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91편
대략 1초.
영문은 모르나 멈췄다. 그건 기회였다.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용한다.
콰앙
옆으로 굴러 피한다. 아카자라면 분명 연계공격이 들어올 것이라 여겨, 회피 직후에 거리를 두고 자세를 취하려던 차였다.
상현의 3, 아카자. 이제는 타격의 여파로 터져나간 벽 앞에, 주먹을 뻗은 자세 그대로 정지해있었다. 아직도 이해 못할 기현상의 도중인가 했더니 그도 아니다. 아카자의 두 눈은 똑바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뭘 한 거냐."
아카자는 확신에 차있었다.
투기를 없애며 진화에 성공한 듯했던 탄지로. 그 녀석은 분수에 안 맞는 큰 힘을 섣불리 다루다 제 풀에 쓰러졌다. 또 다른 변화로 목을 베인 위기에서 탈출한 자신의 일격에 나가떨어졌다. 이겼다.
남은 녀석은 고작해야 하나. 일전을 치르며 급성장한 탄지로와 달리 뒤쳐지는 놈. 무라타라고 했나. 약자다.
주먹을 쓰고 특이한 호흡을 익혔다. 얻어맞은 자리에는 기묘한 화상 비슷한 통증이 남는다. 하지만 그 뿐. 상처는 금방 재생한다. 놈의 기술은 충분히 대처 가능하다. 도리어 흉내내 되갚아주기까지 했다. 복수니 뭐니하는 시답잖은 감정으로 덤비던 그 놈의 표정이 급변하는 꼴은 정말이지 볼만했다.
놀아주기도 시시해져서 끝을 보려던 참이었다.
벽에 쳐박아, 손을 갖다대기만 하면 끝날 손쉬운 일. 그런 일이었다. 일이어야 했다.
퍼엉
가을, 말라비틀어진 낙엽처럼 부스러진 벽. 무너지고 뻥 뚫린 자리. 먼지만이 가득하다. 손끝에 닿는 감각이 없었다.
시선을 돌린다. 아카자의 혈귀술, 파괴살 나침은 틀리지 않았다. 틀림없이 그 자리에 놈, 무라타란 녀석은 있다. 형편없는 모습으로 투기를 거칠게 내뿜으며 경계하고 있다. 그마저도 손쉽게 돌파해낼 수준으로 약화된 상태. 자신이 감지한 감각이 가리키는 위치는 틀리지 않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래야한다.
허약하기 짝이 없는 저놈이 뭔가 일으켰다. 주먹을 꽂아넣은 위치에 무라타의 투기는 있었다. 감지했다. 때렸다. 모든 과정에 오류는 없다.
그런데 틀렸다.
다음 순간 그놈은 옆에 거리를 둔 채 떨어져있었다. 놓친 적이 없을 텐데 놓쳤다. 이해하지 못하는 공백이 생겼다.
'투기는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탄지로. 그 녀석은 투기를 없애는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놈은 무어란 말인가? 투기는 끊임이 없다. 기술은 흐트러지고 힘은 전보다 떨어졌다. 다만 위치만이 바뀌었다.'
미심쩍다. 허나 눈앞의 무라타가 약화되어 있는 것도 사실. 전력의 우위는 이쪽에 있다.
몰아붙인다.
당황. 내 현재 심리이자, 상대인 아카자도 어느 정도는 가져줬으면 했던 심정. 그러나 빈틈을 보이지 않을 혈귀란 걸 이미 알고 있다. 단지 막연한 기대감이었을 뿐. 역시나 상현의 아카자는 강렬한 전투력과는 별개로, 냉철한 분석과 냉정한 판단으로 전투에 임하는 유형다웠다. 더 이상의 지연없이 몰아쳐온다.
파괴살
난식
근거리. 어지럽게 날아드는 연타. 아카자의 기술은 정교했다. 한 방이 무시하지 못할 중압감을 담고 있으며 권역 안의 그 누구도 살아남기 어렵다. 그리고 그 전부를 상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정지한다.
잔상이 남을 만큼 고속. 총 열 번의 타격. 일부는 내가 시전했던 이중극점의 묘리를 섞은 변화를 넣었다. 공중을 수놓은 정타. 옆을 지나며 만져질 듯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다 멀어진다.
1초.
퍼버벙
쏟아진 공격이 공기를 짓누르며 폭음을 발생시킨다.
이동해있는 나를 보는 아카자의 눈빛이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파괴살 종식
청은난잔광
예의 강맹한 난타가 폭발한다. 쏟아지는 권격은 충격파를 일으키고, 푸른 파동의 잔상이 공간을 점하며 쭉 뻗는다.
탄지로가 변화를 일으켜 감지하기 힘들어지자, 공간 전체를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대응했던 아카자의 파괴적 일격.
이제 대강 감을 잡았다. 어째서 이 현상, 시공이 순간에 붙잡히는 기현상에 발을 들인 것인지.
상처입고 약해졌다. 피부는 터져 피가 흐르고 근육은 비명을 지른다. 상시 호흡을 익힌 뒤로 좀처럼 느끼지 못한 "숨이 차다"는 것도 지금은 겪고 있다. 무엇으로 보나 절대적 열세가 확연하다. 내 몸이, 머리가 인식한다.
아카자의 공격은 현 상황에서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 저놈의 기술이 시전되는 순간, 극도의 위기감이 찾아든다. 심장이 거세게 뛴다. 쥐떼 혈귀, 나타구모 산의 거미공 혈귀에게 당해 죽음에 이르기 직전의 생존이 위협당하는 느낌이 덮쳐온다. 동시에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머리를 채운다.
분노.
나약한 자신. 부당한 상황을 강요하는 상대. 모두를 향한 참지 못할 감정이 내면을 압박한다. 그러면 눈을 뜨게 된다. 언젠가 몇 번이고 지나쳤던 현상, 주위 사물이 둔화하는 인지. 거기까지 도달한다. 여기에 더해, 이전에는 부족했던 요소.
파문.
고된 과정을 거쳐 쌓아올린 파문의 질과 양. 그 무게가 일순 뚝 떨어져나간다. 극한의 상황에서 감정이 극에 달한 순간 시정지 상태로 넘어가며 지불한다. 오랜 시간 쌓았던 파문의 일부를 깃털처럼 가볍게 던져줘야만 한다.
회복이야 될 것이다만... 문제는 한창 전투 중. 한 차례 돌입할 때마다 무시 못할 대량의 파문이 빠져나간다.
단 1초.
절대적 열세인 현재. 강대한 상대. 극복하지 못할 격차. 그런 자신이 상현과 대적할 무기.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의 너머를 목격했다. 머리로, 마음으로 익혔다. 도달하기까지의 길도 이제는 안다. 대가가 얼마나 큰지도. 오래 지속하지 못할 싸움이라는 사실도 즉감한다.
단 두 번의 돌입만으로 피가 차가워지는 것만 같다. 몸의 생기가 말라붙는 갈증이 솟구친다.
강자와의 싸움. 행동의 절대적 우선권. 허용된 시간은 1초.
공간을 직시한다. 아카자의 푸른 잔상이 사방을 찢는다. 실시간으로 겪었다면 피하지 못할 기술. 순간에 면밀히 관측, 파악한다. 아주 자그마한 틈. 녹아들듯, 폭풍의 한가운데 고요 속으로 몸을 담근다.
폐허 위로 난사한 강타 세례. 그야말로 쥐새끼 한 마리 살아남지 못할 생명의 여백이 빚어진다.
"...뭣..."
놈은 서있다.
아카자 자신이 약자라 칭했던 그 자가. 숨을 거두기 직전이었을 놈이. 보잘 것 없이 나뒹굴 터일 그 자식이. 이 상현이, 그분이 인정했고 지시는 반드시 이행했던 자신의 앞에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을 저 인간이 존재한다. 자신의 주먹이 허공을 찌른 것처럼.
"간다, 아카자."
무라타란 인간은 그렇게 말하고는 정직한 자세를 취한다. 일권을 때려넣으려는 동작. 그 뿐인 단순 그 자체.
'대체...'
경험하지 못한 인지의 영역. 몸이 굳는다. 정확히는 있었다. 이미 잊었다고 여겼던 과거, 수백 년도 더 전의 흔적.
- 변해라, 소년.
자신을 꾸짖고 이끌어주었던 스승. 케이조.
- 하쿠지 씨, 괜찮아요.
하쿠지. 그 당시의 이름은 하쿠지. 그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준 그녀. 코유키.
약자들이었다. 더없이 쉽게 부서진 흔적, 무르디 무른 약한 조각들이다. 잘라내고 망각한 과거다. 스승의 꾸지람과 소녀의 다정함 앞에 생전 처음 느꼈던 멈춤. 몸이 굳는 느낌. 약자였기에 느꼈고, 강자가 되었기 때문에 부질없었을 감각이 몸을 좀먹는다.
달려온다.
이토록 느릿하게 달려드는 적을 방관한 적도 없었다. 인간을 포기한 자신이 아니던가. 그저 집중한다. 이제는 뭔지도 모를 아집이 자신을 잡아끈다.
아카자는 그간 펼쳐온 기술과는 거리가 먼 무언가를 쏟아낸다. 그저 발광, 세상을 짓밟으려는 강자의 독선, 뭐라 단정짓지 못할 폭력을 터뜨린다.
지금의 자신이 가할 수 있을, 가장 강력한 기술은 무엇인가.
아카자라는 막강한 상대에게 치명타를 넣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중극점.
문득 떠오른다.
이미 파훼당해 복제까지 당해버린 기술.
주먹을 세웠다 꺾으며 거의 동시에 이중의 타격을 가한다. 결과, 물체를 때리며 튕기는 반발력은 상쇄하며 온전한 파괴를 얻는다.
정말인가?
엄밀히 따지면 아니다.
거의. 동시라고는 했으나 한계가 있다. 거의라는 단어가 증거다. 때린다는 행위를 수행하려면 먼저 주먹이 대상에 닿는다. 그 순간. 그 한순간 접촉면에는 단 하나의 주먹만이 붙는다. 여럿이 달려들어도 결국 주먹 하나가 닿을 범위에는 단 한 번의 타격만이 가능하다. 이중극점은 말하자면 꼼수. 잔기술. "거의" 같은 지점을 "거의" 동시에 타격한다.
이중극점의 창시자가 궁구했을 이치의 끝은 그 너머. 인간의 몸으로 닿지 못할 걸 알았기에 최선을 다했다. 결과물이 이중극점. 그렇다면 끝은 어디인가?
단 하나의 지점에 두 번의 타격. 그것도 시간의 오차없이 동시에.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는 틀림없이 불가능했을 일이다.
지금까지는.
아카자에게 돌진한다. 파문을 그러모은다. 주먹에.
파문의 호흡, 제 1형
파문질주 황매화
돌입한다.
무無형
백금의 세계
뒤늦게. 놈에게는 얼토당토 않았을 표현이건만, 진실로 뒤늦게 아카자는 움직인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 혈귀가 뿜어낸 기술, 몸짓의 잔영이 전시된다.
품 속에 파고들어
꾸웅
박아넣는다. 정가운데, 신체의 중심에.
그리고 다시 모은다. 남은 힘을. 파문을 긁어모아 다시 한 번.
쿠웅
동일한 위치에 두 차례. 지금에서야 가능할 최선. 인간으로서,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기술을 꽂는다.
황매화
이중연격
"시간은 다시 움직인다."
이해불가.
아카자의 뇌리를 스치는 단 하나의 의문. 왜 이렇게 됐는가.
허술하게 달려드는 것 같아보였던 그 놈. 주먹을 뻗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니 봤다.
뻗는 광경만이 삭제된 것처럼 생경했다. 돌진한 다음 순간, 주먹을 내지른 채인 무라타가 있었다. 지각의 단락.
"뭐냐"
충격.
뻐엉
고통.
뒤로 넘어가는 시야 아래로 자신의 두 팔과 다리가 분리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고통의 뒤에는 공허. 머리 밑의 감각이 소실된다.
털퍽
육중한 충격이 두피를 스치고 인식한다. 나는, 이 아카자의 머리는 바닥을 구르고 있다.
치이익
그나마도 목 아래에서 올라오는 뜨끈한 느낌이 심상치 않다. 타는 냄새와 소리.
믿을 수 없다. 믿고 싶지 않다.
모든 상황은 그러나 가리킨다.
죽어가고 있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의 이중연격. 시간의 재시동. 풀려나가는 현실.
비린내가 구강을 채우며 입술을 비집고 흐른다. 훔친다. 핏물이 입가를 적신다.
타격 후. 아카자의 몸체는 압력을 견디다 못해 터져버린 풍선처럼, 폭발한다. 그 속은 당연히 혈액, 살점, 뼈, 장기로 그득해서 처참한 풍경을 만든다. 한바탕 피분수가 아카자의 후방으로 휘몰아치듯 터져나간다.
후두둑
흩뿌려진 육편이 바닥과 벽, 잔해에 처덕처덕 뿌려지고 들러붙는다. 곧 가리가리 파쇄된 살점은 타들어가고 혈귀의 피는 증발한다.
따로 떨어져 처박힌 팔다리. 서서히 형체가 무너진다.
시선을 둔 곳. 아카자의 남은 일부, 머리가 버려져있다.
그 입이, 눈이 정처를 모르고 경련한다.
너무나도 강했던 상대. 무라타라는 이름의 자신이 도저히 넘지 못할 벽같던 혈귀. 한없이 초라하고 작아지게 몰아붙여온 자. 죽음의 문턱에 서게 했고. 각고의 노력으로 축적한 파문이 무색하게 한 전투의 대가. 단 하나 부족한 조각을 일깨운 계기.
"아카자."
그를 내려다본다. 작아져서 다 타버리기 전의 그를. 코 아래로는 사라져 눈길만이 찔러오는 그를 향해 말한다.
"내가 살아남은 이유는 단 하나다. 강자여서도, 약자이기 때문도 아니야."
백금의 세계에 발을 들인 기폭제. 극도로 치민 감정.
"너는 나를 화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