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1화 〉51편 (51/109)



〈 51화 〉51편

사아아아


비가 내린다.


손에  우산의 살을 타고 빗물이 흐른다. 떨어진 빗방울은 대지에 추락해 터진다. 흙내음이 공기에 섞인다.

자박


물먹은 발소리. 옷깃을 여민다. 환자에게 지급되는 간단한 의복. 얇아서 한기가 스민다. 걷는다.

푸른  풀떼기로 뒤덮인 땅의 곳곳이 불룩 솟아있다. 저마다 앞에 작달막한 비석 하나씩을 세워두고.

무덤. 묘지다.


본격적인 재활훈련에 들어가기도 전인  상태. 각별한 주의를 덧붙인 외출 허가를 받아 나왔다. 외출이래봐야 귀살대 점유 구역 내의 소소한 것이지만.


볼 일이 있다.

개개의 무덤을 찬찬히 둘러본다. 대원들의 이름, 나이. 간단한 인적사항이 적힌 묘비들.


이곳에 묻힌 사람들이 끝에 기댈 곳은 여기였다. 돌아갈 품이 없었다.

대대로 귀살행을 이어온 대원들. 또는 가족이 있는 이들. 그들은 사고를 당하면 가정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른다.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혈귀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 검을 잡고 복수하려는 대원들이 많았다. 이들에게는 가족이나 친인척이 적거나 없고 연락이 끊긴 경우가 부지기수. 죽고 나서 끝끝내 연고를 찾지 못하면 귀살대 묘지에 묻힌다. 그나마 묻힐 시신이 있으면 다행이다. 종종 시신 조각도 찾지 못하는 사례도 있으니.


멈춰선다. 찾았다. 반 년이었던가. 짧고도 길었던 그 시간, 가르침을 주었던 스승의 무덤이다.

이름은 없다.

그분은 이름이 없었다. 있었는데 감춘 것인지 원래 받지 못했는지 사연은 알 도리가 없다. 귀살대 후속 처리 부대에 물어물어 위치를 알아냈다.

이렇게 찾아온 것도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다. 그간 많은 임무의 수련의 나날로 바빴다. 핑계일지도. 이제야 시간이 나게 된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아래에는 마지막으로 맡았던 직책과 향년, 추정되는 그 날이 쓰여있다.


흉수의 자비없는 손속에 유명을 달리했을 그 날.

피로 쓰인 한 글자. 拳. 머리에 맴돈다.

염주와 탄지로가 마주친 그 혈귀, 아카자. 키부츠지 무잔이 특별히 지정한 상위 여섯의 혈귀, 상현. 그중에서 세번째. 그자의 주력이 주먹과 다리를 쓰는 격투술이라 했다.


사건 직후 탄지로가 지주들에게 불려가 보고를 하고 이를 취합한 결과의 하나다.

혹시, 하는 마음이지만 확신은 없다. 다만 강력한 혈귀의 등장은 유념해야할 귀중한 정보다.


스승이 묻힌 모여서인가. 생각을 멈추기 어렵다. 머리를 흔든다. 푸들거리며 우산에 얹힌 물이 마저 흩어진다.


찾아올 무덤이 있다. 어찌보면 다행일까? 온전치 못한 시신이나마 돌아와 안치, 기릴 수는 있게 되었으니. 쓴 웃음이 난다.

쪼그려앉는다. 가만히  위의 풀포기 언저리를 쓸어본다. 손바닥에 닿는 물이 차갑다. 손등에 더는 빗방울이 쌓이지 않는다.

비가 그쳤다.



스승의 묘소 방문은 자극이 되었다.


한 달의 공백. 그것도 누워서 꼼짝도 못한  숨만 붙어있던. 혈귀와의 전투에서 몸과 마음이 모두 멀어져있었다. 느슨해지기 충분하다.

방문을 계기삼아 긴장의 끈을 조인다.


"드셔보세요."


돌아와 젖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수건이로 닦고 있으려니 들이밀어진 접시. 스미, 키요, 나호. 세 아이가 천진한 미소로 권한다.


네모지게 썰린 물체. 노르스름한 두부같은데 구멍이 크고 작게 송송 나있다. 위는 갈색으로 껍질이 얇다.


"이것두"


건네받은 물건. 오른손으로 얼떨결에 받아버렸다.


"이렇게 이렇게" "찍어서 드세요." "포크래요, 그거."

숟가락처럼 곧은 줄기 끝에 세 갈래 가느다란 가시가 돋은 이게 포크란다. 소녀들의 동작 흉내를 보고 대강 이해했다.

"요건 카스테라란 건데요. 맛있어요."

어쩐지 기대가득인 여섯의 눈동자. 진땀흘리며 포크로 카스테라를 헤집었다. 적당한 크기로 잘라 얹어서, 떨어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입을 벌리고 넣는다.

아이들의 입도 벌어진다.

"어때요?"

포슬하다. 부드럽다. 달다. 녹는다. 꿀꺽.


"...와."


"맛있죠?" "봐봐! 좋아하실 거랬지?" "히히"

사라지듯 없어지고 그 맛의 흔적과 약간의 향만이 입안을 채웠다. 처음 느끼는 맛.


소녀들은 자신들이 겪은 것처럼 기뻐하고 웃고 즐거워한다. 따뜻하다.







링거라고 했다. 깨어난 첫 날 주렁주렁 달고 있던 그 주사액의 명칭이다.


며칠이 지나 병세는 나아졌다. 차도에 맞춰 수액의 개수는 차츰 줄었다.


찌익

방금 빼낸 주사가 마지막이었다. 주삿바늘을 고정하던 끈적이는 천이 뜯겨지고 소독제가 묻은 솜을 받아 가만히 댄다.

"문지르면 멍드니까 살짝 누르고만 있어요."

궁금해 슬쩍 들춰본다. 바늘이 쑤셨던 자리에 작은 구멍이 나있다. 얼른 덮어버린다.

"앞으로의 일정을 일러드리자면.. 기능 회복 이전의 문제예요. 기초 체력부터 길러야겠네요."


충주 코쵸우 시노부의 권유. 옳은 말이다.

누워있던  시간. 몸은 움직이지 않으면 약해진다. 정지한 상태에 맞게 불필요한 근육이 사그라든다. 전신의 근육량이 현저하게 줄어있었다. 거기에 내부 손상도 있었으니.


호흡법이 해주는 역할은 강화. 이는 강화할 대상인 신체 본연의 강함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체력의 근원인 근육이 줄어서야 호흡의 힘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근육을 늘리려면 혹사해야한다. 팔, 다리, 어디든 근육량 증가를 위해서는 당기고 피로한 느낌이 들도록 움직이고 휴식하는 흐름의 반복이다.

기초 체력 단련을 위해 운동과 식사, 휴식이 일과가 되었다.

걷기.


처음은 걸었다. 대체로 안마당을 몇 바퀴 걷는 정도였다. 속력도 꽤나 느리게 조절했다.


"헉, 허억"

숨이 차다.


실감이 난다. 약화된 체력이 뼈저리다. 마루에 주저앉아 쉰다. 물도 한 모금 들이킨다. 일어나  걷는다.

상시 호흡과 파문의 재생력 덕분일까. 잠시 쉬면 근피로는 금세 가셨다.



며칠 뒤 걷는 속도도 상당히 올라갔다.


"후우우"

바닥에 무릎이 닿지 않게 팔굽혀펴기, 발목을 고정시키고 윗몸일으키기도 추가한다. 이 또한 반복.

상체 못지 않게 하체도 중요하다.  내려앉았다가 다시 올라가는 다리 운동도 추가.

 며칠 소요.


전신의 근육이 붙어간다는 체감이 들기 시작한다. 박차를 가하기 위해 기능 회복 훈련에 쓰였던 기구도 이용한다.

굵은 나뭇가지를 축으로 높이 걸린 돌멩이 도르래. 지면을 굳게 디딘 채 두 팔로 밧줄을 힘껏 당긴다. 무거운 보따리를 어깨에 짊어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체와 상체를 동시에 단련하기 좋은 방법이다.


움직일  있게 되고 근육들을 적절히 키워나가는 과정에서 가속이 붙는다.

열흘하고도 하루쯤 지났을까.

"기능 회복 훈련을 준비해주세요."


이미 경험했으나, 그 때보다도 내적인 신체 상태는 불안한 훈련이 시작됐다.

세 명의 간호 소녀가 돕는 유연성 훈련. 팔다리가 비틀리고 허리가 꺾인다.

반사훈련. 단순 체력보다도 반응 속도와 관련이 있는 훈련. 칸자키 아오이와도 해보았다. 열이면 열 약탕을 뒤집어쓰는 건 아오이 쪽. 훈련이 되지 않는다 판단, 바로 츠유리 카나오와 대치한다. 그녀의 시선이 날카롭다.

"시작!"

 날의 결과는 반반. 감에 해당하는 영역이기에, 근육과 내적 손상을 감안하면 적당한 성과를 낸 셈이다.


탄지로가 시행했던 훈련법을 모방해본다.


뜰에 길게 자란 대나무 사이를 누비며 뜀박질한다. 폭 좁은 담장 위를 질주하며 균형 감각도 잡는다. 밧줄타고 오르기로 전신의 근육을 팽팽하게 부풀린다.

그날 하루치 체력은 모조리 쏟아붓고 지쳐 잠드는 나날의 연속.

일주일이 더 흐른다.

촤악

그녀의 검은 머릿결을 타고 흐르는 약재 향. 반사 훈련에서 카나오를 백이면 백, 지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도장의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카나오 님!!"


쩔쩔매며 쫓아가는 아오이. 마당에 카나오의 신발 자국이 깊게 패여있었다.




"안 돼요. 한동안 임무 투입 금지인 걸로 아세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왔다 싶어 시노부와 대면했다. 그녀의 대답은 단호한 부정.

가벼운 실전 임무면 수행할  있을까 해서 회복 훈련의 일환격으로 허가를 요청했던 건데.

"성실하게 수행한 훈련으로.. 겉으로는 말짱해 보이지만. 속도 그럴까요?"


그녀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지금껏 기록도 뒤져보고 겪어본 일들도 돌이켜봤지만 없었어요. 제자리에서 시전한 호흡의 기술만으로 온 몸이 엉망으로 망가진다니, 처음 봤다구요. 당신에겐... 다른 대원들과 다른 기준으로 봐야겠단 결심이 섰습니다."

차분하지만 미미하게 떨리는 목소리.


"몇 달이 걸리더라도. 미세한 부분까지 정상이란 판단이 확실시되는 그 날까지는 보륩니다. 꾸준히 정기 진찰받으셔야 돼요."

"아니.. 그럼 훈련은.."

나비저택에서의 훈련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체력이 늘지 않는단 말이다. 도와준 사람들의 정성과는 별개로, 근육의 한계를 자극하기에는 강도가 부족했다. 차라리 스승님 밑에서 산골을 헤집고 다니던 그 수단이  효과적일 것이다. 너무나 멀고 대외 출타도 불가한 처지라 먼 얘기지만.


"이분을 찾아가세요. 연락은 넣어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내민 쪽지. 장소의 위치와 만날 대상이 적혀있었다.



암주 히메지마 교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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