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96편
"미친 새끼."
코쵸 시노부는 짓씹듯 욕설을 내뱉는다. 그녀답지 않게.
도우마의 공간에 들어서자 방치된 시신들 가운데 하나가 힘겹게 손을 뻗으며 외쳤다. 살려달라며.
충주는 재빨리 여인을 낚아채 빼냈다. 아직 살아있다. 그리고 죽었다.
투두둑
시노부의 품 안에서. 도우마의 손이 슬쩍 움직였고 토막났다. 빙긋 웃는 혈귀. 충주도 베어내기에 충분했음에도 하지 않았다. 단지 희생자만을 정교하게 노렸다. 빠르다. 식은 땀이 난다.
이어 궤변을 늘어놓는다. 사람을 죽여놓고 구원이라느니 행복하게 해줬다느니. 역겹다. 구역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미친 놈이 아닌가.
- 시노부. 그 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몰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죄책감도 없겠지. 죽을 때까지도 모를 거야.
이놈은 없어져야 한다. 언니와 약속했던 것처럼. 혈귀를 한 마리라도 더 제거해서 자매가 겪은 불행이 더는 일어나지 않도록. 타인의 불행을 행복으로 착각하고 강요하는 존재는 있어선 안 된다.
마지막까지 도움을 요청했던 여성의 머리가 나뒹군다. 눈을 감지도 못하고. 더는 말할 수 없을 그녀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미처 맺지 못한 말은 피묻은 입술 안에 담은 채로.
"아, 그 옷. 기억나! 꽃의 호흡을 쓰던 여자아이가 입었던 거지? 아쉬워. 제대로 먹어주고 싶었는데... 혹시 넌 그"
푸욱
미소를 머금고 나긋이 말을 잇던 도우마. 시야가 세로로 길게 찢어진다. 충주의 칼 끝이 상현의 눈을 관통했다.
"그건 내 언니고"
도우마의 온전한 눈에 그녀는 화가 나있는 것처럼 보인다. 돋은 핏줄, 짙게 상기된 피부, 찡그린 얼굴. 봐왔던 사람들의 표정, 그 가운데 분노와 닮았다.
"넌 이제 죽는다. 아니, 죽일 거야. 내 손으로!"
"사범님!!"
츠유리 카나오가 당도했을 때. 둘은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차갑다.
"카나오! 이 자는 위험합니다! 조심"
도우마의 손에 들린 쥘부채. 금색으로 도금된 철선이 공기를 가르니, 기세 그대로 거센 냉기가 형상화하며 덮친다. 시노부는 급히 숨을 참으며 후퇴.
일대는 겨울의 한복판과도 같아서 눈꽃이 피고 물은 언다.
강력한 혈귀술. 카나오의 경계심이 극에 달한다. 치켜든 일륜도를 당장이라도 휘두르고 싶지만 침착해야한다. 무슨 수를 쓰는지 봐야해.
"이런... 방해받긴 싫은데."
혈귀술
결정의 아이
그의 손짓에 카나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얼음덩어리. 한 쌍의 철선을 거머쥔 외양은 도우마 본인과 흡사하다.
"넌 그 아이가 상대해줄 거야."
싱긋 웃은 그는 시노부에게로 돌아선다.
끼릭 끼릭
검집에 꽂아넣은 일륜도 손잡이를 신중하게 조작하는 시노부. 작은 체구는 민첩하나 근력이 부족하다. 때문에 개발한 독자적 전투 기술. 찌르기에 특화한 검, 그 끝에 독을 바른다. 혈귀마다 특성을 달리해 배합 비율을 조절한다. 칼집은 그것을 위한 장치.
찰칵
조작을 마친 칼날을 빼든다.
팟
바닥을 세차게 박차며 쏘아진다.
벌레의 호흡
잠자리의 춤
겹눈 육각
이마, 상반신 좌측하단, 오른쪽 어깨. 수 차례의 연격이 파고들어 점을 찍는다. 피가 튀며 상처가 검게 물든다.
혈귀술
연꽃잎의 얼음
철선을 슥 휘두르자 호선의 궤적을 따라 피어나는 연꽃들. 닿기만 해도 얼어붙을 듯 냉막하다.
"흡!"
초근접 상황에서 펼쳐낸 기술. 전집중 호흡의 검술은 응당 숨을 동반한다. 가까이서 조금이지만 공기를 마시고 말았다.
타닷
가슴팍을 움켜쥐며 물러서는 시노부. 폐가 상한다. 저놈이 사용하는 혈귀술은 그 여파만으로도 위험하다. 단순한 칼바람 정도면 이렇게나 다칠 일도 없을 터.
"피."
냉기 속에 교묘하게 섞어뒀다. 도우마 본인의 혈액이 얼어붙은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무심코 맡았다간 호흡 불능으로 쓰러진다.
힘들어하는 시노부를 본 카나오는 한시라도 빨리 돕고 싶다. 마음만은 굴뚝같은데
혈귀술
연화난만 만개
작은 얼음조각상이 휘적휘적 부채질하자 무수한 연꽃이 허공을 수놓는다. 폭발한다.
꽃의 호흡, 제 3형
피어나는 동백
몸을 중심으로 풀어지는 연분홍 실타래. 시전자를 보호하기 위한 기술. 한겨울 몰아치는 한파에도 피어나는 동백꽃처럼. 카나오를 둘러싸듯 퍼지는 검결의 망은
티디디딩
혈귀술로 생성된 연꽃이 바스라지며 쏟아지는 바늘, 빙침의 공습을 막아낸다.
피빗
"읏"
그 수는 너무나 많아 막을 뚫고 들어온 바늘이 살갗을 스치고 꽂힌다.
예전, 카마도 탄지로가 나비 저택에서 기능 회복 훈련을 마칠 무렵. 그는 카나오에게서 동전을 받아들었다.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카나오에게 코쵸 카나에가 알려준 방법이었던 동전 던지기. 그와 대화할지 말지 고민하던 그녀에게서 탄지로가 양해를 구하고 받아든 동전.
티잉 하고 튀어오른 동전이 빙그르 돌며 솟았을 때, 카나오는 작고 빠른 동전의 동세를 모두 보고 있었다. 마지막에 탄지로의 뒷모습에 가려지지만 않았다면, 동전의 앞, 뒷면 여부도 잡아내기 전에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눈, 동체시력은 굉장히 뛰어났다.
무수한 바늘이 빗발치는 와중에 최소한으로 피해를 경감한 데에는 그 시력이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
도우마와 시노부의 싸움은 격해진다.
"하아, 하아아"
숨이 가빠온다.
연달아 독을 찔러넣었다. 종류를 바꿔가면서. 언뜻 듣는 듯도 하던 독.
"재밌네! 자, 다음은 뭐야?"
방금도 위력이 상당한 극독을 주입했었는데. 저급한 혈귀들이라면 향만 맡아도 녹아내릴 그 약물이 투입됐음에도 재생한다. 상처는 검게 물들다 하얗게 수복된다. 괴로워하다가도 거짓말처럼 멀쩡하다. 연기였나? 아니야. 분명 들었어. 피부가 녹는 현상은 그 증거. 다만 상현, 그것도 고위의 혈귀. 독이 죽이는 속도보다 되살아나는 힘이 강했던 거야.
"뭐야. 더 없는 거니? 나타구모에서 쓴 독보다 훨씬 강하길 기대했는데 이 정도면... 조금 실망인 걸."
역시. 정보는 공유되고 있었다. 무잔일까.
쇄골 언저리가 욱씬거린다. 도우마의 일격이 시노부를 스쳤다. 예상보다도 냉기가 강해 둔해진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출혈이 느껴진다. 행동에 심한 제약이 걸릴 수준은 아니지만 시간을 끌면 위험하다.
최후에는 그 수단을.
모든 독을 모아 목에 박아넣는다. 목을 베지 못하더라도 목이라면.
꾸욱
디딘 다리에 한껏 힘을 불어넣는다. 충분한 공기, 요동치는 탄력.
벌레의 호흡
지네의 춤
백족 자바라
펑 펑 펑
단단한 목재로 구성된 다리. 내리찍는 걸음마다 목판이 터져나간다. 사방으로 구불거리는 움직임. 한순간 접근을 손쉽게 허용하는 속도. 예측 불가의 그 공격이 면전에 도달한다.
양손을 떨쳐내며 시노부의 상체를 노리는 철선.
웅크린다. 바닥에 달라붙을 듯 낮게.
"뭣"
꿍
지면이 으깨진다. 두 다리가 부서져라 가한 압력. 도우마의 말이 첫 마디조차 나오지 못한 그 시점.
푸구국
거친 도약, 사력을 다한 찌르기가 작렬한다. 충주의 검은 천장에 상현을 꿰어버린다. 목을 뚫고 들어간 칼날이 뒤편의 천장 벽면마저 관통한다. 충격으로 쩡 깨져나가는 천장.
순식간에 물들어가는 혈귀. 관통상 주변부가 파랗게, 시꺼멓게 죽어간다.
비상이 끝나고 자유낙하. 떨어지는 도우마의 얼굴.
눈은 냉정하고 입은 징그럽게 웃는다.
통하지 않는다.
"장하구나! 재능도 없고 목조차 베지 못하는 결함덩어리가 여기까지 해내다니!"
눈 깜박할 사이 되돌아오는 혈귀의 혈색. 상처는 없다.
스스슷
도우마의 전신으로부터 여러 갈래로 자라난 연꽃 줄기. 간격을 두고 연꽃이 맺힌 가닥들이 본체를 천장에 고정, 일부는 날아든다. 낙하 도중의, 공격 당시 소모한 힘 탓에 무방비한 시노부에게로.
차락
"사범님!!!"
비명같은 외침. 카나오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어찌 받아내고는 있지만 한 치도 진전이 없는 소모전. 여유가 없다. 가야하는데 갈 수가 없다. 촉수에 휘감겨 끌어올려지는 시노부를 보면서도. 장면의 세밀한 부분까지 망막에 새기면서도.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한다.
"으아아아악!!!!"
비통한 고음이 울린다.
"뭘 해도 소용없는데 끝끝내 해보려는 어리석음. 그게 또 인간이지.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니?"
이미 손에 넣은 듯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한 도우마. 팔 벌려 포옹할 채비를 마친 그를 향해
"지옥에나 떨어져라."
쏘아붙인다.
큰 기술의 큰 반동. 조금만 시간이 있었다면 회복하고 반격했을지 모르는데. 하필 지금의 자신에게는 힘이 없다. 팔다리를 붙든 줄기들을 밀어낼 힘조차.
카나오에게 손짓을 한다. 그 손은 사뭇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의미를 빚어낸다. 수신호를 읽어낸 카나오는 입술을 앙다문 채 공격을 버텨낸다.
먹힌다.
그래. 이 한 몸. 일부만 접해도 어설픈 혈귀는 녹아내릴 등나무꽃 독. 전 체중 37kg의 독덩어리야. 치사량 700배의 독을 맛봐라. 그게 네 마지막 식사가 될 테니.
공격을 받아치는 카나오. 혼란스럽다. 사전에 알고는 있었다. 이해했다.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카나에가 떠나고 피는 안 섞여도 단 하나 남은 가족. 코쵸 시노부. 그녀를 이렇게 보내야할까. 다정한 사람. 돌봐주고 많이도 알려준 언니를 이렇게... 소모...해도 되는 걸까.
현실이 밉다. 혈귀와 싸워야하는 삶이, 그렇게 만든 무잔이, 가족의 원수인 저 상현의 혈귀가. 이 자리에서 힘이 모자라 지켜보기만 하는 자신이 밉다. 더 강했다면. 어쩌면 다른 길이 있었을지도 몰라.
"제발, 제발, 제발!"
주문처럼 되뇌며 얼음조각의 혈귀술을 피하고 받아친다. 그게 전부다.
식은 땀이 난다.
어릴 적 고아로 주워진 카나오. 생존에 필요한 최저한의 식사만을 제공받으며 체벌당하던 나날. 그녀를 포함한 아이들을 거느린 자는 손속이 잔혹했다. 거슬리면 옆에서 아이 하나 죽어나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카나오는 울지 않았다. 운다는 행위와 단절된 것처럼. 들키면 죽으니까. 괴로운 일을 겪어도 목석처럼 우두커니 있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런 순간이 닥치면 식은 땀이 난다. 코쵸 카나에와 시노부의 밑에서 가르침받던 후계 아이들이 혈귀들에게 참살당한 뒤에도, 전대 지주였던 카나에가 도우마에게 당해 상을 치르던 무렵에도. 목전에서 시노부를 상실할 지금도.
"아, 아아, 아아아"
심장이 빠르게 뛴다. 누군가, 아무라도. 구해주세요. 머리로는 충주 코쵸 시노부의 결단이 최선일 거라 생각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 사범님... 언니....
물의 호흡, 제 1형
수면 베기, 일섬
쾅
저만치서 들린 폭음. 푸른 빛줄기가 공기를 양단한다.
"어라"
잘려나간 도우마의 연꽃 줄기.
부스러져 날리는 얼음 분말. 가루가 만들어낸 안개. 그 속을 단숨에 돌파해 착지한 사람.
숨을 몰아쉬는 시노부의 작은 몸을 안아든 그는
"내가 왔다."
수주 토미오카 기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