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15편
꿈을 꾸었다.
자욱이 깔린 안개 속을 걷는다. 물먹은 공기가 발소리마저 삼킨다. 살갗이 축축하다.
옅어진다. 강변이다. 끝없이 흐르는 강물. 건너편에 드리워진 인영.
아.
잘 알던 얼굴.그 소녀. 마지막 그 모습보다도 곱게 차려입은 그 아이. 두 손 모아 옷자락을 쥐고 기다리는 그녀.
가고 싶다. 가서 만져보고 싶었다.
갈 수가 없다.
발 밑에 덤불처럼 얽힌 꽃줄기 무리가 감겨든다. 이리저리 안간힘을 써도 오히려 더 단단히 잡힌다. 피처럼 붉은 피안화. 예쁘게 핀 그 꽃이 지금은 야속하다.
그저 자유로운 손만 어떻게든 가까워지려 내밀어본다. 헛되이 공기만 가른다.
그녀가 입을 뻐끔거린다. 들리지 않아. 뭐라고 하는 거야. 외쳐도 전해지지 않는다.허망하게 끝나버린 무언의 대화.
더없이 애달프게 그녀는 웃었다.
"...아."
"정신이 드시나보군요."
"오오! 다행이야!"
차분한 중년 남성과 활기찬 소년의 음성.
축축하게 땀에 젖은 채로 뉘어져 있다.
"위험한 상태는 벗어났습니다만, 안전하진 못합니다. 보다 전문적인 치료를 해야.."
"음! 안 그래도 연락을 보내두었으니 금새 와줄 것이야! 고맙네, 의사양반!"
안경을 추켜올린 의사가 나지막히 한 마디 한다.
"신기합니다.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이 환자 분.. 금방이라도 유명을 달리하실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죠."
아마도 호흡. 파문의 호흡이 또 살려준 거다. 지금도 의식하지 않을 때마다 깊게 숨을 들이키고 내뱉는 몸. 처음 휘말린 혈귀 사건 당시 살고자 발버둥치던 기억이 새겨넣은 듯했다. 위기에 처하면 숨을 쉬어라.
"이 소년도 배운 모양이군. 그나저나"
드륵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문을 벌컥 열자마자 대뜸 사과부터 날리는 사람. 목소리는 어린데 겉으론 알 수가 없다. 검은 복장에 눈만 빼곤 까만 복면으로 가렸기 때문.
"급하게 왔는데도, 어휴"
숨을 헐떡이는 남자. 렌고쿠였던가.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복면남의어깨를 툭툭 치고는
"뒤는 부탁한다."
말과 함께 뛰어나갔다.
"그럼 이만."
의사도 왕진가방을 챙겨 자리를 뜬다.
잠시 뒤통수를 긁적이던 복면은 아! 하고 감탄사를 뱉더니 업었다.
"읏차! 가볍네요! 하하하!"
누가 봐도 어색하다. 이러니저러니해도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나로선 의지할 따름이다.
아파죽겠는데 뭐가 그리 신나는지. 복면은 이동하며 다양한 화제거리로 대화를 시도했다. 끙끙 앓느라 일언반구의 답도 없었지만.
"난처했다니까요.아니 렌고쿠 쿄쥬로 님의 연락으로 오긴 했지만.. 귀살대원이 아닌데도 '살려야한다!' 이러시면서는. 사실 대원이 아니면 이럼 안 되는데, 어차피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예비대원의 자격이 충분하다느니 하시면서..."
힘든데 더해서 급격히 피곤해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수다에, 복면남자의 뜀박질로 전해지는 흔들림, 겹겹이 쌓인 불편함.
정신이 아득해졌다.
술냄새가 났다.
훅하고 코에 끼쳐오는 독한 향. 과일도, 곡물의 그것도 아닌 이질적인 향기.
"으아아!"
옆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소년과 청년 사이 어디쯤인 남자.
몇 번 들어온 '귀살대', 그 제복을 걸친 사람이 반쯤 누운 채 부들부들 떤다.
하얗고 긴 옷을 늘어뜨린 사람이 집게 끝 솜뭉치를 들어올리자 축 늘어지는 대원. 동시에 독한 냄새도 멀어졌다.
"소독 끝났습니다. 누워서 쉬세요."
그러곤 이쪽으로 온다.
불현듯 두렵다. 안 움직여진다. 슬쩍 보니 몸에 천이 둘둘 감겼다. 몇 군데인가 불긋하게 물들어있다. 미미한 통증.
"치료할테니 참아주세요."
사각사각하며 가위가 오간다. 서늘한 공기가 맨 살에 닿는다.
"으헉!"
극심하게 따갑다. 써늘한 가시로 상처를 쿡쿡 찌르는 자극. 입만 딱 벌린다. 영원같은순간이 지나고 미끌한 무언가를 처덕처덕 발라주는 그.시원하다.
"붕대가 답답해도 참아주세요."
잘려나간 천 대신 동일한 붕대라는 걸 꼼꼼하게 감아준다. 도구를 섬세하게 챙겨들고 그는 사라진다.
옆 사람은 그새 곤히 잠든 낌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많이도 잠들었던 모양인가, 눈이 말똥말똥하다.
할 일은 없고 운동도 못한다. 무의미하게 시간만 죽이는 상황.
'숨이나 쉬자.'
호흡법 연마를 결정하고 들이쉰다.
흐으읍
"켁켁"
반절도 못 쉬고 가슴을 사방에서 쑤시는 고통에 멈춘다.
호흡 수련도 못 한다.
할 게 없다.
시간이 흘렀다.
심심해죽을 지경이 됐을 무렵.
"다행이야!"
누군가 옆의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렌고쿠 쿄쥬로. 그다.
"괜찮아보이는군."
붕대를 칭칭 둘러놓은 것도 괜찮은가 싶지만, 아무튼 살아있고 회복 예정이니 틀린 말도 아니다.
"덕분에.. 살았네요."
"살았다. 남은 사람의 어깨가 더 무거워진다는 이야기야."
잠시 말이 멎었다.
"사망자들의 합동 영결식에 다녀오는 길이다."
그는 칼자루를 꾹 쥐었다.
"이번 사건으로 동료 몇이 또 떠났지. 귀살대는 혈귀를 사냥하는 조직. 사망, 부상은 비일비재하다. 언제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아."
"그럼에도. 자네에게 묻고 싶다. 귀살대에 들어오지 않겠나?"
"네."
즉문즉답.
생각할 것도 없다.
능력도 부족하고 경험은 일천하며 무모한 탓에 죽을 뻔도 했다. 그래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활짝 웃는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만 바로 결정할줄은. 놀랍군!"
"뜬금없지만.. 당신처럼 될 수 있을까요?"
나이차는 별로 없다. 반대로 강함에는 현격한 차가 있다. 강해진다면 죽지 않고도 한 마리의 혈귀라도 더 데리고 갈 테지.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넌 강하게 태어났단다, 쿄쥬로. 약자를 구하는 건 강자의 마땅한 책무. 결코 잊지 말거라. 네 어미여서 내가 행복했다는 것도 꼭 기억해주렴.'
잠시 입술을 깨문 그는 운을 떼었다.
"난 인정받고 싶다. 귀살대의 기둥, 지주가 되어서. 어머니께서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아버지께서 믿고 지켜보셔도 된다고말이야!"
쿄쥬로는 일어섰다.
"동기가 무엇일지는 묻지 않겠다. 다만 그것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함이라면, 자넨 될 수 있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강한 사람이."
뜨겁다. 그가 떠난 후에도 불티가 남아있는 기분이들었다.