그저 울었다.
"...카나오."
감정을 토해낸 여파로 갈라져버린 목소리. 시노부의 음성이 그녀를 부른다.
"미안해요. 다치게 만들었네요. 제가 약해서..."
성한 팔을 들어 손끝으로 살며시 어루만진다. 카나오의 멀어버린 눈가를, 물기를 닦아준다. 그리곤 잠시 손을 얹는다. 미미한 웃음을 띤 시노부의 안색은 파리하고 초췌하다. 그걸 보는 카나오는 먹먹하고 가슴 한 구석이 꾸욱 조여오는 걸 느낀다.
"도와주지 않을래요? 도통 힘을 못 쓰겠어서."
살짝 부은 눈으로 배시시 미소를 흘리며 부탁한다. 카나오에게, 옆사람들에게. 거진 탈진 상태라 자력으로는 서기가 어려워서 어쩔 수가 없었다. 시시각각 사태는 급변할 터인데, 상현의 한 축을 잘라냈다해도 다른 쪽을 도우러 걸음을 재촉해야하는 부분은 변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싸움의 여운에 잠겨있던 시간이 긴 터라 더욱 시급하다.
비교적 멀쩡한 팔은 카나오가 자신의 목 뒤로 둘러 부축하고, 이제 소임을 다한 쪽 팔은 기유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붙잡는 식으로 보조한다. 떨어진 검도 회수하면서.
"면목이 없네요. 다른 이들을 지원해야할 본분이 있을 제가..."
젖어드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시노부를 부축하며 일으킨 카나오는 문득 이상을 감지했다. 기유의 뺨에 있던 반점은 자취를 감췄다. 반면 시노부는.
"사범...님. 그, 그..."
반점이 사라질 기미는 없이 뜨겁다. 그녀의 신체, 접촉한 부위가 제복 너머로 전해지는 열기는 터무니없다. 정상에 비하면.
"...대체 무, 쿠흑"
말을 맺지 못하고 기침하는 그녀를 본 카나오의 표정이 창백하다.
"사범님!"
비릿한 향에 짠 맛이 구강을 자극한다. 시노부는 그녀의 입가로 점성있는 액체가 타고 내리는 걸 느꼈다. 차갑다. 아니, 뜨거운데 그렇게 느끼고 있다. 왜. 몸이 뜨거우니까. 진즉 끝난 싸움에도 부작용의 후폭풍은 끝나지 않았던 거다. 생사가 오갔던 일전 탓에 인식하지 못했던 열, 그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 인체는 고열에 익숙하지 않아.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어, 어"
시야가 빙글 돌며 몸이 휘청인다. 다행히 옆의 두 사람이 받쳐줘 넘어지진 않았으나 좋지 않다. 생각이 군데군데 끊기며 공백이 생긴다. 높은 열기로 머리가 먹먹하다.
"헉, 학, 숨, 수움"
점차 호흡이 가빠진다. 다급히 그녀를, 일행은 바닥에 눕힌다. 혹여 핏물로 숨길이 막힐세라 고개는 살짝 옆으로 기울여보지만, 임시방편일 뿐. 안색, 숨소리, 입가를 넘어 지면을 적시는 선혈까지. 무엇 하나 긍정적인 신호가 없다.
"어, 어떡, 어떻게 해야..."
극도로 당황한 카나오. 급하게 센쥬로, 겐야, 울먹이던 이노스케까지 다가왔으나 방도는 딱히 없다.
"내가 다녀오...아니, 늦어..."
기유가 굳은 표정으로 말해보려다 입을 다문다. 어떻게든 의료 담당 대원이라도 데려와볼 요량이었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는 시노부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사색이 되어있었다. 더군다나 단순한 부상, 병도 아니다. 만일 대원을 용케 찾아 데려왔다한들 구원을 장담치 못한다. 그건 카나오 또한 직감했다.
충주는 이 싸움에 목숨을 걸겠다고 했다. 동시에 그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독약을 씹어삼키면서도 일언반구가 없었다. 철두철미하고 영민할 그녀가, 준비성은 누구에게도 뒤질 일 없고 의학 지식으론 귀살대 내에서 따를 이 없을 그녀가. 끝이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독자적 강화 수단의 부작용, 그 대안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젠 늦었다.
"뭐야? 왜 가만히 있는 거냐! 빨랑 움직여! 사람 죽는 거 안 보이냐고!!"
이노스케가 영문을 모르고 길길이 날뛰다 센쥬로의 몇 마디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구조가 변화하는 광활한 성에서 구호 담당을 데려온다.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서. 가능할까? 불과 수 분 내로 데려오는 게? 아니 지금 즉시 불러와도 뭔가 시도라도 할 시간은 충분하고?
"아아, 읏"
어찌할 줄 모르고 지켜본다. 꾸륵거리며 벌어진 입 새로 작은 핏덩이가 툭 비집고 나온다. 카나오는 달달 떨리는 입술을 깨문다.
"잠시 비켜주세요."
뒤에서 울리는 목소리. 겐야다. 성큼 나서는 그 눈빛에 결의가 어려있다. 카나오는 얼떨결에, 기유는 말리려다 비켜준다.
"무언가 있는 건가?"
"어쩌면, 아마도..."
말을 흐리며 시노부의 옆으로 다가가, 무릎꿇고 앉는다. 이어 손을 뻗는다. 힘없이 놓인 그녀의 흰 손을 두 손바닥으로 모아 감싼다. 지그시 잡는다. 심호흡을 하고,
바삭
쓸리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뉘인 시노부 맞은 편에 한 사람이 정좌해있다.
"센쥬로."
"돕겠습니다. 겐야 형님."
눈빛이 교차한다.
"뭘 할지는 알고 하는 말이냐?"
"형님도 배우셨잖습니까. 저도 어떻게든 뒤따랐고요."
무라타가 직접 경험해 금기로 일러뒀고 가르치길 거부한 기술. 사경을 헤매다 자그마치 몇 개월이나 병석을 지키게 만든 원인.
겐야는 간곡히 부탁했고, 그의 사부는 몇 번이나 거절했으나 끝내 전수하고 말았다. 어떤 일에도 대비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한다던 가르침을 차마 어길 수도 없었고, 누군가를 위하는 길이기도 했기 때문에. 겐야와 돈독한 사이였던 센쥬로도 대화 도중 흘러나온 실마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덕분에 마찬가지로 익혀버렸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으리라 다짐한 무라타의 기술이, 둘씩이나 추가로 아는 지식이 되고 만 거다.
"수 개월. 그 분도 그 대가를 치르고 간신히 회복하셨어. 사부님에 비하면 미력하다. 그래도 할 거냐?"
웃는다.
"어차피 혼자라도 하셨을 거잖아요. 그리고 둘이라면. 우리가 함께라면. 부담은 덜 수 있겠죠."
겐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짓한다. 센쥬로도 심호흡을 하고, 침착하게 임하려던 찰나.
"...할 수 있겠냐?"
"아, 어, 네, 네... 사실... 무섭습니다."
혁도를 들고 용맹했던 소년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그 사부님도 위험했던 그걸 자신이. 손가락이 바르르 떤다. 입이 바짝 마른다. 해야하는데 이성의 저편에서 거부감이 치민다. 속삭인다. 이럼 안 되는데.
"센쥬로. 시간이 없다. 혼자라도 해야겠지만..."
겐야는 옅게, 오랜만에 짓는 표정을 했다. 웃었다.
"너도, 사부님도, 다른 사람들도 오래도록 보고 싶다. 무섭다면 이걸 유념해. 그리해야 했던 순간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그 결과 잃고 마는 것. 뒤늦게 후회하는 것. 진정 무서운 게 뭔지를 아는 것."
말을 듣고 센쥬로는 깊이 숨을 들이킨다. 눈을 감고, 뜬다.
"돌아오자."
둘은 각각 시노부의 손을 하나씩 꼭 잡는다. 호흡한다. 체내의 파문을 돌린다. 움직이고 집중한다.
""파문의 호흡, 제 10형""
그 자리의 모두는 볼 수 있었다. 반짝임을.
어둡다.
앞도, 뒤도 온통 깜깜하다. 슬슬 오싹하다. 으슬하니 추운 것 같기도 하다.
냄새.
코를 킁킁거린다.
가까워진다.
포옥 하니 안긴다.
꽃. 꽃내음. 포근하고 아늑한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언제까지라도 안겨있고 싶다. 뺨을 부비니 따스한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라, 우리 동생. 많이 힘들었구나."
익숙하고도 그리운 목소리. 듣기만 해도 어쩐지 울음이 날 것만 같아서 뜸들이다 얼굴을 파묻는다. 품에.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을 거야. 언니. 언니..."
언니는 조용히 웃음어린 얼굴로 안아주었다. 끝나지 않았으면. 이대로 영원히...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러면 안 돼. 안 되는 거란다."
밀어내는 언니. 서운하다. 볼을 부풀린다. 어리광이라 타박해도 좋아. 떨어지기 싫은 걸.
"보렴."
아주 약간. 미세하지만 조금 밝아졌다. 어두운 방 안에 촛불 하나 켠 것보다도 은은하게. 굳이 비교한다면,
"반딧불이..."
꺼질 듯 꺼질 듯 깜박이는 불빛. 작고 흔들리는 반딧불이 뒤에서 나와 주위를 돈다. 넓게, 점점 좁아지며 원을 그린다. 차츰차츰 가라앉던 불빛은, 가만히 벌린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따스하다. 체온같이.
깨닫는다. 자신, 언니. 미미한 빛이 비추는 아래 둘은 같은 옷을 입었다는 걸. 나비의 날개와도 같은 겉옷.
"언니"
망설이다 입을 연다.
"미안해."
"으응, 아냐. 이 순간이 고마운 걸."
언니는 눈을 감았다. 미소짓는다. 처연하게.
"돌아가렴. 할 일이 있잖니."
손을 흔들고 동생은 돌아선다. 반짝이는 빛을 따라 걸어간다.
"언제까지고... 서있을게."
해야할 일을 다 한 것인가.
가슴에 사무치게 그립던 사람. 그녀가 서있다. 가만히 웃는다.
보는 이마저 감화시키는 미소. 저절로 웃음이 활짝 피어난다.
잘 했다. 충분히 했다. 위로하는 그 표정. 시원하게 모든 미련 털어내고 걸음을 옮긴다.
손.
내려다본다.
미약한 불빛이 손가락에 달라붙어있다. 천천히 들여본다.
따스하다 못해 뜨거운 그 불빛은 뭐라고 할까. 사람의 손길. 그 열기를 닮았다.
"돌아가세요"
"네?"
반겨주었을 사람이 자신을 밀어낸다. 앞으로도 뒤로도 선뜻 걸음이 떼지질 않는다.
"언젠가 당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니..."
그녀는 입술을 달싹인다.
"당신을 찾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믿음에 답해주세요."
뒤돌아본다.
어둡고 캄캄한 공간. 까마득히 먼 곳까지 길게도 뻗은 길. 돌아가려면 너무나 오래, 오래도록 걸어야만 한다.
그 정도면 지쳐서 포기할 법도 하건만. 순간 손에 닿았던 그 열, 그 온기가 인장처럼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외롭지도 힘들지도 않다. 그저 걸어가야지.
"꽤 시간이 걸리겠는걸요."
헤어지기 직전. 그녀에게 미련 한 점 없이, 시원스레 미소를 던져주며 돌아선다.
하주 토키토 무이치로. 그는 현재 박제당한 꼴이다. 좌수는 잘려나갔다. 어떻게든 묶어 지혈은 시도했지만 여전히 피가 샌다.
무엇보다 이 자리, 기둥에서 꼼짝할 수가 없다. 자신의 일륜도에 꽂혀 기둥에 내걸렸다. 오른 어깻죽지 부근에 깊숙이 관통한 칼날에 체중까지 실렸다. 하필 대적하던 상대가 무이치로 자신의 발이 닿지 않는 높이에 꽂아넣은 탓이다.
호흡이 곤란한 지경의 격통이 엄습한다. 빠져나가려면 칼을 빼내야하는데, 어렵다. 오른손은 관통당한 어깨의 통증 탓에 부자연스럽고, 잘린 손 대신 손목으로 붙들어보나 단면의 출혈이 칼날 위로 자꾸만 미끄러지게 만든다.
저기선 혈전이 벌어지고 있다.
칼과 칼이 맞부딪친다. 풍주 시나즈가와 사네미, 암주 히메지마 교메이, 두 사람의 강력한 지주가 협공 중이다. 무투파인 둘이 달라붙은 만큼 응당 수월해야할 텐데.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상현의 1, 코쿠시보.
무이치로에게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하던 혈귀. 그는 검사였다. 그것도 인간의 한계를 넘은 세월을 누리며 갈고 닦은 검기를 습득한 괴물.
나름대로 수련해온 정수를 펼쳐보였으나 형편없이 당해버렸다. 이런 몸이라도 기둥에서 내려와 두 지주와 합류해야 도움이 될 텐데. 애타는 속과 달리 이 칼날을 떼어내기조차 버겁다.
대장장이 마을에서 일전을 치르며 뒤늦게 떠올렸던 형의 기억. 형, 유이치로는 자신에게 "무이치로의 무는 무능無能의 무無"라 쏘아붙였던 과거가 있었다. 그건 사실 걱정에서 나온 것이고 내심은 아니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싸움 도중 떠올렸다. 오래 전에 혈육을 잃고도 오래 뒤의 일이었지만.
더는 잃고 싶지 않다. 이제는. 여기서 벗어나서, 제발...
"끄으으윽!"
가까스로 칼날을 붙잡아 힘을 주었건만 놓쳐버렸다. 조금 뽑히나 싶더니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몸을 쑤셔 더는 할 수가 없다. 숨이 가쁘다. 눈물이 줄줄 흐른다. 유이치로는 아니라 했는데, 이런 자신을 보면 정말 무능한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 있다.
"참거라."
나직한 음성. 뒤이어 어깨를 찌른 도신을 타고 감촉이 전해진다. 그 누군가는 칼 손잡이를 쥐었다. 반사적으로 어금니를 꾸욱 깨문다.
푸학
"카흣, 크아악!!!"
철퍽
나름대로의 자비랍시고 코쿠시보가 취해둔 지혈조치때문에 칼날에서는 피가 그다지 흐르진 않았다. 어찌됐건 아프다. 발도 안 닿던 높이에서 떨어졌으니. 더구나 잘린 손목 단면에 달라붙은 모래 알갱이들이 바늘처럼 따갑다.
"집중해. 호흡을 유지해라. 너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테니."
격통의 흔적인 땀과 눈물로 시야가 차단된 상황에서 목소리만 울린다. 가뜩이나 정신이 어지럽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손상 부위에 의식을 집중한다. 칼을 뽑아내며 더 벌어진 상처, 절단면 주위의 혈관을 통제한다. 닫는다.
"좋군. 훌륭해."
심호흡. 아픔은 있지만 이전만큼은 아니다. 멀쩡한 손을 더듬어 검을 쥔다. 옷소매로 눈을 훔친다. 시야가 트인다.
누굴까. 어쨌든 도움은 받았다. 혈귀는 아니다. 필시 귀살대. 한시라도 빠르게 도우러가기 전 인사라도 건네려 시선을 드는데
"아."
숨이 탁 막힌다.
이럴 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그리고 서둘러야겠지."
"아...아..."
장탄식이 꼬리를 문다. 영문을 모르겠다. 진짜 생각도, 일말의 가능성도 염두하지 않았는데 일어났다.
"내가 선 이 자리에서, 그 누구도 더는, 헛되이 죽게 버려두지 않는다."
형은 말했었다. 죽음을 앞두고 속내를 후련히 털어놓았다.
무이치로의 무는 무한無限의 무無.
가능성에 한계는 없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고 이룬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너라면 해낼 거야.
형의 마지막 손길. 감각이 되살아난다. 눈 앞의 사내에게서. 멍하니 그의 손에 이끌려 일으켜진 무이치로. 그 눈에 상이 비친다.
한 줄기 불꽃같이 타오르는 귀살검. 왼눈 위로 안대를 두른 염주 렌고쿠 쿄쥬로의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