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39편
한 걸음 비틀거리며 자세가 무너진다. 넘어지진 않았다.
머리가 어지럽다. 세차게 흔든다. 단순히 화가 나서라기에는 이상하다.
"독이 잘 듣나보네. 아까 마셨나봐?"
조소어린 목소리. 독의 안개로부터 후퇴하려던 그 때. 맡았던 냄새, 매캐했던 약간의 공기가 원인이었나.
"중독되면.. 어지럽고 숨쉬기 답답해지다가.. 뻣뻣해지고 절명. 여지없이 죽던데, 하나같이."
실험해봤다. 살아있는 인간을 잡아죽이기 전에 재미로. 혈귀는 이야기했다.
깊은 숨을 들이쉰다.
저녀석과 싸우면 맑은 공기는 접하기 어려울 수 있다. 파문의 회복이 어디까지 받쳐줄지 모른다. 최대한 대비하자.
"내 혈귀술은 오래 안 가. 근데 그 전에 네가 버틸지 궁금하네!
그녀는 독액이 흐르는 손으로 움켜쥘 것처럼 휘둘러온다.
빠르다. 거미공의 파훼 후 도망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의외로 선공은 근접한 공격이었다. 거미줄 뿜는 기술이 처음이어서 거리를 둔 전투가 될 줄 예상했다. 경계는 했기에 대응한다.
접근전을 벌인 자신감의 근원은 금세 알게 됐다.
퍼억
피하며 한방 제대로 먹인다. 고밀도의 파문을 집중한 주먹. 거미줄 외피가 푹 파여나갔다.. 싶었는데 바로 실가닥들이 얼기설기 덮더니 수복.
부식시키는 독액탓인지 쓰리다. 당장의 피해는 거의 없지만, 장기전은 여러모로 불리하다.
여혈귀는 자신의 능력이 단기전용인 것처럼 이야기는 했지만 연막일지도 모른다.
혈귀는 뛰어난 재생능력이 있지만, 호흡으로 회복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아직까지 남아 괴롭히는 미미한 현기증, 공기 중에 떠도는 독기, 조금씩 흐트러지는 집중력. 중독되어간다.
모든 정황이 버티기는 어려움을 말해준다.
혈귀의 몸놀림은 싸워본 경험이 별로 없어보인다. 그러나 신체 능력이 월등해져서 정교함은 떨어져도 위험하다. 무작정 덤비는 짐승의 흉포한 기세같이.
쏟아지는 광기어린 공격. 곧 속도에는 익숙해졌다. 피하고 때때로 방어한다.
슉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회피. 근접전 가운데 거미줄 뭉치를 섞기 시작했다.
자체는 위험하지 않다. 대처 가능하다. 문제는 시간. 거미줄에 묶여 대응하는 찰나에 연계 공격이 퍼부어질 거다.
전투는 완전히 수세로 몰렸다. 뒤로 후진하며 맞대응하기 바쁘다. 머리가 무거워진다. 어떻게든 뒤집어야한다.
파문으로 돋운 안력으로 감지. 현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덜 위협적인 독수를 한 대 어깨로 맞아준다. 일순간 전환해 집중한 파문의 힘으로 왼쪽 어깨를 보호, 끌어당기는 힘의 반대를 연상해 퉁겨낸다.
"크윽!"
뜨겁게 지지는 고통을 감수하며 벌어낸 반 호흡도 안 될 그 시간.
파문의 호흡, 제 1형
파문질주 황매화
콰앙
튕겨내 떨어졌던 혈귀의 머리통에 거센 일격을 때려박는다.
억지로 흐름을 끊는다. 한대맞더라도 공세 전환이 필요한 때.
비명을 지르며 날아간 혈귀. 뿜어낸 거미줄을 널린 사물에 부착, 반동으로 날아온다. 일순 깨어졌던 피갑 속 그녀의 안면은 분기탱천, 이를 갈고 있었다. 그마저 순식간에 하얀 천이 불어나 덮는다.
자세를 고쳐잡는다.
최대한 허파를 부풀린다. 독기는 회복으로 최대한 중화. 공기로 파문 활성.
혈귀가 지척에 이른 순간.
전신의 파문을 최소한으로만 남기고 전부 팔에 집중. 팔뚝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파문의 호흡, 제 5형"
쏘아지기 직전의 총탄처럼 두 주먹을 젖혀 장전. 복부에 힘을 꾹 준다.
"파문질주 연타! 으아아아아!!!"
혈귀의 전신에 포탄같은 권격을 퍼붓는다. 삽시간에 전방이 수십의 권영으로 뒤덮이는 착각이 인다. 그러나 하나하나가 실체있는 공격.
각각의 타격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전의 제 1형보다는 파괴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연타를 합치면 투입한 파문의 총량은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거대한 힘.
혈귀의 온 몸을 고르게 깎아내려 상대의 공격을 봉하고 재생력이 못 따라올 때까지 두들겨팬다.
"그아아아아아아!!!"
기합성을 내지르지 않으면 막대한 소모를 견뎌낼 수가 없다.
퍼퍼퍼퍼펑
연달아 터지는 폭음. 무차별 난타.
"억! 악! 끡! 껙! 꺽!"
간간이 들리는 혈귀의 신음성. 그녀의 두들겨맞는 신체가 제멋대로 펄럭거리며 공중으로 점점 떠오른다. 타격의 반동과 낙하의 중간에서 끊임없이 겪는 고통.
"으리야아아아아아!!!!"
두두두두두
대지에 세차게 쏟아지는 굵직한 우박과도 기세로 공세를 강화한다. 잠시라도 멈추면 흐름이 끊긴다. 실낱같은 인내와 긁어모은 파문으로 버틴다.
"끄아아아아악!!!"
악에 받친 비명을 토한다. 제발 멈춰줬으면. 팔이 떨어져나갈 것만 같다. 그만 눕고 쉬고 그러고만 싶다. 얼굴 팔 몸통 다리, 후두둑 쏟아지는 독액을 고스란히 뒤집어써 타는 듯한 격통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직시한다.
주먹 세례 속에서 눈에 띄게 느려진 혈귀의 재생속도. 얇아진 거미줄 껍데기. 그 보호를 위한 막이 곳곳에서 뚫리고 혈귀의 피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아악! 제바아아알!!"
퍼어엉
격렬한 연격의 마지막. 정타를 먹은 혈귀는 허리가 꺾인 채 후방으로 날아간다.
멈추면 안 됐다. 허나 더이상 연타를 시전할 기력이 없다.
혈귀의 고속 비행이 느리게 보인다. 껍질이 거반 다 벗겨진 상태로 곳곳에는 화상과도 같이 타들어간 파문의 잔상. 끝낼 수 있었다. 끝내야했다.
겁이 났다. 이 멈춘 몸에 미미하게 감도는 파문. 이것마저 써버리면 중독 증상의 가속화는 걷잡을 수 없다. 최후의 순간에 또 다시 무력하게 가느다란 호흡으로 연명하며 살아남길 빌어야한다.
커다란 나무 기둥. 혈귀, 그녀의 충돌이 임박. 결단하자. 어쩔 거냐. 살아남자. 살아남아서 어떻게든..
'무라타'
그 아이의 웃음.
'잘 해줬다'
스승님의 음성.
처참하게, 허무하게 죽어나간 동료들.
지금 물러서면 목숨은 건질지 모른다. 그러나 혼이 죽는다.
미미한 파문의 흐름을 손으로 유도한다. 힘이 빠져나간 자리마다 독액의 타는 통증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스릉
왼 팔을 앞으로 뻗고, 오른손에는 일륜도를 거꾸로 뒤집어 쥔다. 혈귀를 멸하는 일륜도의 성질, 쥐어짜 낸 파문의 힘, 던지는 힘에 손에서 떨어지기 직전 막판 한 방울 파문의 척력을 더한 가속도까지.
"파문의 호흡, 제 4형. 파문질주"
고속 투척. 강철을 타고 전해지는 파문.
"은 銀"
그대로 주저앉는다.
투콱
"끄억"
혈귀의 숨넘어가는 소리. 기둥에 튕긴 직후 꽂힌 칼날. 목덜미에 정확히 박혀 혈귀는 허공에 매달린다.
엎어진다. 시선만은 어떻게든 정면으로 고정한다.
"..루이...누나...제대..로..."
목끓는 소리로 혼잣말을 남긴 그녀는 말을 맺지 못하고 재가 되어 흩날린다.
"헉, 학, 하아악"
가쁘게 숨을 내쉰다. 피부가 벗겨진듯 뜨겁다. 달군 쇠로 지지는 것만 같다. 여력이 없다.
말 그대로 살아만 있다. 꺼질 듯한 촛불처럼. 바닥난 파문 탓에 감각의 범위도 극도로 좁아진다. 볼에 닿은 부식된 풀이 바스라진다.
차갑다.
"와아, 끔찍해라."
귓전에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 나긋한 음성. 혈귀인가, 인간인가.
"고생하셨네요. 할 일을 뺏긴 것 같아 미묘한 기분이라고 할까? 빨리 올 걸 그랬다."
다가와 숙이는 누군가. 속삭인다.
"상태가 영 좋지 않네요. 부디 잘 들었으면 좋겠는데."
달그락
유리와 나무 부딪히는 소리. 쿡 찌르는 아픔.
"호흡으로 열심히 견뎌주세요. 아무쪼록 살아서 뵙길."
나비저택에서.
멀어지는 그 사람.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통증이 조금은 가라앉는다.
끊어질듯 얕은 숨을 이어가며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