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18편
애써 놀라움을 감추는 사이, 노인은 냄비에서 한 국자 덜어 건넨다.
조심스럽게 받아든다. 투박한 나무그릇에 숟가락. 맑은 국물과 건더기가 얼마쯤 들어있는 식사.
한 숟갈 떠넣는다. 입에 문 첫 감상은.. 맛있다. 재료는 짐작도 안 가는데 맛있다. 한 그릇을 금방 비워버린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불친절한 안내가 이어진다. 뒤통수 딱 소리나게 한 대 맞고 맞은 자릴 문지르며 쳐다보자 노인이 가리킨다. 이부자리가 마련된 방. 잠들 시간이다.
다음 날 기상부터 일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곳저곳 골고루 찜질당하며 기상. 아픈 부위를 감싸쥐고 따라나선다.
이른 새벽. 이제 막 동이 트기 전, 사물의 윤곽이 어둠 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한 그 시점. 한밤의 냉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을 무렵 공터에 섰다.
노인은 커다란 석판 옆 바위덩이 위에 올라있다. 도저히 다리가 없는 상태에서는 오르기 힘들어보이는데 어떻게.
의문에 대해 궁리해보기도 전에 탁 소리. 석판에 적힌 첫 구절을 막대기 끄트머리로 쿡 내리찍는 노인.
자기소개
엉뚱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까마귀가 이리로 이끌어줬고 거기에 노인이 있었으니 아마 이 사람이 육성자란 거다. 키워줄 상대가 어떤 사람일지 알아야겠지.
"제 이름은 무라타입니다. 버려진 아이여서 부모님의 행방은 모릅니다. 어쩌다보니..."
혈귀를 찾아나선 동기, 파문의 호흡 습득, 혈귀와의 일전, 렌고쿠 쿄쥬로 대원의도움으로 귀살대행, 여기까지.
조용히 들어주던 노인은 파문의 호흡을 언급한 대목에서 잠시 떠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기 때문.
나름대로 우여곡절있던 짧은 인생사를 마치고 바라보자, 노인은 바로 다음 대목을 지목했다.그 어떤 감상평 따윈 없이.
'혹시 말도 못하시는 건가.'
무슨 일을 겪어오신 건지. 궁금증은 감추고 읽어본다.
일일 과제
과제라 적혀있다. 본격적인 시작인가? 밑에 내용을 살펴보니,
반나절 내산 한 바퀴 돌기
귀환 후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앉았다일어나기 각각 백회씩 실시
이게 전부인가?
어마어마하고 실행불가능에 가까운 괴상 그 자체의 두려움과 마주하게 될 것 같아 겁먹고 있었는데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가령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검술이나 기술을 익히거나 하는.
그 생각이 오산이었음은 당일 바로 체득하게 되었다.
평범한 수준의 체력으로는 소화할 수 없는 양이었다.
노인이 지정해준 경로는 인접한 산의 둘레를 따라 쭉 도는 형태였다. 문제는 거리였다. 일반적인 성인 기준으로도 이틀 이상은 걸릴 법한 거리를 불과 반나절. 하루도 아닌 그 절반 안에 주파해야한다.
천생 달리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그냥 달리기로는 부족해서 호흡을 응용하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한다.
평지도 아니다. 울퉁불퉁, 때론 경사도 지고 길이 없을 때도 있다. 고속으로 질주하면서도 나뭇가지, 잘린 나무 그루터기, 돌부리, 움푹 파인 구멍,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들짐승까지. 돌발상황까지 유념하며 변수에 반사적으로 대응해야한다.
첫번째 과제는 엉망으로 끝나버렸다.
완주했을 때 이미 하루가 거의 다 지나가있었다. 옷은 찢긴 곳이 여럿. 멍도 많이 들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장시간 호흡법 유지로 죽을맛인데 체력 단련이 남아있다.
갓 태어난 송아지, 망아지처럼 팔다리가 오들오들 떨린다.
억지로 해본다. 열 개쯤 했을까? 뭔가 끊어지는 감각 뒤로는 기억이 없다.
촤악
"어푸푸!"
팔굽혀펴기를 하던 그 장소에 엎어진 채였다. 꼴사납게 물에 빠진 쥐 꼴이 되어 기상.
먹을 게 코로 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바로 실전.오늘도 뛴다.
이상한 건 노인이다.
분명 물뿌려 잠을 깨우고는 볕을 쬐며 한가로이 집 앞에 있을 터인 그가 어떻게 눈 앞에 있는 것인가. 그것도 달린 지 두 시간도 더 지난 지점에 너른 바위 위에.
수수께끼는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신경 안 쓰려해도 쓰인다. 일광욕에 맞춤인 장소마다 어김없이 노인은 있었다. 말없이 누워있기도, 때로는 허공을 떠도는 나비를 감상하기도, 경치 구경은 덤으로.
어떻게 항상 앞서가있는 것인가. 설마 이 노인은 쌍둥이 형제가 여러 명 있는 건가, 바보같은 상상까지 해봤지만 다 그만두고 과제에나 집중키로 맘먹었다.
며칠이 지났다.
노인이 할당해준 양을 하루 안에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주가 지나간다.
드디어 할당량을 제 시간에 해내고 체력단련까지 마친 뒤에도 해가 저물지 않게 됐다.
'두 바퀴'
"아니 스승님. 좀 너무하신..."
딱
"악!"
탁
두번이나 확인시켜주는 스승님. 매일매일 과제를 마치고 씻고 식사하고마주하다보니 어느새 그를 스승으로 부르고 있었다. 하라면 한다. 암묵적인 규칙.
또 울며 겨자먹기로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