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38편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참이다.
강력한 혈귀인 하현5 루이. 그가 꾸린 가짜 가족. 그 안에서 누나의 역할을 맡은 그녀가 자신있게 선보인 거미줄이었는데.
너무나 쉽게 뚫렸다.
수십 명의 인간을 사냥하고 가둬온 과거엔 단 한 번도 탈출한 놈은 없다. 그랬는데.. 찢다못해 불태우고 나오는 게 아닌가?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다. 이가 딱딱 부딪힌다.
'이대로면 버림받고 말아!'
루이가 요구하는 가족의 역할 연기에 실패하면 처벌당한다.
그의 피를 주입받고 변한 몸, 얼굴, 머리, 받은 옷까지 전부 루이와 유사하게 유지해야한다.
아까도 잠깐 본 모습일 적 얼굴을 드러냈다고 얼굴을 긁혔다.
게다가 여동생이 혈귀인 귀살대 소년의 눈물겨운 가족 사랑에 홀딱 빠진 루이가 '저런 가족이 갖고 싶다'는 식의 발언을 해 겁이 나서.. 버리지 말아달라 소리쳤다가, 위아래로 네 토막 찢겨졌다.
가서 기웃거리는 녀석들이나 잡아.
루이의 명령. 이것만 지키면 만회할 수 있다. 예전 귀살대의 위협에서 자신을 구해주고 안전하게 있을 곳을 만들어준 루이. 행세일지라도 그의 누나로 있으려면 해내자.
짜증도 풀 겸 회심의 거미 실타래로 꽁꽁 묶어 잡아놓고, 한바탕 설명이라도 해주면서 자랑하고 비꼰 뒤에 죽여줄 심산이었는데. 산산조각났다.
맨 손으로 거미줄을 태워뜯는 꼴에 환장한다. 지금은 뭘 해도 안 된다. 도망치자.
남은 방법은 '그 수'밖엔!
권격을 가한 부분이 먼저 동그랗게 타들어간다. 곧 주변부로 불길은 번져 사람이 오갈 만한 폭이 됐다.
타서 오그라든 구멍 언저리를 잡아뜯는다. 버석거리며 쉬이 뜯겨나간다.
천천히 걸어나온다. 다행히 파문의 총량은 아직 여유가 있다.
손바닥을 탁탁 비벼 가루를 턴다.
정면의 혈귀는 어버버거리며 전신 경직 상태였다. 파들파들 떨고 있다. 두 갈래 흰 머리는 아랫 부분을 묶고, 창백한 안면, 이마 양 옆과 두 뺨 밑에는 점점이 붉은 반점. 백색의 눈. 탄지로 일행과 함께일 때 나타났던 강한 혈귀와 닮았다.
가뜩이나 빛바랜 안색에 파랗게 질리기까지 한 혈귀녀는 냅다 도주한다.
놓치면 안 된다. 호흡을 유지하며 따라잡는다.
그녀는 잡힐듯 잡히지 않았다. 지형의 익숙함 차이다. 이 산에 꽤 오래 있었던 듯 어디에 뭐가 있는지 통달한 움직임이다.
끈질기게 쫓는다.
이윽고 혈귀가 멈춰섰다.
"이제 안 도망칠 거야."
차분하기 그지없는 음성. 당황한 게 분명하게 보였던 그 순간이 연기처럼 여겨진다.
혹시나 뭔가 감춰둔 게 있나 싶어 경계하며 천천히 접근한다.
"열매가 다 익었거든."
찌이익
낡은 동아줄이 끊어질 때의 소리. 위다.
높이 뻗은 나무들. 사이마다 수놓듯 굵은 가지에 거미줄 공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떨어진다.
퍼엉
지면과 충돌한 거미줄 공은 찌그러지더니 터진다. 과실의 육즙처럼, 지저분한 액체를 가득 쏟아내고 녹색의 기체를 토한다. 불과 얼마쯤이었던 근거리에서 매캐한 연기를 느끼고 급히 후퇴한다.
"넌 여기 못 들어와. 이거 다 독이야."
펑 퍼엉 펑
첫 공이 낙하함이 신호탄이었던지 줄줄이 떨어져내리는 공들.
혈귀의 짙은 미소는 금새 녹색의 독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퍼지는 독무의 범위 밖으로 물러선 상태에서 파문의 탐지 범위를 확장한다. 일대가 삽시간에 뒤덮여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적게 잡아 스물. 더 많을 수도. 추락한 그 구형의 물체들을 부지런히 오가는 혈귀.
확대한 기감 속에서 활동하는 혈귀의 생명력은.. 불어난다. 각 거미공의 추락 위치에 접근해 그 내용물과 접촉할 때마다 혈귀의 힘이 급속도로 부풀어오른다.
대책없이 지켜보기만 할 뿐 방법이 없다. 다른 대원들은 대다수 사망 또는 불명. 탄지로 일행과는 연락 두절. 귀살 본대의 추가 지원 여부는 모름. 내가 할 수밖에 없다. 이 녀석이 빠져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 못한다.
"인간을 녹여먹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독무 안에서 혈귀녀의 독백이 울린다.
"해봤어. 갑자기 세지더라? 금방 힘은 사라졌지만. 사실 루이한테도 숨기고 있었지.. 들키면 시키지 않은 짓 한다고 벌 받을 게 뻔하니까."
처음 조우 당시와 비교해서, 벌써 몇 배는 강해졌다. 저 흡수가 다 끝나면. 얼마나?
"하지만 루이가, 루이가 말했어. 산에 기웃거리는 녀석들 죽이라고. 말 잘 들으면 루이의 누나로 남을 수 있어. 이게 다 동생 부탁 들어주기 위한 거니까 해도 되지? 잔뜩 먹고 잔뜩 강해져도 되는 거지?"
거세지는 그녀의 어조. 맹렬하게 팽창하는 생명력 덩어리.
혈귀를 중심으로 포위하다시피했던 안개가 가라앉고 드러난다. 그녀 주변의 지면이 부식되어있다.
루이. 먼저 등장했으나 유유히 사라졌던 작은 키의 그 혈귀일 것이다. 그놈이 다른 혈귀들을 거느리고 있단 말인가?
"혈귀술"
나지막히 운을 떼며 모습을 나타내는 그녀. 백색의 매끈한 천이 전신을 감쌌다. 그 형상은 곱디 곱게 차려입은 양갓집 규수를 연상케 한다. 실상은 거미줄. 겉으로 배어나는 액체가 흐르고 떨어진 자리에는 남아있던 낙엽마저 녹아 연기를 피워올린다.
"독거미 비단옷 짓기"
얼굴이 있던 부위도 면사포를 닮은 장막에 가려졌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자신만만.
"예쁜 이름이지?"
이제는 탄지로 일행과 함께 마주친 그 혈귀보다도 언뜻 우위에 선 듯한 위압감. 식은땀이 난다. 거미공 안에 있던 게 모두 인간이라면. 그게 동료 귀살대원이라면.
"너... 지금 대체 몇 명을 먹어치운 거냐...?"
거미줄 천을 둘러 안 보일 텐데. 그녀가 빙긋 웃는 것만 같다.
"인간이 밥을 먹을 때 말야. 쌀알의 개수를 일일이 세진 않잖아?"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틀어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