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6화 〉86편 (86/109)



〈 86화 〉86편

무라타가 수상한 물체와 마주쳤던 때와 같은 시각.


풍주는 수주 토미오카 기유와의 일대일 대련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젠장 쓰레기 새끼가..."


 지주가 다투는 것으로 오해한 탄지로가 끼어들었고, 수주가 대련일 뿐이라 해명하는 사이 탄지로는 코를 킁킁거렸다.

'시나즈가와 씨 혹시 오하기를 좋아하시나요?'

힘든 단련을 마치고 오하기에 말차를 한 잔 곁들여 즐기는 게 꿀맛이자 그만의 비밀스런 취미였는데.

'말차 냄새하고 찹쌀, 단팥 냄새도 나요! 기유 씨는  냄새가 안 나시나요?'


'시나즈가와는... 오하기를 좋아하는 건가...'


냄새에 민감한 탄지로 놈의 언급에 수주마저 입에 그 이름을 올리자 견딜 수가 없어졌다. 치부가 드러나는 끔찍한 기분이었다.

"뭘 잘못 처먹으면 그렇게 맛이 가는 건지, 애새끼가..."

궁시렁대며 계단을 내려가다 무언가 시야에 잡힌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진 등과 등 사이, 수풀 속.

타악


잡아채며 으깬다.

손가락을 펴자 손바닥에 혈흔을 남기고 떨어져내리는 잔해.


"뭐야, 이건."

무라타가 목격한 물체와 동일한, 한자를 한 글자 새긴 안구의 형상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인가."


하얀 정장 상하의, 안에는 꽃무늬 조끼를 껴입고 넥타이까지  완연한 신사의 차림을  인영이 저택에 들어선다. 검정 외투를 흩날리는 망토처럼 두르고 백색의 티없이 깨끗한 구두까지, 누가 봐도 깔끔한 매무새였다.


"...만나서 반갑군. 키부츠지... 무잔..."

"참으로 추악한 모습이구나. 우부야시키."

우부야시키 카가야가 은거하는 저택. 무잔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부야시키 본인, 아내, 아이 둘. 총 네 명. 호위는 없다.'

나키메의 탐지로 사전에 입수한 정보와 동일하다. 귀살대 수장의 거처답지 않게 너무나도 허술하다.

함정의 가능성도 염두했다. 그러나 혈귀의 거두인 자신의 감각을 벗어날 이는 많지 않으며, 있다 한들 적절히 대처하고 벗어날 자신감이 그에게는 있었다. 무잔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나는 옳다. 틀리지 않았다.'


보라. 눈 앞에 자신에게 대항했던 자의 초라한 몰골을.  키부츠지 무잔은 항상 옳다.

여유있게 자신의 집을 둘러보듯 주위로 시선을 돌린다.

크다. 저택의 규모는 상당하다. 그럼에도 고즈넉하다. 세월의 때가 묻은 목재가, 알맞게 꾸며진 정원이, 어두운 밤을 비추는 아릿한 등불이, 아늑한 기분이 들도록 이끈다.




"하나, 하룻밤이 지나면 떠들썩해서 떠들썩해서"




"둘, 어린 소나무는 화려하게 꾸민 소나무 장식 소나무 장식"

하얀 머리에 세상 걱정없어뵈는 우부야시키 가의 아이 둘은 서로 공을 튕기며 논다. 노래를 곁들인 공놀이는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흐뭇하게 만들 것이다. 사람이라면.


"참으로 평온한 광경이야. 너무나도 조용하고 평화로워. 도리어 불안해질 정도로."

마루에 오르지 않은 채 서서, 활짝 열린 방문 너머 우부야시키 카가야의 병석을 내려다보며 무잔은 감상을 털어놓는다.


"만일 너희들이 내 평온을 깨려고 들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런 집에서 고요히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지."

"오래도록...살다보니 말도 많아지는 것인가... 아마네..."


"네."


카가야는 병석 옆에 앉아있던 그의 반려자를 부른다.

"그는... 어떤... 용모를...하고 있지...?"

"20대 중후반의 남성으로 보입니다. 다만 눈동자는 짙은 분홍색, 그리고 동공이 고양이처럼 세로로 길군요."


우부야시키 아마네, 그녀는 무잔의 복장에 대한 설명도 덧붙인다.


"이젠 눈도 안 보이는 건가. 천 년간 날 방해해온 무리의 수장이  꼴이라니. 흥이 다 깨지는군. 주제넘게 대든 대가겠지."

"아니... 주제넘은...쪽은...그 쪽의 복식...아닌가...?"


카가야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부들거리는 팔로 힘겹게 지탱하며 간신히 앉는다.


"이제야...조금은 편하군. 말이. 쿠흑"


"무리하지 마세요."


입가로 흐르는 피. 아마네가 천으로 조심스레 닦아낸다.

"네게 흰 옷은 어울리지 않아. 헤아리지 못할 수의 인명을 살상한 그 손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깨끗한 복장 안의 육신에는 칠흑같이 어두운 욕망이 꿈틀거리겠지. 그런데 백색이라니. 감추고 싶은 건가."

"글쎄. 별 생각은 없는데. 인간을 죽일 때도, 지금도. 오히려 우부야시키,  대면한 지금 짜증이라도 내야 경우가 맞을 텐데... 처참한 꼬락서니에 되려 아무런 감흥조차 없군."

"처참... 부정할  없어. 이미  년도  전에  일 뒤에는 죽을 몸이라 의사가 말했으니 말야."


얼굴, 팔, 다리, 상하체. 옷과 붕대로 가리지 못한 부위들은 거진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썩고 곪아 이미 사람의 피부라기에는 거리가 먼 상태. 부패한 악취가 퍼져나간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는 피눈물을 흘리며, 핏방울 섞인 공기를 토하며 말을 이어간다.

"너를 쓰러뜨리겠다는 집념. 그것만으로 버텼지. 이제 머지 않아 죽겠지만."



카가야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키부츠지 무잔은 우부야시키의 핏줄에서 나온, 이를테면 머나먼 친척이다.


무잔이 혈귀로 재탄생한   전. 우부야시키 일족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하나같이 병약. 얼마 못 살고 죽었다.

저주.

신주의 조언은 하나였다. 무잔을 쓰러뜨려라. 같은 핏줄에서 태어난 귀신을 잡아야만 저주가 풀릴 것이다.


일족이 끊어지지 않도록 신직에 종사하는 일족에서 대대로 아내를 얻어 유년기는 넘겼으나... 그마저도 30세는 넘기지 못하고 요절. 여전히 저주는 남아있다.

"저주라. 허황된 말이야. 왜냐면  아무런 저주도 받지 않았어. 일족의 저주라면 응당 같은 핏줄인 내게도 영향이 있었어야 맞지 않나?"

무잔은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린다.


"난 너무나 멀쩡하거든. 수백, 수천의 인간을 죽여도 아무런 일도 없었지. 아. 그래. 너희들. 그 귀살대인가 하는 족속들의 방해만 빼면."

"고귀한 희생을 방해라 말하는 건가."

"희생. 내게 닿지도 못한 못난 것들을 포장해주는군. 뭐, 다 쓸모없는 얘기다. 이제 네 목숨을 거두고 나는 존재한다. 그것이 결과."

카가야와 아마네는 침묵 속에 독백을 듣고 있었다.

"결과 뿐이다. 이 세상에는 결과만이 남는다. 역사에 기록되는 승자는 보통 살아남는 자. 실상이 어떻든 중요하지 않아. 네놈들이 얼마를 발버둥치건 결국 노쇠하고 스러진다. 흙으로 돌아가지. 반면  보란 듯이 남아있다. 남는 자가 승자. 이 결과로 증명된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살아남는다. 영원히. 바라는 건 불멸이겠지."


"네즈코를 손에 넣는다면 태양의 제약도 벗어나게 된다. 곧 그렇게 될 거고. 영원은 내 손에 들어온다."

"진실된 영원은 그런 게 아니야."


카가야는 자신의 가슴 언저리에 손바닥을 가만히 올리며 말을 잇는다.


"마음. 의지. 서로를 지탱해주는 유대. 몸은 사라져도 그 마음은 전해진다. 반면 무잔... 자네는 안타까워. 본인이 죽으면... 종속된 혈귀가 모두 사라질 테니."


대기가 흔들린다. 막강한 힘을 지닌 무잔의 감정 변화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정답인가?"


"닥쳐라."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무잔은 말한다.


"예전부터 그랬지. 너희들은 항상 거슬렸어. 나의 일상을 방해해왔다.

조용한 아침에는 어둑한 실내를 거닐며 가볍게 산책한다.  날 할 일을 계획하고 움직인다. 희귀혈 한 잔은 몸을 최적의 상태로 끌어올려주지.

밤이 되면 길거리로 나선다. 이전에는 가보지 않았던 곳을 방문해 내 피를 인간들에게 심어넣지. 태양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혈귀의 탄생을 바라면서.


돌아와서도 탐색은 멈추지 않아. 나를 이렇게 만든 의사가 말했던 재료. 푸른 피안화... 충실한 수족들은 계속해서 찾는다. 그걸 관리하고 감독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무잔."


그는 빙긋 웃는다.

"나는 마음의 평온을 바라는 존재라는 걸 설명하는 거야. 내 계획, 과제는 빈틈없고 끊임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부야시키, 내 계획을 어그러뜨리는 자네는 내 적이란 말이야."


무잔은 손아귀에 힘을 주며 손톱을 세운다.

"오늘 밤도 편히 지내기 위해... 자네를 처리하도록 하지."


혈귀의 수장이 죽이려 마음먹은 상대는 지금껏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직접, 또는 수하의 손에 죽거나. 죽이기 전에 모종의 이유로 알아서 죽거나. 어쨌든 죽었다.

죽기 전의 그들은 예외없이 비슷한 반응이었다. 격한 감정.

가증스런 이 귀살대의 수장이란 놈은 어떤가. 초탈한듯 별 반응이 없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옆에는 힘이 될 전력이 하나도 없다.

"그토록 많았던 수하들이 지금은 단 하나도 없군. 쓸쓸한 죽음이야."

"하하하하하"

피가 튀는 것도 아랑곳않고 카가야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린다.

"대체 왜 웃는 거지?"


"아니지, 아니야... 나는... 혼자가 아니다."


무잔은, 도울 이도 지켜줄 무기도 없이, 싸울 힘조차 없는 가족 셋과 함께 하며 병석에서 죽어가고 있을 터인 카가야를 그저 보고 있었다.

'뭐지? 이 녀석은...'


"인간을 얕보지 마라... 무잔."


천 년. 귀살대는  년을 버텼다. 숱한 위기에 궤멸 가까이 내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목적은 단 하나.


복수.


소중한 것들을 지키지 못해 분노하고, 빼앗아간 상대를 절대 용서치 않겠다 다짐하며 달려들고 죽어갔다. 지금의 내가 못하면, 다음이 있다. 살아남은 다른 이들이 뜻을 잇는다. 피로 물든 발자국은 한 걸음씩 끊임없이 나아간다. 그 길의 끝에 서있는 건 키부츠지 무잔.


"네놈은 아무 것도 모른다. 인간의  끝을 알  없는 집념을."

카가야는 미소짓는다. 병색이 짙은  얼굴로, 가래끓는 소리를 내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감사하마. 이제까지 견디어낸 내 몸에. 나를 따라와준 귀살대 아이들에게. 너와 만나게 해준 여태까지의 모든 것에."

전신을 관통하는 감각. 그것은 무잔이 첫 호흡의 검사를 마주친 이후로 처음 느낀 공포였다.

그  막강했던 귀걸이의 사내. 그와는 달리  앞의 우부야시키 카가야는 그저 맨 몸으로 웃고만 있을 뿐. 아무런 무기도, 수단도 없다. 그런데도 더없이 불안하다.


모든 것을 쥐어짜고 죽음을 기다릴 터인 병자의 말이, 결코 허세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근거가...  표정에 드러나 있었다.


무잔은 반신반의한다.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뭔가 있다. 기묘한 괴리.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선다. 불안의 근원은 분명 목전의 카가야와 일가족에게는 없었다. 있다면 저택 지하.




1866년. 스웨덴 사람 알프레드 노벨은 발명했다.


다이너마이트.


기존의 불안정한 액체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에 흡수시켜 안정성을 대폭 향상시킨 고형 폭약.

본래의 목적은 광산, 공사 현장에서의 발파. 그러나 이후 전쟁에서 대규모로 사용되며 살상 무기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누군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집념, 무잔에게는 악의로 비칠 뿐인  감정의 결정체.



대량의 폭탄이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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