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98편
반점 발현 상태에 돌입한 직후, 현기증이 덮쳐온다. 몸은 불덩이처럼 뜨겁고 머리는 어지럽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싸웠구나.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네요. 과거 귀살대를 이끌었던 선대분들은..."
이만한 고통은 그들도 느꼈다. 도저히 무시하고 넘어갈 수준이 아니다. 그럼에도 싸웠다. 혈귀를 쓰러뜨리기 위해, 진정 모든 걸 걸고. 새삼 의지의 무게감이 와닿는다.
"사범님, 저도... 그걸 쓰게 해주세요."
조심스럽게 시노부를 부축하던 카나오가 허락을 구한다. 꽃의 호흡의 최종형. 몸에 극심한 부담을 안기는 그 기술의 사용을.
"안 됩니다."
"아... 네."
위험성은 시노부도 익히 알고 있는 바,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허락.
"라기에는 너무나 위중하죠. 상황이."
"...네?"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바라본 시노부는 빙긋 웃고 있다.
"당신은 너무나 착해요. 분명 상황이 나쁜 거겠죠. 이리 혹독한 선택을 하도록 몰아넣은..."
말끝을 흐리는 충주.
"카나오."
"네, 사범님."
다시 입을 연 시노부는 가라앉은 음성이다.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약화되지 않은 채인 도우마. 그놈과 싸운다.
"상현, 그것도 서열 2위의 전력을 상대해야합니다."
"네."
"죽을지도 몰라요. 아니 승산은 희박합니다. 잘해야 동귀어진에 그칠지도."
최선을 다 하더라도 미래는 누구도 보장하지 못한다. 생존은 도외시한 지 오래. 다만 저 혈귀를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이 관건.
"그래도 싸우겠나요?"
무겁다. 대화의 무게에 답답해진다. 카나오는 억지로 압박감을 떨쳐내듯 말한다.
"...네."
긍정. 마지막일지라도, 그것이 시노부의 곁이라면. 최소한 무력하게 보내고 지켜보기만 하는 결말이 아니라면 뭐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피할 길은 없었으니 물으나마나지만... 마음의 준비란 게 필요하니까요."
시노부는 부축해주던 카나오의 손을 맞잡으며 스스로 선다. 잠시 비틀거렸지만 곧 익숙해진 듯 바로 서서 응시한다.
"허가합니다. 다만 조건이 있어요. 되도록 아끼세요. 쓰더라도 길지 않게. 영구적인 신체 손상이 올지도 모릅니다."
걱정. 단호함. 카나오의 눈에 비친 그녀는 복잡한 표정이다.
"저도 여기 목숨을 걸겠습니다."
짝
"자, 이만하면 시간은 많이 줬고."
손뼉을 마주친 도우마는 웃음을 지운다.
"슬슬 시작해야지?"
긴장감. 센쥬로는 순간 땀방울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만큼 조용하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이 자리의 전원이 상현을 상대로 검세를 끌어올린다. 숨막히는 폭풍전야.
휙
단순히 내젓는 손짓. 간단한 동작으로 전투는 개시한다.
휘리릭
도우마의 철선을 기점으로 뻗어나온 덩굴. 연꽃이 피어나는 얼음넝쿨이 수십 갈래로 찢어지며 일행을 덮친다.
물의 호흡, 제 11형
잔잔한 물결
기유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검권. 그 무엇도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다. 일정 선을 넘어 짓쳐들어가는 덩굴 줄기의 끝부터 바스라지며 잘리고 사라진다. 다양한 각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공세가 가로막힌다. 기유 자신은 그저 가만히 서있을 뿐인데 공격이 스스로 사그라지길 원한 것처럼. 팔락거리는 그의 소매만이 무수한 칼질이 있었음을 슬쩍 알린다.
기유의 영역 뒤로 넷이 모습을 드러낸다. 저마다의 기술이 펼쳐지려던 찰나
혈귀술
황량한 겨울철의 고드름
얼음으로 이루어진 흉기가 하늘에서 쏟아진다. 길쭉하고 날카롭기가 병장기에 가까운 얼음덩어리가 비처럼 퍼붓는다. 빙창의 공습.
꽃의 호흡, 제 5형
덧없는 작약
짐승의 호흡, 다섯째 엄니
마구 찢기
카나오의 9연격. 검의 궤적이 한 송이 작약을 피운다.
공중으로 솟은 이노스케는 사방으로 칼을 내지르며 한바탕 칼춤을 춘다.
센쥬로 또한 전력을 다해 얼음을 쳐낸다.
벌레의 호흡
잠자리의 춤
겹눈 육각
파바바바박
인지하니 거기 있었다. 그만한 빠르기. 이전보다도 월등한 속도. 공간을 접다시피 접근해온 시노부의 검촉이 여섯 개의 혈점을 새긴다.
"별 거 아니지만."
더할 나위 없이 빠르다. 찔린 깊이도, 독액의 농도도 향상됐다. 허나 그 뿐.
스륵
독은 통하지 않고 상처는 금방 재생한다. 그녀에겐 결정적으로 힘이 부족하다. 목을 쳐낼 완력이.
화악
너울거리며 춤추는 철선. 아름다우나 치명적인 안개가 주위를 냉각시키며 뿜어진다.
"흡"
숨을 참으며 물러선다.
짐승의 호흡, 둘째 엄니
가르기
그녀의 공백을 메우듯 좌에서 이노스케가 두 자루 칼을 맹렬하게 내려친다.
파문의 호흡, 제 6형
파문연검
잇달아 가해지는 센쥬로의 검격.
타당
그러나 가로막힌다. 두 사람의 검술이 펼쳐지려던 찰나. 준비자세에서 본격적인 검기로 이어지는 맥의 중간. 도우마의 부채는 정확히 노렸다. 갖은 단련을 거친 대원들이 안간힘을 써보지만 요지부동. 얇은 철선을 쥔 혈귀의 손은 태산같다.
기기긱
교차한 이노스케의 쌍칼을 받아낸 철선이 마찰하며 금속성을 발한다.
타앙
힘으로 쳐낸 도우마. 밀려난 둘에게 쏟아지는 공세.
혈귀술
말라붙은 뜰의 눈
상현의 손이 바삐 움직이며 얼음을 생성한다. 궤적은 마치 카나오의 기술과
"같아?!"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카나오. 상하좌우 몇 번이고 원을 그리며 교차하는 빙결 고리들은 그녀의 작약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흉내를 넘어선 복제. 게다가 혈귀술의 냉기까지.
"크악!"
쿵
나가떨어져 처박히는 센쥬로. 상체를 베이고 부상이 얼어붙는 이노스케. 한 송이 얼음꽃을 두른 도우마는 미소짓는다.
혈귀술
덩굴 연화
연꽃을 피우는 넝쿨. 덩굴이 솟아나 뭉친다. 보다 굵은 동아줄이 되어
쩌엉
내리친다. 대지를 강타하는 밧줄. 나무 바닥은 갈라지고 얼어붙은 물은 으깨진다.
"하아아"
입김이 하얗게 나온다. 싸움이 이어지며 일대의 기온은 조금씩 내려간다. 기유의 숨소리가 변한다.
강적. 감당하기 힘든 적과의 일전은 때로 수 년에 이르는 수련의 성과와 필적한다. 합동 훈련으로 담금질한 몸. 자그마한 계기가 있다면 더 높은 단계로 상승할 그 신체에 지금 자극이 가해진다. 한 발 한 발이 치명적이며 피하기 난처한 일격. 생존의 위기감이 뇌리를 스친다. 심장이 뛰고 숨은 깊어지며 몸은 달아오른다.
물의 호흡, 제 9형
수류 물보라 란
탓탓탓
지면, 튀어오르는 조각들, 심지어 요동치는 혈귀의 공격까지도 발판삼아 어지럽게 회피한다.
벌레의 호흡
지네의 춤
백족 자바라
팡팡펑
반대편에서 돌진하는 시노부 역시 재빠른 몸놀림으로 타격을 흘려내며 접근. 얇은 얼음장은 디딤돌, 밟고 지나간 자리마다 냉수가 솟구친다.
예리한 청색 칼날, 끝만이 날카로운 기형검. 두 자루가 앞뒤로 도우마를 노린다. 오른쪽 뺨에 나비를 새긴 충주와 얼굴 왼쪽에 흐르는 물결처럼 반점을 띄운 수주의 합작.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의 진로상에 둥실 나타난 연꽃 두 송이.
혈귀술
혹한의 겨울 여신
활짝 벌어지는 꽃잎 가운데 눈감은 여인의 상반신이 상을 형성한다.
후우우
파란 입술이 열리고 바람을 분다. 지주들의 면전으로 엄습하는 한파.
찌지지직
튀어오른 물방울이 모조리 결정화하며 쏟아져내린다. 여신의 조각상이 내뱉은 숨결이 스친 경로는 그대로 동결.
"흣"
지주들은 일제히 후퇴한다. 입을 막고 눈까지 감으면서. 노출된다면 연약한 안구는 그대로 동파당한다.
"아, 귀찮아."
지나치게 여유를 부렸나. 아까부터 무잔의 목소리가 도우마에게 들려오고 있다. 한시라도 빨리 제압해라. 다른 귀살대 인간들도 처리해라. 조금 더 즐기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 달려드는 녀석들이 질기게 들러붙어 슬슬 힘을 더 써볼까하던 차였다.
혈귀술
결정의 아이
본체의 삼분지 일도 안 될 크기의 조각이 셋. 카나오를 방해했던 그놈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형상은 도우마를 쏙 빼닮았으며 능력은 그대로. 혈귀술의 위력은 여전한 채 수가 늘어난 셈.
"어"
느닷없는 얼음조각의 등장. 구르고 피하느라 정신없던 센쥬로는 한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혈귀술
얼어붙은 구름
조각상이 빙글빙글 돌며 부채춤을 춘다. 옅게 나타난 얼음 분말은 실처럼 늘어진다. 회전이 빨라지며 둥글게 공처럼 변하더니
훅
두 장의 모조 부채로 센쥬로를 향해 몰아온다. 하얗게 반짝이는 구름의 물결. 그 앞에서 멍하게...
"멍청아!!!"
빡
"악!"
공중 날아차기로 센쥬로를 걷어찬 이는 이노스케.
"이노스케 씨..."
"정신 바짝 차려! 정신줄 놓으면 바로 죽는다!!"
이어 그는 자신의 쌍검을 양손으로 꼬나쥐고 빙그르르 회전시킨다.
후우웅
칼날의 고속 회전이 일으키는 바람이 얼어붙은 안개를 밀어낸다. 센쥬로 앞을 막아선 이노스케를 기점으로 구름이 갈라지며 비껴간다.
카나오는 일륜도를 팔이 빠지도록 휘두르며 어떻게든 공격을 막아본다.
쌔액
그녀의 빈틈을 노리고 이노스케 쪽의 조각상이 빙창을 쏜다.
파문의 호흡, 제 1형
파문질주 황매화
의검
따앙
이노스케의 수비로 여력을 찾은 센쥬로가 급히 몸을 날려 기습을 막는다. 파문을 불어넣은 검은 단단하다.
"괜찮으신가요!"
"어, 으응! 고, 고마...워!"
가깝지 않던 사람과의 대화는 아직 어색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진심을 전한다. 카나오는 차츰 변하고 있다.
"코쵸. 뚫는다."
"토미오카 씨도 생각이란 걸 하네요."
눈빛을 주고 받은 둘.
귀살대가 조각들을 상대하는 사이, 도우마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속으로 잔량 네 기 분의 결정 아이를 만들어 싹 쓸어버리려는 계획을 떠올리던 그.
파창
결정의 아이 하나가 파훼당했다.
벌레의 호흡
벌엄니의 춤
순수한 나부낌
반점 발현이 가져온 압도적 탄력. 찌르기 하나만큼은 경지에 이른 시노부가 지면을 박찬 반동을 극 쾌속으로 고스란히 꽂아넣는다. 얼음 조각상의 중심부. 관통부위 주변에 균열이 가고
물의 호흡, 제 7형
물방울 파문 찌르기 곡
기유의 기술 중 빠르기로는 으뜸일 찌르기가 시노부의 검신 주위를 둘러싸듯 작렬한다. 균열이 쩍 벌어지며 결정체는 부서진다.
도우마가 연달아 손짓하자 혈귀술의 폭격이 이어진다.
위에선 고드름이, 주위로는 폭발하는 연꽃이, 그마저도 부족해 짙은 분말 냉기가 두 사람을 포위하듯 감싸온다.
"버틴다, 코쵸."
그 말을 끝으로, 위협적인 분말에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한껏 들이키는 기유. 참는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소모전이 이어질 뿐. 일격을 가해야한다. 시노부도 뜻을 이해하고 폐부 깊숙이 공기를 채운다.
반점 발현으로 상승한 전투력. 고도로 올라간 집중력과 민감해진 감각.
물의 호흡, 제 11형
잔잔한 물결
둘을 덮치는 모든 위협을 배제한다. 단 한 자루의 검으로. 극히 미세한 결정까지도 가르고 찢는다.
기유의 검세로 가라앉는 공세. 얼음 지옥의 빈틈이 생기자, 시노부는 신형을 튕겨올린다.
퍼엉
이 상태라면 몇 번이고 가능하다. 나비가 날개를 편다.
벌레의 호흡
지네의 춤
백족 자바라
공간의 시작과 끝을 억지로 갖다붙인 듯 도우마의 시야로 찔러들어오는 시노부.
푸걱
일검이 관통한다. 재생해도 좋다. 아주 잠깐이라도 손상을 입히면 충분해. 시노부는 도우마의 목을 관통한 칼자루를 비틀며 웃는다. 지금 난 혼자가 아니야.
물의 호흡, 제 1형
수면베기 일섬
푸극
시노부의 일격에 곧장 따라붙는 참격. 지주들의 검이 목을 거의 반절 도려낸다.
"어라"
고작 인간 따위가 이렇게까지. 도우마는 의문을 품는다. 지나치게 방심했나.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는데. 안 되겠네.
쿠구구
흔들린다. 대지가.
'조금이면!' '제발!'
어떻게든 자른다. 허나 힘은 달리고 꽂힌 칼은 더 들어가지 않는다. 앞서 펼쳐낸 기술 탓에 숨참기의 한계가 급속도로 당겨졌다.
혈귀술
무빙 수련보살
거인. 그 키가 큰 암주 기준으로도 네 배 이상의 높이를 자랑하는 얼음덩어리가 등장했다. 불상의 형태를 한 그것은 온화한 미소로 합장한다. 한 손을 쭉 뻗더니, 거대한 손바닥을 내려친다.
꾸우웅
곧 재생할 상현에겐 별 거 아닐, 혈귀가 아닌 자에겐 통렬한 거력. 얼음불상의 손 모양 그대로 푹 파이는 지면.
"조금이면 됐는데!"
입술을 깨물며 급히 회피한 시노부. 기유 또한 무사히 피하긴 했으나 손에 들린 검이 처지는 건 감추지 못한다.
"후... 방심했네. 대단해."
도우마는 우그러든 신체를 수복하며 박수를 친다.
"선물엔 답례가 있어야겠지?"
그가 불상을 바라보자, 부처는 강풍을 내뱉는다.
후오오오오
삽시간에 위치한 공간 전체의 기온이 급강하한다.
가뜩이나 일전을 치르며 체력은 소모했고 자잘한 부상이 쌓여간다. 인간의 체력에는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충주와 수주는 반점 발현을 통해 전투력을 극도로 끌어올렸으나, 이 또한 없던 것이 갑작스레 생긴 것은 아니다. 같은 양의 연료를 훨씬 빠른 속도로 태워버리는 것이나 진배없다.
"허억" "하악"
둘의 숨결이 거칠다. 아직 반점은 있다. 다만 얼마나 갈지 모른다. 반면 도우마는 여유가 넘친다. 자칫 잘못하면 동귀어진조차 못하고 죽기 직전 타오른다는 회광반조처럼 전력만 헛되이 소모해버린 채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추워...."
얼어붙어간다.
공기가, 주변 사물이 동결된다. 피부가 하얗게 덮여간다. 숨쉴 때마다 아프다. 이제 이곳에 안전한 공기마저 없어진다.
위에서 떨어지고, 아래에서 솟는 얼음들. 사방이 혹독한 추위에 뒤덮인다.
창
땅
어떻게 쳐내고는 있으나 둔화한다. 끝을 모르고 몰아치는 한파에 체온은 식어간다. 동작은 둔해진다. 여전히 공격은 맹렬해서
핏
"으극"
카나오의 허벅지를 스치는 공격. 길게 베인 상처로 피가 나오다말고 얼어붙는다. 배로 고통스럽다.
전멸이다.
무표정하게 지켜보는 상현의 혈귀 앞에서 모두는 쓰러진다.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도 적은 강했다. 그것 뿐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흐으윽..."
흐느낌마저 얼어간다. 센쥬로의 눈가에는 얼음 결정이 맺힌다. 방금은 눈물이었을 액체는 따가운 얼음 조각이 되어 눈조차 뜨기 힘들다.
이대로 진다.
죽는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싸우는데 무력하게 패배하고, 동료들의 곁으로 보내면 안 될 혈귀가... 상현이 자리를 옮기게 된다.
모두가 죽고 만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아니, 많이 강했다면. 결과를 바꿀 수 있었을까.
아버지, 어머니, 형님.
겐야 형님.
무라타 사부님.
전 어떻게 해야하나요.
"커헉"
괴로운 숨을 토해내며 넘어지는 이노스케. 상체가 얼음으로 뒤덮인 지 오래.
그걸 보고만 있어야한다. 다리는 무겁고 발은 바닥에 꽁꽁 얼어붙었다. 감각이 멀어져간다.
이 자리에 필요한 건 뭘까.
힘. 동료. 기술.
아니야. 살고 싶다. 살아서 뒤를 보고 싶다. 추위를 덜어줄 따스함이 사무치게 그립다.
- 센쥬로. 넌 나의 자랑이야.
재능이 없다며 소외당할 때에도 활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던 형님. 염주 렌고쿠 쿄쥬로의 손길. 태양같던 그의 모습이, 목소리가 그립다.
- 여기 있어도 된다.
사부님의 말씀에 벅차오르던 순간. 그때 가득하던 뜨거움이 그립다.
단 한 점의 온기라도 있었다면. 이 추위를 막아줄... 걷어낼...
센쥬로는 얼어간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칼자루만을 움켜쥔다. 손바닥이 새하얘지다 못해 핏줄이 터져 멍이 들도록. 손바닥의 뼈가 뭉그러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질 때까지도 멈추지 않고. 무의식 중에 어떻게든 저항하고 싶어 불어넣는다. 일륜도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파문을 우겨넣는다.
요코 산의 강철이 머금은 태양과 공명하는 파문. 손잡이로부터 전달되는 악력의 힘.
따뜻하다.
손으로부터 전해진 따스함이 손과 팔을 부드럽게 해준다. 모닥불 곁에 둘러앉은 듯한 온기가 주변을 데운다.
"어"
얼어붙어 열리지 않던 입이 숨을 토한다. 눈이 떠진다. 얼어붙은 눈물이 녹아내린다.
"어어"
본다.
센쥬로의 일륜도. 파문의 호흡을 익힌 증거로 황금색이어야 할 칼날이 붉다. 뜨겁다.
해의 호흡 검사가 사용했고, 카마도 탄지로가 네즈코의 도움을 받아 발현했던 현상. 혁도. 그 뜨거움이 마주치는 혈귀는 전부 불살라버리기에 충분했던 위력의 현상.
파문의 과부하와 무의식 중 발휘한 한계 돌파의 악력. 이들은 렌고쿠 센쥬로의 일륜도를 물들인다. 피처럼 붉게.
소년의 칼날에 홍염이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