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9화 〉89편 (89/109)



〈 89화 〉89편

"렌고쿠 쿄쥬로. 강한 사내였다."

상현의 3, 아카자의 건조한 음성.


"그는 지고의 영역을 향해 가고 있었어. 투기는 더없이 날카로웠다. 그런데도 약자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카자는 비웃음을, 탄지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그걸 묵묵히 지켜보며, 혈귀의 행동을 경계한다.

"인간인 채로 강해진다. 얼마나? 수십 년? 길어야  정도면 인간은 죽는다. 전성기는 더 빨리 끝난다. 결국 도태되어 사라지지. 약자는 무릇 그렇다.


강자가 약자를 돕는다고? 헛소리다. 진정 강해지려면 인간을 그만두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인간인 채로 돕는 건 결국, 약자끼리 보듬으며 약자로 남겠다는 핑계나 마찬가지... 쿄쥬로는 하찮은 약자로 추락한 거다."

"너  자식... 렌고쿠 씨를 모욕하지 마라... 아카자아아아아!!!!!"


거칠고 새된 외침. 반대로 움직임은 정제된 검과 같다.


"이 소년은 약하지 않다고 했나. 쿄쥬로의 말이 옳았다 인정하지. 성장했어. 그러니,"

아카자는 다리를 내밀듯 쿠웅 내리찍는다. 그의 주위로 펼쳐지는 눈꽃의 형상.


일순 감지했다. 어렴풋이 또는 선명하게. 어떠한 올가미, 혹은 그물, 뭐라 표현할지 모를 적의가 공간을 채우고 자신들을 감싸는 걸.


술식 전개
파괴살 나침


"처음부터 본격적으로 간다."


달려드는 탄지로를 향해 정권을 내지른다. 그 빠르기가 어마해서 아슬하게 피해야했다. 바닥을 디디며 도약, 공중에서 몸을 돌리며


히노카미 카구라
화차


검의 원을 그리며 아카자의 팔을 후방, 뒤편에서 노린다.

'베어내야 한다! 팔조차 베지 못하면 목은!'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쳐올린다. 어깻죽지를 거꾸로.


스걱


벤다.


칼날이 지나간 자리가 스윽 갈라지며 아카자의 오른팔이 절단된다. 핏물이 튄다.


'됐어! 다음은...!'


찰나, 상현은 대수롭지 않게 잠시 체공 중이던 팔을 왼팔로 잡아채 도로 제자리로 박아넣는다.

탄지로의 표정에 낭패감이 드러난다. 금방 아무는 모습이 눈에 띌 정도.

도리어 곤경에 처한 쪽은 탄지로. 아카자가 그 기세로 세차게 뒤돌며 수도를 취한다. 손날을 그대로 탄지로의 목줄기에 돌려친다. 당한다.


타닥

뛰어들어 파문을 실은 주먹을 밀어넣는다. 주먹 끝을 세워 타격, 곧장 꺾으며 이차 가격.


이중극점




터지는 소리. 아카자의 팔은 행방을 잃고 제멋대로 꺾인다.

"고맙습니다!"


"방심하지 마라. 탄지로."


얼핏 본다. 아카자는 타격당한 부위를 살피고 있다. 움푹 들어가고 타들어간다. 파문의 힘.

"새로운 경험이군. 또 다른 호흡인가?"


그러나 그가 팔을  차례 털자 꺾인 건 제자리로, 피부는 도로 채워지며 원상으로 돌아간다.

'상현의 재생속도. 빠르다.'

어지간한 충격은 없던 것처럼 되돌릴 것이다. 어려운 싸움이다. 절감한다.


"거기 너. 이름이 뭐지?"

대답하지 않는다. 명백한 적. 어떠한 정보도 넘기지 않겠다.

"뭐 좋아."

문답무용. 아카자는 돌격한다.

파괴살
공식

퍼퍼퍼펑


그가 허공에 여럿 주먹을 찔러넣자, 공기가 터지며 충격파가 쇄도한다.


히노카미 카구라
염무

탄지로는 검을 곡선의 궤적을  차례 그어내며 걷어낸다.

이쪽은 향상된 파문 감지로 알아챈 충격을 일일이 때려내는 연타로 받아쳤다.


"앗"


날아드는 충격파가 사라진 자리에 아카자는 이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견제기에 숨어든 셈.

파괴살 각식
관선할


 팔은 바닥을 짚은 채 뒤로 올려차기. 깔끔한 일격이 탄지로를 스친다.


받아냈다. 칼로. 얕았다. 스쳤다.  뿐인데.


코피가 터진다.


허공의 탄지로에게 일격을 먹이려는 혈귀. 끼어들어 쳐낸다. 내 권격을 흘려내듯 빙글 돌며 아카자는 반대편 주먹을 횡으로 후려친다. 목표는 탄지로.


히노카미 카구라
환일홍

훅 꺼지는 불꽃처럼, 비틀리는 동세로 고속 회피. 그 위치의 잔상을 아카자의 주먹이 훑는다.

다행히 탄지로는 얼만큼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아카자의 몸놀림은 물흐르듯 끊기지 않는다.


파괴살 각식
유섬군광


발이 수 개로 불어난다. 아니, 잔상이다. 워낙 빨라 그렇게 보인다. 다만 각각 실체가 있는 묵직한 축격.


파파팡


거의 반사적으로 막는다. 전신에 작렬한다. 파문은 제대로 집중했으나, 복부의 충격에 울혈이 치민다.


"무라타 씨!!"

"저 녀석, 무라타라고 하는구나."

젠장. 한 마디하고 싶었다. 탄지로의 상냥한 마음이 정보 유출로 이어졌다.

쾅 쾅


날려진다. 등짝이 벽에 박히다 못해 뚫고 들어가  장이고 문짝을 부순다. 난잡하게 구르며 처박히다 본다. 절벽.


난간조차 없는 낭떠러지가 튕겨나온  너머에 있었다. 옆눈길로 보고는 구르며 손을 뻗는다. 나무타기 훈련에서 썼던 방법.

손가락과 손아귀에 집중하는 파문의 배분을 급격히 늘리며 목재 바닥에 꽂아넣는다.




크그그그극


날아가던 관성, 멈추려 찌른 손가락. 지면에 손가락 개수만큼의 줄기진 선을 쭉 미끄러지듯 남긴다.

추락 직전에 정지한 몸을 튕겨올리곤 돌진한다. 튕겨나왔던 그 현장으로.


파괴살 쇄식
만엽섬류


슬쩍 떠오른 아카자는 거력을 담은 주먹으로 지면을 내려찍는다.




쿠자작


타격의 중심이 깊이 깨지고 주위로 균열이 퍼지며 와작 으깨진다.


여파를 피해 후퇴하며

히노카미 카구라
양화 찌르기

휘도는 불길 같은 일검을 길게 떨쳐낸다.




관통하는 검상. 몸으로 받아내고는 회복해보이는 상현.

파괴살
귀심팔중심

무수한 난타. 다시 합류한 이쪽을 흘긋 본 아카자는 양팔을 휘두른다. 공간을 메우는 주먹들의 그림자. 하나하나가 터무니없이 묵직하다.

히노카미 카구라
작골염양


탄지로가 나선형의 검기를 여럿 내질러 좌측의 난타를 받아치고


파문의 호흡, 제 7형
연격권

좌완과 우완을 뒤틀어 고속의 연타, 남은 가격을 받아낸다.

뼈까지 울리는 공방.

별안간 공세가 잦아든다.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상현의 3을 노려본다.


"좋아. 대단해. 모처럼 싸울 맛이 난다."


"무슨 속셈이냐."

의문.  공격을 멈췄는가.


"제안을 하지. 보나마나 저쪽 꼬마는 거부할 거고."

아카자의 이질적인 눈이 응시해온다.


"무라타라고 했나? 너 혈귀가 되라."

혈귀가 된다. 인간의 수명, 그 한계를 넘어 살 수 있다. 무한에 가까운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강해진다.


분명했다. 상현 아카자와 자신의 차이. 탄지로와 함께 해서야 간신히 대항할까말까 위태한 상황. 지금도 손이 얼얼하고 온 몸이 시큰하다. 그토록 수련했어도 격차가 난다.

그나마 초장. 싸움이 길어지면 더더욱 불리해진다. 상현급의 체력은 한도가 없고 인간의 신체는 급속도로 힘이 빠진다.


혈귀가 된다. 무한한 시간. 무한한 수련. 무한한 강함.

"좋은 얘기다."


"무라타 씨?"


당혹스럽단 탄지로의 낯빛.

"혈귀가 되어 제약이 사라지면 끝도 없이 강해지겠지. 정말 솔깃한 제안이다. 수련자 입장에서는.

허나 거절한다."

탄지로의 표정은 밝아지고, 아카자는 인상을 찌푸린다.

"나는 인간이어서 수련했고 강해지려 노력했다.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죽어간 사람들. 거슬러 최초의 상실. 소중했던  아이.


"그런 일이 있어서, 죽어간 사람을 잊을 수 없어서 지금의 내가 있다. 혈귀가 된다고? 차라리 죽고 말지. 내가 아픈 건 말이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야. 과거의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었을, 그 시간이 없어져서 이렇게 아픈 거라고."

이를 으득 물며 내뱉는다.


"미련. 약자들은 하나같이 미련을 품고 추억을 갈구하지. 자신들이 약해서 뺏긴 것을, 남 탓을 하면서."

뿌득

어깨를 돌리고 목을 꺾으며 아카자는 슬며시 웃는다.

"널 보니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났어. 얼마 전... 너희들 인간 기준으로 긴 시간이겠지. 난 명을 받았다.


귀살대의 기반을 파괴해라. 약자 주제에 복수랍시고 칼자루 쥐고 설쳐대는 꼴이 어지간히도 거슬렸는데  됐다 싶었다.

목표는 늙은이들. 잔챙이들을 길러내는 놈들을 잡아죽이라는 지시였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  듣고 싶지 않다. 어김없이 이야기는 귀를 파고든다.

"약자를 가르치는 자. 조금은 강할까 했는데 실망했다. 기교는 있을지언정 이미 전성기를 오래 전에 넘긴 육체들은 한 방에 허물어졌지.

단  명을 빼고.

날랜 놈이었어. 감탄했다. 몇 번이고 내 공격을 피해냈어. 가벼운 주먹이었어도 받아낸 인간이 없었는데."

그는 피식 웃었다.

"그게 전부였다. 모처럼 달아올라서 조금 진심을 냈더니만... 바닥에 퍼지더군. 애초에 검사였던 모양인데 검이 없었으니."


검이 없었다.

"다 죽어가는 걸 보니 흥미로웠어. 다리가 없는데도 숱하게 피해낸 점은 높이 사지."


다리가 없었다.

"그리고 뭐였더라... 그놈 몸뚱이를 박살내고 나가려는데 소리가 나더라고. 아주 조용하게. 이름처럼 들리던데."


봤었다. 수습되고 난 직후의 모습을. 피묻은 수염. 그 너머의 입술을 열어 힘겹게 말씀하셨을 거다. 더없이 다정하게. 걱정을 담아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무라타. 네 이름과 같지?"





 한 글자.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던,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던 혈서. 그분은 알려주려고 하신 거다. 위험하다. 조심해라. 다만 시간이 충분한 설명을 허락하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에 그 사람, 말없이 자상했던 스승님은 온통 나를... 생각하셨다...


"...아."

가슴의 고동이 멈춘다. 착각인가. 무심하게 당장의 상황만을 보던 눈이, 얼굴이 일그러진다.


"어떤가, 약자. 그 추억"

혈귀는 웃는다.


"단 한 조각이라도 빼앗는  성공했을까?"

더럽고 역겨운 그 음성이 심장을 쥐어짠다. 호흡이 거칠고 손이 떨린다. 시야가 좁아진다. 참을  없는 무언가가 목구멍을 비집고

"으아아아아아아아아!!!!!!!!!!!"

터져나온다.


짐승의 울음은 아마 이런 거다.

그 자리의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 소리가 끝나도록. 상현은 즐거워하며, 동료는 이를 갈면서.


"허억...헉..."

숨이 차다.  시간이 지나서 다시 찾아온 감각.

"...아카자..."

"보기 좋아. 그 눈. 끓어오르게 하거든. 밟아줄 때의 쾌감이 기대돼서!"



충혈된 눈. 단 하나만을 꿰뚫는 눈.



"너는 반드시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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