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9화 〉99편 (99/109)



〈 99화 〉99편

차갑다.

어린 시절. 희미한 추억. 감각만은 생생하다.

떠올릴 수 있을 가장 처음의 겨울. 온통 하얗고 파란 세상.  위로 내려앉은 서리에 손을 갖다댔다간 혼쭐이 났더랬다. 맛모르고 만진  손이 차게 식어서 어쩔줄 모르고 울상이 되었다.

시노부, 이리 와.

다정한 목소리. 냉해진 손을 감싸주던 따스한 손길. 언니의 그 사소한 보살핌만으로도 겨울은 춥지 않았다. 차갑고 두려웠던 세상은 포근하고 재미있는 대상으로 탈바꿈했다. 작은 온기의 존재가 그리도 컸던가.

세상은 지금도 파랗다.


"하아아"


숨은 새하얗게 언다. 칼을 움켜쥔 손을 살며시 떼어본다.


뜨득


그대로 살갗이 찢어지며 핏방울이 내비치다가 굳는다. 냉기가 유리조각처럼 박혀든다. 시리고 아프다.

거대한 불상. 희뿌연 안개를 짙게 뿜어대는 그 물체를 쳐다본다.

이제 예전의 따뜻한 언니는 없다. 저 흉물을 지어낸 혈귀의 손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대치하는 것만으로 새파랗게 질려버릴 저 자의 손에 목숨을 뺏겼다.


그런데도 이 자리에 붙들려 꼼짝 못하는 자신은 뭘까. 추워서? 힘들어서? 아파서? 움직이고 싶은데 멈춰있다. 마음이 공허하다. 한없이 추운데 감싸주는 누군가도, 일말의 희망도 없다. 추위를 두려워하던 어린 나로 되돌아가는 기분.

저만치에서 무표정한 도우마를 본다. 지나치게 강하다. 그저 쓸모없는 죽음이 아닌가, 별 생각이  든다. 나는 약해. 아무 것도 아닌데 상처받고, 기뻐하지. 그래서 말인데... 뭐라도 있었으면. 보여줬으면. 실낱같은 소망이라도 품게 해줄 무언가가 있었으면. 그것만으로 나는...

빨갛다.

시선의 한 편으로 불꽃이 피어난다. 온통 파란 세상 속에서 한 점 붉은 칼날.

"센쥬로 군."


입술이 조그맣게 그려낸 소년은 붉게 물든 칼을 쥔  서있다. 혁도. 문헌이나 전해들은 이야기에 등장하던 바로  현상이다.


처음 호흡을 사용한 검사가 구사한 기술. 타오르는 도신 앞에 베지 못할 것이 없다던 현상의 구현. 자신만큼이나 몸집이 작은 소년의 손아귀로 빚어낸 혁도.

인간은 미련하다.


정말 작은 것에 기뻐하고 슬퍼한다. 제멋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실망한다. 지극히 사소한 것이 동기가 된다.


센쥬로의 불꽃은 미미하다. 극복하기 힘든 난관을 넘기엔 미약하다. 다만 이 한 몸, 여린 마음을 지피기는 족한 불씨. 공기는 차다. 심장은 뜨겁다. 살아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토미오카 씨."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기유.

"도와주실 거죠?"


"언제든."

무미건조한 대답. 언제나 항상 그랬다. 변하지 않는다. 늘 무성의, 무신경하게 행동하고 툭툭 말을 던진다. 내몰린 이 상황에서마저 변함이 없다. 그래서 더

"믿을게요."

슬핏 미소짓는다.


"어째서 웃지?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모르나?"

진중하게도 의문을 표하는 기유의 그 표정. 한치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반응. 냉각된 입술이 핏 찢어져 핏방울이 비치도록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아, 아, 재밌었다."

눈물이 찔끔 나고 나서야 웃음이 그친다. 닦을 필요는 없다. 얼음결정이 돼버렸으니.

혁도. 귀살대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극소수만이 사용했다 전해지는 특이 현상. 반점만큼이나 희귀해서 존재를 아는 이도 드물다. 원리도 모른다. 그걸 해낸 소년. 더없이 미력한 몸으로 불꽃을 피워올렸다. 말하자면 기적에 가까운 일인 셈이다.


작금의 상황은 그런 기적을 더하더라도 미래가 한없이 불투명한 절망 그 자체. 수만 따지면 다대일의 싸움이다. 본래 이만하면 다수가 전력을 아끼며  명의 전투력을 갉아내는 차륜전의 양상을 띠기에, 유리해졌어야만 한다. 허나 너무나 거대한 도우마의 힘이 모두 엉망으로 만들었다.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가 되려 다수가 하나에게 포위당하는 것만 같은 기괴함을 낳았다.

이길 수 있을까? 강한 상대를 두고 약자들이 얼마나 해낼 수 있을까? 자신을 의심하고 불안에 휩싸여도 이상하지 않다. 원래 그게 맞을 텐데.

안심이 된다. 몸은 차고 통증도 또렷한데. 마음은 편하다. 푸르르 얼음을 털어내는 이노스케, 긴장감에 침을 삼키는 카나오, 덤덤하게 칼자루를 쥐는 기유,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조차 못하고 혁도를 거머쥔 센쥬로. 일행의 면면을 돌아보며 새긴다. 희망따윈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는데, 단 한 명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이렇게도 가까이에 열기가 가득했는데.


대체 무얼 걱정했던 걸까. 그저 살아있고 칼을 휘두를 수만 있으면 된 건데. 마지막을 향해 치닫는 이 길 위에 시답잖은 얘기 몇 마디 나눌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인 걸.

"그만 가죠."

무언가 입을 열려던 기유를 가로막듯 내뱉곤 자세를 잡는다.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이내 칼을 그러쥐며 태세를 전환한다.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는 동화속 이변 같은  없다. 이곳에서 가능한 일은 오직 발버둥. 사람으로 살고 사람으로 죽기 위한 생의 발악.

이제 뭘 해도 후회는 없다.















인간은 어리석다.


이길  있을 리 없는데 덤빈다. 무모하게 달려들도 스스로 명을 재촉한다. 제 깜냥을 알고 수준에 맞춰 행동해야 순리 아닌가?


꼴에 맞서보겠다며 날뛰는 눈앞의 귀살대 족속들이 그렇다. 예전에 도망을 시도했던 코토하가 또 그랬다. 가능하지 못할 일을 기도하다 무너졌다.


불상이 뿜는 입김에 하얗게 덮여가는 저들을 보라지. 마치 코토하가 제 자식 살리겠답시고 강물에 던져버린 자폭 행위같잖아. 뻔히 죽을  보이는데. 찬 물에 빠진 아기만 불쌍하지.

도우마 자신이 만들어낸 불상. 묵직한 팔이 내리치는 자리에 선 검사들이 작은 벌레처럼 보인다. 짓밟히는 미물. 비난하다 흡수당한 코토하의 덧없는 몸짓과도 닮은 그들의 저항. 가엾다. 그 아가도 어미를 잘 만났다면.


어라.


이상하다. 그러고보니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멧돼지탈을 뒤집어쓴 저 아이. 궁금해서 들췄고 코토하와 똑 닮아서 잔재미를 줬던 녀석. 그렇다면 코토하의 자식, 그 던져버린 아기가 죽지 않고 귀살대 검사가 되어 나타났다는 건데. 죽을 걸 알면서 던져버린 코토하의 선택이 결국 틀리지 않았다? 죽었어야  아이가 살았다? 내 예상이 빗나갔다고?

어?















"최우선 목표는 저 불상입니다. 호흡의 근원인 공기를 오염시키고 활동을 제약하는 얼음덩이를 제거해야 그 다음이 있겠죠?"


"아무튼 때리고 부수면 된다는 거잖아! 우럇!!"

뛰쳐나가는 이노스케. 심호흡을 하고 따르는 카나오.

줄곧 냉기를 뿌리며 장내를 얼리기에 전념하던 불상이 이상을 감지한다.

후우웅

응징하려 거구의 팔을 움직인다. 갈라지는 공기. 밀려나는 바람에 눈보라가 인다.

"크윽!"

앞서가던 이노스케가 와닿는 냉기에 멈칫한다. 상체의 상처로 스며드는 바람. 뒤따르던 카나오가 노출된다.


떠엉

"으긋!!"

서둘러 내민 검신에 가해진 육중한 무게. 몸이 찌그러질 듯한 충격이 팔, 어깨를 넘어 척추를 강타한다.


꾸득


디딘 나무 바닥에 내려앉은 얼음장이 일차로, 목판이 이차로 부서지며 주저앉는다.


카앙


"버텨! 어떻게든 하라고!"


짓눌리는 카나오가 납작해지기 전에 끼어든 이노스케. 자신의 쌍검을 교차하며 냉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상의 묵직한 주먹을 떠받친다. 폭력적인 질량. 써늘한 거인의 겉면은 직접 손을 댈 수가 없다. 즉시 얼어붙고 마니까. 대신 일륜도로 들이박는다.


그기기긱

표면과 마찰하며 갈리는 칼날. 조금이라도 무게 중심과 엇나가면 도신이 절단날지도 모른다.


"조금 약해졌어."

시노부의 눈이 이채를 띤다. 그녀가 뚫어져라 노려본 지점은 거대 불상의 입. 기온을 전체적으로 떨어뜨리던 저주스런 숨결이 줄어들었다. 정확히 카나오와 이노스케를 발견하고 불상이 행동을 취한 시점부터.

"토미오카 씨!"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기유와 함께 달려든다.

까앙


지주, 그것도 반점을 발현한 두 사람. 그들이 쏜살같이 돌진해오자 불상은 나머지 한 손으로 대응한다. 사력을 다해 버티기만 하는 이노스케 쪽과 달리, 지주의 칼은 매서워서인지 먹혀든다. 파고든다.


그러나 얼음덩이의 경도와 부피는 만만치 않아서, 곧장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만다. 카나오 쪽이 얼음 표면에 칼날을 맞대고 견디는 상황이라면, 기유와 시노부는 표면에 박힌 칼날을 붙잡고 씨름하는 형국이다.

"어디, 애들은 쓰셨는데.. 이를 어쩌나."


얼음 불상과 맞붙는 검사들을 지켜보는 도우마는 완연한 관객이 되어 감상을 떠들어댄다.

"팔 한 개에 두 명. 어떻게 막긴 했다만 그 다음은 뭔데? 응?"

체력만으로 어찌 감당할 수준이 아니어서 귀살대원들은 차츰 밀린다. 서서히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거인의 주먹은 조금씩 바닥과 가까워진다.


"짐작이... 맞았...어.."


힘겹게 앙버티면서도 시노부의 눈은 똑바로 응시한다. 불상의 입. 입김이 눈에 띠게 약해졌다. 그들 넷의 분전덕분에.

최대한 힘을 다른 곳에 쏠리게 유도해 냉기 분말의 사출을 억제한다. 접근이 용이해진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분출 근원지에 뛰어들기 어렵다. 당장이라도 인체 정도는 순간 얼음조각으로 만들 수준의 온도였으니. 열. 신체를 보호할 수준의 열원을 지니고 나서야 근접이 가능하다.


"센쥬로오!!!"




이노스케의 외침. 튀어오르는 인영. 그는 귀살대원을 짓누르는 팔을 타고 뛴다.  손으로  잡은 혁도.


"이번엔 제대로 불러주셨네요."

작게 중얼거리며 미미하게 미소짓는다. 그의 앞으로

후와아

얼음 안개가 휘몰아친다. 불상이 안개를 내뿜는 각도를 낮췄다. 소년을 노리고. 단숨에 공기는 오염되고 숨쉬기 힘들어진다.

치직


달리며 혁도를 앞세우자 정면이 뿌옇게 흐려지며 증기가 치솟는다. 뜨겁게 달궈진 쇳덩이에 부어지는 물처럼 닿는 결정들이 순식간에 증발하며 숨결이 갈라진다.

혹한의 중심에 다가선다. 어깨, 머리통의 바로 옆에 도달, 곧바로 다리에 힘을 주고




수직 도약. 공중에서 반 바퀴 돌아 거꾸로 마주 본다. 불상의 정수리, 정가운데 지점. 낙하하며 칼을 곧추 세운다.


푸식


떨어지며 쭉 뻗은 팔, 낙하 속도까지 더해진 칼은 박힌다. 무른 점토에 꽂아넣기라도 한 것처럼 저항없이 칼자루 바로 위까지 불상의 표면 너머로 삼켜진다. 혁도가 파고든 틈새로 치미는 수증기.


"으아아앗!!"

기합성을 내지르며 단단히 잡은 손잡이에 전신의 무게를 싣는다. 절벽에 나뭇가지 하나를 붙들고 매달린 형세. 거대 불상의 뒤통수에 깊숙이 꽂아넣은 검신을 붙잡은 채 쭉 미끄러진다. 어디 착지할 생각 따윈 없이 추락한다. 얼음 거인의 등짝을 수직으로 양단한다.

푸화아악


쩍 벌어진 불상의 후방. 혁도가 내리가른 틈이 열리며 거칠게 김을 토한다.

꾸국

꾸드득

양쪽에서 힘겨루기 중이던 대원들. 그들이 불균형하게 엇갈리며 가한 힘. 이것이 갈라지며 취약해진 불상의 구조와 맞물리면서


쩌겅


비틀린 거인의 좌우는  떨어지며 나뉘고


쿠웅

쓰러진다.

"이런."


아쉬운 듯 한 마디하며 신속하게 다음 수를 구사하는 도우마.

혈귀술
통곡의 관

불상이 쓰러진 직후, 제각기 흩어져 좁혀들어오는 대원들을 향해 철선을 훅 떨쳐내는 상현.

스아악


다음 걸음을 던지려던 카나오의 사방을 정말 찰나의 순간, 구형의 빙벽이 솟아오르며 사방과 위편을 틀어막는다.


푸부부부북


크고 작은 창대. 바늘촉보다 예리한 얼음 창이 무수히 생성되어, 빙벽 밖에서 쏟아진다. 둘러싸인 채로 가만히 있다간 한 줌 핏물로 화할 일촉즉발의 위기.

쓰는 수밖에 없다.

꽃의 호흡, 최종형태
석산주안

제아무리 뛰어난 시력이라 해도 온전히 피해내기 어려울 숫자. 그럼에도 똑똑히 보고 피해내야만 한다. 받아친다. 그러기 위해 끌어올린다. 동체시력을 극한까지.

"윽"

안구에 피가 쏠리며 격통이 엄습한다. 핏줄이 터진다. 각막이 새빨갛게 물든다. 충혈을 넘어선 혈안. 눈을 쥐어짜는 고통이 거세짐에 비례해 동체시력은 상승한다.

타앙


쳐낸다. 회피한다.


그녀의 눈에는 이 순간 세상의 먼지  톨까지도 명료하게 비친다.

타다다다당

쉼없이 검을 뿌리고 몸을 틀며 빙창 무리의 공습에 응한다.












"이런 제기랄"

동시각 빙벽에 감싸인 이노스케의 입에선 외마디 탄식이 터지고

후두둑

얼음 내벽으로 피가 흩뿌려진다.














푸가악

이 자리의 다른 검사들에 비하면 힘도 숙련도도 뒤떨어질 센쥬로. 그러나 얼음과 상극일 혁도에 힘입어 포위망을 뚫고 나온다. 고열의 검기 앞에 얼음은 무력하다.

재빨리 둘러본다.


이미 빙벽의 관뚜껑은 열어젖히고 나왔던지, 두 지주는 일전의 도우마 분신과 전투 중이다. 베어냈을 얼음 분신이 무려  기. 새로 생성한 놈들이 틀림없다.

어서 합류해야

"흡"



숨이 막히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노스케가 돌진하던 자리, 그 방향에 솟아난 반구형의 빙벽엔 무수한 막대가 꽂혀 고슴도치의 형상을 연상케 한다. 문제는 그 벽이


"이노스케 씨!!!"

안쪽에서 터져나온 액체로 붉다. 점점이, 산산이.


설마.


콰창


터져나가는 빙벽. 구멍을 뚫고 튀어나온 건 기괴하게 몸이 뒤틀린 생물.

"이노스케 씨?!"

아까와는 달리 반가우면서도, 섬뜩해서 놀라는 바람에 비명같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을 자세. 누가 종잇조각을 힘껏 구긴 것마냥 몸을 배배 꼰 형상에 잠시 못 알아볼 뻔했다.

"모, 몸이!"


"아, 이거?"

끄응 힘을 준다. 이노스케의 신체는 펴지고 반대로 꺾이고 얼마쯤 단계를 거쳐 되돌아온다.

슈욱


잡아뽑혀 덜렁거리던 팔을 돌려놓는다.


이노스케가 통곡의 관에 집어삼켜진 당시, 그는 공기의 변화와 자신을 향하는 수많은 살기를 피부로 감지했다. 뛰어난 촉각으로. 살아남기 위해 몸을 최적화한다.

일부 찔리는 부상도 당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연체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제멋대로 잡아빼고 비틀었다. 가까스로 회피했다. 공세가 멈춘  배배꼬인 몸뚱이를 반대로 돌렸다. 역회전시켰다.  기세로 모조리 부서뜨리고 탈출했다. 반동이 심했던 탓에 나왔을  몸이 역방향으로 왜곡됐지만.


뿌득

그는 목을 세차게 꺾고 어깨를 휙 돌린다.

"됐구만."


"에엑..."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센쥬로.

"몸이..."


조금  나온 카나오마저 놀래킨 이노스케의 재주. 멧돼지탈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되려 대꾸한다.

"엇, 넌 왜 눈이 빨개졌냐? 정체가 토끼였던 건가!"


언젠가 산중에서 봤던 흰 토끼의 빨간 눈을 떠올린 이노스케. 궁금해서 잡아다 구웠다. 맛은 똑같더만.

"앗!"


그제야 석산주안의 시간 제한을 떠올린 카나오는 서두른다. 영구적 손상은 피해야한다. 이미 다쳤지만 늦으면 부상이 커진다.

네 기의 결정 분신이 득달같이 퍼붓는 공세.

기유는 표정없이 검권을 넓힌다. 독자적인 검형인 잔잔한 물결. 혈귀술이 난무하는 가운데를 딛고 우두커니 서서, 그저 벤다.


반점의 발현으로 상승한 체력, 집중력은 티끌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그의 영향권 내로 스며드는 대원들. 이전까지의 11형이 방어를 위한 수단이었다면, 지금은 디딤돌. 기유의 일륜도가 극한의 섬세함으로 아군을 피해 적의 노림수만을 지운다. 그 안에서 그들은 태세를 갖춘다.

저마다 가장 빠르게, 적의 심장부를 노릴 검술을 준비하고


터엉


빛살처럼 내쏜다.

콰자자작

네 기. 얼음 분신들은 꿰뚫려 파훼당한다.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기유. 다른 이들도 지치기는 마찬가지. 허나 길은 열렸다.

다섯의 인간, 하나의 혈귀. 부서져내리는 얼음 결정들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그들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좋아. 인정할게. 대단해. 솔직히 여기까지 할 줄 몰랐어. 칭찬해줄게. 참  했어."


짝 짝 짝


박수를 치는 도우마.

"그냥 죽지? 닥치고."

비릿한 미소로 쏘아붙이는 시노부.


"이를 어쩐다. 나도 물러서면  될 입장이라. 흠..."


고심하듯 손목을 까딱이며 철선 끄트머리로 볼을 톡톡 두드리던 도우마는 차륵 부채를 편다.

"그냥 쓰지 뭐. 조금 힘들지만 짧고 굵은 게 좋잖아?"

쭉 찢어진 혈귀의 눈에 푸른 빛이 스친다.

"영원히 얼어버리렴."



혈귀술
만년결빙





쩌어엉




세상이 멈춘다.


"움직...일.."

소리가 제대로 만들어지질 않는다.

센쥬로는 자신의 몸이 공중에 떠있음을 느꼈다. 부유감이나 직전에 지면을 박찼다던가 그런 근거가 아니다.

저 아래 사선으로 올려다보는 도우마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우마가 서있는 얼만큼의 자리를 제외한 공간 전체가 그지없이 투명한 얼음으로 채워졌다. 순간. 꽤 넓었을 장내를 순수한 얼음으로 메워버렸다.

센쥬로, 기유, 이노스케, 카나오, 시노부. 모두가 무력하게 붙들리고 말았다. 칼을 놓치지는 않았으나 단지 그뿐.


몸의 구석구석 밀고 들어오는 얼음의 물결에 구속당한 채 상현의 시야에 전시된다. 박제당한 생물처럼.

전신을 붙잡고도 모자라 흉포하게 남은 공간을 잡아먹으려드는 얼음.


뿌직

'커헉'

이제는 비명이 육성과 생각 사이 어디쯤을 맴돈다. 사방을 억누르며 부푸는 얼음의 압력에 왼손이 부서진다. 손이 셀 수 없는 칼날에 난자당하는 고통. 센쥬로가 오른손에 쥔 혁도는 아직 빛을 잃지 않았지만, 그전에 숨이 꺼지고  거다.


얼어서 동사하기 전에, 사라진 공기로 질식하기도 전에, 짓눌려 압사당한다.

눈을 뜨고 감기도 어렵다. 시리다 못해 쨍한 눈알.  못보게 되겠지. 죽든, 터지든, 얼든.

저만치 아래 웃고 있다. 도우마라는 혈귀가. 움직일 수만 있다면. 지금도 손목 너머로 느껴지는 열기를 저놈에게 향할 수만 있다면.


모든 수단은 봉쇄당했다. 검술도, 호흡도, 생존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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